백제의 10대 왕인 분서왕은 아버지인 책계왕처럼 대외정책에 있어서 꽤나 강경한 태도로 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탓인지는 몰라도 그는 재위 7년째에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하고 맙니다[1]. 그런데 말입니다. 분서왕의 암살 이야기에는 다른 이야기도 하나 전해지고 있습니다. 바로 황창랑(黃昌郞)이라는 신라 출신 소년입니다. 분서왕이 바로 이 황창랑이라는 신라 출신 소년 자객에게 암살당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둘이 적절히 믹스한 버전인 <낙랑에서 보낸 자객=황창랑>라는 이야기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인기를 끌었던 만화로 보는 00왕조실록 시리즈에서는 낙랑 사람이 황창랑을 이용해 분서왕을 암살한다는 이야기가 실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황창랑이라는 인물은 과연 누구일까요? 황창랑은 삼국시대의 정사인 삼국사기나 그리고 삼국시대의 각종 야사 등이 수록된 삼국유사에도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꽤 훗날인 조선시대 문집이나 심지어 조선왕조실록 등에서는 이 황창랑의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효종 대왕(孝宗大王)도 후원(後苑)에서 재예(才藝)를 시험하였는데, 이상진(李尙眞)이 불가하다고 하며 백제(百濟)에서 황창랑(黃昌娘)이 검무(劍舞)를 추었던 일을 인용하여 진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 조선왕조실록 현종 8권, 5년(1664 갑진 / 청 강희(康熙) 3년) 6월 11일(임인) 1번째 기사
황창랑은 신라 어느 대의 사람인지 모르나, 속설(俗說)에 전하기를, “그가 여덟 살 난 어린애로써 신라왕과 꾀하여 백제에게 분풀이를 하려고 백제 저자에 가서 검춤을 추니 저자 사람들이 담처럼 둘러서서 구경하였다. 백제왕이 듣고 궁중에 불러들여 춤추라 하니, 창랑이 그 자리에서 왕을 찔러 죽였다.” 한다. 후세에 탈을 만들어 그의 모습을 본뜨고 처용무(處容舞)와 함께 놀이에 아울러 행해지나, 사전(史傳)에 상고하면 도무지 그런 기록이 없다 쌍매당(双梅堂) 이첨(李詹))은 말하기를, “청랑(淸郞)이 아니요, 기실은 관창(官昌) 와전(訛傳)이라.” 하여, 변(辨)을 지었지마는, 그것도 억칙(臆測)의 설이어서 믿을 수가 없다. 이제 그 춤을 보건대, 빙빙 돌면서 돌아보며 흘겨보며 휙휙 번쩍번쩍, 지금에도 늠름히 아직 생기가 있는데, 그 춤은 절주(節奏)만이 있고 가사(歌詞)가 없기로 아울러 시를 짓는다. - 속동문선 제4권 동도악부 칠수 중 일부
황창랑(黃昌郞) “이러한 사람이여, 어려서 나라를 떠났도다. 키가 석 자도 안 되는 어린 사람이 어찌 그리도 씩씩하고 날랜고? 평생에 왕기(汪錡)를 자신의 스승으로 삼아, 나라 위해 치욕 씻었으니 마음에 후회 없네. 칼날을 목에 겨누어도 다리도 떨지 않고, 칼날이 심장을 가리켜도 눈도 깜박이지 않았네. 공을 이루고는 태연히 춤을 그치고 가 버리니, 태산을 옆에 끼고 북해(北海)를 뛰어 건너는 듯.” 하였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1권 경주부
신라(新羅)의 황창랑(黃昌郞)이 8세에 그의 임금을 위하여 백제(百濟)에 가서 거리에서 춤추는데, 백제왕이 그를 불러 궁중에서 춤추게 하였더니, 그는 이내 그 칼로써 백제왕을 죽였다. - 열하일기 피서록
《우해암집(尤海庵集)》에 이르기를, “황창랑(黃昌郞)이 8세에 왕을 위해 백제에 가서 시장에서 칼춤을 추었다. 백제 왕이 궁중으로 불러와 춤을 추게 하니, 춤을 추는 척하다가 왕을 찔러죽였다.” 하였다. - 임하필기 제11권 악기
이 밖에도 서거정의 사가집과 사가집보유 그리고 명재유고 제41권 의정부 우의정 이공 신도비명 등에서도 이 황창랑의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볼 때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 황창랑이 백제왕을 죽였다는 것으로 인식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인식은 조선시대 무예 교습서인 무예도보통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이르기를, “황창랑(黃倡郞)은 신라(新羅) 사람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나이 일곱 살에 백제(百濟)의 시중(市中)에 들어가 칼춤을 추니, 구경꾼들이 담처럼 에워 쌓다. 백제 임금이 듣고서 불러다 보고는 마루에 올라와서 칼춤을 추라고 명령하였다. 황창랑이 기회를 엿보아 임금을 찔러 죽이니, 백제 사람들이 그를 죽였다. 신라 사람들이 슬프게 여기고 그의 얼굴을 본떠서 가면(假面)을 만들어 칼춤의 형상(形狀)을 만들었다.’ 하는데, 지금까지도 그 칼춤이 전한다.” 하였다. - 무예도보통지 제3권 본국검
조선 정조 때 편찬된 무예도보통지에서는 동국여지승람의 부분을 인용하여 <황창랑=백제왕 죽임>이라고 제3권 본국검 서두에서 말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본국검의 시조로 황창랑을 언급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정작 무예도보통지에서 언급한 동국여지승람에서는 황창랑이라는 인물 자체에 대해 부정하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첨(李瞻)이 고증(考證)하기를, "을축년 겨울에 내가 계림에 손이 되었더니 부윤 배공이 향악을 베풀어 나를 위로하는데, 탈을 쓴 동자가 뜰에서 칼춤을 추는 것이 있었다. 물어보았더니 말하기를 '신라에 황창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나이 15,6세쯤 되어서 칼춤을 잘 추었는데, 왕을 뵙고 말하기를 신이 원하건대 임금을 위하여 백제의 왕을 쳐서 임금의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하였다. 임금이 허락하였다. 곧 백제에 가서 시가에 춤추니 백제의 사람들이 담처럼 둘러서서 구경하였다. 백제 임금이 듣고 궁중에 불러 들여 춤추게 하고 구경하였다. 창이 임금을 좌석에서 쳐서 죽이고 황창은 드디어 좌우 신하들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어머니가 듣고 울부짖다가 드디어 눈이 멀어졌다. 사람들이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눈이 도로 밝아지게 하려고 꾀를 내어 사람을 시켜서 뜰에서 칼춤을 추게 하고 속여서 말하기를 '창이 와서 춤을 춘다. 창이 죽었다는 전일의 말은 거짓이다.'하니 어머니가 기뻐 울며 눈이 도로 즉시 밝아졌다 한다. 창이 어려서 능히 나라 일에 죽었으므로 향악에 실어서 전해 내려온다고 하였다.
내가 일찍이 삼국사를 보니 모든 관직을 임명하거나 이웃나라를 침벌한 것은 다 씌어 있으며, 해와 별과 우뢰와 비의 변이 초목, 금수의 요괴에 이르기까지 기록하지 않은 것이 없다. 나라의 임금이 적국의 아이에게 살해된 것과 어린 아이로서 적국의 임금에게 원수를 갚았다는 것은 다 작은 일이 아니다. 그런데 두 나라의 역사에 실려 있지 않으니 진실로 의심할 만하다. 다만 열전에 관창의 일의 전말이 기재되어 있어서 그의 충의가 장하니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비통하게 한다. 이 춤추는 것은 반드시 관창일 것이다. 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무릇 적국에 대하여 변을 내려고 음모하는 자는 혹은 행상 가장하고 본국에서 죄를 지었다고 거짓말하는 등, 감언과 아첨하는 말로써 속여도 백제가 이미 신라와 더불어 적국이 되어 있었으니, 창이 응당 공공연하게 칼을 갖고 백제의 번잡한 시가의 큰 길 가운데에 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였다면 백제의 사람들이 창을 붙잡아다가 장차 형을 갖추어서 고문하였을 것이다. 어찌 내버려 두어서 임금의 뜰에 행악을 하게 하였겠는가. 이것은 인정과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내가 옛삼으로 관창과 비겨서 가즈런히 논할 만한 자를 찾으니, 춘추에 대공 11년에 노나라의 소년 왕기(王錡)가 공을 위하여 수레 에 같이 탔다가 함께 국서의 나에 죽으매 공자가 말하기를 ‘능히 창과 방패를 잡고 사직을 호위하였으니 상으로 대우하지 아니함이 옳다.’하였다. 의에 죽어 인을 이루는 것은 진실로 어려운 일인데, 동자로서 감히 이러한 일을 한 자는 홀로 왕기와 창에게서 볼 수 있다. 이야기가 잘못되어 있기에 변백하지 않을 수 없다. 창의 춤을 보는 자를 위하여 고증하고 또 따로 역사를 읽는 사람을 위하여 고증한다.“하였다. - 동국여지승람
이첨은 황창랑의 고사를 언급하며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아니 백제 왕이 암살될 정도의 큰 일이 왜 백제나 신라 기록에는 보이지 않느냐, 또한 백제와 신라는 서로 적국인데 신라의 아이가 칼차고 돌아다니고 있고 게다가 임금의 뜰 앞까지 행악을 하게 하는 걸 백제 사람들이 미쳤다고 가만히 있겠음? 이건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의견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백제왕을 죽인 자객이 황창랑이 아니라 관창일텐데 잘못 전한 것이다라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황창랑의 이야기도 이첨이 경주 소년에게 들은 것이 전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첨에게 황창랑의 이야기를 해준 소년 역시 지역에 내려오는 이야기라고 언급할 뿐이었습니다.
여러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 황창랑의 이야기는 그의 실존여부를 떠나서 경주 지역 등지에서는 꽤 오랫동안 내려오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이 황창랑 이야기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 널리 퍼지면서 <황창랑=백제왕 죽인 자객>으로까지 인식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한 영향을 받아서 황창랑이 <백제왕을 죽인 신라 출신 소년 자객>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책에도 수록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1] 겨울 10월, 임금이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七年 春二月 潛師襲取樂浪西縣 冬十月 王爲樂浪太守所遣刺客賊害 薨) - 삼국사기 제24권 백제본기 권2 분서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