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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식민지화 과정 - 8
게시물ID : history_1755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한심허다
추천 : 11
조회수 : 1007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08/04 22:38:04
 
프랑스가 대군을 동원하여 재침략을 시작하려던 찰나에 완조(阮朝)에서는 혼란이 일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재침략이 시작되기 한달 전인 1883년 7월, 사덕제(嗣德帝)가 죽고, 사덕제가 아들이 없었던 관계로 양자로 들인 조카들 중 하나인 완복응진(阮福膺禛)이 사덕제의 뒤를 이어 육덕제(育德帝)로 즉위합니다만 완복응진의 황제로서의 자질문제가 제기되면서 논란을 빚고 있었던 것이지요.
 
 
TongDoc_de_Hanoi_et_sa_suite.jpg
 
하노이에서의 사덕제.
 
 
사실 육덕제가 사덕제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지명된 것도 단지 여러 양자들 중에 최연장자이면서 장자였기에 그리 된 것이었고 사덕제도 생전에 육덕제가 방탕하다는 말을 종종하며 그리 탐탁찮아 했는데다 오히려 다른 양자이자 훗날의 건복제(建福帝)가 되는 완복호(阮福昊)를 더 총애하고 있었고 제위를 물려줄 생각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건복제.jpg
 
완조(阮朝)의 제7대 황제 간종(簡宗) 건복제(建福帝)
 
 
하지만 육덕제의 친모인 태후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고 상술했다시피 장자라는 이유로 뭇 신하들의 주장에 힘입어 사덕제도 별수 없이 후계자로 지명했던 것인데, 원체 글러먹은 망나니였는지 즉위한지 고작 3일만에 완문상(阮文祥), 존실설(尊室説), 진천성(陳踐誠) 등의 신하들에 의해 폐위되어 머지않아 독살당했고 신하들은 뒤를 이어 사덕제의 이복동생인 완복승(阮福昇)을 협화제(協和帝)로 옹립합니다.  
 
200px-NguyenVanTuong.jpg
 
완문상(阮文祥)
 
1874년에 완조(阮朝)의 대표로 제2차 사이공 조약에 서명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사덕제 사후 존실설, 진천성과 더불어 삼두정치로 완조의 조정을 장악하지만 삼궁(三宮)이라고도 불리우는 사덕제의 태후 및 후궁들과 권력을 두고 궁중암투를 벌이는 권신스러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거기에다 무려 육덕제에 이어 협화제, 건복제 세명의 황제를 독살해버리는 패기를 보여주는데 이건 나중에 나올 내용이니 그때 보시면 되겠고 나중에 근왕운동이 벌어지자 프랑스의 압력으로 이를 저지하려 합니다만 실패하자 빡친 프랑스에 의해 타히티 섬으로 유폐되어 거기서 죽었다고 합니다.
 
 
PH_CHI~1.JPG
 
존실설(尊室説)
 
삼두정치 요인 중 하나로 패악질을 서슴치 않던 완문상에 비해선 좀 나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동남아사의 비중이 별로 없는 고등학교 세계사에서도 한번쯤은 꼭 나오곤 하는 베트남의 근왕운동을 이끈 인물들 중 하나입니다.
 
 
협화제.jpg
 
 
완조(阮朝)의 제6대 황제 협화제(協和帝)
 
협화제도 재위기간 동안 완문상 등의 권신들과 신경전을 벌이다 살해당해서 그런지 묘호도 없고 시호도 그냥 문랑군왕(文郞郡王)에 그쳤습니다. '협화' 는 치세기에 쓴 연호에서 비롯되어 붙여진 이름이고요. 비슷하게 죽은 육덕제도 사실은 묘호나 시호도 없고 그냥 그가 거주하던 궁의 이름을 따 육덕제라 칭해진 것이지 죽은 직후에는 추존되지 못했고 나중에 그의 아들인 성태제(成泰帝)의 시기에 그나마 공종(恭宗) 혜제(惠帝)로 추존됩니다.
 
아무튼 요점은 프랑스의 침략이 다시 시작되려는 마당에 일치단결하지는 못할 망정 집안싸움으로 골머리를 썩히고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근데 일치단결한다 해서 막을 수 있었을란가는 모르겠지만..
 
 
바로 이 협화제의 대에 프랑스의 재침략이 시작되었습니다. 즉위한지 한달도 채 안된 1883년 8월, 1만 6천에 달하는 프랑스군은 통킹의 하롱베이에서 출발하여 완조의 수도 순화(順化 : 이하 후에)를 목표로 수륙으로 나뉘어 남하합니다. 여기서 혹시 이런 의문을 가지실 분이 계시지 않을까 싶은데요, 앙리 리비에르의 프랑스군이 패했으니 통킹을 상실했을텐데 어떻게 프랑스군이 통킹에서 출병할 수 있으며 그 병력은 또 언제 통킹에 왔는가 하고 말이지요.
 
 
French_artillery_at_Gia_Cuc_jpeg.jpeg
 
1883년 3월, 강림(降臨)을 공략하는 프랑스군
 
 
 
1280px-Combat_of_Nam_Dinh_19_July_1883.jpg
 
1883년 7월, 프랑스군의 남정(南定) 점령
 
 
사실 리비에르의 병력이 패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한 전투에서의 패배에 불과했고 그 외에도 곳곳에서 프랑스군의 통킹공략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남정(南定)이라든지 강림(降臨) 등 통킹 곳곳에서 프랑스군과 유영복의 흑기군, 완조군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고 프랑스는 싸우는 족족 승리를 거두며 1883년 8월까지 통킹을 거진 접수하게 됩니다. 그리고 프랑스 본국에서는 1만 6천의 병력을 계속해서 보내면서 지원하게 했던 것이고요.  
 
 
Admiral_Courbet_drawing.jpg
 
쿠르베 제독
 
 
당시 프랑스군의 사령관은 쿠르베란 사람으로 앞서 서술하였다시피 병력을 수륙 두갈래로 나누어 완조의 수도 후에로 진격하게 했습니다. 해군의 함대는 하롱베이에서 즉각 남하하여 후에와는 지척의 거리에 놓인 순안(順安)이라 하는 곳을 공격하게 했고 육군은 홍하(紅河)를 옆에 끼고 남하하게 했는데 실질적으로 후에를 타격하는 주력은 함대의 해군병력이었습니다.
 
 
Thuan-An-4_8.gif
 
순안(Thuan An)의 위치입니다. 보시다시피 후에(Hue)와는 상당히 가깝죠.
 
 
Warships_at_Thuan_An.jpg
 
1883년 8월, 순안을 공략하는 프랑스 함대
 
 
프랑스 함대는 순안의 항구를 수비하는 순안진을 포격을 묵사발을 내버린 후에 병력을 상륙시켜 공격하게 했고 순안진을 수비하는 완조군의 저항도 만만찮았던지라 우수한 무기와 화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은 3일에 걸쳐 전투를 벌였고 결국은 치열한 공방전 끝에 순안진을 점령합니다.
 
 
phap_tan_cong_cua_bien_thuan_an_hue_500.jpg
 
순안에 상륙하는 프랑스군
 
 
800px-Campagne_du_Tonkin_Debarquement_des_fusiliers_marins_a_Thuan_An.jpg
 
순안에 상륙한 프랑스군과 완조군의 전투
 
 
Capture_of_Thuan_An_Forts.jpg
 
그리고 결말..
 
순안전투는 완조가 마지막 항전의 불꽃을 불사른 최후의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의 패배로 결국은..
 
 
800PX-~1.JPG
 
후에에 있는 완조(阮朝)의 정궁 자금성
 
중국의 자금성과 이름이 같습니다.
 
 
순안에서의 패배로 저항할 의지를 상실해버린 완조는 후에로 곧장 쳐들어오는 프랑스군을 막을 여력도 없었습니다. 물론 원체 가까운 거리였던지라 요격하고 자시고할 틈도 없었겠지만 말이죠. 게다가 통킹에서 육상으로 남하해오는 프랑스 육군이 흑기군을 쳐부수었다는 비보마저 전해져 완조의 조정은 주전파와 화친파가 갑론을박 논쟁을 벌이는 등 벌집 쑤신듯 시끄러웠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결국에는 협화제가 화친파에 손을 들어줘 8월 20일, 순안전투로부터 5일 후인 8월 25일, 아르망 조약 혹은 후에조약을 체결합니다.  
 
 
LeKyHoaUocQuyMui1883Hue.jpg
 
1883년 8월 25일, 아르망 조약 체결
 
프랑스측의 대표가 아르망이란 사람이라 아르망 조약이라고도 불리웁니다.
 
 
아르망 조약은 이전의 1,2차 사이공 조약처럼 단순 불평등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베트남이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전락해버렸다는 데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상 베트남의 전국토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것이었지요. 조약의 내용을 대충이나마 열거하자면 프랑스가 그토록 목매던 통킹지방의 완전한 할양과 프랑스의 통치인정, 프랑스 동의 없이 외국과 외교 금지 등등.. 뭐 그 밖의 조항들이 있긴한데 식민지가 된 마당에 그런건 있으나 마나한 조건들일테니 굳이 따로 적지는 않겠습니다.
 
 
French_Indochina_expansion.jpg
 
위 지도에서 보시다시피 통킹지방은 1883년(지도에는 1884년으로 되어있는데 왜그런가 모르겠네요 아무튼 1883년이 맞습니다)에 프랑스에 할양되었고 베트남 중부지방 역시 1883~1884년에 프랑스의 보호령이 됩니다.
 
 
이렇듯 베트남이 완전히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자 그동안 베트남의 종주국을 자처하며 상전노릇을 해오던 중국의 청나라가 가만히 있을리 만무했겠죠. 그래서 발발한게 청불전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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