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 전부터 기원 후 3~4세기에 활약하던 백제나 고구려와는 다르게 신라는 많이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지리적인 영향인지 혹은 고구려와 백제의 영향력이 그만큼 강했던 것인지 정확하게 진단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발전이 늦어진만큼 신라는 6세기에 들어서면서 매우 강해집니다. 신라가 실질적으로 엄청난 발전 한 것은 6세기의 지증왕 때입니다. 지증왕은 500년에 즉위해 514년까지 신라를 다스렸죠.
신라가 발전 바탕에는 농업 발달이 하나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지증왕은 502년에 소를 이용하면서 농사를 하는 우경을 권장합니다. 이에 신라 각지에서 소를 이용한 농사가 시작됩니다. 또한 이때가 되서야 신라에서도 벼가 일반적인 작물이 되었습니다. 나라 경제의 근본이 되는 식량 생산의 증대는 결국 강력한 국가의 탄생으로 이어지지요. 물론 모든 국가가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이런 장점을 잘 활용할 리더와 지지세력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이런 이유로 중앙집권화가 강력한 나라가 되는데 중요한 것입니다. 고대 국가의 형성에 대한 이야기부터 고구려와 백제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오면서 끊임없이 살펴봤던 것이 바로 이 중앙집권화였는데요. 국가라는 개념이 생기고 주변의 국가와 경쟁해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중앙집권화가 강력한 나라를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쯤에서 궁금증이 생길 수 있습니다. 중앙집권화를 하면서 왜 한반도의 국가들이 중국 대륙의 정치제도를 가져왔을까요? 단순히 중국 대륙이 큰 영향력을 가져서였을까요? 그 보다는 중국에서 수 많은 나라들이 치열하게 싸우면서, 그리고 새로 나타나고 멸망하면서 검증된 것들 이기에 들여왔다고 보는 편이 가장 타당한 추측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503년, 지증왕은 국호를 신라라고 하나로 정하고 왕을 부르던 마립간이란 단어 대신에 王(왕)이란 단어를 쓰게 합니다. 이것은 중국식 정치제도를 받아들인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불어 풍습처럼 행해졌던 순장을 금지하고, 수도에 시장을 만듦니다. 과거의 효율적이지 못한 풍습을 버리고 새롭게 나아가겠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죠. 또한 시장을 만든다는 것은 신라가 산업발전에 힘을 쏟고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다음 왕이 된 법흥왕은 520년에 나라의 안정을 위해 법령을 반포합니다. 법은 사람들 사이의 시시비비를 가리고 나라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지요. 법은 수 많은 일에 옳고 그름을 나누는 시간을 많이 줄여주는 역할도 하니 사람들이 생활하는데,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줄여주게 됩니다. 물론 현대의 한국의 법은 좀 다르게 쓰이는 것 같긴합니다만... ㅡㅡ;;
법흥왕은 게다가 국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옷에 대한 규격도 정해둡니다. 이는 국가에서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 차이를 두고 쉽게 알아볼 수 있게 만들어 질서를 잡겠다는 뜻이지요. 백성의 질서든 관리들의 질서든 질서를 잡게되면, 많은 것이 효율적으로 변합니다. 물론 단점도 있지만 여기서는 권력이 중앙에 집중되는 것이 이야기의 핵심이니 장점만 이야기 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531년에 진골 귀족들의 대표자로 상대등이란 지위를 만듭니다. 귀족들의 회의 결과를 축약해서 보고 받겠다는 뜻에 가까운 행위지요. 또한 불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는데요. 527년의 일입니다. 불교는 앞선 글들을 통해 전해 드렸듯이 대중의 마음을 하나로 합치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불심으로 대동단결!!"을 시작한 셈입니다.
법흥왕은 이름 그대로 법과 규칙을 정하는데만 신경을 썼던 것은 아닙니다. 영토 확장에도 힘을 썼는데요. 532년에 김해에 있던 본가야을 병합해 낙동강 하류지역에 진출합니다. 이렇게 안팍으로 다져나갔기 때문에 536년에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도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참고로 512년에 지증왕은 우산국, 현재의 울릉도를 복속시킵니다. 신라의 영토로 편입시킨다는 뜻이죠. 이러면 독도는 당연히 뭐... ^^;;
진흥왕은 앞선 왕들의 노력의 결과물의 혜택을 제대로 입은 왕이라고 봐도 됩니다. 일단 545년에 국사(國史)를 편찬하게 됩니다. 나라의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은 왠만큼 나라가 안정되지 않으면 하기 힘든 일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때 진흥왕 시기가 꽤 풍요로웠다는 것을 추측케 합니다. 뿐만 아니라 앞선 법흥왕이 그랬던 것처럼 551년에 연호를 쓰는데요. 개국(開國)을 사용하게 됩니다. 고구려 전성기를 이야기 하면서 했던 것처럼 연호를 쓴 다는 것은 그만큼 군사적으로든 뭐든 자신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지요. 진흥왕은 불교도 크게 성장시켰고 화랑도를 제도화해 미래를 위한 인재들도 국가적인 차원에서 관리합니다.
영토 확장에 있어서 진흥왕은 엄청난 성과를 자랑합니다. 진흥왕은 소백산맥을 넘어 단양의 적성을 점령합니다. 이게 삼국사기 기록에는 진흥왕이 즉위한지 12년째 되는 해인 551년입니다. 하지만 적성비에 적혀있는 내용을 유추해보면, 이미 그전에 적성을 비롯한 소백산맥 넘어의 땅에 신라가 진출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네요.
뿐만 아니라 551년에 진흥왕은 백제와 같이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 상류지역의 10군을 점령합니다. 그리고 2년 후인 553년에 백제가 점유하고 있는 한강 하류 지역마저 빼앗아 중부지방 모두를 독점하죠. 과거 고구려가 두려워 백제와 손을 잡았던 신라지만, 이제는 신라 때문에 고구려와 백제가 손을 잡게 된 상황까지 만들어 낸 것입니다.
신라는 이 덕에 한강유역의 인적, 물적 자원을 획득했고, 이 지역에 북한산주를 설치해 군사적으로 튼튼히 대비해 놓습니다. 또한 남양만에는 당항성을 쌓아서 바다를 통한 교역과 외교에서 다른 나라의 도움없이 직접 5호 16국 상태였던 중국의 남조와 이후 들어서게되는 수나라 및 당나라와 외교적 관계를 쌓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거기다 562년 진흥왕은 남아있던 가야연맹인 고령의 대가야까지 무너뜨리며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진흥왕의 영토 확장 업적은 북쪽으로는 해안선을 따라 함흥평야까지 진출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에 대한 정보는 창녕과 북한산, 황초암, 마운령에 남아 있는 네개의 순수비를 통해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신라의 통일 과정 이야기는 앞서 하지 못한 고구려의 중국 대륙 국가들과의 항쟁과 멸망이야기 그리고 백제의 멸망 이야기와 묶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신라 사회 구조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죠. 신라 사회의 핵심(?) 혹은 가장 많이 강조되고 알려진 것은 바로 진골과 성골이 나오는 골품제도 입니다. 이는 과거 신라가 형성될 때 힘이 되었던 족장과 군장들 영향인데요. 특히 왕을 돌아가면서 하던 시기에 형성된 대표적인 왕족들이 진골과 성골을 이루게 됩니다.
일단 관등제도부터 알아보도록 하죠. 신라의 관등제도는 6세기 초 법흥왕 때 17관등으로 완성됩니다. 이 관등조직이 한줄로 세워진 정도로 보이지만 여기에는 앞서 말한 골품제도와 많은 부분에서 연계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승진 제한입니다. 골품에 따라 맡을 수 있는 주요 관직에 제한을 받습니다. 이 사실이 통일신라 후기에 가면 신라를 무너지게 하는 원인 중에 하나가 됩니다.
최고 관직인 1관등인 이벌찬까지 승진을 할 수 있는 것은 진골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6두품은 6관등인 아찬까지 밖에 승진할 수 있었지요. 그 아래 5두품은 10관급인 대나마, 4두품은 12관등인 대사까지가 한계였지요. 종종 이 제한 너머까지 업무적인 면에서 한관등 더 승진할 수 있는 길이 있었지만 흔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6두품 이하 1두품까지의 신분은 과거 사로국(신라)을 형성했던 6촌과 이후 복속된 족장의 후예들이 세력에 따라 등급이 매겨져 편성된 것이었는데요. 시간이 지나면서 진골과 6두품, 5두품, 4두품만이 남고 나머지 4두품부터는 평민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짐니다.
귀족들의 구성도 보죠. 신라의 대표적인 왕족인 성골과 진골 중 성골만 왕이 되었었는데요. 진덕여왕 이후 성골은 소멸되었고 무열왕부터는 진골 출신이 왕이 되었습니다. 이 진골에는 김씨왕족 및 전 왕족이면서 오래된 왕비족인 박씨, 그리고 전쟁을 통해 새로 복속된 본가야의 왕족인 새로운 김씨 등이 포함되었는데요. 많이 알려진 김유신 가문이 본가야의 김씨 입니다.
진골귀족들이 국가의 중요 문제를 결정했었는데요. 이 진골 중 높은 지위에 올랐던 대등들이 모인 회의를 화백회의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조금 독특한 결정 방법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바로 만장일치의 원칙이 적용되었다고 합니다.
신라와 귀족하면 생각나는 것이 또 하나 있지요. 바로 화랑도 입니다. 화랑도는 진골출신의 화랑 한명을 중심으로 수 백명의 낭도가 모여 하나의 화랑집단을 형성합니다. 지금의 사관학교와 비슷하지요. 다른 것이라면 귀족의 자제들을 중심으로 뭉쳐다니며 수행했다는 것 정도랄까? ^^;;
더불어 이들 이야기를 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원광법사가 만든 세속 5계입니다. 사군이충(충성심으로 군주를 섬긴다), 사친이효(효로써 어버이를 섬긴다), 교우이신(믿음으로 친구와 벗을 삼는다), 임전무퇴(전쟁에서는 후퇴하지 않는다) 이렇게 5가지 입니다. 이는 당시에 유교사상과 불교사상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었다는 증거인데요. 충, 효, 신은 유교에서 많이 강조하는 분야고, 살생을 함부로 하지 않는 다는 것은 불교사상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화랑 출신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으로는 대표적으로 김유신이 있고, 사다함과 관창이 있습니다.
지방조직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도 살펴보도록 하죠. 우선 왕경(수도)가 내량, 사량, 본피, 모량,한지, 습비의 6부로 편성되었는데요. 기존에 부족적인 전통을 행정조직으로 흡수 개편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전국은 소경과 주, 군, 촌의 제도를 실시했습니다. 514년에 아시촌(함안)에 소경을 설치한 데 이어 557년에는 국원(충주), 639년에는 하슬라(강릉)에 설치했는데요. 그 곳의 장관을 사신이라고 불렀습니다. 소경은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로써 한마디로 지방의 중심 도시 같은 것입니다. 말 그대로 작은 수도인 셈이죠. 이는 신라 수도인 경주가 한반도의 한쪽에 너무 치우쳐져 있기 때문이지요. 나중에 통일 신라시기에는 5개의 소경으로 늘어납니다. 흔히 듣게되는 신라의 9주 5소경은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확대 된 것입니다. 물론 흔히 못들어보신 분도 계시겠지만요. ^^;;
한편 주는 505년에 처음으로 실직주(삼척)에 설치된 후에 진흥왕 때까지 사벌주(상주), 신주(북한산주), 비사벌주(하주), 비별홀주까지 5주가 세워졌는데요. 이 주의 장관은 군주(軍主)라고 불렀습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군사적인 성격이 강했음을 알수 있지요. 주 밑에는 군이 있었구요. 군을 관리하는 사람을 당주(幢主)라고 불렀고, 그 아래는 촌(성)이라 하고 도사(道使)라고 불렀습니다. 여기까지 관리가 파견되었습니다.
신라에는 대당을 비롯한 6정이라는 군단이 편성되었는데요. 왕경과 5주의 부근에 배치되었고 왕경에는 대당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이 외에도 모병으로 편성된 서당(誓幢)을 편성해서 군사력을 강화했습니다.
신라도 농민들이 자신의 토지를 소유해 경작했습니다. 고구려, 백제와 마찬가지로 세금과 지역특산품, 국가일에 동원되었지요. 오래 전부터 신라는 품주라고해서 세금을 관리하는 기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전국적인 조세행정이 꽤 일찍 체계적으로 발달했던 것 같습니다.
이상이 신라의 폭발적인 발전과 사회상에 대한 요약입니다. ^^
참고로 한 책은
2010년 검정을 통과한 천재교육의 고등학교 한국사
2010년 검정을 통과한 비상교육의 고등학교 한국사
2002년 제작된 고등학교 국사
1996년 제작된 한국사통론 4판
이렇게 입니다.
제 개인 블로그에 동시에 올리고 있습니다. 링크된 글은 위 내용과 똑같습니다.
http://myahiko.tistory.com/15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