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고구려와 신라보다더 빠르게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빠르게 전성기를 맞이했던 만큼 이후에는 큰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했는데요. 그럼에도 백제는 나름대로 체제정비와 외교 등을 통해 과거의 영광을 찾아오려고 노력했습니다.
백제의 전성기는 기원 후 3세기 중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초고왕때 백제는 앞선 글로 설명했던 무시무시한 고구려 땅으로 쳐들어가면서 영토확장을 했었죠. 하지만 그 영광도 오래 가지는 못했습니다. 고구려가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 단단하게 만들고 본격적으로 영토확장에 열을 올렸기 때문입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백제와 신라는 동맹을 맺게 됩니다. 참고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와 신라는 433년에 동맹을 맺는다고 합니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서로 진귀한 물품을 주고 받고 고구려의 침입에 군사를 보내줘 돕기도 했다고 하네요.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475년에 백제는 고구려의 장수왕에게 한성(위례성)을 빼앗기게 됩니다. 이 때문에 개로왕도 죽게 되지요. 어쩔 수 없이 백제는 수도를 지금의 공주인 웅진으로 옮기게 됐고, 백제의 왕권은 땅에 떨어지게 됩니다. 이때 왕의 외척들 활개를 치기 시작합니다. 왕비족이었던 진씨와 해씨가 백제를 좌지우지 하다보니 정치는 혼란 속에 빠지게 되죠.
이런 우울한 상황 속에서 동성왕이 즉위합니다. 동성왕은 다시 백제의 옛 영광을 찾으려고 합니다. 대표적인 일이 바로 신라와의 동맹을 강화하는 것이었습니다. 493년 동성왕은 신라 왕족인 이벌찬직위에 있던 비지의 딸을 왕비로 맞이해 신라와의 동맹을 굳건히 다지고 왕권도 강화합니다. 왜 왕권이 강화되냐면, 외부에서 왕이 신부를 맞이해 외 척으로 백제 정치를 쥐락펴락하던 이들이 함부로 나서지 못하게 했다는 말입니다. 마치 히딩크가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 감독으로 와서 학연 지연 및 모든 인연을 차단시킨 것과 비슷한 것이려나? 그러면서 자신을 지지해줄 세력들을 새로 이동한 지역에서 찾게 됩니다. 연씨, 백씨, 소씨 등 웅진(공주) 지방 토착 세력을 관직에 오르도록 힘써서 외척세력을 견제시킨 것입니다.
이후 무령왕도 정권 안정에 힘을 씁니다. 특히 외국과의 교류에 신경을 쓰는데요. 5호 16국으로 나뉘어져 있던 중국 남조의 양나라에 사신을 보냅니다. 양나라와 국교를 강화해서 영동대장군이란 관직을 제수 받게 되는데요. 고구려에 비하면 비굴한 처사긴 하지만 백제의 상황에서는 멸망당하지 않으면 할 수 밖에 없었던 선택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여하튼 관직을 제수 받았다는 것은 양나라와 친분관계가 꽤 깊었음을 증명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번 이야기의 비운(?)의 주인공인 왕 성왕이 등장합니다. 성왕은 본격적으로 과거 백제의 영광을 되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수도를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옮기지요. 또한 538년에 국호도 남부여로 고쳤구요. 산업성장에 힘썼고, 불교를 진흥시켰습니다. 백성들의 지원과 응원을 얻기 위해서였겠지요. 또한 22부의 중앙관서를 확대시킴으로써 관직도 재정비 시켰습니다. 수도의 5부, 지방의 5방제를 갖춤으로써 지방 관리체계까지 새로 정비하게 됩니다.
이에 힘입어 551년에 성왕은 고구려에게 빼앗겼던 한강 하류의 6군을 신라와의 협동작전을 통해 탈환합니다. 하지만 신라가 2년뒤인 553년에 백제를 배신하고 백제는 다시 한번 한강 유역의 땅을 잃고 맙니다.
신라의 배신 행위에 대한 댓가를 치루게 하려고 성왕이 군사를 이끌고 관산성(옥천)에 쳐들어갔으나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백제는 고구려와 연계해 신라와 치열한 싸움을 벌이게 됩니다. 이후 이야기는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 부분에서 계속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비운(?)의 백제는 어떤 사회조직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백제는 부여씨를 중심으로 소씨, 연씨, 협씨, 해씨, 진시, 국씨, 목씨, 백씨의 대성팔족이 지배세력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정사암 회의를 통해서 귀족들이 의견을 모으고 재상을 선거해 뽑았습니다. 백제의 수도가 한성에 있던 시대에는 진씨와 해씨가 부여씨와 함께 이끌어나갔었지요. 왕권이 강할 땐 나쁘지 않았지만, 이런 이유로 한성을 빼앗기면서 왕권이 땅에 떨어지자 진씨와 해씨가 과도한 힘을 가지게 되었지요. 이 때문에 동성왕이 신라 재상에 해당하는 이벌찬 비지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이런 백제가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제대로 된 정치조직을 갖추었습니다. 이유는 전설에서 표현되듯이 지배집단들이 북쪽에서 내려왔기 때문인데요. 다시말해 이민족이 토착 세력들을 다스리려다보니 자연스레 왕에게 그 힘을 몰아주게 된 것입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듯이 힘을 한쪽으로 몰아 강력한 힘을 실어주면 통치하는데 효율적이 되지요. 쉽게 말하면 중간에서 누구말을 따라야 할지 우왕좌왕하는 일이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
더불어서 백제는 일찍이 중국과 교역을 활발히 한 덕에 중국 대륙의 국가들이 앞서 발달시킨 정치제도를 빠르게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260년에 고이왕이 6좌평, 16관품제도를 제정하게 되죠.
백제의 관등제도는 명칭이 중국식으로 되어 있었고, 꽤 조직적인 편이었습니다. 단순한 16개의 조직이 아니었죠. 일단 1품에는 6좌평들이 있었는데요. 조선시대로 치면 6조, 요즘 한국으로 치면 장관 쯤 되는 자리들입니다. 그래서 크게 세단계로 나뉘는데요. 최상위는 좌평과 더불어 솔계열이 있었고, 그 다음이 덕계열, 마지막이 무명계열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단계는 옷 색깔도 다르게 입었다고 합니다. 좌평과 솔계열 같은 최상위 계층은 자주색으로 입었고, 덕계열은 붉은 색을 입었으며, 마지막 무명계열은 청색을 입었다고 하네요.
한편 지방제도의 경우도 일찍이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 안에 흡수시켰습니다. 전국에 22담로를 설치해 왕의 자식들과 왕족들을 보내 다스리게 했다고 하네요. 이렇게 되면 아무래도 각 지방에 왕의 명령이 더 잘 전해지고 왕이 시킨 일들이 더 쉽게 받아들여지는 장점이 있습니다. 기존 군장들에 의한 자치제를 하면 왕의 명령이라고 해도 자치하는 군장에 의해서 시행이 안될 수도 있것들이 많으니까요. ^^;; 단점은 왕이 뽑은 관리가 아니라 왕족들이라는 점 때문에 완벽한 중앙집권적인 지방제도라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처벌내리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후기에 가면 다시 제대로 손을 보게 됩니다.
앞서 말한 비운의 성왕은 지방 전국을 5방으로 나누어 다스렸구요. 각 방마다 방성을 두어 다스렸다고 합니다. 중방에는 고소성, 동방에는 득안성, 남방은 구지하성, 서방은 도선성, 북방은 웅진성을 두었다고 합니다. 이 방성에는 달솔로 임명된 방령이 700~1200명 정도 규모의 군대를 통솔하면서 다스렸다고 합니다. 방 아래에는 군이 있었고, 이 군은 덕솔로 임명된 군의 장수 3명이 같이 다스렸다고 합니다. 군 아래에는 성이라고는 조직이 있었다고 하네요.
간단히 말하면, 전국 5방, 군, 성의 순서대로 조직된 지방 체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백제는 전국에 37군 200성이 있었다고 합니다.
수도의 경우 5부를 두었는데요. 고구려의 것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上(상,동쪽), 前(전,남쪽), 中(중,가운데), 下(하,서쪽), 後(후,북쪽)의 방향성을 지닌 이름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는 앞서 말한대로 토착세력이 뭉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토착세력을 지배하면서 형성된 국가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백제도 농민들이 있었고 이들이 세금도 내고, 특산품도 지역 백성들과 함께 내고, 국가적인 일이 있으면 끌려가야 했다고 하네요. 한편 백제 후기에 수공업과 관련된 관부가 많이 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왕궁 소속의 천민 기술자들이 많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가 있습니다.
이상이 백제의 중흥기와 사회상에 대한 요약입니다. ^^
참고로 한 책은
2010년 검정을 통과한 천재교육의 고등학교 한국사
2010년 검정을 통과한 비상교육의 고등학교 한국사
2002년 제작된 고등학교 국사
1996년 제작된 한국사통론 4판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3권 눌지마립간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3권 비유왕
이렇게 입니다.
부족하거나 보충해야 되거나 혹은 잘못된 것이 있다면 댓글을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
제 개인 블로그에 동시에 올리고 있습니다. 링크된 글은 위 내용과 똑같습니다.
http://myahiko.tistory.com/15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