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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의 사망원인에 관한 잡설.
게시물ID : history_1752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oirCafé
추천 : 5/13
조회수 : 15604회
댓글수 : 24개
등록시간 : 2014/08/03 10:43:43
유관순의 형량은 관련자료가 발굴되어 이가 명백히 규명이 완료되었으나, 사망원인에 관해서는 당시대의 사료부족과 유관순의 유골유실로 인하여 이를 명백하게 밝혀내는게 불가능한 실정입니다.

유관순의 형량은 다음과 같습니다.

- 1심 법원에서 징역형 5년을 선고받음. 이에 불복하여 항소.

- 2심 법원에서 징역형 3년을 선고받음.

- 복무도중, 영친왕과 이 마사코의 결혼기념으로 특별감형. 3년 -> 1년6개월.


 여기서 한가지 알수 있는 재미있는 점은 1심에서 상당한 형량을 선고받음에 동시에, 2심 징역살이 도중에는 소위 말하는 '잡범'으로 치부되어 특별감형의 대상이 되었다는 모순인데,(민족대표 33인 등 '특별범'들은 감형의 대상이 되지 않음.) 이 모순은 1심의 징역형 5년 선고는 유관순의 본래죄목인 내란죄, 소란죄에 의한 것보다는 법정에서 걸상을 집어던지는 등 '법정모독죄'가 더 크게 작용했다는 사실을 통해 해결된다는 점입니다. 즉, 유관순은 당시 일제의 법정에서 '잡범'으로 취급되었다고 간주하는 것이 옳습니다.


 유관순의 사망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자료의 전무로 인하여 어느 설도 확신할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다만, (최근에는 사실상 폐기처분된) 토막살인설의 경우 3.1운동으로 인한 국제여론 악화를 우려하고 이를 최대한 무마하기 위해 노력했던 제국주의 일본이 유관순의 시체를 미국인 이화학당 교사들에게 넘겨줬다는 점을 미루어볼때 신뢰성이 크게 떨어집니다.

 최근에는 2013년 11월에 발견된 '3.1운동시 피살자명부'를 근거로 하여 옥중 타살설이 제기되고 있으나, 이 자료 또한 신뢰성에는 문제가 있는것이,

3.1운동시 피살자명부.png

먼저 '3.1운동시 피살자 명부'가 유관순이 사망한지 30년도 더 된 이후에 '대인조사'라는 방식을 통하여 작성되었다는 점.(이 시점에 이르면 이미 유관순의 이름은 특정집단의 광고활동으로 인하여 널리 알려진 상태였습니다.)

제목 없음.png


둘째로, 이 자료에 제시된 유관순의 연령 및 사망일자가 매치가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유관순은 1902년 12월 출생이고, 호적등재가 1년 밀린 인물이므로 1922년에 사망하였다면 사망당시연령은 19세가 되어야 함이 옳고,

결정적으로 유관순이 공식 사망한 연도와 일시는 1920년 9월 28일로, '대인조사'에 의해 획득한 자료상의 내용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1920년 12월 30일에 출소예정이었으므로 저 일시에 감옥에서 사망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유관순이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는 점에 관해 따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것이, 일개 '잡범'에 불과한 '무명'여고생(유관순은 독립 이전까지는 줄곧 무명인물이었습니다.)을 2심재판까지 거쳐 처리한 일제가 굳이 고문을 하여 죽이거나, 혹은 고문을 해야할 필요성이 있었는가?라는 점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유관순은 미국인이 운영하는 학교의 생도였으며 이를 고문함은 일제가 가장 우려하던 국제여론 악화를 부채질할 수 있는 요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점등을 차치하더라도, 이의 정확한 사망원인은 전혀 알수 없는 상황이며 결론적으로 그녀의 죽음에 관한 판단은 독자 개개인의 몫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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