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는 무슨 그래도. 마. 우리도 위험하면 알아서 피할 끼다. 니 혼자 다 해먹을라꼬 하면 섭하다.”
“알았다. 그러면 내가 토끼뿌라 하면 토끼는 거다. 알 긋나?”
순간. 아이들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키득키득 웃음을 참는 아이들도 있었다.
“울아. 니가 사투리 쓰니깐 요상하다. 다시 한양말 써도.”
“흠……. 그런가? 다음에 나도 정식으로 사투리 배워야겠다.”
“그래라.”
잠깐의 실랑이가 있는 와중에 마을을 침노한 불량한 무리가 울이와 아이들이 숨어 있는 곳까지 접근했다. 마을 어귀로 갈려면 반드시 개울가의 징검다리를 건너야 한다. 울이는 그 틈을 노린 것이다.
“자. 내가 신호하면 짱돌을 던져라.”
울이는 아이들에게 말하며 품속에서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줄팔매를 꺼냈다. 줄은 가야금에 쓰이는 질긴 명주실과 고래 힘줄을 꼬아 제작하고 가운데 조약돌을 감싸는 가죽은 쇠가죽 못지않은 고래가죽을 써서 만든 것이다. 아비가 구하기 어려운 고래부산물로 울이에게 무릿매를 선물한 것은 그가 유능한 고래잡이 중에서 고래의 숨통을 끊어 놓는 작살잡이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석기의 주요 유적중에 하나인 울주 반구대 암각화에 고래표식이 있을 정도로 오랜 세월부터 울산은 고래잡이가 흥했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조선 시대 이르러 고래잡이에 대한 관의 가혹한 수탈이 지속함에 따라 어부들은 고래사냥을 기피했다. 간간이 해안으로 길을 잘못 든 고래가 발견되면 관아에서 어민들을 차출하여 갈 곳 잃은 고래를 죽여 그 고기는 상하지 않게 곧바로 임금에게 진상했다. 울산 해안가 주민들에게는 고래잡이는 대가 없는 공역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이의 아비는 향촌민들이 꺼리는 관에서 주관한 고래잡이에 빠지지 않고 참석해 마을 사람들의 신망을 얻었다.
그러나 울이의 아버지의 주 종목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석전이었다.
‘호흡을 가다듬자. 아버지는 우리 동네 제일의 작살잡이이자, 석전꾼이었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물매를 믿자.’
울이는 굳은 표정으로 멀리 전방에 나타난 일련의 왜적무리들을 바라보며 돌팔매를 천천히 돌리기 시작했다.
‘울이야. 명심하거라. 돌팔매를 세게 돌리는 것은 네가 가지고 있는 힘만 뺄 뿐이다. 천천히 돌리면서 상대와의 거리를 추정하거라. 상대방이 멀리 있다면 줄을 어깨 위로 돌려 돌을 던지고, 적이 가까이 있거나 정확히 명중시키기 위해서는 겨드랑이 아래에서 사선을 그리다가 투척하면 된다. 그다음으로 이 방법 보다 파괴력이 강한 투척법은…….’
아버지가 이 무릿매를 주시며 한 말씀을 울이는 다시금 떠올렸다. 지난 정월 대보름에 아비와 함께 윗마을을 상대로 투석전을 벌였던 이곳에서 울이는 혼자 놀이가 아닌 실전을 치르게 되었다.
“딱. 딱. 따닥.”
사전에 정한 대로 아이들이 무차별적으로 짱돌을 날리기 시작했다. 징검다리를 건너던 왜구무리들이 비틀거리며 엄폐물을 찾아 근처 바위 무덤 쪽으로 피하기 시작했다. 그때 두 번째로 강을 건너던 왜적 놈이 돌 세례를 피하려다 디딤돌에 낀 물이끼를 밟아 자빠졌다. 울이는 도랑물에서 황급히 일어서는 그에게 돌팔매를 날렸다.
“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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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악. 다리가……. 내 다리가…….”
지로가 수심이 얕은 개울가에서 오른쪽 무릎을 감싸고 구르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앞장서서 가던 이치로상은 징검다리를 건너 마을어귀로 달아나 버리고 몸 성히 남은 건 사부로와 막내 시로였다. 그리고 인질인 눈물점 여인네 하나가 있었다.
“퉷. 이치로 녀석. 잘 난체란 잘 난체는 다하더니만……. 우릴 놔두고 내빼버렸단 말이지…….”
용케 징검다리 옆 모래사장의 바위틈에 숨은 사부로가 입속에 묻은 모래를 뱉어내며 불같이 화를 낼 찰나였다. 동리 안에서의 상황과 같은 일이 반복되자 사부로는 정예 아시가루라는 체면에도 불구하고 숨을 곳을 찾아 뛰어드니 온몸이 모래 범벅이 되었다. 이런 꾀죄죄한 꼴은 조금 떨어진 수풀에 숨은 시로와 포로도 마찬가지였다.
“사부로 형. 이치로 큰형이 무사히 강을 건넜으니, 곧 원군이 올 거야? 그치?”
겁을 잔뜩 집어먹은 얼굴을 한 시로가 그를 보며 긍정의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흥. 원군은 무슨 원군. 아마 벌써 본대로 도망갔을 거다. 시로야.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봐. 네가 이치로 새끼라면 정체불명의 잇키가 우글우글한 이곳에 돌아오겠냐?”
“하지만…….”
침울해진 시로를 바라보며 사부로는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그는 막내에게 말했다.
“시로. 잘 들어라. 내 말대로 해야 우리가 산다. 알겠지?”
“형……. 우리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할 수 있어! 넌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는 거야 알겠지?”
“응…….”
그때였다. 두 사람의 기억 속에서 잠시 잊고 있던 존재. 지로가 움직이지 않는 오른 다리를 잡고는 기어서 그들이 숨어 있는 곳으로 오려 하고 있었다.
“사부로……. 시로야……. 살려줘……. 몸에 힘이 없어……. 살려줘……. 으…….으…….”
지로는 흐르는 개울가에서 느릿느릿 몸을 옮기고 있었다. 머리에 쓴 진가사가 무거웠는지 내팽겨쳐버리고 갑옷도 풀어헤친 채였다. 투구를 벗으니 소갈머리가 휑한 그의 머리 상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원형탈모의 그가 물속에서 흐느적거리니 마치 전설 속의 요괴 갓파가 살아 돌아온 것 같았다. 단지 피부가 녹색이 아닌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는 건만 빼고 말이다.
“풉……. 지로형. 갓파 같아. 히히…….”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시로가 지로의 그로테스크한 모습을 보고는 실실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사부로는 혀를 끌끌 찼다.
“쯧쯧. 시로 너. 정신 차려. 여긴 전장 한가운데다. 그러니……. 네가 지로를 보내줘라.”
“엥? 지로형을 어디로 보내? 데리고 오는 게 아니고?”
계속 말대답하는 시로 때문에 사부로는 미간의 주름이란 주름은 다 찡그려졌다. 그는 시로를 재차 다그쳤다.
“지로를 죽이라고! 지로가 여기로 기어들어 오면 우리 위치가 발각되잖아.”
“그렇다고 같은 편을 죽여? 난 못해. 하고 싶으면 형이 해.”
시로는 사부로에게서 고개를 돌려 거부 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했다. 그리곤 잡아온 여인의 품에 안겨 울기 시작했다.
“엄마. 엉엉……. 엄마 말대로 집에서 얌전히 농사나 지을걸.”
그런 시로가 황당한 건 사부로도 자신의 품으로 파고드는 시로를 보는 아낙네도 마찬가지 이었다. 찰나의 순간이 지난 후 손이 묶인 부인은 시로를 안간힘을 써서 밀어내려 애쓰고 있었다. 여자가 버둥거리자 시로는 이내 짜증이 났는지 힘으로 제압하려 주먹을 쓰다가 그녀를 기절시켜 버렸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부로는 평소에는 찾지도 않던 부처님을 연신 연호하며 마음속으로 ‘참을 인’자를 되뇌고 있었다.
“어이. 시로짱. 형이 말 한데로 하기로 했잖아. 아줌마는 그쯤 해서 놔두고 얼른 지로를 죽이라니깐…….”
좀 더 나긋나긋해진, 그러나 체념한 말투의 사부로였다.
“아놔. 못 죽인다니깐. 그렇게 죽이고 싶음 형이 해!”
토라진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가 시로의 입에서 나왔다. 그의 정신이 퇴행하고 있는 것이다.
“형은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어. 그러니깐 지로를……. 아니. 갓파를……. 그래! 갓파 요괴를 죽여! 저놈은 지로의 몸을 빌린 갓파야.”
“갓파?”
“그래. 갓파.”
시로는 섬뜩하게 배시시 웃으며 품속에서 수리검 몇 개를 꺼내 들었다. 몇 해 전 떠돌이 상인에게 헐값으로 산 녹슨 수리검. 시로는 시간이 날 때마다 수리검을 갈고 던지기를 반복했다. 언젠가는 높으신 다이묘의 눈에 들어 부귀영화를 누릴 그 날을 위한 준비였다.
“푹”
“으악……. 시로……. 이러지 마……. 살려줘…….”
첫 번째 수리검이 지로의 왼쪽 어깨에 박혔다. 그는 통각이 없는 오른쪽 다리를 감싸다 수리검을 맞고는 고통의 단발마를 소리쳤다.
“헤헤. 지로형……. 아니 요괴야……. 움직이지 마……. 한 방에 보낼 수가 없잖아. 자. 극락왕생하거라.”
“푹”
“캑……. 캑……. 케에엑…….”
시로가 던진 두 번째 수리검이 지로의 모가지 한가운데에 꽂혔다. 그의 목과 입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물속에서 발버둥 치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