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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게시판 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게시물ID : history_1750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Uminary
추천 : 2
조회수 : 890회
댓글수 : 16개
등록시간 : 2014/08/02 06:06:14
먼저 저는 역사의 '역'자도 잘 모르고 고등학교시절 역사를 등한시 여겼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정도전을 계기로, 조선 건국의 역사에 대해 조사하고 알아보면서(단순한 흥미로..)

상당히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역사를 시험위주로 암기식으로 하니 싫어했던 과목일지도..)

아무튼 그저께 목요일 명량을 보고 왔습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설민석 이투스 인강 선생님의 영화전 강의(?)가 돌아다니길래 역시 먼저 보고 갔구요..

그런데 일본 여자친구와 이야기를 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관하여 말입니다.

명량이든 기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한 영화, 한국사 수업은 항상 초점은 한국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일본에서 제시한 새로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새로운관점(?) -[일단 제가 몰랐던 것이니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에 상당히 신선하고 재미있더군요.
(역사를 엄청, 정말 모르는 놈이라, 제가 일본인인 여자친구가 알려주는 새로 알게 된 내용에 굉장히 흥미라 가더군요.
일본역사학자가 말하는 관점이니깐요...)

하지만 이러한 여자친구의 새로운 의견제시, 이 역시 일본 인터넷에 올려져있는 어떠한 역사학자라 불리는 사람이 쓴 글이였더군요....

(그래서인지 어느정도 믿어야 되나, 이걸 믿어야되나, 정말 사실인가? 하는 여러 의문이 들긴 했지만요.)


뭐 딱히 역사를 전공하는 것도 아니고, 마땅히 어디에 물어볼 사람도 없어서

일단 역사게시판분들의 의견을 조금이나마 듣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남김니다.

일본역사 - 닥치고 반대! 하시는 분들께서는 밑의 장문의 글을 읽지 않고 뒤로가기 누르셔도 상관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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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일본 여자친구도 역사적 내용을 한국말로 하기에는 어렵다고하여 라인번역기를 통하여 보내준 내용이였습니다.

(발번역기 이용한점 죄송합니다만 의미파악하시는데에는 충분하시리라 믿습니다)

일본어는 원글 이라 첨부하고, 아래 해석글만 읽으셔도 충분하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면 시작하겠습니다.


最近の韓国で、もっとも嫌われている日本の人物の代表といえば、豊臣秀吉があげられます。
理由は、文禄、慶長の役(ぶんろく、けいちょうのえき)で朝鮮半島に攻め込んだからなのだそうです。

요즘 한국에서 가장 미움 받고 있는 일본의 인물의 대표라고 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들 수 있습니다.
이유는 분로쿠, 게이초의 역(대부분 6, 경청해 준 역)에서 조선 반도에 몰아쳤다 때문이래요.

一方、この出兵に際し、日本と朝鮮半島の海峡で戦った李舜臣は、まさにヒーローとされているそうです。
彼らの言い分によると、李舜臣の戦いによって、日本は海上を封鎖され、朝鮮半島への補給路を断たれた日本は、半島からの敗退を余儀なくされたからなのだそうです。

한편 이 출병에 즈음해 일본과 조선 반도의 해협에서 싸운 이순신은 바로 영웅으로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순신의 싸움에 의해, 일본은 해상을 봉쇄되고 한반도에의 보급로를 끊긴 일본은 조선에서 패하는 원인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래요.


李舜臣についていえば、なるほど朝鮮の海将として文禄元(1592)年8月29日に釜山港を占領していた日本軍に戦いを挑んでいますが、あえなく敗退しています。
また、慶長3(1598)年)年11月18日の露梁海戦(ろりょうかいせん)では、明国と朝鮮の連合軍の指揮を執りながら、日本軍の圧倒的な戦力の前に、戦死しています。
李舜臣によって、日本が海上補給路を断たれたという事実は、どこにもないのです。

이순신에 대해서는, 과연 조선의 해상 자위로 분로쿠 전(1592년 8월 29일 부산항을 차지했던 일본군에게 싸움을 도전하고 있지만, 어이없이 패퇴하고 있습니다.
또, 게이초 3(1598년)년 11월 18일 노량 해전(로 양 카이세은)에서는 명나라와 조선의 연합군 지휘하면서 일본군의 압도적 전력 앞에 전사하고 있습니다.
이순신에 의해서 일본이 해상 보급로를 끊겼다는 사실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そもそも、秀吉の朝鮮出兵についても、誤解と偏見がまかりとおっています。

戦国時代や秀吉を描いた歴史小説においても、そもそも秀吉の朝鮮出兵が「なぜ行なわれたか」について、きちんと踏み込んで書いているものはたいへん少ない。

원래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에 대해서도 오해와 편견이 마카리토오쯔고 있습니다.

전국 시대나 히데요시를 그린 역사 소설에서도 원래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이 "왜 열렸나"을 제대로 파고들지 쓰고 있는 것은 매우 적다.


おおかたは、秀吉の朝鮮出兵は、
◆秀吉が耄碌していたために起こした戦いだった、
◆秀吉の成長主義がひき起した身勝手な朝鮮征服の戦いであった、
◆戦いを好む戦国武士団を朝鮮、支那に追い払い殺して数を減らすための戦いだった
などと、ほとんど意味不明の解説がなされているようです。
まさに、木を見て森を見ず、です。

대부분은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은
◆ 히데요시가 노쇠했기 때문에 일으킨 싸움이었다,
◆ 히데요시의 성장 주의가 일으키단 제멋대로인 조선 정복의 싸움이었다,
◆ 싸움을 좋아하는 전국 무사단을 조선, 중국에 쫓다 죽이고 수를 줄이기 위한 싸움이었다
등과 거의 의미 불명의 해설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나무를 보고숲을 보지 않습니다.


そもそも、仮に秀吉が耄碌爺であったとしても、当時の日本は、江戸日本も含めて、各藩がそれぞれ独立した国家を営んでいたのです。
耄碌ジジイの世迷い事で、大枚をはたいて朝鮮までノコノコ出ていくおバカな大名は、全国どこにもいません。

원래, 만일 히데요시가 노쇠 할아버지였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일본은 에도 일본도 포함해 각번이 각각 독립된 국가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노망 지지이의 세미이 것으로 거금을 털어서 조선까지 노코노코 나가 바보 같은 다이묘는 전국 어디에도 없습니다.

秀吉の成長志向が招いたという解説にしても、信長から秀吉と続く体制は、農業重視というよりも流通指向がかなり強かった体制であり、領地がもらえなくても、それぞれの大名は、商業による貨幣経済によってかなりの富が蓄積できたわけです。
金持ち喧嘩せずとはよく言ったもので、食うに困らない、生活に困らない豊かな生活を満喫できているのに、あえて、戦争など、誰も好き好んで行うものではありません。

히데요시의 성장 지향이 자초했다는 설명도, 노부나가로부터 히데요시로 이어지는 체제는 농업 위주라는 것보다 유통 성향이 상당히 강한 체제이며, 영지를 받지 않아도, 각각의 다이묘는 상업에 의한 화폐 경제에 의해 상당한 부가 축적할 수 있던 것입니다.
부자 싸움하지 않고 말은 잘한 것으로, 생활에 걱정 없는 생활에 걱정 없는 풍요로운 생활을 만끽하고 있는데 굳이 전쟁 등 누구나 좋아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では、なぜ秀吉は朝鮮出兵を行ない、世の大名たちも、これに追従したのかが問題となります。

그럼, 왜 히데요시는 조선 출병을 하고 세상의 다이묘들도 이에 추종했는지가 문제입니다.


実は、このことを考えるには、日本国内だけの事情をいくら考えても答えはでてきません。
そもそもなぜ、秀吉の時代に日本が一国にまとまったのか、そして朝鮮出兵をするに至った背景には何があったのか。

사실 이 생각에는 일본 국내외의 사정을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원래 왜, 히데요시의 시대에 일본이 일국에 정리된 것인지, 그리고 조선 출병을 하게 된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実はそこには、当時のアジア情勢という国際政治が大きく影響していたのです。
そしてそういう国の内外の事情を理解したからこそ、東北の大名たちまでもが、秀吉の朝鮮出兵に前向きに協力し、兵を出しているのです。

실은 거기에는 당시 아시아 정세는 국제 정치가 크게 영향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나라 안팎의 사정을 이해했기 때문에, 토호쿠의 다이묘들까지도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군사를 내는 것입니다.


そもそも、二度にわたる秀吉の朝鮮出兵(文禄、慶長の役)というのは、16世紀における東アジアでの最大の戦いです。
日本からは約16万の大軍が朝鮮半島に送り込まれたし、朝鮮と明国の連合軍は、戦力25万の大軍です。

원래 두 차례에 걸쳐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분로쿠, 게이초의 역)이란, 16세기의 동 아시아에서의 최대의 싸움입니다.
일본에서는 약 16만 대군이 한반도에 투입되었고,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전력 25만 대군입니다.



天下分け目の戦いといわれる関ヶ原の戦いにしても、東軍7万、西軍8万の激突ですから、いかに朝鮮出兵の規模が大きかったかがわかります。
천하를 겨루는 전투라고 불리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동군 7만, 서군 8만이 격돌하니까, 아무리 조선 출병의 규모가 컸는지 알 수 있어요.



この時代、世界全体を見渡せば、まさにスペイン国王が、世界を制した時代です。
世界の8割は、スペインの植民地となっていました。

이 시대, 세계 전체를 바라보면 바로 스페인 국왕이 세계를 제압한 시대입니다.
세계의 8할은 스페인의 식민지로 되어 있었습니다.

そのスペインは、東亜地域では、ルソン(いまのフィリピン)に、東アジア地域全体の戦略統合本郡である総督府を置いていました。
そして信長、秀吉の時代、スペインによってまだ征服されていなかったのは、東亜では、明国と日本だけとなっていたのです。

그 스페인은 동아 지역에서는 루손(지금의 필리핀), 동 아시아 지역 전체의 전략 통합 홍그인 총독부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노부나가, 히데요시의 시대, 스페인에 의해 아직 정복되지 못 했던 것은 동아에서는 명나라와 일본만 남아 있었습니다.


そのスペインが、日本に最初にやってきたのは、天文18(1549)年のことです。
日本では、宣教師のフランシスコザビエルの来日として歴史に記録されています。
그 스페인이 일본에 처음 온 것은 천문 18(1549년의 일입니다.
일본에서는 선교사 프란시스코 자비에르 내일로서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当時のスペイン宣教師というのは、表向きの役割はキリスト教の伝道ですが、裏では立派な軍事組織を持つ、僧兵軍団です。
実際のキリスト教の伝導とは異なり、それぞれの国民に受け入れられやすそうな調子の良いことを言って改宗させ、頃合いを見計らって、軍隊を送り込み、人民の殺戮や財宝の強奪、ひいては植民地占領をしていたのです。

당시 스페인 선교사란 것은 표면상의 역할은 기독교 전도이지만, 뒤에서는 훌륭한 군사 조직을 가지고 승병 군단입니다.
실제 기독교의 전도와 달리 각각의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쉬운 듯한 상태의 좋은 소리를 하고 개종시켜 적당한 시기를 봐서, 군대를 보내 인민의 살육이나 재보의 강탈, 나아가 식민지 점령을 하고 있었습니다.

日本が内乱に明け暮れていた時代の戦国大名たちは、最初は、宣教師たちについても、ただのものめずらしさしかありません。
ザビエルは、あちこちの大名に招かれ、大名たちもキリスト教の信者になったりもして、伝道師たちを快く受け入れていました。

일본이 내란에 빠져 있던 시대의 센고쿠 다이묘들은 처음에는 선교사들에 대해서도 그냥 신기한 것밖에 없습니다.
자비에르는 여기저기 다이묘에 초청돼 다이묘들도 기독교 신자가 되기도 하고 전도사들을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ところが唯一、日本が他の国々と違っていたのは、彼らが持ち込んだ鉄砲という武器を、日本人はまたたくまにコピーし、それを量産してしまったことです。
気がつけば、日本の鉄砲所持数は、なんと、世界全体の半数を占める莫大な数になってしまいました。

그런데 유일하게 일본이 다른 나라와 달랐던 것은 그들이 가져온 총이라는 무기를, 일본인은 순식간에 복사하고 이를 양산된 것입니다.
깨달으면, 일본의 총 소지 수는 무려, 세계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는 막대한 수에 되어 버렸습니다.



宣教師たちも、さすがにこれには驚いた様子で、イエズス会のドン・ロドリゴ、フランシスコ会のフライ・ルイス・ソテロらが、スペイン国王に送った上書にも、このことについては明確な記述があります。

〜〜〜〜〜〜〜〜
スペイン国王陛下、陛下を日本の君主とすることは望ましいことですが、日本は住民が多く、城郭も堅固で、軍隊の力による侵入は困難です。
よって福音を宣伝する方策をもって、日本人が陛下に悦んで臣事するように仕向けるしかありません。
〜〜〜〜〜〜〜〜

선교사들도, 과연 여기에는 놀란 모습으로 예수회 동・로도리고, 프란체스코회 튀김 루이스· 서 테러들이 스페인 국왕에게 보낸 상서에도 이 일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술이 있습니다.

~~~~
스페인 국왕 폐하, 폐하를 일본의 군주로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일본은 주민이 많고 성곽도 견고하고, 군대의 힘에 의한 침입은 어렵습니다.
따라 복음을 선전하는 방안을 갖고 일본인이 폐하를 기쁘게 받아 드리고 신사 하도록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



住民数を言うなら、南米やインドの方がはるかに住民数が多いわけで、城塞の堅固さも、日本の平城は、アジア、ヨーロッパの城塞には敵いません。
にもかかわらず、彼らが「日本は住民が多く、城郭も堅固で、軍隊の力による侵入は困難」と書いているのは、単純に、鉄砲の数が圧倒的で、とても軍事力で日本には敵わない、ということです。
だから、「福音を宣伝する方策をもって、日本人が陛下に悦んで臣事するように仕向ける」というのです。


주민 수를 말한다면, 남미와 인도 쪽이 훨씬 주민 수가 많은 이유로 성채의 견고함도, 일본의 나라는 아시아, 유럽 요새에는 못 당해 내겠어요.
그런데도 그들이 "일본은 주민이 많고 성곽도 견고하고, 군대의 힘에 의한 침입은 곤란"이라고 써 있는 것은 단순히, 총 수가 압도적으로 너무 군사력에서 일본을 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복음을 선전하는 방안을 갖고 일본인이 폐하를 기쁘게 받아 드리고 신사하게 만들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こうしてスペインは、日本での布教活動に、まず注力していきます。

一方、あたりまえのことですが、スペインの狙いは日本だけではありません。
お隣の明国も、スペインは植民地化を狙っています。
こちらは、鉄砲をコピーするような能力はなく、単に人海戦術、つまり人の数が多いだけです。
ただ、大陸は広く、その調略には手間がかかる。

ちなみに当時のスペインにとって、朝鮮半島は対象外です。
朝鮮半島は、明国の支配下だったわけですから、明が落ちれば朝鮮半島は、自動的に手に入る。
それだけのことです。

이렇게 스페인은 일본에서 포교 활동에 우선 주력합니다.

한편 당연한 것이지만, 스페인의 목적은 일본뿐만이 아닙니다.
옆에 명나라도, 스페인은 식민지화를 노리고 있습니다.
이쪽은 총을 복사하는 능력은 없이 단지 인해전술, 즉 사람의 수가 많을 뿐입니다.
다만 대륙은 넓어서 조략에는 번거롭다.

참고로 당시의 스페인에 한반도는 대상 외입니다.
조선 반도는 명나라의 지배 아래였던 것이니까, 명나라가 떨어지면 조선 반도는 자동적으로 손에 들어간다.
그만큼의 일입니다.


さてそのスペインですが、明国を攻略するにあたり、当時、世界最大の武力(火力)を持っていた日本に、一緒に明国を奪わないか、と持ちかけています。

ところが日本には、まるでそんなことに関心がない。
そもそも信長、秀吉と続く戦国の戦いは、日本国内の戦国の世をいかに終わらせ、国内に治安を回復するかにあったのです。

그런데 그 스페인이지만, 명나라를 공략할 때, 당시 세계 최대의 무력(화력)을 가지고 있던 일본에 함께 명나라를 빼앗지 않을까 해습니다.

근데 일본에서는, 마치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원래 노부나가, 히데요시로 이어지는 전국 싸움은 일본 내 전국의 세상을 어떻게 끝내고 국내 치안을 회복하느냐에 있었습니다.


信長は、比叡山を攻めたり、本願寺を攻めたりと、まるで第六天の魔王であるかのように描かれることが多いですが、実際には、次々と行なった信長の戦いの目的は、一日も早く戦乱の世を終わらせることに尽きた。
だからこそ、多くの人々が信長に従ったということが、最近になって発見された各種文書から、次第にあきらかにされてきています。

このことは秀吉も同様で、なぜ秀吉が人気があったかといえば、百姓の代表だから百姓の気持ちがわかる。
戦乱によって農地が荒されることを多くの民衆が嫌っていることを、ちゃんとわかってくれている人物だったからこそ、秀吉人気はあったのです。

노부나가는 히에이 산을 공격하거나 혼간지를 공격하거나, 마치 제륙천의 마왕인 것처럼 그려지는 일이 많은데, 실제로는 차례차례로 한 노부나가의 싸움의 목적은 하루 빨리 전란의 세상을 끝내기로 떨어졌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노부나가에 따랐다는 사실이 최근에 발견된 각종 문서에서 점차 분명해 와 있습니다.

이 것은 히데요시도 마찬가지로, 왜 히데요시가 인기가 있었느냐 하면 백성의 대표니까 백성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전란에 의해 농지가 휩쓰는 것을 많은 민중이 싫어하는 것을 잘 알아 주고 있는 인물이었던 때문에 히데요시 인기가 있었습니다.


要するに、当時の日本の施政者にとっては、日本国内統一と治安の回復こそが政治使命だったわけで、わざわざ明まで出かけて行く理由はひとつもない。

ところが、日本が秀吉によって統一され、なんとかその治安と太平を回復すると、今度は、対明国への対策が大きな課題となってきます。

どういうことかというと、スペインが日本に攻めて来たとしても、彼らは海を渡ってやってきます。
スペインとの直接対決ならば、海を渡ってやって来るスペイン人は、数のうえからいえば少数であり、火力、武力ともに日本の方が圧倒的に上位です。
従って、日本がスペインに攻略される心配はまるでない。

요컨대 당시 일본의 시정자에게는 일본 국내 통일과 치안 회복이 정치 임무였던 것으로, 일부러 명나라까지 나가는 이유는 하나도 없다.

그런데 일본이 히데요시에 의해 통일되어 그럭저럭 그 치안과 태평을 회복하자 대 명나라에 대한 대책이 큰 과제가 됩니다.

무슨 일인가 하면, 스페인이 일본에 공격해 왔지만 그들은 바다를 건너서 다가옵니다.
스페인과의 직접 대결이라면, 바다를 건너고 오는 스페인인은 수 위에서 말하자면 아주 소수이고 화력, 무력 함께 일본이 압도적으로 상위입니다.
따라서 일본이 스페인에 공략될 걱정은 전혀 없다.


ところが、スペインが明国を植民地として支配下におさめると、様子が違ってきます。
いかに数多くの鉄砲を日本が持っているとはいえ、スペインに支配された明国兵が、数の力にモノを言わせて日本に攻め込んできたら、これはたいへんなことになる。
元寇の再来です。
これは驚異です。

그런데, 스페인이 명나라를 식민지 지배하에 두면 모습이 달라집니다.
얼마나 수많은 총을 일본이 갖고 있다고 하나, 스페인의 지배를 받은 명나라 병사가 수의 힘에 물건을 말하고 일본에 몰아붙여 오면, 이것은 큰일 난다.
원구의 재래입니다.
이는 경입니다.


となれば、その驚異を取り除くには、スペインよりも先に明国を日本の支配下に置くしかない。
火力、武力に優れた日本には、それは十分可能なことだし、万一明国まで攻め込むことができなかったとしても、地政学的に朝鮮半島を日本と明の緩衝地帯としておくことで、日本への侵入、侵略を防ぐことができる。

このことは、ロシアの南下政策を防ぐために、明治日本が行なった政策と、当時の状況が酷似していることをあらわします。

있다면 그 위험을 제거에는 스페인보다 먼저 명나라를 일본의 지배하에 두는 수밖에 없다.
화력 무력에 뛰어난 일본에는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것이고, 만일 명나라까지 파고들지 못했다고 해도, 지정학적으로 한반도를 일본과 명나라의 완충 지대로 둠으로써 일본에의 침입, 침략을 막을 수 있다.

이는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막기 위해 메이지 일본의 정책과 당시의 상황이 비슷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さらにいえば、秀吉は、すでにこの時点でスペインの誇る無敵艦隊が、英国との戦争に破れスペイン自体が海軍力を大幅に低下させていることを知っています。
ですから、スペインが海軍力で日本と戦端を交える可能性は、まずありません。

더 하면 히데요시는 이미 이 시점에서 스페인이 자랑하는 무적 함대가 영국과의 전쟁에 패한 스페인 자체가 해군력을 크게 저하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페인이 해군력에서 일본과 전단을 포함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一方、長く続く戦乱の世を終わらせようとする秀吉は、全国で刀狩りを実施し、日本の庶民から武力を奪っています。
これはつまり、日本に太平の世を築くために必要なことであったわけですが、同時にこのことは、もし日本が他国侵逼の難にあったときは、日本の戦力を大きく削ぐことにもつながってしまうのです。

ならば、武力がまだ豊富なうちに、余剰戦力を用いて、朝鮮出兵を行ない、朝鮮から明国までを日本の支配下に置いてしまうこと。
これは我が国の安全保障上、必要なこと、であったわけです。

한편, 길게 이어진 전란의 세상을 끝내려는 히데요시는 전국에서 또한 도검 회수를 실시를 실시해, 일본의 서민에서 무력을 빼앗고 있습니다.
즉, 일본에 태평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던 것인데, 동시에 이 것은 만약 일본이 타국 침핍의 결점에 있을 때는 일본의 전력을 크게 삭감에도 연결되어 버립니다.

그렇다면 무력이 아직 풍부할 때, 잉여 전력을 이용해 조선 출병을 하고 조선으로부터 명나라까지 일본의 지배하에 두는 것.
이것은 우리 나라의 안전 보장상 필요한 것인 셈입니다.


こうして秀吉は、文禄の役(1592〜1593)、慶長の役(1597〜1598)と二度にわたる朝鮮出兵を行なうのですが、同時に秀吉は、スペインとも果敢な政治的交渉を行なっています。

何をしたかというと、スペインに対して、日本に臣下としての礼をとれ!と申し出たのです。

最初にこれを行なったのが、文禄の役に先立つ1年前、天正18(1591)年9月のことです。
秀吉はスペインの東亜地域の拠点であるルソン(フィリピン)総督府に、原田孫七郎を派遣し、「スペインのルソン総督府は、日本に入貢せよ」との国書を手渡します。

世界を制する大帝国のスペインに対し、真正面から堂々と「頭を下げて臣下の礼をとって入貢せよ」などとやったのは、おそらく、世界広しといえども、日本くらいなものです。
まさに、気宇壮大というべきです。

이렇게 히데요시는 임진왜란(1592~1593), 게이초의 역(1597~1598)와 두 차례 조선 출병을 하지만 동시에 히데요시는 스페인과도 과감한 정치적 협상을 벌이고 있습니다.

무엇을 했는가 하면, 스페인에 대해 일본에 신하로서의 예를 갖추다!라고 신청했습니다.

처음에 이것을 한 것이 임진왜란에 앞서 1년 전, 덴쇼 18(1591년 9월의 일입니다.
히데요시는 스페인의 동아 지역의 거점인 루손(필리핀)총독부에 하라다 마고시치로 파견,"스페인의 루손 총독부는 일본에 입공 해"의 국서를 전달합니다.



세계를 지배하는 대제국의 스페인에 대한 정면에서 당당히"머리를 숙이고 신하의 예를 취해 입공 해"등이라고 한 것은 아마 세계가 넓다 해도 일본 정도인 것입니다.
바로 기우 장대하다고 해야 합니다.




対するスペイン総督府にしてみると、これはきわめて腹立たしいことだけれど、すでに無敵艦隊が消滅し、海軍力を大幅に低下させている現状にあっては、日本に対して報復的処置をとれるだけの力はありません。
悔しいけれど、放置するしかない。

すると秀吉は、その翌年に、朝鮮出兵を開始するのです。

驚いたのはルソンのスペイン総督府です。
日本が、朝鮮、明国を征すれば、その国力たるや、東亜最大の政治的、軍事的圧力となることは目に見えています。

대한 스페인 총독부로 해 보면, 이것은 지극히 괘씸한 것이지만, 이미 무적 함대가 소멸하고 해군력을 크게 저하시키는 상황에 있어서는 일본에 대해 보복성 조치를 취할 수 있는 힘은 없습니다.
분하지만, 방치할 수밖에 없다.

하려고 히데요시는 그 다음해에 조선 출병을 개시하는 것입니다.

놀란 것은 루손의 스페인 총독부입니다.
일본이 조선, 명나라를 정벌하다면 그 국력이야말로, 동아 최대의 정치적, 군사적 압력이 되는 것이 뻔합니다.



しかも、海を渡った朝鮮出兵ということは、いつ、ルソン島のスペイン総督府に日本が攻めて来てもおかしくない。
慌てたスペイン総督府は、当時ルソンに住んでいた日本人たちを、マニラ市内のディオラ地区に、集団で強制移住させています。
これがマニラの日本人町の始まりです。

게다가 바다를 넘어간 조선 출병이라는 것은 언제, 루손 섬의 스페인 총독부에 일본이 공격해 와도 이상하지 않다.
당황한 스페인 총독부는 당시 루손에 살던 일본인들을 마닐라 시내의 디오라 지구에 집단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이 마닐라의 일본인 거리의 시작입니다.


さらにスペイン総督府は、同年7月には、ドミニコ会士の宣教師、フアン・コポスを日本に派遣し、秀吉に友好関係を樹立したいとする書信を届けています。
このとき、膨大な贈物も持参している。
いかにスペインが日本をおそれていたか、ということです。

けれど秀吉は、そんな贈り物くらいで騙されません。
重ねてスペインの日本に対する入貢の催促の書簡を手渡します。
その内容がすさまじいです。
スペイン国王は、日本と友好関係を打ち立て、マニラにあるスペイン総督府は、日本に臣下としての礼をとれ、というのです。
そして、それがお嫌なら、日本はマニラに攻めこむぞ、このことをスペイン国王にちゃんと伝えろ、というのです。

게다가 스페인 총독부는 동년 7월에는, 도미니코 수도회사 선교사 후안 고 포스를 일본에 파견해 히데요시에 우호 관계를 수립하려는 서신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때, 방대한 선물도 지참하고 있다.
어떻게 스페인이 일본을 두려워하고 있었는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그런 선물 정도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거듭 스페인의 일본에 대한 입공의 독촉의 편지를 건넵니다.
그 내용이 대단하다입니다.
스페인 국왕은 일본과 우호 관계를 세워 마닐라에 있는 스페인 총독부는 일본에 신하로서의 예를 잡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싫어한다면 일본은 마닐라에 쳐들어가는 거야, 이 일을 스페인 국왕에게 제대로 전달 하는 것입니다.


この秀吉の書簡を受け取ったコポスは、帰路、遭難します。
本当に海難事故で遭難したのか、返書の内容が100%スペイン国王の激怒を買うことがわかって、故意に遭難したことにしたのかは、いまとなっては不明です。
けれどおそらくこれは後者ではないかと私は見ています。

さて、コポスの遭難のおかげで、秀吉の書簡は、スペイン総督府には届かなかったわけですが、当然のことながら、スペイン総督府からの返書もありません。

けれど、返書がないからと、放置するほど甘い秀吉ではありません。
秀吉は、10月には、原田喜右衛門をマニラに派遣し、確実に書簡を総督府に届けさせたのです。


이 히데요시의 서한을 접수한 고 포스는 귀로, 조난합니다.
정말 해난 사고에서 조난했는지, 답장의 내용이 100%스페인 국왕의 격분을 살 알고 고의로 조난한 것에 했는지는 이제는 불명입니다.
하지만 아마 이것은 후자는 아닌지 저는 보고 있습니다.

자, 고 포스의 조난의 덕분에, 히데요시의 서한은 스페인 총독부에는 받지 못한 것인데, 당연히 스페인 총독부가 답장도 없습니다.

그러나 답장이 없다고 방치할 만큼 달콤한 히데요시가 아닙니다.
히데요시는 10월에는, 하라다 키우 에몽을 마닐라에 파견해 확실히 서한을 총독부에 전해 주었습니다.


文禄2(1592)年4月、原田喜右衛門は、マニラに到着しました。
そしてこのとき、たまたま在マニラの支那人約2000人(明国から派遣された正規兵だったといわれています)が一斉蜂起して、スペインの総督府を襲ったのです。

スペイン兵は、応戦しますが、多勢に無勢です。
これを見た原田喜右衛門は、手勢を率いてスペイン側に加勢し、またたく間に支那兵を殲滅してしまいます。

日本強し。
原田喜右衛門らの圧倒的な強さを目の当たりにしたスペインのゴメス総督は、日本の強さに恐怖します。

けれど、ゴメスは、スペイン大帝国から派遣されている総督です。
世界を制する大帝国王に、日本に臣下としての礼をとらせるなど、とてもじゃないが報告できることではありません。

분로쿠 2(1592년 4월, 하라다 키우 에몽은 마닐라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이 때, 우연히 재 마닐라의 중국인 약 2000명(명나라에서 파견된 단골들이었다고 합니다)이 일제 봉기해 스페인의 총독부를 덮친 것입니다.

스페인군은 응전하지만, 중과 부적입니다.
이것을 본하라다 키우 에몽은 부하를 이끌고 스페인 측에 가세하면서 삽시간에 중국 군사를 섬멸해 버립니다.

일본 강함.
하라다 키우 에몽들의 압도적인 강함을 목격한 스페인의 고메스 총독은 일본의 강점에 공포합니다.

그러나 고메스는 스페인 대제국으로 파견된 총독입니다.
세계 정복을 대제 국왕에게 일본에 신하로서의 예를 취하는 등 엄청은 아니지만 보고 할 수는 없습니다.


ゴメスは、なんとか時間をかせごうとします。
そして、翌文禄3(1594)年4月に、新たにフランシスコ会士のペドロ・バウチスタ・ベラスケスを特使に任命し、日本派遣します。
要するに、特使の派遣を繰り返す中で、少しでも時間稼ぎをしようしたのです。

名護屋でペドロと会見した秀吉の前で、ペドロは、スペイン王国が、いまや世界を制する大帝国であること、日本とはあくまでも「対等な」関係を築きたいと申し述べます。
普通に考えれば、世界を制する大帝国のスペイン国王が、日本という東洋の小国と「対等な関係」というだけでも、ものすごい譲歩です。

けれど、秀吉は聞く耳を持たない。
ペドロに対し、重ねてスペイン国王の日本への服従と入貢を要請します。

고메스는 어떻게든 시간을 따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분로쿠 3(1594년 4월에 새로 프란체스코회사의 페드로·바우치 스타·벨라스케스를 특사로 임명하고 일본 파견하겠습니다.
요컨대 특사 파견을 반복에서 조금이라도 시간 벌기를 사용한 것입니다.

나고야에서 페드로와 만난 히데요시 앞에서 페드로는 스페인 왕국이 이제 세계 정복을 큰 제국임, 일본과는 어디까지나 "대등한 "관계를 꾸리고 싶다고 말씀 드립니다.
보통으로 생각하면, 세계를 지배하는 대제국의 스페인 국왕이 일본이라는 동양의 소국과 "대등한 관계"것 만으로도 엄청난 양보입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귀을 가지지 않는다.
페드로에 대해 거듭 스페인 국왕의 일본에 복종하고 입공을 요청합니다.

なぜ秀吉は、ここまでスペインに対して強硬だったのでしょうか。
理由があります。

第一に、国際関係において、対等な関係というものは存在しないのです。
この時代における国際関係というのは、やるかやられるか、つまり上下の関係しかありません。
たとえ日本が小国であったとしても、大帝国のスペインに日本を攻めさせないためには、日本が圧倒的な強国であることを、思い知らせるしかなかったのです。

왜 히데요시는 여기까지 스페인에 대해 강경했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국제 관계에서 대등한 관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시대의 국제 관계는, 하느냐 할지, 즉 상하 관계밖에 없습니다.
비록 일본이 소국이었다 하더라도, 대제국의 스페인에 일본을 몰게 하지 않으려면 일본이 압도적인 강국임을 환기시키는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第二に、もし、秀吉が中途半端に「対等な関係」の構築を図ろうとするならば、スペインは当然のごとく平和特使と称して宣教師を日本に派遣します。
そして宣教師たちは、日本の内部から切り崩し工作(まさにいま支那や韓国によって行なわれている日本解体工作と同じ)を行なう。
現に、世界のあらゆる国家が、その方法でスペインの植民地にされていたのです。

ですから、日本がスペインの驚異から逃れる道は、ただひとつ。
あくまでスペインに対して、強硬な姿勢を崩さないこと。
これしかなかったのです。


둘째, 만약 히데요시가 어설프게"대등한 관계"의 구축을 도모하려면, 스페인은 단연코 평화 특사로 칭하여 선교사를 일본에 파견하겠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일본 내부에서 무너뜨리다. 공작(바로 지금 중국이나 한국에 의해서 이루어져 있는 일본 해체 공작과 같은)을 한다.
실제로, 세계의 모든 국가가 그 방법으로 스페인의 식민지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이 스페인의 경이에서 벗어나는 길은 단 한가지.
어디까지나 스페인에 대해 강경 자세를 바꾸지 않는 것.
이것밖에 없었습니다.


第三に、秀吉が目指したのは、あくまでも「戦のない世の中」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
並みいる敵は、圧倒的な武力で制圧する。
その上で、武力そのものも奪ってしまう。
つまり「刀狩り」を行い、そうすることで秀吉は、「戦のない世の中」を実現しようとしています。

けれど、同時に刀狩りをして日本人から武力を奪うことは、一方において日本人を弱化させることを意味します。
ならば、日本国内に武器を持たない平和な国を実現するためには、国際的な武力衝突の危険を日本から出来る限り遠ざける必要がある

셋째, 히데요시가 목표로 한 것은 어디까지나 "전 없는 세상"이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적은 압도적인 무력으로 제압하다.
그 위에서 무력 자체도 빼앗아 버린다.
즉"또한 도검 회수를 실시"를 하고 그럼으로써 히데요시는,"전 없는 세상"을 실현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또한 도검 회수를 실시해서 일본인에게 무력을 뺏는 것은 한편에서 일본인을 약화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일본 내에 무기를 가지지 않는 평화로운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무력 충돌의 위험을 일본에서 최대한 멀리할 필요가 있다.

名護屋におけるペドロ・バウチスタ・ベラスケスとの会見も、平行線となったスペインのゴメス提督は、日本との軟弱な外交姿勢を咎められ、スペイン国王によって更迭されてしまいます。

そして後任の提督としてやってきたのが、ルイス・ダスマリニャスです。
ルイス・ダスマリニャスは、アウグステイン・ロドリゲスを使者として日本に派遣し、回答の引き延ばしを図るとともに、日本の戦力を冷静に分析します。

나고야의 페드로·바우치 스타·벨라스케스와의 회견도 일치된 스페인의 고메스 제독은 일본의 연약한 외교 자세를 나무라며, 스페인 국왕에 의해 경질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후임 제독으로 해온 것이 루이스·다스 마리냐스입니다.
루이스 다스 마리냐스은 아우그스테인 로드리게스를 사자로 일본에 파견해 응답의 확대를 도모하는 동시에 일본의 전력을 냉정히 분석합니다.

そして、ゴメスの分析通り、もし日本とスペインが、東亜で正面から衝突すれば、むしろスペイン側に勝ち目がないことを知ります。
そこでルイスは、秀吉との直接交渉は避け、ひとり、またひとりと、宣教師を日本に派遣するという戦略をとる。
つまり、時間を稼ぎ、その間に、当初の戦略通り、日本に宣教をしていこうとしたのです。

文禄3(1594)年には、ルイス提督の意向を受けて、ヘロニモ・デ・ヘスス以下のフランシスコ会修道士4人が、日本に派遣され、日本での布教を再開しました。
秀吉も、これは認めています。

그리고, 고메스의 분석대로, 만약 일본과 스페인이 동아에서 정면으로 충돌한다면 오히려 스페인 측에 승산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곳에서 루이스는, 히데요시와의 직접 협상은 피하고 혼자 또 한 사람으로 선교사를 일본에 파견한다는 전략을 취한다.
즉, 시간을 벌고, 그 사이에 당초 전략대로 일본에 선교를 하려 한 것입니다.

분로쿠 3(1594년에는 루이스 제독의 의향을 받아들여 헤로니모·데・헤스스 이하의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4명이 일본에 파견돼 일본에서 포교를 재개했습니다.
히데요시도 이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ところが、慶長元(1596)年のことです。
スペインの貨物船、サン・フェリーペ号が、荷物を満載したまま遭難し、土佐の浦戸に漂着したのです。

救助した船員たちを、秀吉の五奉行の一人である増田長盛が取り調べにあたりました。
そこで驚くべき事実があきらかになります。
なんとサン・フェリーペ号の水先案内人が、増田長盛に世界地図を見せ、
「スペイン国王は、まず宣教師を派遣し、キリシタンが増えると、次は軍隊を送り、信者に内応させて、その伝道地の国土を征服するから、世界中にわたって領土を占領できたのだ」と証言したのです。

그런데 게이쵸 전(1596년의 일입니다.
스페인의 화물선, 상・후에리ー페호가 짐을 만재한 채 조난을 당하여 토사의 우라토에 도달한 것입니다.

구조한 선원들을 히데요시의 다섯 부교의 하나인 마스다 장성가 조사에 맞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놀라운 사실이 밝혀져습니다.
무려 상・후에리ー페호 수로 안내인이, 마스다 장성에 세계 지도를 보여
"스페인 국왕은 먼저 선교사를 파견해 천주교가 늘어나면 다음은 군대를 보내 신자에게 내응하고, 그 전도지의 국토를 정복하니까 세계에 걸쳐 영토를 점령한 것이다"라고 증언한 것입니다.



報告を受けた秀吉は、即座にキリシタン26人を逮捕しました。
そして彼らを長崎に送りました。
キリシタンを続けたいなら、外国へ出て行け。
日本に残りたいなら、改宗しろ、というわけです。

迷う26名に対し、長崎のイエズス会は、この26名の死罪を長崎奉行に申し出ます。
磷付にして、晒してほしいと、申し入れたのです。

보고를 받은 히데요시는 당장에 천주교 26명을 체포했어요.
그리고 그들을 나가사키에 보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계속하고 싶다면 외국으로 빠져나간다.
일본에 남고 싶다면, 개종한다는 것입니다.

망설이는 26명에 대해 나가사키의 예수회는 이 26명의 사형을 나가사키 부교에 신고합니다.
磷부에 효수 달라고 신청한 것입니다.


イエスズ会の腹はこうです。
26名の信者を、イエスの十字架になぞらえて見せ物にし、間違いなく天国に行くことができたと宣伝する。
こうすることで、キリスト教徒としての栄光に輝く姿を印象づけ、侵攻による団結心をたかめる。

まあ、このあたりの話は、本題からかなりそれるので、また今度詳しく書くこととして、要するに秀吉の朝鮮出兵は、スペインによる東洋の支配に対して、統一国家をやっと形成した日本が、いかに国を護るかを考えた上での決断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


예수 즈회의 배는 이렇습니다.
26명의 신자를 예수의 십자가를 본떠 구경거리로 만들다, 틀림없이 천국에 갈 수 있었다고 선전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기독교도로서의 영광에 빛나는 모습을 인상을 붙여, 침공에 의한 단결심을 높이다.

아이고, 이 쪽 얘기는 주제에서 상당히 벗어나서, 또 자세히 쓰는 것으로 요컨대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은 스페인의 동양의 지배에 대해 통일 국가를 겨우 형성한 일본이 어떻게 나라를 지키는 것을 생각한 결단이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このことは、単に日本や朝鮮の国内事情だけを見ても、まったくわかりません。
当時の世界情勢、東亜諸国の情勢をみなければ、秀吉がなぜ朝鮮出兵を決意したのか、そして多くの大名たちが、なぜその秀吉に従い、兵を出し、勇猛果敢に他国に出て戦ったのかが、理解できない。

もっというなら、日本が明治という統一国家を形成してから朝鮮半島を領有するまでの動きと、秀吉の朝鮮出兵当時の世界の動きは、スペインがロシアと変わっただけで、まったく同じことが歴史上、繰り返された、ということなのです。


이 것은 단순히 일본이나 조선의 국내 사정만 봐도 전혀 모르겠어요.
당시 세계 정세, 동아 제국의 정세를 보지 않는다면 히데요시가 왜 조선 출병을 결심했는지, 그리고 많은 다이묘들이 왜 그 히데요시에 따라 군사를 내고 용맹 과감하게 타국에 나가 싸웠는지 모르겠다.

더 한다면 일본이 메이지(명치)이라는 통일 국가를 형성하고 조선 반도를 영유할 때까지 움직임과,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 당시 세계의 움직임은 스페인이 러시아와 바뀌었을 뿐 똑같은 것이 역사에 반복되었다는 것입니다.



もし、秀吉が朝鮮出兵を行なわず、日本の国力をスペインに見せつけなければ、どうなっていたか。
スペインは、当然のことながら、明国を植民地としての支配下に置いたことでしょうし、当然のことながら、朝鮮半島も、スペインの支配地となったことでしょう。

そしてスペインの支配地となることが、いかなる意味を持つのか。
そのことは、南米の様子が、見事にまで現代に伝えています。

いま、南米に南米人の純粋種は存在しません。
白人種との混血種だけです。

만약 히데요시가 조선 출병을 행하지 않고, 일본의 국력을 스페인에 보여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되고 있었니?
스페인은 당연히, 명나라를 식민지의 지배하에 둔 거고, 당연히 한반도도 스페인의 지배지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스페인의 지배지가 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 것은 남미의 모습이 완전히까지 현대에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 남미에 남미인의 순수종은 없습니다.
백색 인종과 혼혈 종 뿐입니다.


アルゼンチンやウルグアイでは、先住民族がほぼ完ぺきに抹殺されてしまいました。
このエリアの女性たちは、手当たりしだい強姦されたあげく、子を産む前に殺戮されたのです。
ですから、いま住んでいるのは、ほぼ白人種です。

ブラジル、エクアドル、ペルー、ボリビアは、全員が、先住民族との混血です。
純血腫はいません。
強姦され、放置され、子を産み、いまに至っています。

日本も支那も朝鮮も、それぞれに純血種を保ちながら、いまに至っています。
なぜそうなったかといえば、秀吉たちが、スペインと真っ向から戦う姿勢を明確に見せたためです。

ちなみに、慶長の役は、秀吉の死去にともなって、中止となり、日本は朝鮮半島から撤収しました。
だから、これは秀吉の気まぐれでおきた戦争だというのは、大きな間違いです。
半島に出兵した大名たちは、それぞれに真剣に戦ったのです。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에서는 토착 민족이 거의 완벽하게 말살되어 버렸습니다.
이 지역 여성들은 닥치는 대로 강간을 당한 끝에 아이를 낳기 전에 살육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살고 있는 것은 거의 백 인종입니다.

브라질,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는 모두가 원주민과의 혼혈입니다.
순혈 종양은 없습니다.
강간당하고 방치되고 애를 낳고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일본도 중국도 조선도 각각 순종을 유지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됐느냐 하면 히데요시들이 스페인과 정면으로 싸울 태세를 분명히 보였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게이초의 역은 히데요시의 사망에 따라 중단되면서 일본은 한반도에서 철수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히데요시의 장난으로 일어난 전쟁이라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반도에 출병한 다이묘들은 각각에 진지하게 싸웠습니다.



ではなぜ日本が撤収したか。
こたえは簡単です。

スペイン自体が、英国やオランダに押されて、国力を低下させ、もはや東亜に構っていられなくなったのです。

わたしたちは、いま、スペインという世界最強の大帝国に対し、一歩も退かず、むしろ臣従せよと迫った秀吉の壮大な気宇と誇りを、いまこそ見習うべきときにきてい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그럼 왜 일본이 철수한?
대답은 간단합니다.

스페인 자체가 영국과 네덜란드에 밀려 국력을 저하시켜 이미 동아에 마음 쓸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스페인 등 세계 최강의 대제국에 대한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신종하라고 윽박지른 히데요시의 장대한 기개와 긍지를, 지금이야말로 본받을 때 오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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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이 글이 일본침략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자의적 해석일지는

저는 모르겠습니다. 역사적 해석에 대한 견해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능력이 없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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