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명량 대첩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입니다.
게시물ID : history_1746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17/9
조회수 : 1964회
댓글수 : 31개
등록시간 : 2014/07/31 10:55:54
*일전에 작성한바 있는 명량해전의 이야기를 하며 곁가지로 이런 저런 문제들을 짚어보려 하는 수준의 짧은 글입니다, 편의상 경어는 생략합니다,

우선 명량해전의 배경을 보자, 직산전투이후 남쪽의 곡창 지대를 상실하였으며 한성 지척에 몰려든 일본군으로 인하여 조선에서는 도성이 텅 비었다는 기록이 나올정도로 참담하고 짙은 패전의 분위기가 나라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더욱이 칠천량 해전이후 사실상 수군이 소멸된 터라 수군에 별 다른 기대도 걸지 않았고 해체하고 육군으로서 복무하라는 말이 나올정도이니 무슨말이 더 필요할까, 

더욱이 직산전투 이후 공세에 자신감을 얻은데다 조선 수군의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던 일본군은 하루라도 빠르게 10여척의 수군을 격파하고 충청도 와 경기도의 가토 기요마사와 구로다 나가마사에게 보급을 할 생각만을 가지고 있었지 결전을 벌일 생각을 가지지도 않았다, 아니 가질수가 없었다.

고작해야 10여척 남짓 그 것으로 무엇을 할수 있을까? 비단 이 생각은 일본군의 그 것은 아니고 조선군도 마찬가지로 소문에 따르자면 1천여척에 달하는 일본 수군의 대 함대에 비하자면 중과부적도 이만한게 없었고 이러한 생각은 한산도가 무너진 이래 각종 병가와 사유를 들어 부임을 거절하는 수 많은 장수들에게서 엿볼수 있다, 그럼에도 이순신은 모친상에도 불구하고 거부하지 않고 일어서서 맞섰다, 자세한 생각이야 알수 없지만 할수 있다 내지는 할수 밖에 없다 라는 생각을 가진것같다, 물론 그러한 생각은 이순신 혼자의 생각인데 자세한건 아래에 적겠다, 

아무튼 간략하게 명량해전에 있어 양 측의 전력을 보자면 단적으로 조선 수군은 시대를 초월했다 볼수가 있다, 

뭐 격차는 조선말에 가서는 유명무실해지지만 최소한 이 시대에는 어떠한 국가도 생각하기 힘든 놀라운 성과를 나타내고 있었다, 나라에 의하여 통일된 규격을 가진 전선, 무구와 보급체계 등은 당시 그 어떤 나라도 시도하지 못한 매우 근대적인 해군으로서 솔직하게 이 걸 가지고 진다는 것은 원균의 사례에서 볼수 있듯이 지휘관의 문제일따름이지 다른 문제가 아니다.

가령 주력 전선인 판옥선을 보자, 판옥선은 왜구를 상대로한 전투들에서 때로는 갈려나가고 때로는 이겨가며 얻은 경험들의 정수가 모인 결전병기다,항해 능력이나 악천후속 복원력 등의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철저하게 연안 전투만을 염두해둔 까닭에 큰 문제는 아니고 3층에 달하는 높이는 흘수선이 낮은 세키부네로 하여금 공성전을 방불케 하는 불리한 상황을 강요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 이전에 20여문의 화포와 각종 화기들은 적들이 백병전을 강요하는 상황을 방지하기도 했고 말이다,

물론 사거리나 장전 속도 등을 생각하면 화력전이 능사는 아니지만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특히나 체급이 적은 세키부네에게 판옥선은 견적이 쉬이 나오지 않는 상대이기도 하다.

명량 해전에 참전한 함선은 이 판옥선 13척 외에도 백여척이 넘기는 하다 ,다만 그 대다수가 어선으로 실제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의문이다, 피난민을 의병으로 전용한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닌데 확실하게 이렇다 하는 것은 알기 어렵다, 실제 전력으로 효용성도 의문일 따름이고 그저 동원되었구나 하는게 전부이다.

일본 수군의 상황을 보자면 수군과 전혀 무관한 이 들도 함대를 이끌고 섞여 있는데 그네들이 이상한게 아니다, 시대로 볼때 이 쪽이 정상이다 (....) 특히나 중앙 집권화와 거리가 먼 세월을 근 1백여년간 보낸 일본에서는 지방 다이묘들의 군권이 주가 되었고, 당연히 각자 비 규격화된 장비와 함선을 보유한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주력 전선인 세키부네의 규격이 다양한것은 뭔가 이상한 것도 아니고 뒤에 판옥선에 특화된 것으로 보이는 대형화 된 세키부네도 나오지만 그 것이 일본 전체의 움직임이라 생각하는 것도 무리한 일이다, 단적으로 세키부네는 빠른 기동성과 근 접전을 위하여 장갑이 희생된 상황으로 대나무로 갑판이 막혀 있으면 다행이지 대개는 천막이 전부 였고 이는 판옥선이 절대적인 강점을 가지게 만들었다,

생각해보자 전투원이 모두 높은 갑판 안에서 1차적으로 안전하게 보호를 받으며 공격을 하는 상대와 1~2층 낮은 갑판 밖에서 몸을 드러낸채 상대의 배에 매달려 타고 올라가며 싸우는 상대가 동일한 상황이라 볼수 있을까?

이러한 일본 수군의 병기는 당연히 함선의 체급상 뭔가 실을수 있다기 보다는 온전하게 개인이 소지한 병기들인데 여러가지가 있다, 물론 주류는 동북 아시아에서 유달리 긴 길이를 자랑하는 장창과 같은 냉병기였으나 아무래도 우리에게 유명한 것은 조총일 것이다,

물론 선조가 패전원인으로 일본은 조총을 쓰고 우리는 화기를 잘 못쓴 것으로 꼽을 정도로 조총은 조선에 있어 임진왜란을 통해 그 효용성을 능히 짐작하게 만들었으나, 딱히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임진왜란 3년전에 황윤길이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올적에 대마도주로 부터 진상품으로 2정의 조총을 얻은바 있고 장점을 명확하게 파악했지만 단점 또한 뚜렷하였고 또 활과 비교했을때 이렇다 할 장점을 가지지 못하였고 이미 화포를 다량 보유하고 있었기에 중용하지 않았을뿐인데, 이게 전란이 벌어지고 보니 전혀 달랐던 것이다.

200m는 커녕 50m도 장담하기 힘들었고, 분당 1발 남짓한 사격속도를 가졌기에 낙제점을 받았던 조총은 산탄을 사용함으로써 명중률을 높일수 있었던 조선의 개인 화기들보다는 상대적으로 명중률이 좋았고, 어쨌거나 유효 사거리내에서 맞는다면 갑옷을 입던 뭐하던 활보다 강력하고 확실한 타격력을 보장했고, 무엇보다 저렴한데다 사용하기 쉬웠던 것이다.

다만 그 단점 역시 극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명확하였기에 활이 조선 말까지 병행된 것인데 아무튼 이순신도 조총의 생산을 고려할만큼 조총은 높게 평가를 받았는데 이순신이 훈련주부 정사준에게 명령하게 만든 것은 조총이라기 보다는 조총과 승자총통의 중간 정도의 형태로 이후의 기록이 없는 것을 봐서는 그렇게 큰 효용은 없는 것 같다, 사실 조선은 이후로도 조총을 만드려 하다 하다 안되서 일본에서 수입을 해올 정도였으니 지방 관아의 낮은 공업력으로는 어렵기도 했겠지만 말이다.

사족을 좀 더 적어보자면 이순신이 조총을 생각한 이유는 무구 목록에서 찾아볼수 있지 않나 싶다. 정유재란 당시 기준으로 새로 건조되는 판옥선에 들어가는 무구는 다음과 같다. 흑각궁 10정 상각궁 1정 지자궁 7정 죽궁 1정 장창 12자루 환도 3자루 일본도 1자루 참부 1자루 방울 1개 대쟁 1개 통아 8개 현자총통 4자루 승자총통 7자루 현자총통용 화살 2개 대철환 12개 중철환 40개 소철환 3,000개 소소철환 500개

보다시피 개인 화기인 활이 화포보다 많았으며, 개인 화기인 승자총통도 적지 않게 탑재되었음을 그러니까 개인 화력의 중요성을 높게 평가했음을 볼수 있는데, 이러한 보급품들은 다분히 개인 화력의 증대를 노린게 아닐까 싶다,

중요한건 이게 아니고 아무튼 조총이 임진왜란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보면 그 것은 물론 아니다 원정군 전체를 통틀어 10~30% 남짓 보유했을뿐 대다수는 활이나 창과 같은 냉병기들이다, 다만 전쟁 초기 강한 인상을 남겼을뿐이지 행주 대첩이나 직산 전투등을 보면 알수 있지만 무언가 조선에 컬쳐 쇼크를 안겨준 물건은 아니다.

이는 아이러니 하지만 일본군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야전이 중시되었고, 공성전이라고 해야 오오즈츠와 같은 커다란 조총 그러니까 대형 화기로 해결할수 있는 환경이었기에 대포가 천시 아닌 천시를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포를 모르거나 컬쳐쇼크를 가졌겠는가? 그 것은 물론 아닐것이다.

마찬가지로 조선 역시 승자총통이나 기타 화기들이 산재해 있는 상황이었고 조총은 그러한 화기가 한발자국 앞서 나간것 뿐이다, 물론 활과의 비교 문제라던가 기존의 화기등과의 문제에 겹쳐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말이다.

자 이제 그럼 명량 해전 이야기를 좀 해보자,

앞서 언급했지만 조선의 전력은 사실상 13척이 전부이다, 기타 군선과 어선을 합쳐 1백여척이 더 있었다지만 큰 기대를 가지는 것도 무리이고 실상 참전하지도 않았으니 넘기자

일본의 전력은 난중일기 등의 기록을 통해 133척이라 할수 있으나 실상 5백여척이나 몰려온다는 당시 피난민들의 소문이나 기타 사료등의 기록을 따져볼때 정확한 숫자는 알수 없다, 물론 수송함대를 포함한 것이기는 한데 판옥선에 기어오르거나 갑판에서 총과 활 등을 쏘는 거야 다 같은 것이니 넘어가자.

이 전투는 울돌목에서 벌어졌다 하는데, 기록으로 볼때 전라 우수영 앞바다, 진도 앞바다 등 여러 이견이 제시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울돌목이라는 기존의 정설을 토대로 작성해보도록 하겠다.

흔히 드라마나 소설에서 멋들어진 학익진을 토대로 왜군을 몰아냈다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거 까놓고 말해서 뻥이다,

실제는 이렇다.

1. 여러 장수들은 양측의 전력을 비교하고 도망가려 하고 있었고, 이순신 장군이 탄 배만 앞에 있었고 삼도 수군은 1마장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벌써 2마장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마장이라는게 리로서 오 리나 십 리가 채 못되는 거리를 나타낸다고 하는데, 정확한것은 잘 모르겠고 여하튼 최소 km 단위로 떨어져 있던 것을 알수 있다, 참 답이 안나오는 순간이고 이순신으로서는 입에서 쌍욕이 비트박스로 쏟아지는 순간일 것이다.

2. 이런 상황에서 그렇다고 물러나면 빼도 박도 못하는것은 자명한 터라 이순신은 위치를 사수하고 돌파를 시도하는 적들에게 화력을 쏟아 부었는데 아무리 쏴도 쏴도 적들이 줄어들지 않으니 다들 얼굴만 하얗게 질려간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렇게 붕괴되어 가는 상황속에서 이순신의 진가가 발휘되는데,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 흔들리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 맞혀라 라고 하며 부하들을 독려하여 전투 의지를 고양시키는데 주력하였다, 그 외에 다른 할수 있는 일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3. 이런 상황속에 우리 애들 어디있나 봤더니 우수사 김억추는 벌써 모습도 가물 거릴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나머지 애들도 도통 올 기색이 안보인다, 정말 답이 없는 순간으로 난중일기에 기록된 바를 옮겨오자면 배를 돌려 바로 중군 김응함의 배로 가서 먼저 목을 베어다가 내걸고 싶지만, 내 배가 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가 점점 더 멀리 물러나고 적들이 더 덤벼들 것 같아서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형편이 되었다. 라는 말에서 볼수 있듯이 상황은 최악을 내달리고 있었다.

정말 멘탈 붕괴나 정신줄을 놓지 않은게 놀랍기 그지 없다.

5. 부하들을 부르는 깃발인 초요기를 세웠더니 안위와 김응함이 머뭇머뭇 다가와 크게 질책하고 앞에 내세웠다, 즉 부하들에게 용기를 주기위해 독려하기 위해 나간게 아니라 나까지 빠지면 안되서 어쩔수 없이 나간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

6. 개미가 달라붙듯 매달려 기어오르는 적들과 고군분투 하며 선봉을 맡은 것으로 보이는 세 척을 간신히 다 잡아가다보니 송여종과 정응두가 다가와 화포를 난사하여 적을 몰살시킬수 있었는데, 이때 적장 구루지마 미치후사를 사로 잡아 토막을 쳤더니 적의 사기가 떨어져 승기를 잡게 되었다.

7. 난중일기의 말을 그대로 옮겨오자면 우리 배들이 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일제히 북을 올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쫓아 들어갔다.

즉 이길 것 같으니 드디어 몰려들어 적과 싸우기 시작했다, 막타 스틸 ㄴㄴ함 뭐라 할 문제는 아닌게 다시 말하지만 이쪽은 10여척 저 쪽은 언뜻봐도 수백척이다, 자살 특공을 하는 것도 아니고 중과부적인 상황인 것은 모두가 알았으나 다만 이순신이 싸우기를 선택했을뿐이다.

이후 적선 31척을 물리치자 적들이 물러갔는데, 물결도 몹시 험하고 바람도 거꾸로 불어서 우리 편의 형세가 외롭고도 위태로운 듯하여 당사도로 옮겨가 밤을 지샜다는 기록이 나오며 난중일기의 기록은 끝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일본 수군과 조선 수군의 싸움은 근대 수군과 중세 수군의 대결로 까지 볼수도 있을뿐 더러 질래야 질수 없는게 사실이다, 당장 세키부네와 판옥선의 체급차를 볼때 그 격차는 자명한 노릇이고 이는 명량해전의 조선군 사상자가 상선 즉 이순신의 배에서 2명이 죽은 것이 전부 라는 것에서 알수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누구나 지휘한다고 이길수 있는 노릇은 아니다, 양이 지휘하는 사자와 사자가 지휘하는 양이 같은 전력이 아닌 것 처럼 원균과 이순신의 사례에서 볼수 있듯 지휘관이 중요한 것이다.

아무튼 이 명량해전을 놓고 볼때 이순신의 역할을 매우 크다, 우리의 성웅을 해석하다니 무엄하다!! 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순신이 사람인 것은 사실이다, 까놓고 말해서 양 측의 전력차를 놓고 볼때 수군을 해체하고 육군으로 복무하라는 조정의 지시가 일견 타당성을 지니고 있고 군졸들 더 나아가 장수들 마저 전투 의지를 상실하고 무너져 내리는 것을 수습할수 없었으니 무슨 말을 더 할까?

더욱이 명량해전은 요격전으로 무모하다고 평가를 내리는게 과언은 아닌 수준이다, 양측의 격차가 자명한 노릇이라지만 그 것이 극복되지 못할 문제는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이순신이 가진 전투 의지, 용기 무엇으로 표현하던 아무튼 그 개인의 중요성이 매우 크다고 본다,

다만 그 배경에 있어 조선 수군이 약했는가, 하면 그 것은 아니다, 물론 십여척 남은 참담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세키부네와 판옥선이라는 주력 함선간의 격차는 상당한 편이고 화력의 비중 역시 조선이 약하다거나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상기 목록에서 볼수 있듯 화력에 신경을 쏟은 것은 오히려 어찌보자면 조선이 더 크다 할수 있다, 개인 화력 개인의 능력만 놓고 보더라도 생각해보자 조총이라 해야 원정군 전체의 10~30%이다, 거기다 세키부네는 흘수선이 낮기에 높이가 많게는 2~3층 정도 차이가 벌어진다, 조선이라고 해서 활이 전부가 아니라 개인 화기인 승자총통도 있고 더욱이 기어올라야 하는 상황인 일본군에게 내려오는 것은 비단 이게 전부가 아니고 도검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몽둥이와 돌까지 내려온다, 

물론 이순신의 능력을 폄하하거나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이순신이 그러한 능력을 발휘할수 있는 배경을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기록상 알수는 없지만 전장을 고르고 또 가장 앞서 나가 싸울수 있었던 까닭은 그러한 것을 뒷받침 해줄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는데 아무튼 그렇다, 개인적으로는 한산대첩보다 높은 의의를 부여하는 까닭인데, 이 전투는 모두가 안될거라 생각하는 상황속에서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모두가 패전을 생각할때 이길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고 그 길을 보여주었다, 직산 전투 이래로 명나라와도 일전을 생각하고 있던 일본의 기세를 부러뜨렸다.

무엇보다 그러한 어찌보면 당연한 것을 해낼수 있는 것이 지휘관의 역량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랬기에 이순신이 특히나 대단한 것이고 말이다.


추신을 하나 달자면 우스갯소리인데 사실 조선 수군에 있어 가장 큰 사상자를 발생시킨것은 이순신 장군이다, 생각해보자 반나절을 해협에서 적을 틀어막은 함선에서 고작 2명이 죽었다, 그러나 각종 규율 위반과 기타 사안으로 죽고 처벌받은 조선 수군은 몇일까?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