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4년, 제2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함으로서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지화 작업은 가속화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별다른 효과는 없었습니다. 원인은 다름아닌 프랑스의 국내사정 때문이었는데요, 프로이센과의 보불전쟁에서 패한 이후 제정이 몰락하고 공화정이 수립되었지만 전후 복구 문제로 인하여 유리한 조약을 체결했음에도 불구하고 차마 베트남에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것이죠. 2차 사이공 조약에 따라 세 도시를 개항하고 그토록 염원하던 홍하(紅河)의 운행권을 따냈지만 정작 세 항구를 드나들며 이익을 보던 건 경쟁자 영국이었을 정도로 당시 프랑스는 베트남에서의 영향력을 상당부분 상실하고 식민지화 작업을 거의 중단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완(阮) 왕조 (이하 완조)의 사덕제(嗣德帝) 역시 프랑스가 국내의 문제를 마무리 지은 후 재침략을 가해올 것이란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프랑스가 주춤하면서 양국간의 전쟁도 소강상태로 접어들기 무섭게 2차 사이공 조약 이후 사덕제는 종주국인 중국의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 프랑스와는 대립구도에 있던 다른 서구열강 세력들인 영국이나 독일에도 도움을 청하는 등 나름의 자구책을 모색합니다만 2차 사이공 협정에 위반된다는 이유로 프랑스가 강하게 반발하자 시도는 해프닝에 그치고 맙니다.
그러나 이도 잠시 2차 사이공 조약이 체결된지 약 5년 만인 1879년, 비로소 국내의 문제를 마무리지은 프랑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베트남으로 눈길을 돌려 본격적으로 재침략 야욕을 드러냅니다. "프랑스의 미래는 통킹에 있다." 라는 프랑스의 어느 지도자의 발언이 이를 대변하듯 말이죠.
레옹 강베타.
베트남 입장에서는 장 뒤피, 프란시스 가르니에에 이은 세번째 천하의 개쌍놈.
위에서 말씀드린 그 어느 지도자 되시겠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세세한 정치상황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강베타란 인물이 프랑스 공화정 수뇌부의 중심인물로 부상하게 됨으로서 베트남 재침략이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강베타는 베트남에서의 식민지화 작업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꼭 통킹을 족치자는 취지의 발언도 한 것일테고요. 게다가 코친 차이나 식민지의 총독도 계속해서 본국을 닦달하며 재침략을 권유하며 재촉하고 있었으니 본국과 식민지는 손발이 척척 맞아 1881년, 프랑스 의회가 베트남 침략에 거액의 군비를 쏟아붓는다는 정책안에 동의함으로서 병력과 무기 모두 마련되어 만반의 준비도 갖추었겠다, 이제 남은건 침략할 명분 뿐이었죠.
베트남에서 뭘 등쳐먹을까 하고 노리는 흑기군.
완조 입장에선 이 흑기군이 그야말로 애물단지 같은 존재였을 것 같네요.
한편 완조(阮朝)의 상황은 심히 좋지 않았습니다. 북부 통킹에서의 혼란이 그것으로, 그동안 완조에 예속되어 프랑스와의 전쟁에도 공헌한 바 있는 유영복의 흑기군은 또 통제불능의 상태가 되어 홈그라운드 통킹에서 난리치고 있었고 또 이걸 진압하고자 요청받아 내려온 청군에다 여기에 통킹의 군벌들까지 덩달아 가세하여 '미쳐 날뛰는' 몇년전의 상황이 그대로 또다시 재연되고 있었던 것이죠. 몇년전에 청나라 군대에게도 시달렸음에도 불과하고 또 청군을 불러 진압하게 시킨 것만 봐도 짐작하실 수 있듯이 완조는 이미 북부에서의 혼란을 제어할 통제력을 상실한지 오래였습니다. 그리고 프랑스는 쾌재를 불렀겠죠.
이렇듯 최적의 조건이 마련된 상황에서 프랑스는 신박하게 트집거리 하나를 잡아냅니다. 1881년 말, 프랑스 선박이 홍하를 거슬러 올라가 중국의 운남성으로 향하던 도중에 완조의 관리에게 저지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홍하에서의 운행권을 인정하는 2차 사이공 조약에 위반된다면서 문제삼고 나섰던 것이죠. 그리고 이듬해인 1882년 4월, 코친 차이나 총독은 해군대령 앙리 리비에르라는 사람에게 조사단을 빙자한 6백여명의 병력과 함대를 주어 통킹으로 파견하여 문책할 것을 지시합니다만 말이 조사단이지 실질적으로는 침략군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앙리 리비에르.
네번째 죽일놈 되겠습니다.
앙리 리비에르가 지휘하는 6백여명의 프랑스군은 통킹에 이르자마자 고의적인 무력충돌을 유도하여 곧장 하내(河內 : 이하 하노이)에 상륙, 기습을 가합니다. 당시 하노이를 수비하던 완조의 하내총독 황요(黃耀)는 끝까지 항전하지만 프랑스군의 압도적인 화력을 이기지 못하고 패하자 패전의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하여 프랑스군은 하노이를 점령합니다.
하노이를 수비하는 황요와 프랑스군의 전투를 그린 그림입니다.
하노이를 점령한 리비에르는 즉각 완조에 점령한 하노이의 할양, 베트남의 보호국화 등을 주로 하는 4개 조항을 요구하며 협상을 제안합니다만 사덕제는 이를 거부합니다. 종주국 청나라의 빽을 믿고 있었던 것이죠. 물론 외왕내제를 고수하던 완조였기에 정말로 청나라를 종주국으로 여기지는 않았겠지만 현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명목상으로나마 종주국에 도움을 요청하는 형식으로 조공을 바치며 원조를 청합니다.
완조의 요청을 받아들인 청나라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통킹에 인접한 국경지대에 병력을 진주시켜 무력시위를 감행했고 애물단지 흑기군도 완조가 위기에 처하자 거병하여 프랑스군과 대치합니다. 이에 당황한 프랑스는 청에 홍강을 경계로 통킹을 분할하는 것을 제안합니다만 이듬해인 1883년, 프랑스 본국에서 강베타의 뒤를 이어 강경주의자 쥘 페리라는 사람이 집권하여 강경론이 대두됨에따라 통킹 분할 제안도 취소됩니다.
그러던 중 프랑스군과 대치하던 흑기군과 완조군은 하노이를 탈환하고자 기습을 가해왔고 그때 하노이의 남부에 위치해 있던 남정(南定)이란 도시에 있던 리비에르는 황급히 하노이를 방어하고자 회군했지만 하노이성 서쪽에서 다리를 두고 흑기군과 교전하던 도중에 전사합니다.
흑기군과 교전하는 프랑스군.
맨 왼쪽의 사람이 리비에르입니다. 진흙탕에 대포가 빠져서 그걸 꺼내다가 그만..
당시 흑기군과 프랑스군이 교전을 벌인 장소입니다.
남정(베트남어로는 남딘 : NamDinh)은 하노이(Hanoi)의 남부에 위치한 도시로 그리 멀지는 않습니다.
상기하였듯이 이때 리비에르에게 주어진 병력이라고 해봐야 고작 6백여명에 불과했던지라 하노이를 점령하고 통킹지방까지 석권하기는 커녕 하노이나 인근 점령지도 수비하기 벅찼던지라 점령지를 모두 수비하려면 당연히 병력을 분할해야 했습니다. 이때 남정(南定)도 당시 프랑스군의 점령지였는데 하필이면 리비에르가 남정에서 볼일보느라 하노이를 비운 사이 흑기군이 들이닥쳤던 것입니다.
하노이에서의 전투로 리비에르와 휘하 프랑스군들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한 프랑스 본국은 "프랑스는 자랑스러운 조국의 아들들을 위해 복수할 것이다!" 라며 대규모 침공을 예고합니다. 그리고 그 예고에 걸맞게 1만 6천이라는 병력을 동원하여 본격적인 침공에 돌입하고요. 이제껏 프랑스가 베트남 침략에 동원한 병력의 규모로는 최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