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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럭저럭 대왕이 나라를 평안하게 다스려간 지 수십 년이 되고 이제는 대왕도 늙어 병석에 누운 어느 봄날이었다. 대왕이 여신에게서 검은 수정 반지를 받은 후 한참동안 평탄하기만 하던 곰나루의 뱃길에 갑자기 험악한 물결이 크게 솟아올라 사람들이 모두들 두려워 강을 건너지를 못하고 있다.
그 소식을 들은 대왕이 태자를 불렀다. “이제 곰나루의 여신께 반지를 돌려 줄 때가 된 것 같다. 밤이 깊어져 축시가 되면 네가 이 반지를 곰나루에 가져가서 여신께 돌려주어라. 거센 소용돌이를 향해 힘껏 던져야 한다.”
“네, 아바마마.”
한밤중이 되자 태자는 반지를 가지고 궁궐을 출발하였다. 곰나루 근처 소나무 숲에 당도하니 어둠 속으로 지옥의 심연처럼 거세게 소용돌이치는 검은 물결이 보인다.
그는 반지가 무척 탐이 났다. 평소 반지에 얽힌 부왕의 신통력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태자는 이 귀중한 보물을 버리지 않고 소중히 간직하여 부왕처럼 나라를 잘 다스리고 싶었다. 그래도 부왕의 명인지라 태자는 반지를 들고 강가로 갔다.
그는 무섭게 굽이치는 물결을 향하여 반지를 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다가 그는 도저히 반지를 버릴 수가 없어 되돌아와 소나무와 진달래가 아름답게 어우러진 소나무 숲의 바위틈에 몰래 숨겨 놓았다.
태자가 빈손으로 궁궐에 돌아오자 대왕은 조용히 물었다. “그래 반지를 돌려주었느냐?”
“네. 아바마마.”
“반지를 돌려주니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반지가 빠진 곳의 물결만 일렁일 뿐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태자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내가 직접 가서 반지를 던지는 것을 보겠으니 나를 강가에 데리고 가 다오.”
태자는 할 수 없이 대왕을 모시고 강가로 갔다. 그곳에 도착하여 반지를 던지니 거센 물결이 다시 잠잠해지고 어여쁜 여신이 찬란한 궁전과 함께 금강 위에 솟아올랐다.
그녀는 떨어지는 반지를 가볍게 받은 다음 감회에 젖은 목소리로 대왕께 말한다. “대왕, 이제 우리의 아름다운 인연이 다하여 헤어질 때가 왔나 봅니다.”
대왕도 서운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강가에 누운 채로 손을 흔들며 조용히 말한다.
“그동안 이 백제국과 나를 도와주워서 정말 고맙소. 여신이 이룩한 업적은 해와 달같이 영원토록 이 땅에 빛을 뿌릴 것이오. 그대와 오래 전에 약속한 대로 나는 항상 그대를 바라보며 저 언덕에 누워 있을 것이오. 또한 그대의 공을 높이 기려 사당을 세워 사시사철 언제나 제사를 모시게 할 것입니다.”
“저도 대왕의 크나큰 은덕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대왕께서는 이제 세상의 모든 따사로움과 원한을 잊고, 모든 분노와 슬픔을 넘어 항상 기쁨이 꽃피어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곳, 영원한 극락의 도솔천으로 저를 따라 오십시오!”
목이 멘 대왕은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인다.
“부디 여신께서는 승천하시고 밤하늘의 아름다운 별이 되시어 이 나라 백제를 영원히 보살펴 주십시오.”
여신도 대왕을 하염없이 내려다보며 흐르는 눈물과 함께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연다.
“위대하신 대왕이야말로 백제 국을 지키는 고귀한 별이 되셔야 합니다.”
마침 멀리 어두운 밤하늘에서 별 두 개가 유난히 영롱하게 반짝였다. 그러자 여신이 손을 흔들며 바람처럼 사뿐히 날아오른다.
“저 하늘에 사랑스런 아이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대왕.”
여신에게 반지를 돌려준 두 사람이 물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강가에서 굽이쳐 흘러가는 검은 물결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가 문득 무령왕이 태자에게 힘없이 고개를 돌리고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군왕이 될 태자에게 마, 마지막 부탁을 하고 싶소.”
“아바마마. 그것이 무엇이옵니까?”
“나, 나의 머리를 고, 곰나루로 돌려 묻어 주, 주시오. 욱!”하면서 검붉은 피를 한 움큼 토한다. 그의 입술이 새파랗게 변하고 얼굴이 얼음장처럼 창백하다.
“앗! 아바마마. 갑자기 이, 이렇게 피를!” “아바마마. 어인 일로?” 놀란 태자가 달려들어 무령왕을 부축했다. 왕관과 뒤꽂이를 벗긴 다음 요대를 느슨히 하고 화문석 위에 편안히 눕힌다.
“나, 나의 눈이 그, 그곳의 고, 곰 여신을 여, 영원히 으!”
대왕의 눈에 희미한 여신의 그림자는 점점 멀어지며 저 아득한 밤하늘 속으로 까마득히 사라지고 있었다. 태자가 말릴 사이도 없이 갑자기 대왕은 벌떡 일어나 비틀거리며 그 환영을 따라가다 백사장 위에 그만 엎어졌다. “여신, 같이 가오. 여신.”
피에 젖은 자수대포의 무령왕이 간신히 숨을 몰아쉬며 말을 잇는다. “태, 태자. 이, 이곳 우, 웅진에 도, 도읍을 하고 있으면 나, 나라가 펴, 평안. 후~우!”
“아바마마. 방금 여신이 반지를 되찾아가지 않았습니까?”
“태, 태자. 반지가 전, 전부는 아, 아니.”
“그러면 어떤 것이 중요합니까?”
힘없이 고개를 젓던 무령왕은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을 잇는다. “요...옹...기. 노, 노오...력. 욱!”하면서 다시 피를 한 사발 토하더니 눈을 감는다. “아바마마, 아바마마, 흑흑!”
조금 있으려니 대왕은 저절로 자신의 몸에서 스르륵 빠져나와 공중에 붕 뜨는 것을 느낀다. 위에서 강가에 힘없이 누운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왠지 모르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위대한 백제 국이여, 영원 하라. 영원히 부강하여라.” 그런 후 대왕의 영혼도 여신의 뒤를 따라 별들이 총총한 밤하늘로 아련히 날아갔다.
곰 여신과 대왕이 승천한 후 봄날의 밤하늘에 새로운 별자리가 생겨나게 되었다. 곰 여신은 그리운 자녀들이 하늘로 올라가 생긴 작은곰자리 옆에 정답게 자리를 잡아 큰곰자리가 되었다고 한다. 못 잊을 곰 여신을 따라간 대왕도 용자리를 만들어 흙냄새가 상큼하게 풍기는 애틋한 봄날의 밤하늘을 함께 아름답게 수놓고 있다.
그때 갑자기 요란한 천둥번개와 함께 봄비가 후두두 쏟아지기 시작했다. “쏴아!” 태자는 점점 거세지는 빗발을 아랑곳하지 않고 곰곰이 생각했다. “이건 분명 독살이다. 누가 그랬을까. 명백히 밝혀서 부왕의 원한을 풀어드릴까.”
태자는 눈물을 훔치며 시신을 말 잔등에 싣고 원앙이 수놓아진 비단 천으로 고이 덮은 다음 궁에 돌아왔다. 그는 곧바로 별궁으로 가서 모후인 무령왕비를 찾았다.
“어, 어마마마! 흑흑!” 태자가 울부짖자 무령왕비 연씨는 주위 시녀들을 모두 물러가게 했다. “아니. 태자 어쩐 일이오.”
“아, 아바바마께서. 흑흑!” 그 순간 무령왕비의 날카로운 눈이 기묘하게 빛났다.
“어, 어디?”
비에 젖어 자수포가 몸에 착 달라붙은 태자가 차가운 무령왕의 시신을 안고 별궁에 들어와 침상 위에 눕힌다.
비단 천을 열어젖힌 무령왕비의 얼굴에 알지 못할 이상야릇한 미소가 흘렀다.
“이건 분명히 독살이라 생각됩니다. 대왕 주변의 궁녀와 내시들을 철저히 조사할까요?”
“이 무슨 해괴한 소릴? 태자! 태자는 무슨 근거로 대왕이 독살되었다고 생각하시오?”
“선왕은 한창 육순의 나이입니다. 그런데 달포 전부터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시더니 설사를 한 후 기운을 차리지 못했어요.”
“그래서 이 어미가 입맛을 돋우어 기운을 차리시라고 꽃 게장에 꿀을 발라 드렸죠. 이렇게 피를 많이 토하셨으니 아마 폐결핵일 것 같소.”
“어마마마의 정성덕분에 선왕께선 잠시 기운을 차리셨습니다. 그 뒤에 어의가 더 기운을 차리시라고 인삼과 부자를 섞은 탕약을 올린 일이 있지요.”
“그만! 태자. 내버려두시오. 독살이라는 소문이 나라 안에 돌면 왕실의 체면이 땅에 떨어집니다.”
“그래도 진실을 분명히 밝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흥! 내가 보기엔 대왕께서 여인네들을 너무 탐하느라 기력이 약해져서 돌아가신 것 같소. 나라 안팎에 알려진다면 정말 창피한 일.”
“......”
“태자. 이 어미도 궁궐 주변의 동태를 계속 주시할 테니 태자는 어서 왕위에 오르시오.”
“......”
그러한 엄청난 사실이 다음과 같이 『남당유고』에 실려 있다.
사(斯)마(摩)처(妻)연(燕)씨(氏) 투(妬)沙(사)오(烏)처(妻)백(苩)씨(氏) 독살(毒殺)사(斯)마(摩) 사(斯)마(摩)서자(庶子)명(明)농(穠) 비(秘)기(其)상(喪)이(而)자립(自立)
사마(무령왕)의 처 연씨가 사오(부하장수)의 처 백씨를 투기하여 사마를 독살하였다. 사마의 서자 명농(성왕)이 초상당한 것을 숨기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무령왕이 곰나루에서 세상을 떠난 바로 그날 밤 신라의 밤하늘에 음산하게 깜박거리는 흉성이 길게 꼬리를 끌며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삼년산군(충북 보은) 천민 가문.
“크아~아~앙! 크애~애~앵! 크르르르!”
“웬 아이가 이래요?”
“글쎄 말이오. 애기 울음소리가 정말 섬뜩하고 소름 돋는군.”
“눈빛도 장난 아니고요. 싸늘하고 살기가 가득 풍깁니다.”
“음. 그러고 보니 정말 이상하군.”
“이 아이가 애기인지 망나니인지 알 수 없군요.”
“아니 애기 보고 망나니라니?”
“역적 목 자르는 큰 칼 휘두르는 사람.”
“여보. 아이가 아무리 이상해도 그런 저주 같은 말 삼가게나.”
그러자 모시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던 산모가 대꾸한다. “내가 낳은 자식 생긴 대로 말하는 것이 뭐 잘못인가요?”
“닥쳐! 아니, 이 사람이 어미가 되어 가지고 함부로 입을 놀리고.”
“알았어요. 하여튼 애기 이름이나 지어보세요.”
“가만히 있자. 무엇이 좋을까. 옳지. 칼이야, 칼.”
“아니 칼이라니요?”
“아이의 이름말이야. 칼. 그것도 서울의 칼. 아이 낳으면 서울로 보내어 높이 되게 하라는 말도 있고 하니 어차피 이렇게 험상궂게 생겼으면 무지막지한 무사가 되어야 출세할 것이여.”
“여보. 그 말도 정말 그럴듯해요. 그럼 아이 이름은 도(都)도(刀)가 되는 거군요.”
“그래. 도(都)도(刀). 좋게 생각하자고. 우리 집에 장군감이 태어났어, 장군. 하하하!”
도도는 어릴 때부터 성격이 포악하고 끈질겨 주변의 아이들을 주먹으로 휘어잡았다. 밖에 나가 완력을 뽐내며 신나게 놀다가 집에 돌아오면 영락없는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집안엔 먹을 것도 마땅치 않고 부모도 사고뭉치 아들을 외면하고 구박만 하였다. 세월이 지나 점점 철이 들면서 평생 설움 받고 굶주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도도. 그는 일찌감치 집을 나가 얻어먹고 훔쳐 먹으며 자유롭게(정처 없이) 여기저기를 부랑자로 떠돌게 된다.
그로부터 사년 후(527년) 신라 서라벌 근교 형산강 백사장. “단칼에 목을! 단칼에 목을! 단칼에 목을! 으하하하!” 노래 부르듯 외치면서 칼을 들고 방방 뛰며 설치는 망나니. 그의 섬뜩한 외침에는 단칼에 죄수의 목을 잘라 고통을 줄여주는 것이 자비라고 철석같이 믿는 망나니들의 확고한 철학이 잘 드러난다.
피에 절은 누르스름한 삼베저고리를 입고 산발한 머리에 물과 함께 하얀 석회를 뿌린 망나니. 그는 사형장 탁자 위에 놓인 막걸리를 한 사발 단숨에 들이켰다. “푸!” 술을 칼날에 뿜어 뱉은 다음 날카로운 눈을 번득이며 칼춤을 춘다. “휘! 휘! 얼씨구나 좋다. 지화자 좋다.” “칼. 칼. 무슨 칼. 작두같이 생긴 칼. 어디 어디 있나. 내 손 안에 있지.”
죄인의 둘레를 돌면서 나름대로 흥겹게 노래하며 춤추는 망나니. 사형장에 온 많은 구경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흰 기가 달린 긴 장대 아래 고의(속옷)만 입고 형틀에 묶여 끌려와 꿇어앉은 이차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백사장 사방에서 살벌한 함성이 한꺼번에 들려온다. “와! 죽여라! 이차돈을 죽여라.” “임금과 백성들을 속인 사기꾼을 처단하라. 와! 와!” 하지만 흥분된 구경꾼들 속엔 차분한 승려 한 사람. 눈을 감은 채 무릎을 꿇어 합장하고 계속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대왕마마 납시오.” “길을 비켜라.” 잠시 후 화려한 일산이 보이면서 그 아래 우아한 가마를 탄 법흥왕이 수많은 병사들과 함께 처형장으로 들어온다.
이차돈 앞에 선 법흥왕의 가마.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휘장을 젖혀라.” 앞에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이차돈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조용히 묻는다. “마,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는가?” 그러자 비장한 각오가 얼굴에 서린 이차돈이 또렷이 말했다. “만약 불도가 행해질 수 있다면 소신은 비록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그 말에 임금이 비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오늘 너의 희생이 이 나라 신라의 흥성을 이룰 것이야. 부디 극락왕생하기를. 흑흑!”하면서 왕이 눈물짓는다.
역시 온몸이 젖도록 눈물짓는 이차돈. “대왕.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소신은 불법(佛法)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만약 신령스러움이 있다면 소신의 죽음에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잠시 후 형리가 싸늘한 목소리로 망나니에게 명령한다. “죄인의 목을 베어라.” 임금의 행차에 기가 죽어 구석에 숨어 있다가 다시 칼을 들고 가볍게 뛰어나온 망나니. “으하하하! 극락과 지옥이 내 칼 아래 달려 있다. 단칼에 목을! 단칼에 목을! 으싸! 으싸!” 칼춤을 추던 망나니가 칼을 높이 들었다.
“얏!” “으악!” 순간 이차돈의 목에서 하얀 액체가 분수처럼 마구 솟구친다.
“아! 저, 저건 피가 아니다.”
“그래. 젖이야 젖. 하얀 젖이 솟아오른다.” 다음 순간 또 다른 놀란 함성. “이차돈의 머리가 날아간다.” “와! 와!”
잠시 후 “으아! 하늘이 컴컴해졌다. 하늘이 노하셨다.”
“우르릉! 쾅!” 땅도 이차돈의 죽음이 슬퍼 몸부림치며 통곡하는 듯 크게 흔들린다. “지진이다. 모두 피하라.” 그곳에 모여 있던 구경꾼들은 앞을 다투어 자리를 떴다.
“흑흑! 과인이 그토록 말렸거늘. 흑흑!” 임금은 슬퍼하여 눈물이 자주색 곤룡포를 흠뻑 적셨다. 임금을 모시던 병사들이 합창하듯 외쳤다. “아! 하늘에서 아름다운 꽃이 내려온다.” 그윽한 향기를 풍기는 꽃들이 공중을 가득 메우며 사뿐히 내려앉는다. 하늘도 왕의 슬픔을 달래려는가. 이차돈의 거룩한 순교를 기리는 것인가.
한참 후 정신을 차린 임금과 신하들. 사형장엔 아직도 하얀 피가 뿜어져 나오는 이차돈의 시신이 누워있다.
그것을 보고 놀란 임금이 호통을 친다. “네 이놈! 이차돈의 목은 어디에 있느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하는 망나니. “공중에 높이 떠 날아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대왕.”
“음. 기이한 일이구나. 아마 성스러운 그가 다시 태어날 곳을 둘러보기 위하여 멀리 떠났을 것이다.” 그러더니 옆의 신하들을 돌아보며 엄하게 꾸짖는다. “경들은 그래도 이차돈이 임금을 속인 거짓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는가?”
“송구하옵니다. 대왕.” 하지만 두려운 신하들의 얼굴에 진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법흥왕 14년(527년), 성왕 5년의 일.
여기는 백제 가림성 인근 오솔길. 보자기에 묵직한 물건을 싸고 나는 듯 빠르게 움직이는 한 승려가 있다. 법명은 혜량이며 주문과 주술을 중시하는 밀교의 대가. 비록 고구려에 몸을 두고 있어도 신라를 위하여 활동한 지는 벌써 수년이 넘었다. 경전을 중시하는 삼론종만이 활개를 치는 고구려사회에서 혜량의 밀교는 찬밥 그 자체였다. 마찬가지로 경전이 주류로 대접받는 율종을 장려하는 백제사회에서 밀교에 능통한 혜량이 설 자리는 아무 데도 없었다. 불교가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않은 신라만이 그의 꿈을 펼 수 있는 유일한 나라. 실제 눈으로 보여줄 수 있는 비술을 연마하는 밀교로 삼국에 현실의 불국토를 이루는 것이 혜량의 원대한 꿈인 것이다.
다음 편은 내일 올리고요. 천도의 흑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