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왕이 왕위에 오른 지 몇 달이 지난 후의 일이다. 평소 나라와 백성의 살림살이에 관심이 많았던 임금인지라 자주 도성 밖을 둘러보고 싶어 했다. 하루는 도성 밖을 나와 주변 지역을 순시하다가 신하들에게 말한다.
“나라의 살림살이가 좋아지려면 모든 물자가 잘 유통되어야 한다. 우리 백제국의 물류는 주로 어디에서 움직이는가.”
뒤를 따르던 신하가 공손히 대답한다. “대왕마마, 그곳은 도성 에서 오리쯤 되는 곰나루이옵니다.”
“그러면 그곳을 한 번 돌아보겠다.”
대왕이 곰나루에 도착하니 남북으로 시원하게 뚫린 물길이 눈앞에 드러난다. “경치가 수려하고 문물을 교류하기에 정말 좋은 곳이오. 우리 모두 이곳을 중심으로 대백제국의 크나큰 부강을 이루어 나갑시다.”
대왕이 계속해서 감탄의 찬사를 보내며 물길을 둘러보고 있는데 강 건너편 물위에서 갑자기 소용돌이가 크게 일며 비바람이 몰아친다.
“마마, 얼른 몸을 피하십시오.”
“갑자기 맑은 하늘에 무슨 귀신의 조화인가.”
“네, 마마. 이곳은 오래 전에 원한을 품고 물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은 암곰의 귀신이 죽치고 앉아 이렇게 심술을 피우고 있사옵니다.”
“미천한 짐승이 어떤 사연으로 끔찍한 귀신이 되었단 말이냐?”
“마마, 아무리 짐승이라 하여도 곰은 영물이옵니다. 곰은 품성이 정직하여 세상을 속이고 탐욕을 일삼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나은 존재이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런데 그 영민하고 선량한 곰에게 그렇게 억울한 일이라도 생겼단 말인가. 궁금하니 어서 말을 해 보시오.”
“네. 마마. 아주 오랜 옛날 추운 겨울에 어느 나무꾼이 강 건너편에 있는 연미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날이 어두워져 그만 길을 잃었다 하옵니다.”
“그래서?”
“네. 길을 헤매다가 꼼짝없이 얼어 죽게 된 나무꾼을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한 암곰이 발견하고 자기 굴로 데려와 살게 해 주었다고 합니다.”
“잘 되었구나. 그 다음엔 어찌 되었는가?”
“여인을 따라 굴에 들어간 사내는 두 남녀가 한 동굴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랑을 하고 아기들을 낳아 정들어 단란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잘 된 일인데, 그 뒤에 무슨 험악한 불상사라도 생겼단 말이오?”
“네. 마마. 어느 날 밤에 곰 여인과 같이 자던 나무꾼이 축시에 문득 잠을 깼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 옆에 누워있어야 할 아름다운 여인은 간데없고 시커먼 곰 한 마리가 누워 있는 것이었습니다.”
“오호라, 곰이 오래 묵어 둔갑을 한 후 사내를 유혹하여 같이 살다가 드디어 귀신의 시간인 축시에 그 정체가 탄로가 났구나.”
“예. 마마. 나무꾼도 처음에는 도저히 자기 눈이 못 미더웠습니다. 그래서 밤마다 일부러 눈을 감고 잠을 자는 체하다가 축시까지 기다려보니 그 시각이 되자 영락없이 곰으로 변신하는 아내를 보고 기겁하여 굴을 탈출할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음, 계속 말해 보오.”
“어느 날 밤 축시가 지나 인시가 되어 첫닭이 울자 곰은 여인의 모습으로 먹을 것을 구하러 밖에 나간 사이 사내는 몰래 굴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 나루터에 나와 지나가는 나룻배를 불러 타고 강 중간쯤 오니 사랑하는 사내의 멀어져가는 냄새를 맡고 아이와 함께 달려온 곰이 돌아와 달라고 애타게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그런 경우에 짐이 사내의 입장이라면 냉혹하게 강을 건널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무꾼은 그냥 그대로 물을 건넜단 말인가.”
“예. 마마. 강을 거의 건너왔을 때 절망한 암곰이 아이들의 몸을 양팔로 들어 올린 후 안 돌아오면 아이들을 죽여 버리고 자기도 따라죽겠다고 하였다 하옵니다.”
“그 뒷이야기는 더 듣기가 슬프고 끔찍한 일이니 그만 하시오. 나는 사랑에 충실하여 숨져간 애절한 곰의 영혼을 위로하고 싶소. 그리하여 그 원귀로부터 나라의 중요한 뱃길을 안전하게 하고자 지극한 제사를 지내볼까 하오.”
“네. 마마.”
“그러면 언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좋겠소?”
“귀신의 제사는 밤, 특히 귀신이 가장 왕성하게 설치는 축시에 지내야 효험이 있사옵니다. 그러나 거센 강물에, 그것도 야밤에 가시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옵니다.”
“이 나라의 임금으로서 그런 위험을 두려워한다면 아니 될 일이오. 경들도 자지 말고 동명성왕의 사당에 있는 사제를 불러 자시에 같이 출발하도록 하시오.”
축시가 가까워 대왕 무령을 태운 배는 나루터를 출발하여 소용돌이치는 어두운 강물로 나아갔다. 그 앞에 이르러 데리고 온 사제를 불러 극진히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그래도 아무 소용이 없이 시커먼 물기둥만 솟구치며 거친 물보라만 일으키고 있다.
그것을 본 대왕이 안타까워하며 말한다. “내가 직접 곰 여신께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지내겠소.”
그러더니 제물을 차려놓은 제사상 앞에 엎드려 정중히 절을 올린 다음 무시무시한 소용돌이를 향하여 크게 외쳤다.
“백성들이 여신의 노여움으로 마음 놓고 뱃길을 다니지 못합니다. 바라건대 저희들의 정성을 받으시고 그만 사내로 인해 맺힌 여신의 원통한 한과 분노를 너그러이 거두어주소서.”
대왕이 뱃전에 엎드려 한참 동안 정성껏 기원을 하니 갑자기 비바람과 소용돌이가 잠잠해지고 뱃길이 시원하게 열렸다. 그러더니 물이 좌우로 갈라지며 찬란한 광채와 함께 선녀처럼 어여쁜 여인이 둥실 솟아오른다.
그녀는 구르는 옥구슬 같이 고운 목소리로 대왕을 부른다. “대왕, 배에서 내려 이리로 오소서.”
대왕이 기가 막혀 볼 멘 소리로 대답한다. “여신, 이렇게 강물이 깊고 험한데 어떻게 갈 수 있단 말입니까?”
“대백제국을 부흥시키고 나라의 명성을 만방에 휘날리실 대왕께서 무엇이 두렵단 말이십니까?”
“알았소. 그렇게 하리다.”
대왕이 말을 마치자 옆에선 신하들이 만일을 위하여 물 아래로 큰 그물을 가지고 받치고 있고 수영을 잘 하는 사내들이 서너 명 강물로 뛰어 들어 뱃전을 붙잡고 대기하고 있다.
대왕이 물 위로 내려가 발이 물에 잠긴 순간 그물에 찰싹 붙어버린 듯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할 수 없이 대왕은 배에 올라 안타깝게 강물과 여신만 번갈아 바라보고 있다.
그러자 저쪽에서 주변 강물을 부드럽게 울리는 듯한 곰 여신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세상일은 모두 믿음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대왕께서 저를 믿으신다면 모든 것을 치운 다음 마음 놓고 물위를 걸어오십시오.”
대왕이 크게 주저하다가 마침내 결심한 듯 명을 내린다. “그물을 전부 치우고 모두들 앞을 비켜라.” 그러더니 잠시 후 배에서 물속으로 몸을 내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디딘 발밑이 너무나 부드럽고 편안한 것이다. 아예 신발이 물에 젖지도 않는다. 대왕이 앞을 바라보니 저편 여신의 얼굴에서 기쁨에 찬 환한 빛이 강렬하게 뿜어 나오고 있다.
“대왕, 대왕의 용기는 너무나 훌륭하십니다. 이제 그 빛을 따라 저에게 오십시오.”
그러자 대왕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다음 빛을 비추는 물길을 걸어간다. 대왕이 배 위에서 바라보았을 때 그렇게 멀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빛이 비추는 물길은 끝이 없이 펼쳐진다. 배 위에서 놀란 신하들이 크게 소리 지른다.
“대왕마마. 대왕마마. 어서 돌아오소서. 요망한 귀신이 마마를 유혹하고 있사옵니다. 속지 마시옵소서. 마마.”
그 말에 마음에 동요가 생긴 대왕은 고개를 무겁게 숙이고 잠시 고민하다가 결심을 한다. ‘이왕 곰 여신을 믿고 위험을 감수한 내가 아닌가. 곰 여신이 믿고 사랑을 바친 사내가 배반하여 그 맺힌 원한을 풀지 못하고 나라와 백성들의 뱃길이 위험하게 되었으니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그 한을 풀어 주리라.’
마음을 굳게 다진 대왕이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마아~마. 마마.”
당황한 신하들의 외침이 아득히 들려오다가 물결 따라 점점 사라져간다.
벌써 한 시각쯤 걸었을까. 아직도 환한 빛을 발하는 곰 여신이 아직도 멀게만 느껴진다.
‘조금만 더 가면 여신의 곁에 가까워지겠지.’
대왕이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니 여러 모양의 꽃 장식을 한 관을 머리에 쓴 우아한 여신이 얼굴에 가득 웃음을 담고 정겹게 팔을 벌리고 있다. 여신의 뒤로는 금은보화와 오색영롱한 보석으로 가꾸어진 극락 같은 궁궐이 황홀히 펼쳐져 있다. 대왕이 여신 앞에 나아가 그 앞에 섰다. 그들은 한참동안 서로의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무령은 자기도 모르게 눈앞에 서 있는 꽃다운 여인, 아니 곰 여신에게 깊숙이 빨려들고 있었다.
“대왕, 어서 궁 안으로 드시죠.” “그럽시다.”
두 사람이 다정하게 손을 맞잡고 웅장하고 화려한 궁궐 문 안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환한 빛이 사라지면서 다시 큰 비바람과 함께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배에 남은 신하들은 커다란 두려움과 자책감에 몸을 떨면서 나루터로 배를 몰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