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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江戶)의 음식세계
게시물ID : history_1742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oirCafé
추천 : 16
조회수 : 1480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4/07/29 20:36:21
일본 관광을 가거나 혹은 이에 관한 이야기를 할때 빼놓을 수 없는 테마 중 하나가 바로 음식이죠. 현대 일본 음식의 토대를 형성한, 그리고 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시기가 언제인지에 관한 관점은 사람들마다 다양할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에도시대가 아닐까합니다.(기간대비로 따지면 메이지유신 초기이겠지만)

Kanto.png

일본의 시대명으로도 쓰이는 전설적인 도시인 에도(江戶)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겐세이를 당하여 관동지방으로 전봉된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중심지로 건설한 도시입니다. 에도는 원래 새조차도 둥지를 틀지않는다는 말이 있을정도의 뻘촌으로 이를 개간하고 제대로 된 도시로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함은 물론, 막부수도답게 수많은 식충이사무라이들이 밀집해 있는 도시인만큼 상업기반도 구축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개발된 에도에는 일본의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왔는데, 개중에는 특히 고향에서 한밑천 잡기위해 상경한 독신남들의 숫자가 많았습니다. 즉, 에도는 독신 사무라이들과 서민 독신남들의 도시이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사람들도 당연히 인생 퇴갤하지 않기위해서는 음식을 섭취해야 했지만, 현대에도 학업이나 직업문제로 독신하는 자취자들이 대개 음식을 만들어먹지 않고 편의점이나 도시락전문점 등을 통해 끼니를 때우듯 당시 대부분의 에도 사람들도 대부분이 밥을 스스로 지어먹는대신 사 먹었는데, 이러한 에도인들의 식생활패턴이 역설적으로 에도의 음식문화를 꽃피우는 원인 중 하나가 됩니다.

 에도는 건설당시는 물론, 빈번히 일어났던 화재를 진압한 이후에도 거대한 공사판 도시가 되기 일쑤였는데 대도시인 에도에서 이러한 대규모 프로젝트를 완결짓기 위해서는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노동자들에게 간단한 식사를 제공하기 위한 식당들이 형성되게 되는데, 1660년을 즈음해서 설립된 에도 아사쿠사(현재 도쿄의 그곳과 같은)의 나라챠메시(나라식 차밥)야라는 음식점이 서민들을 대상으로 한 일본 최초의 음식점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프랑스 파리 최초의 음식점이 설립된 년도가 1765년이고 영국 런던의 경우 1828년이라는 점을 상기해 보면 일본의 음식점 문화의 전통이 길다는 것을 알수 있고, 이와 같은 긴 전통이 오늘날에도 도쿄가 세계최초의 미식도시로 손꼽히게 되는 배경을 마련하지 않았나 생각해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비단 요리점 뿐만이 아니라 인쇄술의 발전에 힘입어 요리서적, 즉 레시피 책자도 활발하게 간행되었습니다. 1674년 '에도요리집'이라는 서적이 출간되기도 하였는데 이 레시피는 서민들과는 괴리가 있는 레시피가 많이 수록되어 있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최초 가정 요리책으로는 흔히 1782년에 출간된 '두부백진'을 꼽는데 이는 100종의 두부 요리법이 담겨 있었고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어 두부요리 수록종류를 332종으로 늘린 속편이 출간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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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른 에도시대 발간된 요리책인 '에도요리백선'의 표지)


 다른 한편으로 에도는 길거리 음식, 즉 노점상의 천국이기도 하였습니다. 에도 노점상에서는 텐푸라, 장어꼬치, 스시, 오뎅, 우동, 소바, 오징어구이, 떡, 경단 따위를 취급했는데 거의 모든 음식의 한 개 가격이 에도시대 화폐로 4몬(대략 당시 쌀 50밀리리터 가격)이었습니다. 당시 노점상을 찾는 주 고객층은 에도의 중하류층이었고 상류층은 대개 정규 음식점에서 식사를 해결하거나 혹은 주문했습니다. 전자는 후자에 비해 주로 싼 음식, 즉 수준이 떨어지는 음식을 먹었지만 후자가 누리지 못하는 특권(?)을 누리기도 하였는데 바로 텐푸라가 그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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잦은 화재로 뽜이야 노이로제에 걸린 에도막부는 실내에서 텐푸라 조리를 엄금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텐푸라는 실외, 즉 노점상에서만 조리할 수 있었고 당연히 노점상들만 이를 취급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찌됬든 막부의 이런 화재방지정책이 에도의 중하류층들에게 이러한 특권(?)을 준 셈이지요.

 텐푸라도 맛있긴 합니다만, 일식하면 역시 스시일 것입니다. 원래 에도시대 일본에서 사람들이 즐겨먹던 스시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 스시"가 아니라 밥과 생선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Boxy하게 만든후 썰어낸 하코즈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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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코즈시)

 흔히 아는 "그 스시"의 탄생설화는 이렇습니다. 11대 쇼군 이에나리의 치세 당시 막부의 실세 중 하나였던 나카노 세키오라는 인물은 에도에 거대한 저택을 세워놓고 떵떵거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나카노 세키오의 저택 바로 앞에 에도의 한 스시 명인이 식초를 넣고 비빈 스시의 밥 위에 가장 맛있는 생선부위를 얻은 스시, 즉 '니기리즈시'를 개발하여 점포를 하나 차렸는데 이 점포가 대성황을 이루면서 오히려 '니기리즈시'가 하코즈시를 몰아내고 스시의 이른바 스탠더드로 등극하였습니다.

 이 니기리즈시는 맛도 더블인만큼, 가격도 더블, 즉 8몬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고급형 스시 대신 염가형 스시도 개발되었는데 이나리즈시와 마키즈시가 그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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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나리즈시(上)와 마키즈시(下))

 스시를 일본인들이 즐겨먹은만큼, 스시의 원료이기도 한 물고기또한 일본인들이 즐겨먹었습니다. 이 중에서도 하츠카츠오, 즉 초여름에 일본 근해에서 최초로 어획된 바다 가다랑어는 아마 일본인들이 가장 선호했던 물고기였을 것입니다.

 1812년 초여름의 기록에 의하면 니혼바시의 어시장에서 하츠카츠오 17마리가 어획되어 입하되었는데 이 중 쇼군가에서 6마리를 사들이고 에도 최초의 음식점에서 3마리를 사들일 정도로 이는 값을 불렀던 초대박 아이템으로 한마리의 가격이 무려 금화 2냥(쌀 350~400리터의 가격수준)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비단 이러한 고급물고기 뿐만 아니라 다양한 해산물들이 큰 인기를 누렸고, 복어와 같은 러시안룰렛스러운 먹을거리도 이의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에도시대 일본의 유명한 하이쿠 시인인 마츠오 바쇼는 이러한 하이쿠를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


" 복어국이라고 했소?
도미도 있지 않소?
정말 목숨 아까운 줄도 모르는군 "


 하지만 이러한 마츠오 바쇼도 결국은 유혹을 이기도 못하고 복어를 먹고 결국 이 하이쿠를 남겼습니다.


" 아이고, 아무 일 없었구나
어젯밤을 편안히 보냈구나
복어국을 맛보았네 "


 마츠오 바쇼가 맛있게 복어를 먹고 만족한 반면 이러한 진미인 복어 때문에 빡친 인물도 존재하는데, 바로 토요토미 히데요시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위하여 히데요시는 거의 전국의 사무라이들을 나고야(토카이의 나고야가 아니라 큐슈의 나고야)로 집합시킵니다. 이 나고야로 가기 위해서는 북큐슈와 나가토 지방 일대를 지나야 했는데, 이곳은 유명한 복어산지였습니다. 복어에 독이 있는걸 몰랐던 많은 사무라이들이 경유지에서 복어를 먹었다가 현지에서 인생퇴갤하고 말았는데 이 사실을 듣고 빡친 히데요시는 "그렇게 죽고 싶으면 조선에 가서 죽을 것이지!"라고 부들부들거리며 사무라이들에게 복어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히데요시가 내린 사무라이들에 대한 복어 금지령은 에도시대 말기까지 이어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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