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8년. 호라즘 제국의 영토였던 오트라르의 영주가 동북쪽에서 온 이교도 대상들을 살해하고 재물을 강탈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 소식을 들은 이교도 군주는 곧 항의 사절단을 호라즘으로 보내지만 이들 중 일부는 죽고, 나머지는 수염이 모조리 깎여버린채(1)귀국해야 했다. 바그다드를 위협하며 대제국을 건설한 호라즘의 샤 무하마드에게 이들은 모욕해도 될 존재들로 여겨졌던 것이다.
- "호라즘 놈들은 내가 누군지 모르는구나!" -
그러자 이 이교도 군주는 분노하여 호라즘을 침공했다. 불행히도 이 이교도 국가의 이름은 몽골이었고, 그들의 군주는 칭기즈칸이라고 불리는 사나이, 테무진이었다.
- 죽기 직전의 부하라 시민들에게 설교를 하는 칭기즈칸 -
분노에 휩싸인 테무진과 사준사구들 앞에 호라즘 제국은 순식간에 풍비박산이 났다. 사마르칸트가 불탔다. 우르겐치가 불탔다. 오트라르는 지도에서 사라졌다. 타슈켄트도 쑥밭으로 개조되었고, 부하라 주민들은 칭기즈칸이 "나는 너희들을 벌하러 너희들의 신이 보낸 신의 채찍이다."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죽어야 했다. 오트라르의 영주는 끓는 수은물(2)을 눈으로 들이붓는 형벌을 받고 죽었다.
호라즘의 샤 무하마드는 한때 중앙아시아와 서남아시아를 호령했던 기세를 모두 잃고 도망쳤다. 칭기즈칸의 사냥개와 사냥매, 제베와 수부타이가 그 뒤를 쫓았는데 무하마드는 카스피해의 한 섬으로 도망가 거기서 죽었다. 이 때 칭기즈칸의 귀에 어떤 소식이 전해졌다. 보르테를 납치했었던 저 빌어먹을 메르키트 족 중 일부가 호라즘 북서쪽의 쿠만족에게로 도주했다는 것이었다.(3)
-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모두 파괴하라!" -
이를 듣고 칭기즈칸은 페르시아 북부를 휩쓸던 제베와 수부타이에게 약간 뜬금없는 명령을 내렸다. 자신이 보낸 약간의 구원병과 함께 카스피해 북쪽을 돌아 자신의 군대와 합류하라는 것이었다. 그냥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리는게 더 빨리 합류할 수 있다는 지리적 조건을 감안할 때 그냥 쿠만족을 한 번 밟아주고 오라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었다.
- "페르시아 속담에 왕이 미치면 여기로 전쟁온다고 하였다. 너희 왕도 미쳤구나." "우리 안 미쳤고 결정적으로 우리 군주 칭호는 왕이 아니라 칸이다!" -
곧 제베와 수부타이는 군대를 이끌고 북상했다. 한창 기세를 올리던 조지아 왕국군이 그들과 대결했지만 무참히 패배했다. 이후 카프카스를 넘던 이들은 다랄스키 협곡에서 산민들과 쿠만족의 연합군에 포위되는 아찔한 상황을 겪었지만 뇌물로 쿠만족을 철수시켰다. 이후 몽골군은 배신한 산민들부터 밟아버리고, 쿠만족과 크림 반도도 약탈하여 뇌물을 회수했다.
제대로 털린 쿠만족은 키예프 루스로 사신을 보냈다. 쿠만족 사신은 러시아인들에게 "오늘은 우리가 당했지만 내일은 그대들이 당할 것입니다."라며 구원을 요청했다. 악랄한 쿠만족들을 겁에 질리게 한 저 낯선 동방의 이방인들에 대한 경계 심리는 러시아인들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이 쿠만족을 흡수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 러시아 공국들은 쿠만족을 지원하기로 했다. 1223년 키예프 루스의 군대는 쿠만족과 힘을 합쳐 약 3만의 대병력을 칼카강으로 진격시켜, 본국으로 돌아가던 제베, 수부타이와 충돌하게 된다.
- "이것들이 비겁하게 뒤통수를 쳐! 오냐 오늘이 니들 제삿날이다!" -
전투 초기 러시아 공국들은 몽골족에게 자신들이 몽골과 싸울 뜻이 없다고 전달하게 하여 그들을 안심시킨 후 배후를 쳐, 천여명의 병사들을 죽이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는 칭기즈칸이 가장 총애하는 두 사냥개를 화나게 하였다. 이들은 러시아-쿠만 연합군 사이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전열을 붕괴시킨 후 포위하여 연합군을 몰살시켰다. 남은 잔여 병력들이 키예프 대공 므트디슬라프 3세의 지휘 하에 언덕에서 3일간 버텼다가 몽골군의 안전 보장 약속을 믿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건 몽골의 속임수였다. 러시아인들이 한번 쓴 수법을 그대로 되갚은 것이었다. 상당수 병력들은 몰살되었고 포로들도 학살당했다. 므트디슬라프 3세도 붙잡혔고, 그는 피를 보지 않는 몽골의 풍습에 따라 질식사당했다.(4) 이렇게 러시아 공국들의 주력 병력들이 이 전투에서 모조리 몰살당해버렸다. 러시아 공국들은 이 피해를 복구하지 못했다. 친척들간의 유혈 투쟁은 줄어들었지만 워낙 크게 피해를 입었고, 설마 또 오겠냐 싶은 마음에 이들은 공동 대응을 생각하지도 못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영지를 지키는 데만 급급했으며 가끔은 친족간의 유혈투쟁 본성을 못 잊고 친척들끼리 싸우기 바빴다. 결국 아무런 대비 없이 13년 후 제대로 된 재앙을 맞이하게 된다. 몽골족이 대대적으로 침공한 것이었다!
<북부 러시아의 참극>
1236년 몽골족이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러시아로 진입한다. 총사령관은 바투. 칭기즈칸의 손자였다. 그 외에 사준사구 중 한 명이자 러시아와 싸운 경험이 있던 수부타이, 오고타이 칸의 아들 구유크, 톨루이의 아들 몽케 등이 원정에 동행했다. 몽골의 왕족들과 백전노장들이 상당수 포함된 말그대로 몽골이 작정하고 만든 대규모 원정군이었다.
이들의 첫 목표는 볼가 불가르였다. 볼가 불가르의 수도 빌라는 금방 함락되고 곧 지도에서 사라졌다. 볼가 불가르가 이렇게 멸망하자 다음 차례는 쿠만족이었다. 쿠만족도 다수가 포로로 잡힌 후 노예로 팔리거나 살해되었다. 바치만이라는 수령이 좀 오래 저항하나 했더니 금방 잡혀죽었고, 일부만이 헝가리로 도주했다. 이 사실을 안 바투는 마침 만나게 된 헝가리인 수도사에게 쿠만족을 헝가리가 받아들이면 러시아가 박살난 이후 다음 목표는 헝가리일 것이라는 내용의 최후통첩을 주어 돌려보냈다.
- 유리 2세가 몽골 사신들의 항복 요구를 거절하는 장면을 그린 삽화 -
이제 남은 것은 러시아 공국들이었다. 바투는 러시아 공국들 중 가장 강대하고, 또 가까이 있던 블라디미르 수즈달 공국의 대공 유리 2세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유리 2세는 이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자 이들은 블라디미르 수즈달 공국 근처에 있던 라쟌을 공격했다. 라쟌의 선봉부대가 그들을 요격했지만 되려 전멸당했고, 5일간의 공성전 끝에 라쟌이 1237년 12월 21일 함락되었다. 라쟌의 공작 유리는 살해되었고, 시민들은 교회로 대피했다가 불타죽었다. 라쟌은 철저하게 짓밟혀져 살아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죽은 자들을 위해 눈물을 흘릴 자도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참고로 라쟌을 구원하러 온 세력은 없었다.
- "너무 쉽네. 화살 괜히 썼나. 모르겠다. 화살이나 회수해야지." -
그 다음은 블라디미르 공국이었다. 콜롬냐, 모스크바 등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주요 도시들이 파괴되었다. 안되겠다 싶었던 유리 2세는 블라디미르 성을 나와 공국을 돌아다니며 병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사이 바투의 주력군이 수도 블라디미르를 공격해 1238년 2월 4일 블라디미를 함락, 약탈하였다. 유리 2세는 수도를 포기하면서까지 모은 병력으로 3월 4일 시트강에서 몽골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블라디미르 공국은 패배했고 유리 2세는 전사했다. 블라디미르 역시 아무도 도와주러 오지 않았다.
- 몽골과 싸우는 러시아 전사들을 보여주는 그림. 1번은 갈리치아 공국의 보야르. 2번은 볼히니아의 석궁 민병대. 3번은 리투아니아 전사이다.-
이후 로스토프, 우글리치, 트베르 등이 파괴되었다. 그나마 토르초크와 코젤스크가 몽골군을 상대로 꽤 오래 버텨주었다. 코젤스크의 경우 4천명이 넘는 몽골군이 전투 도중 전사하여 몽골군에게서 '사악한 마을'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토르초크의 경우 무려 2개월을 버텨냈다. 그러나 결국 두 도시 모두 함락되었고, 잔인하게 파괴되었다. 하지만 토르초크의 저항으로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서 라스푸티차가 찾아왔다.
- 라스푸티차의 위력을 보여주는 20세기 중반 무렵의 사진. 20세기 중반에도 이 지경이니 13세기의 몽골군은 정말 경악했을 것이다.-
이 라스푸티차로 인한 엄청난 뻘밭에 질려버린 몽골군은 노브고로드 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덕분에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겨울이 아닌 봄이 러시아를 구원한 것이었다. 하지만 몽골군의 위세를 옆에서 지켜봤기에 이들 역시 몽골에게 공물을 바치기로 했다. 이후 러시아군은 남쪽으로 이동, 남아있는 쿠만족 잔당들을 쓸어버리는 한편 크림반도를 다시 한 번 약탈하고 알라니아 왕국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카프카스 산민들에게도 다시 한 번 배신의 대가를 치루게 해주었다.
<키예프 루스의 멸망>
1239년 몽골군은 다시 한 번 러시아 공국들에 대한 공세를 재개했다. 체르니코프와 페레야슬라브를 시작으로 수많은 남부 러시아의 공국들이 파괴되기 시작했다. 이들 역시 북부 러시아처럼 지리멸렬하게 자신들의 영지를 지키는데만 급급했다가 모조리 각개격파당했다. 이 무렵 키예프 대공은 미하일 2세(5)였는데, 그는 헝가리, 마조비아 공국(6)에 지원을 요청했다가 거부당하자 직접 갈리치아-볼리니아 공국으로 찾아가 지원을 요청했다. 이 때 보이보데 드미트로라는 장군이 이끄는 갈리치아 공국 지원군이 키예프에 입성하기는 했지만 미하일은 아직 갈리치아에 머무르며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 사이 몽골군이 키예프를 공격했다.
- 몽골에게 함락되는 키예프 -
드미트로는 용맹하게 몽골군에 맞서 싸웠다. 만만치 않은 저항에 몽골군은 키예프 성벽의 약한 부분인 폴란드 문 근처의 목책을 공격했다. 1240년 12월 5일 목책이 결국 파괴되었다. 이 날의 공세는 어떻게 키예프 루스 군대가 겨우 막아내었지만, 키예프 수비군도 엄청나게 지쳐버렸다. 결국 다음 날인 12월 6일 몽골군이 키예프에 입성했다. 키예프 시민들은 한 교회로 도피했지만 몽골군은 그 교회도 파괴하고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이면서 키예프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한 때 번영하며 파리를 촌구석으로 여겨지게 만들던 키예프가 이렇게 무너진 것이었다. 6년 후 이 곳을 지나게 된 카톨릭 수도사 카르피니는 키예프가 있던 곳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고 움막 몇 채만 있다고 기록하였다.
이후 갈리치아 볼히니아 공국도 공격받았고 무참히 파괴되었다. 다닐로와 미하일은 폴란드로 도주했다가 폴란드가 털리자 헝가리로 도주해야했다. 미하일은 1241년, 다닐로는 1245년이 되어서야, 몽골의 종주권을 인정한다는 서약을 하고 러시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또 다른 위협>
이렇게 키예프 루스는 멸망했다. 이제 키예프 대공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정확히 말해 키예프 공국 자체는 존속하였지만 이제 러시아의 대표자가 아니었다. 그나마 대공을 칭하던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이 대표가 된 것도 아니었다. 이제 모든 러시아의 공국들은 몽골족에게 공물을 바쳐야 했다. 각 공들의 임명권은 몽골인 대칸이 가지게 되었으며 러시아인들은 몽골인 군주들에게 충성을 하고, 군대를 제공하며, 재물을 바쳐야 했다. 그들에게 멍에가 씌워진 셈이었다. 훗날 이를 두고 타타르의 멍에라고 부르게 되었다.
- "이제 노브고로트를 평정하러 가자!" -
하지만 아직 러시아 공국들에게 시련이 남아있었다. 바로 카톨릭 세력의 침공이었다.
- 12세기 후반 발트해 지역에서 목조 요새를 건설 중인 덴마크군의 모습. 1번은 덴마크 기사, 2번은 덴마크 하사관, 3번은 포로로 잡힌 에스토니아인 전사. -이미 이들의 침공 전조는 12세기 경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덴마크, 스웨덴, 독일인들이 발트해로 세력권을 뻗어나가면서 충돌이 벌어졌던 것이다. 첫 상대는 일단 발트인, 핀족 계열의 이교도들이었지만 곧 그들의 주적은 러시아인들이 되었다. 스웨덴과 노브고로드의 충돌은 이미 핀란드와 발트해에서 상시적으로 벌어지고 있었고, 독일인들 역시 러시아 공국들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리보니아를 두고 이미 몽골 침공 전부터 충돌이 있었는데 그 결과 러시아 공국들은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에게 리보니아 지역 영토를 전부 빼았기고 말았다.
- 네바강 전투에서 패배하고 도망치는 스웨덴군의 모습. 1번은 스웨덴 기사. 2번은 스웨덴 보병 하사관. 3번은 스웨덴인 선원 혹은 뱃사공.-하지만 이들이 리보니아와 에스토니아에만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1240년 스웨덴의 군대가 노브고로드 공국을 침공했다. 그러나 7월 15일, 스웨덴 군은 네바강에 머무르고 있다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가 이끄는 노브고로드 공국 군대에 의해 전멸당하고 말았다. 스웨덴측 지휘관이 전사하고 종군한 주교들 다수가 살해당할 정도의 대승이었다.
그러나 이걸로 카톨릭의 확장 야욕을 꺾을 수는 없었다. 노브고로드에 대한 성전이 곧 선포되었던 것이다. 성전 명분이라면 아직까지 이교도였던 리투아니아가 더 적절해보이겠지만 사실 리투아니아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리투아니아는 그들이 아직 분열되었던 1236년에 이미 리보니아 검의 기사단 군대를 몰살시킨 전례가 있었다. 더군다나 이들이 몰살된 직후 리투아니아가 통일되었는데 리투아니아를 통일한 인물은 사울레에서 독일인들을 몰살시킨 비킨타스가 아니라 민다우가스라는 인물이었다. 비킨타스도 무서운데 그를 복속시킨 놈은 더 무서운 놈이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한 인간심리. 분열되었을 때도 이기지 못했는데 비킨타스보다 더 강해보이는 놈이 통일을 한 상태이니 리투아니아를 상대하는 건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노브고로드는 달랐다. 러시아 공국들의 분열상이야 이미 유명했고, 더군다나 설령 도우려 해도 그들은 이미 다른 이교도들에게 몰살당했다. 더군다나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불안정한 대공 자리 덕에 쫓겨난 자들이 꽤 있었는데 이들은 다시 한 번 노브고로드 공화국으로 복귀하려고 시도하고 있었고, 그 중 한 명인 블라디미르 므트디슬라비치는 도르팟 대주교 헤르만과 인척지간이었다. 즉 동조자까지 존재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노브고로드는 만만하게 여겨졌다. 그리고 덴마크와 튜튼기사단(6) 등은 자신감을 가지고 노브고로드에 대한 침공을 결의하였다.
아. 근데 알렉산드르 네프스키가 있지 않냐고?
- "네프스키. 이놈이 어디서 까불대는거냐. 이제 꺼져라!" - 그는 그 짧은 기간 사이에 추방당한 상태였다.
(1) 수염이 깎인다는 것은 남성으로써의 상징을 상실한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즉 최악의 모욕인 셈이었다. (2) 기록마다 금이라는 둥, 은이라는 둥 다 다르다. 여기서는 수은설을 채택한다. (3) 사실상 밑에서 서술할 어찌 보면 비상식적인 명령을 설명할 가장 그럴듯한 근거기는 하지만 이것이 러시아 원정, 쿠만족 원정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불확실한 점이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4) 몇몇 기록은 포대 안에 들어간 뒤 몽골인들이 그 위에서 군무를 치는 식으로 압사시켰다고 한다. (5) 전임자는 야로슬라브 3세로 블라디미르 대공 유리 2세의 동생이었다. 그는 형이 전사하자 블라디미르를 복구하기 위해 대공위를 버리고 블라디미르로 가 그 곳의 대공이 되었다. (6) 단 튜튼기사단은 러시아 원정보다는 프로이센의 안정화에 더 주력하려고 했기에 반응이 미지근했고, 주로 튜튼기사단 리보니아 지부를 구성하게 된 검의 형제 기사단쪽에서 참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