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중 노브고로드 공화국이 가장 독창적인 존재였다. 본래 노브고로드는 류리크 왕조의 탄생지였던 유서깊은 도시로 키예프의 뒤를 이은 키예프 루스 제 2의 도시였다. 더군다나 이곳은 바랑기안길의 중심지이며 발트해와도 가까운 곳이라 교역과 상업으로 크게 발전한 도시였다. 당연히 그 상징성은 대단했고, 키예프 대공의 후계자들은 주로 노브고로드에서 대공직을 지내다가 키예프 대공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노브고로드 시민들은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앞서 말했듯이 이 곳이 교역의 중심지라 부가 축적되기 쉬웠다는 점도 있지만 야로슬라프가 자신을 지지해준 보답으로 도시의 절반을 스스로 다스릴 권리를 주는 등의 상당한 자유를 노브고로드 시민들에게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와중에 므트디슬라프의 장남, 브세볼로드가 1117년 노브고로드 공작이 되었다. 그는 이 때 자신은 노브고로드에서 죽겠다고 맹세했으며, 최초의 길드를 세운다든지, 주변의 핀-우구르계 부족들과 싸우며 노브고로드의 영역을 넓혀나가며 정력적으로 통치했다. 하지만 1132년 부친 므티드슬라프가 죽으며 그의 기반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 "이제부터 노브고로드의 대공은 시민들이 직접 뽑겠다! 이따위 대공은 꺼져라!" -
최초의 문제는 그가 페레슬라브 공작을 겸임하게 되면서였다. 노브고로드 시민들은 이것을 앞서 그가 노브고로드에서 죽겠다고 맹세한 것을 위반했다고 간주해버렸다. 다행히 이듬해 브세볼로드가 리보니아를 침공해, 도르팟 일대를 점령하면서 평판이 나아지나 했더니 1134년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과의 전쟁에서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패배하면서, 평판은 최악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결국 1136년 5월 28일. 노브고로드 시민들과 귀족들, 성직자들은 봉기하여 브세볼로드를 유폐시켰다가 곧 추방했다. 이후 노브고로드 시민들은 브세볼로드의 친척 스뱌토슬라프를 대공으로 옹립해버렸다. 이후 1156년에 노브고로드 시민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노브고로드의 대주교를 뽑을 권리(1)를 얻어내면서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 정치를 하게 되었다.
다만 독특하게도 공화국임에도 국가수반은 계속 류리크 가문 출신의 귀족들이 공작이란 이름으로 존속할 수 있었다. 이들의 권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불분명하나 노브고로도 공화국의 공작은 군사령관이었으며, 타 공국과의 외교 문제 등을 해결하는 등 어느정도의 힘은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제약도 많아서 이들은 기본적으로 도시 정부에서 주는 월급을 가지고만 생활해야 했고 세금은 공작의 이름으로 거둘 수 없었으며, 법에 의해 생활이 규제되었다. 만약 이 공작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려고 시도하면 바로 독재자로 규정되어 시민들에 의해 쫓겨나기 일쑤였다.
- 베체를 묘사한 그림. 노브고로드의 베체는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
그런 의미에서 실질적으로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이끌었던 것은 러시아의 민회라 할 수 있던 베체, 그리고 이 베체에서 뽑은 시장 혹은 행정 관료인 6명의 포사드니크(2)와 티샤츠키(3)들, 그리고 노브고로드 대주교 등으로 이루어진 명사 협의회, 혹은 귀족 회의(4)라 불리는 위원회였다. 전반적으로 웬만한 업무는 위원회에서 처리한 것으로 보이지만 중대한 사항일 경우는 베체에서 처리했다. 이 베체는 노브고로드에 있던 성 소피아의 종을 치면 소집됬는데 이 종은 아무나 칠 수 있었고, 한번 소집되면 귀족부터 평범한 시민까지 거의 모든 노브고로드 시민들이 모여서 국정을 논의했다고 전해진다.
-12세기 북부 및 동부지역 러시아를 묘사한 오스프리의 삽화. 1번은 수도승. 2번은 포사드니크. 3번은 수비대 병사이다. -노브고로드는 바랑기안 길이 쿠만족의 침공, 십자군 원정, 콘스탄티노플의 파괴 등으로 쇠락하자, 그 대안으로 모피에 주목하였다. 이들은 계속 핀-우구르계 종족들과 전쟁을 벌이며 동진하였고, 풍부한 모피 산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하늘에서 모피를 가진 동물들이 비처럼 내린다"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모피를 손에 넣어 '모피의 제국'을 건설한 이들은 이 모피를 직접 배에 실어서 유럽의 다른 지역들에 팔았다. 당시 스웨덴 고틀란드 섬에는 이 노브고로드 상인들을 위한 정교회 교회가 2곳이나 존재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덕에 노브고로드는 굉장한 부를 손에 넣었고, 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다. 실제로 노브고로드 시민 다수는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까지의 발굴 결과 천여건의 온갖 서류들(일기, 영수증, 책 기타 등등)이 발견되었는데, 더 많은 양의 문서들이 땅 속에 잠들어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1260년 당시 리보니아를 묘사한 지도. 도르팟을 비롯한 일부 지역은 본래 러시아계 공국들의 영토였던 것을 검의 기사단이 강탈한 것이었다. -
그러나 이 부는 유럽인들의 시샘을 샀고, 마침 카톨릭을 널리 전파하려던 당시의 분위기까지 합쳐져 노브고로드는 서유럽과 충돌하게 되었다. 1142년 발트해 해상에서 스웨덴 함대가 노브고로드 상선을 습격해 150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핀란드를 침공하던 스웨덴 군이 1164년에 라도가 호수를 습격하기도 했다. 그러자 노브고로드 역시 핀족과 연합해 스웨덴을 몇차례 습격, 스웨덴 본토의 시그투나시를 불태워버리기도 했다. 이후에도 스웨덴과 노브고로드는 핀란드 지역을 두고 지속적으로 갈등, 충돌을 빚어왔다.
- "로마를 따르던가 아니면 죽어라!" -하지만 스웨덴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독일인들이었다. 13세기 초엽 리보니아 지역으로 슬금슬금 기어들어오던 독일인으로 구성된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이 러시아 공국들을 건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검의 형제 기사단은 1224년 도르팟을 공격, 노브고로드 공화국 군을 전멸시키고 도르팟을 점령하여 도르팟 대주교령으로 만들어버렸다. 이후 교황청도 1229년, 발트해 지역 이교도들에 대한 교역 제재를 명령하면서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그 명단에 포함, 카톨릭의 영향력을 넓히고, 정교회를 흡수하려는 욕망을 드러내었다. 노브고로드의 운명은 이제 풍전등화에 놓이게 된 것이다.
1108년 아직 페레야슬라브 공작이던 블라디미르 모노마흐는 자신의 아들 유리 돌고루키를 로스토프로 부임시키며 영지 일부를 나누어주었다. 이후 유리 돌고루키는 1121년에 영지의 수도를 로스토프에서 수즈달로 옮겼다. 이로써 그의 공국은 로스토프-수즈달 공국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발트계 및 핀족 계열의 이민족들과 맞서 싸우며 영토를 넓히고, 트베르, 유리 폴스키 등 수많은 도시와 요새들을 건설하였다. 이 때 건설된 도시 중에는 모스크바가 있었는데 모스크바가 최초로 기록에 등장하는 건 1147년, 유리가 자신의 동맹자 스뱌토슬라프를 초대하면서 모스크바를 언급한 부분이었다. 정황상 이미 이 이전에 모스크바란 이름의 촌락은 그 전에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유리 돌고루키는 정력적인 정복 활동으로 자신의 공국을 건설하였고, 이 힘을 바탕으로 라쟌 공국을 굴복시켰다가 1149년 키예프까지 정복했다. 하지만 2년 후 반격을 개시한 이자슬라프 등에 의해 유리는 키예프에서 쫓겨났다. 1155년 다시 한 번 군사를 일으켜 키예프를 점령하기는 했지만 2년 후 그는 급사하였고, 키예프는 다시 한 번 상실하고 말았다.
-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JPG -
이후 그의 아들 안드레이가 공작이 되었다. 안드레이는 수도를 수즈달에서 할아버지가 세운 블라디미르로 옮겼다. 그리고 이제 로스토프-수즈달 공국은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으로 불리게 되었다. 안드레이는 1169년 군대를 이끌고 키예프를 침공해 키예프를 짓밟고 자신이 대공이 되었다. 그리고 대공의 거처를 블라디미르로 옮겨버렸다. 다른 공국들은 이를 거의 인정하지는 않고 여전히 키예프를 습격하며 자신이 대공이다 하고 뽐내고 다니기는 했다. 하지만 이제 키예프의 권위가 땅바닥에 떨어졌다는 것, 그리고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위세를 무시할 수 없으며,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이 여러 러시아 공국들 중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공국이라는 것은 확실해졌다.
다만 이 과정에서 그의 힘을 두려워한 보야르들이 생겨났고 이들은 1174년 6월 안드레이를 암살했다. 블라디미르 공국은 이 사건으로 힘이 약해지는 듯 했지만 잠시 키예프 대공이 되기도 했던 안드레이의 동생 브세볼로드가 2년 후에 대공이 되면서 안정을 찾았다. 브세볼로드는 블라디미르의 영역을 넓히고, 도시와 교회, 요새를 건설하며 공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였다.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바로 나름 후계가 안정적이라는 것과 동시에 공의 권력이 상당히 강했다는 것이었다. 아직까지 계승 법칙이 불확실한 측면이 있기는 했지만 유리 돌고루키 이후 계승을 두고 분란이 생긴 적은 한 번도 없었고, 대공들의 통치는 안정적이었다. 더군다나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영역 절대 다수는 본래 발트계나 핀-우구르 계열의 이민족들의 영토였었고, 따라서 블라디미르 공국의 발전은 이들을 몰아내면서 영역을 확장하고 도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즉 최초로 이 곳을 정복하고, 사람들을 끌어모으던 자는 바로 공작이었던 셈이다.
러시아의 다른 지역들은 러시아에 흡수된 본래의 토착민들이 먼저 도시를 건설하거나, 기반이 되었고, 나중에 유입된 공작들이 지배층을 형성한 것인지라 아무래도 민중들 혹은 토착 유력자들의 권력이 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공국의 영역의 도시들 다수는 류리크 가문원이 토착민들을 쫓아낸 후 다른 지역의 러시아인들을 끌어모아 건설하고, 보호하고, 지원한 것이라 애시당초 공작의 권위에 도전할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는 훗날 러시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갈리치아 볼리니아 공국- 파란만장>
사실 키예프 루스가 분열된 후 가장 파란만장했던 역사를 가진 곳 중 하나가 바로 이 갈리치아 볼리니아 공국이었다. 키예프 루스 남서쪽에 위치한 이 곳은 폴란드와의 분쟁지인 붉은 루테니아도 포함한 곳이었으며 본래 볼리니아 공국과 할리치 공국, 이렇게 2개의 공국이 존재하고 있었다.
- " 거 형님 갈 길이 바쁜데 이렇게 개입해야겠냐!" -할리치 공국은 꽤나 불안정하여, 1188년 그 곳의 대공이었던 블라디미르가 귀족들에 의해 쫓겨나 헝가리로 망명을 가기도 했다. 헝가리 왕 벨라 3세는 블라디미르의 지원 요청을 받아 할리치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하지만 약속의 뒷부분, 즉 블라디미르에게 할리치를 돌려준다는 부분은 이행하지 않았다. 벨라 3세는 할리치를 그대로 헝가리에 귀속시키고 블라디미르를 구금했다. 하지만 곧 블라디미르는 헝가리를 탈출, 신성로마제국에 망명해 프리드리히 바바로사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프리드리히 바바로사는 폴란드(5)의 지원을 얻을 수 있게 도와주면서, 3차 십자군 원정을 위해 헝가리에 들렀을 때 벨라를 압박했다. 뭐 어차피 할리치 공국은 이 무렵 헝가리의 통제력도 약화되어 무주공산 상태에서 볼히니아 공국에 넘어갔었던 상태였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과 폴란드의 지원을 받은 블라디미르는 할리치 공국을 탈환할 수 있었다.
볼히니아 공국은 이에 비하면 나름 안정적으로 굴러갔고, 가끔 키예프를 차지하기도 했었다. 1170년 볼히니아의 공작이 된 로만은 1189년 경 할리치 귀족 등의 지지를 받아 잠시 할리치 대공이 되었다가 곧 블라디미르의 반격으로 쫓겨났다. 이후 로만은 자신의 장인 류리크 2세와 1195년 영토 문제를 두고 다투어 몇몇 도시들을 장악했고, 1199년 할리치 공 블라디미르가 죽자 카지미에시의 아들 레셰크의 지원을 받아 할리치를 합병, 갈리치아-볼리니아 공국을 건설해냈다.
- "교황의 사절이라고! 꺼지시구려!" -
이후 그는 쿠만족, 즉 폴로베츠인들을 막기 위해 비잔틴 제국에 접근, 1200년에 이삭 2세의 딸과 결혼하였다. 이후 그는 쿠만족, 리투아니아인, 러시아 공국들, 헝가리에 대한 군사적 원정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6) 쿠만 원정 중에는 잠시 화해했던 장인 류리크 2세와 사이가 벌어져 그와 그의 가족들을 체포해 수도승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했다. 그러자 두려움을 느낀 레셰크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에게 간청해 그에게 루스의 왕관을 제의하는 대신 로마 교황을 받아들이도록 하여, 종교적 연대를 맺는 방안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교황청은 이에 흥미를 느끼고 로만에게 사절을 보냈지만 로만은 이를 거부했다. 이후 로만은 레셰크에 대한 응징 원정에 나섰지만, 자비호스트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하였다.
- "맛있겠네. 저거 딱 먹기 좋게 생겼네'" -이후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은 혼란에 빠졌다. 로만의 장남 다닐로가 겨우 4살이었기 때문이다. 헝가리 왕 안드레 2세와 폴란드의 고공 레셰크, 갈리치아 공국 내부 보야르들이 바로 다닐로를 이용해먹거나 쫓아낼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다닐로는 이듬해 귀족들에게 쫓겨나 헝가리로 도주했고, 애시당초 헝가리의 안드레는 로만이 죽자마자 자신을 갈리치아의 왕(7)이라고 칭한 상황에서 이 꼴을 보자 로만이라는 류리크 가문 일원 중 한 명을 갈리치아 공작에 앉혔다. 그러다 1208년 그와 귀족들이 다투자 할리치를 점령했다.
그러나 할리치는 곧 블라디미르라는 인물에 의해 점령되었고, 헝가리 내부 사정도 복잡해져, 한동안 신경을 끌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어찌저찌 복귀했던 다닐로가 1213년 다시 쫓겨나자 이를 명분으로 레셰크와 함께 갈리치아를 점령하고는 레셰크와 다닐로까지 배제시키고 자신의 아들 칼만으로 하여금 갈리치아를 통제하게 하였다.
그러다 어느정도 성숙한 다닐로는 곧 다른 류리크 가문 친척의 지원을 받아 1219년 칼만을 쫓아내고 갈리치아를 탈환했다. 1221년까지 헝가리인들은 갈리치아에서 축출되었고, 다닐로는 갈리치아를 확고하게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상 이런 막장의 원인은 보야르들에게 있었다. 사실상 보야르들이 어린 대공을 가지고 놀고, 심지어는 폐위시키고 하면서 외세의 개입을 불러왔던 것이다. 보야르들의 위세가 얼마나 컸으면 1210년에는 류리크 가문 출신이 아닌 보야르 한 명이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의 공작이 되는 엽기적인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물론 그는 금방 자리에서 물러나야했지만 이후에도 보야르들은 수시로 다닐로와 대립했다. 애시당초 남서부 러시아에서 보야르들의 권력은 상당히 강해서 공국의 공작들이 이들을 통제하는데 애를 먹기도 했다.
사실 지금 이 글에서는 러시아의 분열 시기에서 가장 비중이 컸던 3개의 공국만을 다루었지만 사실 당시 러시아에는 더 많은 공국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리보니아에도 어느정도 손을 뻗쳤던 폴로츠크 공국이라던가, 라쟌 공국, 노브고로드-세베르스키 공국이라던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의 공국들이 난립하며 서로 다투고 있는 현실이었다.
- "이 모든 것을 끝내러 왔다! 반항하는 것은 모두 밟아주겠다!"- 그리고 이들을 모두 정리해버리기 위한 자들이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1) 제비뽑기로 뽑았다고 전해진다. 물론 제비뽑기로 뽑혔다고 해도 총대주교의 승인은 받아내야했지만 형식적이었다. (2) 단 이 포사드니크가 6명이 된 것은 몽골 침공 이후의 일이다. (3) 주로 천인대장으로 번역된다. (4) 단 이 위원회의 존재 유무는 불확실한 면모가 있다. (5) 당시 폴란드는 분열상태였고, 그나마 카지미에시가 폴란드의 여러 공국들을 대표하는 고공 혹은 대공(영어로 High Duke)의 칭호를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카지미에시는 원래 로만에 호의적이었지만 바르바로사의 압력으로 블라디미르를 지지해야 했다. (6) 갈리치아의 연대기는 로만을 "그는 이교도들을 향해서 마치 사자처럼 자신의 몸을 던졌고, 스라소니처럼 포효했으며, 악어처럼 파멸을 안겨다주었고, 독수리처럼 그들의 땅을 제압했으며, 오록스처럼 용맹스러웠다."고 기록했다. (7) 나중에 이 칭호는 돌고 돌아 합스부르크가문에게까지 넘어간다. 그리고 합스부르크는 폴란드 분할을 통해 실제로 갈리치아를 통치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