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근대화론의 허구를 밝힌다 / 이재환 2000. 6. 19
우리는 근대화란 용어를 쉽게 사용한다. 박정희의 경제개발정책을 근대화라고 말하고 日帝가 조선을 침략해 35년간 국권을 강탈했던 기간에 있었던 산업화를 근대화라 말하는 몰상식한 학자들이 있다.
서구인들이 말하는 근대화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스스로 생각하여 판단하고 존재가치를 인식할 때, 神에 예속되거나 귀족에게 예속되거나 왕에게 지배받거나, 식민지 지배를 받거나, 파시스트에게 구속되지 않는 그런 사상적 자유가 대세를 이루는 시대를 근대화라고 말하는 것이다.
배부르게 된 것을 근대화라 하지 아니하며, 파시스트가 횡행하고 자신의 意思 없이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그런 시대, 남의 권리는 짓밟으며 자기의 권리만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런 시대를 근대화된 시대라고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특정 계층에게 일방적 혜택을 준 불평등한 그들만의 경제개발은 산업화일 뿐 결코 근대화라고 불러서는 안된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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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 '식민지 근대화'라는 그럴싸한 신화(神話)
요즘 들어서 우리 학계에서는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뒤에 수탈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단순히 日帝 식민지 시대를 수탈의 역사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뒤에 철도를 놓고 공장을 만들고 토지 정리를 하면서 비록 목적은 식민지화에 두었으나 결과적으로 한국의 공업을 일으켰고 산업의 '근대화'를 가져왔다. 이 '근대화'가 서기 1960년대의 공업화와 최근까지의 경제발전으로 이어져 내려왔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日帝 식민지가 되었기 때문에 공업이 발전하고 상업이 일어났으며 아울러 농업도 봉건적인 농업에서 벗어나 비로소 '근대적'인 농업으로 나아갔다는 말이 성립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식민지 체제를 '수탈과 퇴보'의 시기로 보지 말고, '발전과 응전(應戰)'의 時期로 보아 그 부분에 있어서만은 식민지 체제를 긍정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이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하지만 그 말이 과연 사실인가? 다시 말해서 식민지에 취해진 경제적인 조치들 - 토지조사사업, 산미(産米)증식계획, 공장 건설 - 이 모두 식민지에 참된 '근대화된 경제'와 완전한 자본주의화를 안겨다 주었으며 이것이 그대로 광복 이후에도 공업화로 이어졌는가?
여러 가지로 살펴본 결과 - 설령 국권 상실과 식민지라는 현실, 그리고 식민종주국이 식민지인의 근대화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식민지를 원료수탈과 경제착취의 기지(基地)로 삼으려고 투자했다는 사실을 빼더라도 - 냉정하게 경제적, 사회구조적으로 살펴보아도 日帝의 '투자'는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으며 서기 1960년대 한국의 경제개발로는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조선 - 북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본 보고서는 여러 가지 이론들 - 토지조사사업이 '근대적인 토지소유체제'를 가져왔다는 주장, 총독부가 적극적으로 조선에 공업을 일으켰다는 주장, 서기 1930년대에 日帝가 많은 공장을 세우면서 조선의 공업이 발전했다는 주장, 식민지 시절의 '공업화'와 '토지개혁(?)'이 광복 이후에 그대로 한국에 이어졌다는 주장을 자료와 실례를 들어가면서 반박할 것이며, 이런 논의 자체가 일어나는 현실을 비판하고 한국 역사학계의 보다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경제종속론 비판을 촉구할 것이다.
2. 조선총독부는 과연 조선의 공업을 '장려'했나?
'식민지 근대화론'에서 주장하는 가장 중요한 주장 가운데 하나는 조선총독부와 일본 자본이 식민지 조선에 '적극적으로' 자본을 유치하고 공장을 세우고 철도를 놓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조선의 자본주의가 발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서기 1910년 12월 회사령(會社令)이라는 법을 발표하였다. 회사령(會社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제 1조 : 조선인 회사의 설립은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제 2조 : 조선 밖에서 설립된 회사가 한국에 본점이자 지점을 둘 때에도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제 4조 : 위 조건을 위반할 때, 그리고 '선량한' 풍습을 위반할 때에는 사업을 정지, 금지할 수 있고 회사를 폐쇄하거나 내쫓을 수 있다.
제 12조 : 제 1 조의 허가를 받지 않고 회사의 설립행위를 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禁錮), 5천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고, 부실신고를 하여 허가 받은 자도 이와 같다.
일본 '본국'의 경우와는 달리 거기서는 기업을 만들기만 하면 무조건 허가해 주었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조선총독부가 회사를 적극적으로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총독부에 신고하고 허가를 받아야만 회사를 만들 수 있도록 하는 억제策을 썼다. 외국 기업도 조선에 마음대로 들어올 수 없었고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야만 지부(支部)를 세울 수 있어 자유로운 무역활동을 억제 당했다.
또 총독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회사는 회사 창업주를 감옥에 가두고 벌금을 물려서 회사를 꾸려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조선 안에서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과 회사설립을 통한 자본주의의 발전 (기틀을 닦는 일)을 막았던 것이다.
한마디로 조선총독부는 회사령을 발표하여 조선에서 회사가 세워지고 커지는 일을 막았고, 결과적으로 조선에서 자본주의가 자라나는 일을 막았다. 비록 서기 1920년에 회사令이 철폐되기는 하지만, 이때 성장이 가로막힌 조선의 자본주의는 이후로도 제대로 발전하지 못한다. 이런 조치를 취한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자본주의화를 도왔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그렇다면 회사령이 철폐된 이후에, 그러니까 조선에 일본 자본이 들어서기 시작하고 공장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만주사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뒤에 세워진 공장들은 조선의 자본주의 발전에 - 경제적으로 - 도움이 되었는가?
회사令이 철폐된 뒤인 서기 1928년의 조사에 나온 경성(서울)시내 토막민(식민지 시절에 생겨난 도시빈민)의 직업 분포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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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928년의 토막민 통계(統計)(총 1,143명 조사) :
510명(30.1%) : 무직
361명(32%) : 날품팔이
91명(8%) : 지게꾼
28명(2%) : 상점 고용인
28명(2%) : 목수
25명(2%) : 인력거꾼
20명(2%) : 石工
15명(1%) : 회사 직공(職工)
15명(!%) : 과일 행상(行商)
50명(4%) :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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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표에서는 빈민의 44.6%가 일자리가 없는 상태에 처해 있다. 또 일자리가 있는 사람도 공장노동자가 아니라 대부분 "날품팔이, 지게꾼, 상점고용인, 목수, 인력거꾼, 石工, 회사 직공(職工), 과일 행상(行商)"처럼 공업생산에 별다른 도움이 못 되는 일을 하고 있다. 만약 총독부가 조선에 자본주의를 '제대로' 심었다면, 식민지 조선의 빈민들을 공장노동자로 충분히 흡수했어야 했다.
하지만 도표에서 보듯이 대부분의 조선 빈민들은 공장에 들어가지도 못했고, 기껏 일자리가 있다는 사람들은 날품팔이를 하거나 인력거꾼이 되거나 지게꾼이 되는 등 공업화와는 관련이 없는 일에만 종사하고 있었다. 따라서 서기 1920년대의 일본 자본주의는 식민지 조선에 공업화를 크게 일으키지 못하였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서기 1930년대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래는 토막민에 대한 서기 1931년의 통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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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931년의 토막민 통계(총 1536명 조사) :
462명(30.1%) : 날품팔이
200명(13%) : 공사장 인부
164명(10.7%) : 지게꾼
270명(17.6%) :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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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화'가 되었다는 서기 1931년에도 대부분의 빈민들은 공장노동자로 일하지 않고 "날품팔이"로 일했고, 그 다음이 "공사장 인부"와 "지게꾼"이었다. 일본의 자본주의는 농토에서 쫓겨난 식민지 조선의 빈민들을 노동자로 끌어들일 만큼 발전하지도 못했고, 조선에 전반적인 '공업화'를 불러오지도 못했다. 한마디로 조선 빈민들이 "공장노동자가 될 수 있는 길은 대단히 좁았던 것(강만길 교수)"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일본 때문에 '공업화' 되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심지어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서 '군수공업'이 활발하게 일어나던 때인 서기 1942년에도 조선 빈민들이 종사한 직업 가운데 "제일 높은 비율을 차지한 것이 인부"(강만길 교수)였다.
조선의 공업화를 앞당겼다면, - 비록 군수공업일지라도 - 공장노동자의 비율이 높아지고 다른 직업의 비율은 상대적으로 낮았어야지 그 반대로 공장노동자의 비율은 낮고 날품팔이나 인부의 비율만 높았다는 사실은 일본은 식민지 지배가 끝나는 날까지 조선에 참된 '공업화'를 불러오지도 못했고, 따라서 일본에 의해 '공업화'가 되었다는 말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음을 보여준다.
만주사변(滿洲事變)이나 중일(中日)전쟁, 태평양전쟁 때 조선에 많은 공장이 들어섰고 우리가 징용을 당하면서 노동자로 불려가지 않았느냐고 반문하실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노동력 대부분이 전쟁 기간중에만 동원되었고 광복 이후에는 공장노동자가 되지 않고 돌아와서 그대로 농민이나 실업자가 되었다. 결국 "日帝의 식민지배 정책 때문에 농촌에서 강제로 쫓겨났던 조선의 노동력은 해방과 함께 거의 대부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것(강만길 교수)"이다. '원점'으로 되돌아간 셈이다. 전쟁기간 동안의 군수공업이나 강제 징용도 조선의 자본주의화에 도움을 주거나 간접적인 바탕이 되지는 못했다.
또 강만길 교수의 말을 빌리면 "서기 1944년에 조선에서 생산되는 선철의 89.4%가 일본으로 반출된 데서 알 수 있듯이 생산품의 대부분이 군수공업의 원료로서 일본으로 반출되어 조선 자체의 민수용 중화학공업의 발전으로 연결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공업이 발전하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공장의 대부분은 북한에 집중되어 있었고, 그것조차도 한국 전쟁 때 전쟁으로 대부분 파괴되었다. 따라서 남한의 공업화에는 日帝시대 남겨졌던 공장들이 별 도움이 안 되었으며 한국(남한)과 조선(북한) - 특히 남한은 완전히 無에서 새로 시작해야 했다. 만약 일본이 남기고 간 공장 때문에 공업화와 근대화가 가능했다면 어째서 일본이 세운 공장이 상대적으로 많았던 북한이 지금은 한국보다 더 경제가 낙후되고 외부의 원조가 없이는 버티지도 못할 정도가 되었는가?
게다가 식민지 시대 전쟁을 수행하려고 만든 공장을 돌리던 대부분의 기술자들은 "거의 일본인 경영자와 기술자가 담당했고 조선인이 기술에 접근할 기회는 극히 예외적이었다."(주종환 교수) 이 결과로 "戰後 일본인 경영자와 기술자가 본토로 철수한 이후에 남겨졌던 공장은 거의 모두 조업이 정지되어 버릴 정도였다."(주종환 교수) 따라서 일본이 아무리 공장을 세우고 돌렸다 해도 그것이 조선인 기술자나 숙련공을 길러내지는 못했으며, 공업을 발전시키려고 해도 공업기술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단순 노동만을 할 줄 아는 노동자만 있는 상황에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일본의 식민지 공업정책은 공업화를 불러올 만큼 크게 발달하지도 못했고, 공업화에 도움이 되는 기술자를 길러내지도 않았다. 일본의 조선 공업화는 패전과 더불어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갈 정도로 허약한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이 조선의 공업화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는 말은 사실과 다르다.
3. 과연 조선총독부는 농업 근대화를 일으켰는가?
총독부가 조선에서 한 일 가운데 하나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신고하지 않은 토지를 빼앗고 그 토지에 일본인 농민들을 이주시켜서 地主로 만든 뒤 조선인에게서 소작료를 받게 한 지주제(地主制)를 확립한 일이었다.
토지 소유가 地主와 소작민(小作民)이라는 봉건적인 관계를 벗어나, 오늘날의 농촌처럼 地主에게 매이지 않고 농민들이 마음대로 땅을 사고 팔 수 있으며 이사를 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옮겨갈 수 있고 자기 땅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상황을 농촌의 근대화라고 한다면, 총독부는 농촌을 '근대화'하기는커녕 오히려 봉건적인 토지 소유 제도를 더욱 강하게 굳힌 셈이다.
게다가 총독부는 농민들이 그런 地主제도에 반항하거나 불만을 털어놓는 일까지도 경찰과 군대로 강하게 억눌렀다. 半 봉건적인 제도에 대한 인민의 저항이나 불만 제기를 권력인 총독부가 억누르고 그 제도를 부수지 못하게 막았다는 사실은 총독부가 '근대화'로 가는 과정을 억눌렀다는 사실을 말해주며 결과적으로(사실은 의도적으로) 총독부는 조선 농민들과 조선의 농촌이 근대화를 향해 가는 길을 가로막았다.
만약 농촌을 근대화 시키려고 했다면 광복 이후 이루어진 토지개혁이나 地主制 타파(북한의 경우)로 봉건적인 소유제도를 강제력으로 무너뜨리고 농민들의 생활을 향상시켰어야 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농민들이 자치를 하거나 농민들이 자작농(自作農)이 되는 일을 막고, 대부분의 농민을 소작농(小作農)으로 삼아 地主에게 일방적으로 종속되게 만들어 저항을 허락하지 않은 총독부의 조치를 근대화라고 말할 수는 없다.
농촌에서 일하던 농민들은 과연 자본주의에 도움을 줄 만한 존재들이었는가? 자세히 살펴보았을 때 답변은 부정적이다. 농민들은 지주에게 소작료를 바쳐야 했는데, 자본주의 경제에서의 중요한 매개체인 돈이 아니라 곡식이라는 '現物'이었고 그것도 수확량의 50%를 넘었다. 농민에게는 거의 남는 것이 없었다.
소작료를 낼 때 돈이 아니라 곡식이라는 現物로 내야 했던 자체가 자본주의적이지 않거니와, 잉여 생산량의 대부분을 소작료로 바치고 남는 것이(소비활동에 쓰거나 다른 일에 투자할) 거의 없어서 소비자가 될 수 없었던 농민들이 자본주의 경제에 기여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인신구속관계(人身拘束關係)도 근대적이지 못했다. 地主와 소작인이라는 관계 자체가 봉건적인 관계였다. 또 지주는 마치 중세 西유럽에서 영주가 '중요한 노동력'인 농노(農奴)를 단속했듯이 농민들이 지주에게 진 빚을 반드시 갚도록 소작인을 '5人組 제도'로 묶어 서로 감시하도록 하고 소작인이 '도당(徒黨)을 만들고' '불온한 언동'을 하지 못하도록 감시했다. 소작인은 마음대로 이사하지도 못했고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는 일도 嚴禁했다.(중세 西유럽의 농노(農奴)제도와 다를 게 무엇인가? 이것이 근대적인 토지소유제도인가?)
또 소작인은 지주에게 완전히 매여 있었다. 비료를 사거나, 씨앗을 사거나, 농기구를 사거나, 농사에 쓸 소를 빌리는 데에도 지주에게 기대야 했고 이는 農奴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日帝의 地主제도는 自作農을 몰락시키고 근대적인 토지소유제도가 나타날 길을 막아버리는 결과를 불러왔다.
강만길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
서기 1916년에는 自作農 비율이 20.1%, 自小作農(自作農이면서 소작농)이 40.6%, 소작농이 36.8%, 地主가 2.5% 였습니다. 소작농 비율이 36.8%인 데 비해 自作農과 自小作農을 합친 비율이 60.7%나 되어 농촌 중간층이 그만큼 많았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16년 뒤인 서기 1932년에는 自作農 비율이 16.7%, 自小作農이 26%, 소작농이 54.2%, 地主가 3.7%로 변했습니다. 自作農과 自小作農을 합친 비율이 60.7%에서 42.7%로 감소한 데 비해 소작농이 36.8%에서 54.2%로 크게 증가하고, 地主도 2.5%에서 3.7%로 크게 증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강만길 교수의 책 [20세기 우리 역사]에서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은 또 어떤가? 쌀 생산량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나, 그 이익은 경작 농민층에게 돌아가지 않고 지주들에게 돌아갔다. 또 돈이 아닌 現物(곡식)로 내야 하는 소작료 제도(는 기껏 늘어난 쌀 생산량을 대부분 지주에게 바쳐야 하는 결과를 불러왔고 (산미증식(産米增殖)을 위한 토지 개량 지역에 과세가 집중됨), 잉여량을 모두 그런 식으로 빼앗긴 농민들은 자주적인 주체로 자라나지 못했다.
결국 조선총독부의 조선 농업정책은 근대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근대화를 가로막는 半봉건적인 것이었으며, 조선 농민들에게 근대화를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지는 '농노제(農奴制)와 같은' 地主制를 가져다 주었다.
4. 맺는 말 - '잘못된 신화'에서 벗어나길 바라면서
지금까지 필자는, 간단하게나마 우리나라의 농업과 공업이 식민지시대부터 크게 일어났다는 주장을 통계와 자료를 통해 반박하였다.
이 글을 쓰면서 크게 괴로왔던 점은, 아직도 논의될 가치가 없는 '식민지 근대화' 같은 주장이 우리 학계에서 진지하게 논의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직접적인 공업화와 근대화로 이어지지 못한 사실은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그저 겉모습만 보고서 근대화되었다고 주장하는 행태가 이런 史觀을 낳았다.
그러나 나는 아울러 '식민지 = 무조건 수탈' 이라는 등식만을 꼭 붙든 채 '왜,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얼마나' 식민지와 공업화, '근대화'가 연결되어 있는지를 따져보지 않은 지금까지의 한국 역사학계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구태의연하게 수탈만 강조하고 있다가 결국 '자료와 증거를 동원한' 식민지 근대화론者들에게 날벼락을 얻어맞은 셈이니까.
앞으로의 역사학은 - 비록 식민지 근대화론者들의 주장에는 찬성할 수 없지만 - 감정에서만 보는 태도에서 벗어나, 보다 구체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증거로 하나하나 따져 보고 반박할 줄 아는 자세를 요구하며, 이것은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라 하나의 '의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