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들어가기전에 제목에 쓴 자유는 '자유의지' 혹은 '인과론'에서 말하는 자유가 아닙니다.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 기계론적으로 인과에 묶이지 않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안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받는 상태, 억압받는 상황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상황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사회적인 합의를 갖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칸트가 말하는 계열의 시작을 결정할 수 있는 형이상학적 자유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인간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상황을 말하는 통상적 의미의 자유입니다. 또한 제가 인문학적으로 소양이 떨어지는 관계로 어쩌면 제가 모르는 어떤 클리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은 역사적으로 역사 이후의 시간은 대부분 억압의 시기였습니다. 일자 혹은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인간을 말하는 것이죠. 동양, 서양을 막론하고 일부의 황제, 왕, 귀족, 관료를 제외한 인간의 삶은 자유보다는 억압이 지배하는 사회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최고의 위치에 있는 황제 혹은 왕을 제외한 귀족, 관료들도 민중에 비해 폭넓은 자유를 갖지만 일자에 비해서는 자유롭지 않았죠. 그러한 역사를 유물론적으로 해석을 한다면 한정된 생산력으로 말미암아 대부분의 생산을 맡고 있는 민중의 소비를 억제하기 위하여 억압했다는 해석이 가능해 보입니다.
근대 이전의 생산력은 사회구성원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엔 너무나 부족했고, 그래서 지배계층은 자신들의 소비를 위하여 민중의 소비를 억압한 것이죠. 민중의 소비를 억제하고 자원을 혹은 재화를 지배계층이 독점하기 위하여, 종교를 포함한 여러가지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검소하고 절약하는 삶이 갖는 매력을 강조하거나 혹은 사후의 천국을 약속한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 자신들은 생산에 이바지하는 면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잉여가치를 독점하여 충분히 소비하고 남는 것의 일부를 민중에게 돌려주면서 사민이니 애인이니 하며 성군의 칭호를 받는 것이죠.
서양에서는 근대에 이르러 지배계층의 잉여가치 독점에 대항하여 영국의 명예혁명, 프랑스 혁명, 산업혁명 등의 시기를 거치며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고민을 하고, 폭넓은 자유를 보장받으며, 신분제가 희석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서유럽의 자유주의가 나폴레옹으로 인하여 유럽 전반으로 퍼지고,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전세계적으로 자유주의가 퍼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제가 역사에 대한 소양이 부족하여 확언하기는 힘들지만 그런식의 역사가 근대 이후의 자유에 관한 역사해석이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유물론적으로 바라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닐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금 딴길로 새보자면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원래 자본주의가 동양이 아닌 서양에서 발전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하여 씌어진 책입니다. 저도 직접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대강의 내용은 절약, 검소를 강조하는 청교도윤리가 소비보다는 생산을 강요하여 서양에서 폭발적인 생산력 증대를 초래하여 자본주의가 발전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자본가가 소비에 대한 욕망을 누르고 자신의 자본을 소비시키지 않고 다시 자본운동에 투입함으로써 사회 전반적인 생산력이 늘어난다는 것이죠. 상당히 그럴싸한 의견이라 한동안 서양자본주의 해석의 교과서와 같이 받아들여집니다. 하지만 곧 엄청난 비판을 맞게 되는데 자본주의의 본질을 꿰뚫어본 보드리야르가 등장하기 때문이죠.
보드리야르는 자본주의는 생산이 아닌 소비에 의해 발전하고 생산보다는 소비가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비가 담보되지 않는 생산은 공황을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생산은 결국 소비자의 욕망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으며, 소비야말로 생산을 이끌어내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죠. 그래서 자본주의는 생산력도 중요하지만 소비를 자극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눈만 돌리면 보이는 광고들, 비록 멀쩡히 사용할 수 있지만 아직도 홈버튼이 있는 휴대폰을 쓰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는 암시를 주는 것도 생산보다는 소비가 자본주의의 정수라는 이해가 생기면서 발생하는 현상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소비, 소비가 늘어나야 자본이 더 커질 수 있다는 것이죠.
다시 원래 얘기로 돌아오면 근대 이전의 경제는 성장보다는 정체되어 있는 시기였습니다. 그러므로 한정되어 있는 자원, 재화를 누군가 갖게 되면 누군가는 소외되어야 하는 것이죠. 성장이 담보되지 않는 경제상황에서 지배계층에게 가장 유리하고 효율적인 이데올로기는 절약, 검소, 노동이었을 것이라 청빈, 충성을 강조하는 유학, 기독교 등의 이데올로기가 세계를 지배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생산의 잠재력이 확보되자 더욱 자본이 커질 수 있는 방향은 민중이 민중이 아닌 개인이 되어 소비를 폭발적으로 늘리는 것이 되었고, 부수적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가 확대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현대는 단지 존엄성을 가진 개채로서의 개인뿐 아니라 개인의 개성을 중요시하면서 차별적인 소비를 만들어냅니다. 더욱이 한 개인조차도 며느리로서의 소비, 아내로서의 소비, 엄마로서의 소비, 전업주부로서의 소비, 맞벌이 회사원으로서의 소비, 여성으로서이 소비를 나눔으로써 더 많은 소비를 강요하고 있죠. 그러면서 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가 중요해지기도 합니다. 엄마는 소중하니까 이것이 필요해, 전업주부로서는 이것을 해야 더 존중받는 느낌을 받게 될거야, 남자라면 이 정도는 갖추고 있어야지 하면서요.
인간의 긴 역사를 대입하여 유물론적으로 바라보고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을 것 같습니다. 호모 사피엔스 수십만년간 대부분을 차지하는 구석기 시대는 재화 획득 과정의 효율성으로 인하여 이동하며 생활을 했고, 역사시대에 이르러서는 정주생활이 가장 효율적인 재화 획득 방법이라 인간의 삶을 정주생활로 결정되었으며, 더 효율적인 재화 획득 및 분배를 위해 상업이 발생하였습니다. 또한 지배계층이 분화되면서 기득권에게 가장 효율적인 재화 분배과정을 위하여 억압이 더 심화되고, 과거의 억압적인 분위기 보다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자본운동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가 발전하였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상당히 불편한 얘기지만, 또한 유물론적으로 지나치게 편향된 결론이지만 결론적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는 자본이 허락하였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다라는 의견이 가능해 보입니다. 모든 인간의 정치, 사상이 경제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유물론이 갖는 한계가 있고, 피로 얻은 자유를 너무 폄하한다는 문제가 분명히 있습니다. 단지 한가지(유물론)에 불과한, 여러가지 다양한 방법중에 단지 한가지의 세상을 보는 방법이라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세상은 워낙 여러가지가 겹치고 겹쳐서 일이 벌어지고 해결되는 것이라 하나의 방법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맞지 않겠죠. 세상을 좁은 휴지심을 통해 보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의 세대갈등, 성별갈등, 지역갈등, 민족갈등의 원인이 혹시 근대 이전의 재화 분배와 관련이 있지는 않을까요? 남성이 여성을, 혹은 노인이 젊은이를, 게르만인이 유대인을 재화로부터 소외시키기 위해 존재했던 억압이 경제 체제의 변화를 통해 변화하는 과정에서 충돌하는 것이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또한 만약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근본적으로 자본에 의해 혹은 다른 경제체제에 의해 훼손될 가능성은 없는지 고민해 볼만 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