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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러시아 역사 이야기 6. 대크킹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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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리볼버오셀롯
추천 : 10
조회수 : 904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07/27 16:06:59
출처 : http://cafe.daum.net/shogun/9xm/8300

<블라디미르 모노마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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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라디미르 모노마흐를 새긴 부조 -

1113년. 키예프에서 스뱌토폴크가 죽은 후 키예프에서 민중 봉기가 벌어졌다. 키예프 시민들은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가 다음 대공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를 키예프 대공에 추대했다. 원래 이는 계승 서열상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장남인 이자슬라프계가 통치를 했던 만큼 원래대로면 차남 스뱌토슬라프의 후손이 키예프 대공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민들은 이미 군사적으로도 명성이 높고 인망도 두터운 브세볼로드계의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가 대공이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분명 계승원칙에 위배되는 짓이었지만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의 세력 자체가 굉장히 강성한데다가 시민들의 지지 역시 확고했기에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가 대공이 되었다.


 블라디미르 모노마흐는 브세볼로드의 아들로 할아버지는 야로슬라프였고, 모계로는 마케돈 황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애시당초 그의 별칭이기도 한 모노마흐 자체가 비잔틴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9세 모노마쿠스의 외손자라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었다. 그는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전사한 잉글랜드 왕 고드윈의 딸 기티아와 처음 결혼했었고 그녀가 죽은 후로는 비잔틴 제국의 귀족여성을 맞아들였고, 그녀가 죽자 이번에는 쿠만족 칸의 딸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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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만족도 이 멧돼지처럼 사냥해주자!" -

블라디미르 모노마흐, 블라디미르 2세로도 알려진 그는 키예프 대공이 된 후 정력적으로 일했다. 그는 블라디미르를 건설하는 등 내치에도 힘썼지만 무엇보다 쿠만족의 침공을 막는데 주력했다. 그가 남긴 유훈에 따르면 그는 쿠만족의 군대를 83번 패주시켰고 200명의 족장들(1)을 죽였다고 기록이 되어있었다. 쿠만족은 블라디미르의 군대에게 연이어 패배하였고, 일부 쿠만족은 키예프 루스의 군대를 피해 조지아로 망명하기도 했다.(2)


 이렇게 키예프 루스의 마지막 황금 시대를 이끌었던 블라디미르 모노마흐는 12년의 짧은 치세를 남기고 1125년 죽었다. 그의 뒤는 그의 장남 므트디슬라프가 계승하였다.


 <꺼져가는 불꽃>

 

 므트디슬라프는 오래전부터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가 후계자로 키워온 그의 장남이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므트디슬라프도 키예프 루스를 나름 잘 통치하였다. 그는 쿠만족과 전쟁을 계속해나갔고, 에스토니아인, 리투아니아인들과도 전쟁을 벌이며 키예프 루스의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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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놔 이것들이 슬슬 말을 안 듣네!" -

므트디슬라프가 1132년에 죽자 이번에는 그의 동생인 야로폴크가 야로폴크 2세란 이름으로 키예프 대공이 되었다. 이때부터 말썽이 시작되었다. 1134년 노보고로드 공작이자 야로폴크의 조카 브세볼로드(3)가 삼촌인 유리 돌고루키가 통치하던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을 공격하는 내전이 벌어졌었다. 이 내전에서 노보고로드의 군대는 패배하였다. 거기에 더해 1135년 스뱌포슬라프 2세의 손자인 체르니코프 공작 브세볼로드가 쿠만족과 동맹을 맺고 므트디슬라프의 아들이자 야로폴크 2세의 조카 이자슬라프를 공격했고, 야로폴크는 브세볼로드를 응징하기 위해 군대를 움직였다. 하지만 전투가 벌어진 후 쿠르스크와 또 다른 마을 하나를 브세볼로드 쪽에 넘겨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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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권은 시민들에게 있다! 키예프의 입김을 받은 대공은 꺼져라! 이제는 우리가 대공을 뽑는다!" -

더군다나 이듬해인 1136년에는 므트디슬라프의 아들 브세볼로드가 통제하던 노보고로드 공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노보고로드 시민들은 브세볼로드를 폐위시킨 후 연금했다가 추방했고, 앞으로 그들의 대공은 노보고로드의 베체에서 뽑기로 결정해버렸다. 노보고로드 공화국의 탄생이자, 키예프 루스에서의 이탈 선언이었다. 브세볼로드가 1138년 프스코프에서 군사를 이끌고 와서 노보고로드를 공격했지만 패배하였다. 이제 키예프 루스의 권위는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거기에 스뱌토슬라프 2세의 손자 스뱌토슬라프 올고비치가 야로폴크 2세의 권위에 도전했다. 야로폴크 2세는 헝가리 군대까지 끌어들인 대대적인 연합군을 동원해 그를 1139년에 찍어누르지만 곧 사망하고 만다.


 이후 동생인 비아체슬라프가 키예프 대공이 되었다. 하지만 1달만에 스뱌토슬라프 2세의 손자인 브세볼로드의 군대에 의해 키예프 대공의 자리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키예프 대공 막장 전설이 시작되기 시작했다.


 <혼돈의 러시아>


브세볼로드는 브세볼로드 2세라는 이름으로 7년간 집권했다가 사망한다. 이후 동생 이고르가 이고르 2세란 이름으로 집권하지만 바로 므트디슬라프의 아들 이자슬라프의 공격을 받는다. 이고르는 동생 스뱌토슬라프와 함께 맞섰지만 패배했고 다리가 허약했던 그는 포로로 붙잡혔다. 그는 웅덩이에 내던져졌다가 거의 죽기 일보 직전 상태에서 수도승이 되기로 하고 살 수 있었지만 곧 이자슬라프의 선동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군중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의 동생 블라디미르가 형을 구조하려고 했지만 실패하였다. 


 그러나 인과응보였을까 이자슬라프도 삼촌인 유리 돌고루키(4)의 공격으로 3년만에 폐위당하고 쫓겨난다. 그러던 유리 돌고루키도 2년후에 쫓겨나고 이자슬라프와 비아체슬라프가 키예프 대공 자리를 두고 다투는 기간이 1151년부터 1154년까지 3년간 지속된다. 그리고 이후는 개판의 연속이었다. 모노마흐계도 여러 갈래로 분열되어 서로 키예프 대공 자리를 두고 다투었고, 스뱌토슬라프 계열까지도 가세하여 키예프 대공 자리는 이제 수시로 바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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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킹2 AI 충신놀이 현장이 아닙니다. 현실에 존재했던 키예프 루스 대공 명단입니다. -

 어처구니 없는 것은 승리한 쪽이 패배한 쪽을 결정적으로 패배시킨 적이 한번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니 패배한 쪽도 몇년 안 가서 다시 군사를 키워서 키예프 대공 자리에 복귀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나마 스뱌토슬라프 계열의 스뱌토슬라프 3세가 12년간 키예프 대공 자리를 붙들어맨적이 있었지만 그가 죽은 후 다시 내란이 벌어졌다. 이 시기 키예프 루스 대공들이 얼마나 폐위와 복위를 반복했으면 모노마흐계의 류리크 2세는 5번이나 즉위와 폐위를 반복했고, 다른 경쟁자들도 못해도 2~3번은 즉위와 폐위를 반복했다는 것이었다. 모노마흐가 죽은 뒤 50년간 대공이 바뀐 횟수가 18번이었고, 그 뒤로도 이쯤 되면 포로로 잡혔다가 맞아 죽은 이고르만 굉장히 운이 없었다고 봐야 될 정도다. 이런 상황은 몽골족과 최초로 충돌한 칼가강 전투 즈음까지 꾸준히 반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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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전사들과 쿠만족 동맹자들. 1번은 러시아아 귀족 전사. 2번은 체르니 클로부키 지도자(족장), 3번은 체르니 클로부키 기수 -

당연히 나라꼴은 개판이 되었다. 각 공국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쿠만 부족들과 결탁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고, 이런 부족들은 검은 모자라는 뜻을 가진 체르니 클로부키라고 불렸다. 쿠만족은 러시아의 내란을 틈타 이렇게 각 공국들과 합종연횡하며 그 힘을 키워나갔고, 마구잡이로 러시아 공국들을 약탈해대었다. 덕분에 안그래도 십자군으로 동방무역길이 새로 뚫린 상황에서 위험성이 높아진 바랑기안 길은 완벽하게 사망선고를 받았다. 콘스탄티노플이 1204년 십자군에 의해 황폐화되면서 이런 경제적 쇠락은 더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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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전성기 키예프 루스의 강역. 하지만 이 시기에는 이 강역들은 쿠만족에게 넘어가거나 분열되어있었다. -

이러니 키예프도 멀쩡할 리는 없었다. 키예프 대공들의 거처도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가 생전에 건설한 소도시 블라디미르로 옮겨졌고 성문은 수시로 부숴졌다. 그리고 이런 공성전들을 떠나 키예프 자체도 1169년과 1203년, 두 번에 걸쳐 크게 약탈당했다.  1169년의 약탈은 로스토프 공국에게, 1203년의 약탈은 쿠만족이 벌인 짓이었다. 키예프의 권위 자체도 땅바닥으로 떨어져 이미 노보고로드는 자체적으로 대공을 뽑고 폐위하는 일을 반복해서 벌이고 있었고, 다른 공국들도 이제 자율적으로 움직이며 자기들 마음대로 영역을 확장하고, 땅을 두고 친척들과 다투기 시작했다. 키예프 루스는 사실상 붕괴된 것이었다.


 계속되는 쿠만족의 약탈을 막기 위한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184년 일부 러시아 공국들의 반격으로 쿠만족 군대가 패배하는 일이 벌어지자 노보고로드-세베레스키 공국의 공작 이고르는 1185년에 각 공국들을 설득, 나름대로 연합군을 결성하고 쿠만족을 응징하기 위한 원정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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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틀렸어. 이제 꿈이고 희망이고 없어." -

하지만 이 원정군은 쿠만족에 의해 몰살당했고, 이고르는 포로로 잡혔다가 이듬해 겨우 탈출하여 자신의 영지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때의 이야기를 당시 종군했던 사람 중 한 명이 서사시로 적었으니 그것이 바로 이고르 공 원정기였다. 그리고 이를 19세기 중후반 활약했던 러시아 5인조의 일원 보로딘이 오페라로 만드니 그것이 바로 '이고르 공'이었다. 이후 러시아 공국들은 쿠만족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은 생각도 못 하였고, 가끔 오는 약탈만 방어하면서 자기들끼리 키예프 루스 대공 자리를 따먹기 위한 경쟁만 벌이고 있었다.


 당시의 이런 막장상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절망감은 이고르 공 원정기에 나온 다음과 같은 말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스러운 나의 형제들, 아들들, 그리고 러시아 땅의 남자들이여! 젊은 시절을 단속하지 못하고 우리의 러시아 땅을 폴로베츠인(5)들에게 열어두었구려." 


"풀은 슬픔으로 고개를 숙이고 나무는 비탄으로 땅으로 휘어져 있다. 왜냐하면 형제들이여, 이미 음울한 계절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의 힘은 황야에 삼켜져버렸다. 이단자들을 누른 공들의 승리는 사라졌으니, 이제 형제가 형제에게 '이것은 내것이고 저것도 내것'이라고 말하고 또한 공들이 사소한 일을 가지고 '보라! 이것은 큰 문제로다.'하며 불화를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사방에서는 이단자들이 승리를 거두면서 러시아 땅으로 쳐들어오고 있다."


 그러나 쿠만족과 계승 분쟁으로 인한 혼란상은 앞으로 다가올 일에 비하면 차라리 약과였다. 적어도 앞으로 다가올 위협들은 이 상황을 차라리 천국으로 여기게 해줄 것들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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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발트해를 평정할 시간이다!" -
첫번째 위협은 카톨릭 세력들이 슬금슬금 러시아를 건드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12세기 중엽, 오딘을 믿던 토착 북방 신앙을 스웨덴에서 겨우겨우 몰아낸 이후 스웨덴, 덴마크, 독일인 등은 발트해 지역으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 중 스웨덴 인들은 12세기 중반부터 핀란드 지역을 장악해가면서 노보고로드 공화국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덴마크 인들과 독일인들까지 십자군 명목으로 발트 지역으로 살금살금 세력을 확장해나가기 시작했다. 이들은 1200년 경에 리보니아 지역에도 세력을 뻗어나가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이미 리보니아에 한 발 걸치고 있던 러시아계 국가들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하필 1204년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고 라틴 제국을 세워버리면서 정교회와 카톨릭의 갈등이 최고조로 달한 상황에서 이는 분명 중대한 위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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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든 작은 몽골을 건드리면 X되는거야! 아주 X 되는 거라고!" -

하지만 진짜 중대한 위협은 따로 있었다. 1206년 몽골족이 몽골 초원을 통일하면서 몽골족에게 밀렸던 메르키트 족 중 일부가 쿠만족에게로 도주한 것이었다. 문제는 메르키트 족은 테무진의 아내 보르테를 납치해, 테무진에게 엄청난 원한을 산 종족이었고, 이 사실이 호라즘 원정 도중 테무진. 즉 칭기즈칸의 귀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리고 칭기즈칸의 충실한 사냥개, 수부타이와 제베는 이 때 무하마드를 쫓아 페르시아를 휩쓸면서 카스피해 연안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제 진정한 지옥이 시작되려고 한 것이다.


추신: 단 몽골족의 침공을 다루기 이전에 주요 공국들에 대해 다루는 글이 올라올 것입니다. 몽골족은 조금 시간이 걸릴 듯 합니다.


(1) 정황상 소규모 부족의 부족장들도 포함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2) 조지아 왕국은 이들을 활용해 이슬람 세력들을 몰아내고, 몽골족의 침공 이전까지 카프카스 산맥 일대를 호령할 수 있었다.


(3) 므트디슬라프의 장남이었다.


(4)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공작이었고 모스크바를 최초로 건설한 인물이다. 중요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애시당초 이 시기가 워낙 개판이라 다른 글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5) 러시아인들이 쿠만족을 가리키던 말. 쿠만이란 표기는 독일-영국식 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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