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주제는 통일신라 이후 한민족의 역사에 뿌리깊히 박혀 21세기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사대주의’ 전통에 관한 것이다.
‘사대(事大 : 섬길 사, 큰 대)’는 자기보다 크고 힘센 세력을 인정하고 섬기는 흉내라도 내는 것이니 인류 역사상 보편적인 ‘자기생존방식’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대주의는 섬기는 흉내 수준을 넘어 자신보다 힘 센 세력에게 조공을 받치고 의지하며 진짜로 섬기는 행동양식이다.
고려시대 까지는 그나마 민족의식을 갖고 사대하는 역사였으나 조선시대의 사대주의는 그 도를 넘어 주자 성리학의 내용을 단 한마디라도 부정하면 ‘사문난적(성리학을 어지럽히는 반역자)’으로 몰며 이미 망해버린 중화민족 명나라를 숭상하며 제사까지 지내는, 제정신이라 볼 수 없는 외교적 굴복을 정치 행위로 선택하게 되었는데 그 역사가 고려시대 보다 5~60년 이상 길게 유지되었던 것이다.
‘사대하는 흉내’를 내며 고통 받는 삶은 생명이 짧고 아예 힘 센 세력의 노예가 되어 사는 삶이 생명력이 더 긴 이 역사의 아이러니는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오늘날 ‘세계 15위 경제대국’ 대한민국의 문화적 후진성을 설명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은가? 21세기 현대 사회에서도 사대는 자신의 생존을 위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 잘났다는 유럽도 미국의 무기 앞에서는 사대하지 않는가?)
하지만 사대주의는 한국과 일본의 ‘미국사대주의’가 그 예가 될 수 있으며 요즈음 한국사회의 ‘영어열풍’, ‘미국유학 열풍’은 한국판 사대주의의 전형이며 조선시대 과거열풍의 내용적 연속이다. 주체 사상의 북한도 소련이라는 사대의 대상이 없어지자 자기 자신을 사대하는 수령사대주의로 사회주의 사상을 종교적 신앙으로 만들지 않았는가?
어떻게 압록강과 두만강이라는 확고한 국경선 아래에 갖힌 남·북한의 두 체제가 종류는 다르나 그 본질은 하나인 사대주의에 싸여 이리도 민중들을 괴롭히는가?
자신의 힘이 약함을 성찰하는 삶보다 아예 힘 센 세력에게 몸을 맡기는 삶이 더 편한21세기의 이 희한한 모습은 18세기 칸트의 계몽주의적 이성과 비교해도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비합리주의적 행동이다. 그렇다고 이미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도구적 이성으로 판명된 서양의 이성을 우리가 선호해야 할 이유는 없다.
칸트도 ‘오성(인간이 외부사물을 받아들여 범주별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정신적 요소)’이라는 소프트웨어를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다고 했다.
하지만 21세기에는 도구적 이성이라는 서구의 낡은 계몽주의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오성을 어떻게 자신에게 적용하여 내가 주인이 되는 삶을 살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21세기의 대한민국은 뿌리 깊은 사대주의에 쩔은 기득권자들이 ‘성찰적이성’을 갖고 생활하는 사람들을 정치·경제적으로 학대하고 있다. 헌법은 완벽하고 중·고등학교 교과서는 동·서양의 사상적 성과물을 요약해서 담고 있으며, 국가 시험인 수능이나 모의고사 문제도 논리적으로 올곧음을 담고 있다.
그런데 집안과 학교와 사회는 그 모든 논리를 배반하고 있다.
이 땅의 학생들은 거의 전쟁에 준하는 스트레스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집안에서 무시 당하고 학교에서 시달리며 학원에서 까지고 대학 가서도 스펙 노동에 지치고, 졸업 후에는 다수가 비정규직 내지는 잠재·자발적 포기 실업자 신세로 전락한다. 이런 악머구리판에서 창의력 따위를 이야기 하는 것 자체가 참으로 한가한 소리다.
해방 후 미군정에 대한 사대주의가 친일파들을 온존 시켰고 21세기 첨단 정보통신 사회에서도 그 친일파 후손들이 정치권력을 흔들어 대는 이 나라에 더 이상의 전망은 없다.
존 롤스라는 학자의 ‘정의론’에서 이야기 하는 대로 일단 잘난놈과 못난놈, 집안이 부자인 자와 가난한 자, 1류대와 2류대 구분 없이 ‘무지의 장막’을 치고 모든 한국인이 도탄의 구렁텅이에 빠져서 서로를 의지하지 않으면 자신도 전혀 살 수 없음을뼈저리게 성찰하고 그 굴레를 여러 사람의 힘으로 빠져나와 상대의 존재를 고맙게 인정할 수 있는 날 대한민국은 역사 속에서 새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대학 진학률 83%라는 경이적인 세계 신기록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가 아직까지도 임금 착취나 해먹는 방식으로 세계화의 파고를 헤쳐나가려는 발상이 한심할 뿐이다.
같이 망하자는 뜻이니 기득권자들에게도 결코 이로울 게 없다. 오직 현세적 지배욕구를 충족하려는 맹목적 신념에 가까운 의지만이 있을 뿐이다. 전통적 샤머니즘에 근거한 기복 신앙적 믿음이 21세기 한국의 천민 자본주의 사회를 관통하며 민중들을 쥐어짜고 있는 것이다. 조선 후기 ‘세도정치’사회와 무엇이 달라졌다고 생각하는가?
이 땅의 종교적 신앙은 아홉가지에 이르고 있다.(문제제기 3에 자세히 나와있다) 주류 종교들이 자본주의적 물질공세에 휘둘리고 있는 가운데 소수 종교는 그 실체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평등 이념이 좋아 받아들이거나 창시한 종교들이 계급성을 띠며 부패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통일의 시대를 맞아 한국의 모든 종교는 그 실체를 세상에 드러내고 서로의 차이만을 인정한 채 차별 없는 종교 화합에 나서야 한다. 무슨 종교를 갖고 있더라도 모든 신앙인은 헌법에 보장된 인권에 근거하여 존중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어떤 종교를 믿던 ‘사대주의’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라는 한국의 속담은 자신의 신앙도 기복적이면서 타인의 신앙을 사탄이니 마귀니 무시하는 자기신앙 사대주의에 경종을 울리는 문구라 할 수 있다.
천체 물리학에서 교훈을 얻자면, 우주역사 137억년, 태양계 역사 45억년 동안 태양계 만한 은하가 2000억개 있는 우리은하 주위를 태양계가 2억년 만에 한 번 공전하고 우리은하 같은 규모의 은하가 또 2000억개 있는 상상 불가능한 우주세계에서 우리 은하가 다른 은하군을 돌고 그 거대한 은하군이 또 다른 은하단의 주위를 공전하며 지금도 계속 팽창하고 있는 우주의 영원한 [떠돌이방랑자 = 지구인]들이 벌이고 있는 편협하고 치졸한 기득권 다툼에 뜻 있는 사람들의 정의로운 채찍이 절실하다는 사실이다. 지구는 앞으로도 태양의 나머지 역사 50억년동안 존속될 여지는 남아있다.
물론 우리세대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다음 세대의 몫이며 그것도 안된다면 다시 역사적 빙하기를 맞는 방식으로 전개 될 것이다. 이 지구상의 60억 인구는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그 존재가치를 찾을 수 없는 너무나도 미약한 존재이며, 아니 그 흔적조차 찾기 힘든 초라한 모습일 수 있다.
현대의 그 화려한 과학적 성과물이 일궈낸 우주상의 대발견(콜럼버스의 지리상의 발견과는 그 의미 조차다른)을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을 칸트는 인간이 타고난다고 했는데 그 말은 거짓말인가? 그 말이 거짓이라면 ‘성선설’을 주장한 맹자의 이론은 과연 현실에 합당한가?
도대체 현대사회의 탐욕과 살육전쟁과 끊임없는 종족간 갈등을 매일 목격하며 누가 맹자의 성선설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이제 맹자에서 주자로 이어지는 ‘성선설계보’는 접어두고
순자의 소위 성악설(이기적으로 태어나는 인간이 인위적인 교육과 사회제도를 통해 타고난 본성을 ‘선함’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사상)이 유학의 주류 학설로 등장해야 한다.
순자의 ‘악하게 태어난다’는 말은 ‘교화되지 않은 이기적 상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17세기에 사회계약론을 주장한 영국의 토마스 홉스가 말한 ‘인간의 이기적 본성론’보다 약 2000년이나 앞선 것이 된다.
고대 시대에는 불완전한 인간을 이상화시키기 위한 작업이 주류를 이루었으니 그 점을 감안해서도 순자는 너무나도 현실적인 철학을 제시한 것이다.
성선설은 인간의 철학적 본성을 설명하려는 의도보다는 ‘악한 행위를 왕따시키기만 하면’ 질서가 유지되는 정치지배 성격이 짙다.
이제 동양철학은 ‘법가사상’의 분기점이 되었던 순자의 ‘이기적 본성론’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본다.
출처 : k-potentia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