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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도> 첫 번째 관객은 백범 김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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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오래된유머
추천 : 11/22
조회수 : 1501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4/07/26 13:4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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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군도 : 민란의 시대>에 등장하는 캐릭터들.
ⓒ 쇼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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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11년 하반기. 조선이 망한 지 1년 뒤였다. 장소는 경성감옥. 경성감옥은 1912년에 서대문감옥으로 개칭됐다가 1923년에 서대문형무소로 바뀌었다. 1911년 7월 이후의 경성감옥에서는, 그로부터 103년 뒤인 2014년 7월 23일 개봉될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이하 '군도')가 '맛보기'로 '상영'됐다. 

이때의 관객은 딱 한 사람, 서른여섯 살 된 백범 김구. 주연배우나 감독 없이 영화의 스토리텔링을 담당한 이는 40대 김진사. 김진사는 김구에게 조선 도적들의 세계를 이야기해주었고, 김구는 그 이야기를 자서전인 <백범일지>에 담았다. 

23일 개봉한 영화 <군도>는 백정 돌무치(하정우 분)가 19세기 중반에 '지리산 추설'이란 도적 집단에 가담한 뒤에 겪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에 나온 지리산 추설을 포함한 도적 집단들의 세계를 김진사로부터 자세히 배운 이는 김구였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김구는 영화 <군도>의 1호 관객이었다. 

경성감옥에서 만난 김구와 김진사

1911년 현재, 김구는 세 번째로 투옥된 상태였다. 그는 1896년(당시 21세)에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의 차원에서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를 죽인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2년 뒤에 감옥 바닥을 뚫고 탈옥했고, 1909년(34세)에는 안중근의 이토우 히로부미 저격 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체포됐다가 무혐의로 풀려났고, 1911년에는 안명근(안중근의 동생)의 독립운동 모금 사건(안악 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경성감옥에 수감됐다. 

경성감옥에 들어간 김구는 '쓸 만한 사람이 없을까?'라며 죄수들을 물색했다. 훗날 자기와 함께 구국운동을 벌일 사람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이때 그의 눈에 띈 인물이 바로 김진사였다. 김진사는 마흔 살을 넘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김구보다 적어도 다섯 살 이상은 많아 보였던 모양이다. 

김구의 접근을 계기로 두 사람은 감옥 안에서 금방 가까워졌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김진사는 김구에게 자기는 강도범이며 5년형을 선고받았다고 소개했고, 김구는 "나는 강도 15년형을 받고 들어 왔소"라고 소개했다. 

조선시대에는 남의 물건을 강탈하는 행위뿐만 아니라 국가에 도전하는 행위도 강도죄와 동종 범죄로 취급했다. 앞의 것은 좁은 의미의 강도범, 뒤의 것은 넓은 의미의 강도범이었다. 

국가권력이 군주의 소유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국가권력을 빼앗거나 여기에 도전하는 행위도 강도죄로 인식된 것이다. 김구가 스스로를 강도범으로 소개한 것은 자기가 일본 국가권력에 도전한 국사범(정치범)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김진사가 김구를 강도로 착각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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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의 사진. 서울 종로구 평동의 경교장에 전시된 사진이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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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사는 김구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김구가 좁은 의미의 강도범인 줄로 착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김구 자신이 <백범일지>에 썼듯이 젊은 시절 그의 외모는 정치범과는 좀 동떨어진 외모였다. 

김구는 "내 얼굴을 아무리 관찰해 봐도 귀하거나 부한 데는 없고, 천하고 빈하고 흉한 데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우리가 사진으로 흔히 보는 인자하고 덕스러운 모습의 김구는 오랫동안의 독립투쟁과 인격수양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김구를 좁은 의미의 강도범으로 오인한 김진사는 "당신, 추설 소속이요, 목단설 소속이요, 아니면 북대 소속이오?"라고 질문했다. 어떤 계통의 도적이냐고 물은 것이다. 

김구가 무슨 말인지 몰라 답변을 하지 못하자, 김진사는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형씨는 북대 소속인가 보네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죄수가 "이분은 국사범이라서 그런 말을 이해하지 못하십니다"라고 말해줬다. 김진사가 김구를 북대 소속으로 판단한 이유는 잠시 뒤에 나온다. 

김진사에게 호기심을 느낀 김구는 다른 죄수들에게 김진사에 관해 이것저것 조사했다. 그 결과, 김구는 그가 삼남 지방 비밀결사의 수장으로서 수십·수백 명의 도적을 이끄는 리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영화 <군도>에 나오는 노사장 대호(이성민 분)에 상응하는 인물이다. 노사장(老師丈)의 의미에 관해서는 잠시 뒤에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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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도>의 노사장 대호(이성민 분).
ⓒ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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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열아홉 살 나이로 황해도 접주(지부장)가 되어 농민전쟁에 참가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10대 후반부터 혁명가의 길을 걸었다. 동학전쟁이 실패한 뒤에도 그는 자기 생애 내에 혁명을 성사시키겠다는 열망을 품고 있었다. 혁명을 성사시키기 위해 그가 터득하고 싶어 했던 것은 혁명 조직의 운영 기법이었다. 이런 마음을 품고 있는 상태에서, 수십·수백 명의 도적을 지휘하는 김진사라는 조직가를 만나게 된 것이다.  

조선 도적 3대 계통, 목단설과 추설 그리고 북대

김진사에게 배울 게 많겠다고 판단한 김구는 그에게 도적 단체에 관해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생각 외로, 김진사는 자기가 아는 것들을 순순히 알려주었다. 김진사는 조선 도적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처음에 자기가 김구를 북대 소속으로 오해한 이유를 말해줬다.  

김진사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 도적의 세계에는 3대 계통이 있었다. 강원도 같은 중부 지방에 근거를 둔 도적 집단은 목단설 계통으로 분류됐고, 충청·전라·경상 같은 남부 지방에 근거를 둔 집단은 추설 계통으로 분류됐다. 이 설명에 따르면, 지리산에 근거지를 둔 영화 <군도> 속의 도적 집단은 추설 계통이 되는 것이다. 

목단설이나 추설에 속하는 도적 집단들은 상당히 조직적인 체계를 갖고 있었다. 비밀결사의 형태를 띤 이들은 단순 도적떼라기보다는 의적의 성격을 갖춘 집단들이었다. 이들은 탐관오리나 부유층의 재산을 빼앗아 서민층에게 분배했다. 

목단설과 추설을 제외한 나머지 부류는 북대 계통으로 분류됐다. 북대 계통의 도적 집단들은 순전히 돈에 눈이 멀어 무고한 사람들의 재물을 훔치는 부류였다. 북대는 요즘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범죄조직에 해당했다.  

목단설 계통과 추설 계통은 서로 상대방에 대한 경의를 품고 있었다. 두 계통에 속한 사람들은 초면일지라도 오랜 동지처럼 대하고 서로를 도왔다. 하지만, 두 계통은 북대 계통에 대해서만큼은 냉소적 태도를 취했다. 북대는 잡범들의 계통이라고 인식한 것이다. 

처음에 김진사가 "당신, 추설 소속이요, 목단설 소속이요, 아니면 북대 소속이오?"라고 물었을 때, 김구는 질문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 모습을 본 김진사는 '이 사람은 추설이나 목단설이 아닌 북대로구나'라고 짐작했다. 추설이나 목단설에 속했다면 자기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을 리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김구에게 "형씨는 북대 소속인가 보네요"라고 말했던 것이다. 

목단설과 추설의 신입회원이 거쳐야 하는 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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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대문형무소.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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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사의 설명은 계속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목단설 및 추설 계통은 노사장(老師丈)이라는 최고 지도자를 중심으로 조직적인 지휘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또 이들은 신입 회원을 받아들이는 독특한 방식을 갖고 있었다. 

영화 <군도>에서는 고통에 허덕이는 돌무치의 모습을 본 '지리산 추설'의 지도부가 그를 신입 회원으로 받아들였지만, 이것은 <백범일지>에 소개된 김진사의 설명과는 다르다. 

김진사에 따르면, 목단설 및 추설 계통에서는 신입 회원을 받아들이기 전에 먼저 시험해보는 단계부터 거쳤다. 이들은 신입 회원 후보를 강도범으로 몰아 수사기관에 체포되도록 만들었다. 물론 이 수사기관은 가짜였다. 기존 회원들이 수사관으로 가장해서 회원 후보를 조사하고 고문했다. 만약 후보가 끝까지 자백을 하지 않으면 신입 회원으로 인정했다. 고문을 못 이겨 강도라고 자백하면, 그냥 집으로 돌려보냈다. 

따라서 목단설이나 추설의 신입 회원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고문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했다. 이근안 같은 악질 형사를 만나도 끝끝내 입을 다물 수 있는 인내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신입 회원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목단설 및 추설 계통은 강인한 조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북대와 달리 목단설과 추설은 아무 때나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았다. 이들은 정해진 때에 정해진 절차에 따라 회합한 뒤에 집단적으로 도적질에 착수했다. 이들은 이런 '행사'를 '장 부른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목단설 계통과 추설 계통이 연합해서 전국적으로 행사를 벌이는 경우에는 '큰 장을 부른다'는 말로 표현했다. 이들의 행위는 엄밀히 말하면 혁명운동이지만, 국가 기록인 실록 같은 데서는 강도나 도적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 

목단설과 추설이 체계적이고 강력한 집단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김구는 훗날 자기도 이런 조직을 만들어 나라를 구하겠다고 결심했다. 영화 <군도>의 관객들은 진지한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코믹한 이 영화를 보면서 이따금씩 웃음을 터뜨릴 수도 있지만, 김구는 혁명 조직을 만들 목적으로 이야기를 경청하다 보니 중간 중간에 웃음을 터뜨릴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김구가 조직의 귀재가 된 요인 중 하나, 김진사와의 인연

15년형을 선고받은 김구는 감형을 받고 1915년에 석방됐다. 1919년 3·1운동 뒤에 중국으로 건너간 그는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가담했다. 

처음에는 수위나 다름없는 경무국장 타이틀을 갖고 임시정부의 허드렛일을 처리했던 김구는 나중에는 임시정부를 책임지고 살려냈음은 물론이고 한인애국단 같은 비밀결사를 만들어 이봉창·윤봉길 같은 영웅을 배출했다. 그는 1932년에 히로히토 일본왕과 일본 장군들에게 폭탄을 던지는 의거들을 조직함으로써, 침체된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고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의 지원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일본의 공권력이 들어갈 수 없는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서 비밀결사를 이끌며 독립운동을 지휘하는 김구의 모습은, 관군이 쉽게 들어갈 수 없는 지리산 같은 데서 비밀결사를 이끄는 목단설·추설 계통 지도자들의 모습과 흡사했다. 또 이봉창을 오랫동안 시험한 뒤에 일을 맡기는 모습은, 신입 회원을 이리저리 시험한 뒤에 입단시키는 목단설·추설의 신입 회원 선발 방식과 흡사했다

또 김구는 중국 국민당의 협조 하에 1940년에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일본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단행했다. 이처럼 김구는 독립운동 조직을 만들고 운영하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김구가 이렇게 조직의 귀재가 된 요인 중 하나는 김진사와의 인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김진사가 가르쳐준 조직 경영의 비법이 김구의 의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김진사의 가르침이 자기에게 큰 영향을 줬기 때문에 <백범일지>에서 김진사의 이야기를 비중 있게 소개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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