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에 대한 철학은 변화에 대한 거부 혹은 변화 가능성을 부정하여 세상을 배타적으로 보고 적과 동지의 구분을 짓는 부정적인것이라는 글을 밑에 썼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철학을 갖는 것이 일자에 대한 철학보다 더 나은, 더 발전적인, 더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일까요? 들뢰즈는 일자에 대한 철학을 나무 이미지로 생각을 했다고 밑에 썼습니다. 들뢰즈가 생각하는 더 발전된 철학의 이미지는 리솜입니다. 각각을 뿌리를 땅에 박고 나뭇가지는 연결이 되어 있는 리솜이 들뢰즈가 추구하는 철학의 이미지 입니다. 각각의 개인들이 만들어내는 연대! 마주침입니다.
타자는 지옥이다. 사르트르는 타자의 타자성으로 말미암아 타자를 지옥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내가 타자를 만날 때 어떻게 반응할지 알고 있습니다. 기계를 다룰 때도 마찬가지죠. 액셀을 밟으면 차는 빨라질 것이고 브레이크를 밟으면 느려질 것입니다. 하지만 타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선의를 갖고 다가가도 선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고, 더 큰 선의로 돌아올 수도 있으며, 심지어 나를 해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타자는 지옥일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진정 타자가 지옥인 것은 바로 나를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타자와의 만남은 필연적으로 나를 변화시킵니다. 또한 내가 타자를 변화시킵니다. 피히테는 나=나 라는 자기동일성을 통해 세상의 학문이 발생하고 세상에 의미가 출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내가 다니던 학교가 단순한 건물이 아닌 나에게 특별한 이유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같은 존재라 나에게 그 학교 건물이 갖는 가치가 발생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처음 사랑할 때의 나와 현재의 나가 같기 때문에 그 연인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유치원에 다니던 나와 현재의 내가 정말 같은 나일까요? 심지어 몽테뉴는 밥먹기 전의 나와 밥먹은 후의 나는 절대 같은 나는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꾸준히 변해갑니다.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도 바뀌고 같은 대상을 접할 때의 감정조차 달라집니다. 단지 호르몬을 비롯한 인체 내부의 변화 때문만은 아닌 경험의 차이에서 비롯될 것입니다. 그 경험이라는 것이 바로 타자와의 마주침이죠. 초등학교 때의 생활을 중학교에서도 똑같이 할 수는 없습니다. 입대 전에 살던 방식으로 군대에서 살 수는 없죠. 친구가 생긴다면 그 친구는 나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나 또한 그 친구를 변화시킬 것이고요. 그래서 철학자 강신주는 자서전이란 내가 만났던 타자와의 역사라고 합니다. 문제는 그 변화라는 것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타자는 지옥이다 라는 말은 타자의 예측불가능성과 함께 나를 변화시키는 고통을 수반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한 타자와의 마주침은 고통스럽지만 반드시 지옥은 아닙니다. 내가 성숙하거나 변화하기 위해선 바로 그 마주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마주침은 고통스러운 면을 갖고 있지만 또한 나의 행복과 발전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이죠.
마주침으로 인한 고통은 나를 바꿔야하기 때문에 생길 것입니다. 과거에 하던 관성 그대로 한다면 그다지 괴로울 것이 없으나, 그 생활방식을 바꿔야 하기 때문에 괴롭죠. 물론 변화된 일상이 가혹해서 힘든 면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또한 변화된 일상이 너무 편하다면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죠. 예를 들면 제대하는 경우처럼. 하지만 제대처럼 편한 변화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고통은 있습니다. 변화자체가 고통을 수반하니까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변화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변화가 도움이 되도록 할 수 있다면 오히려 그러한 변화가 삶을 더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취직이나 진학도 고통을 수반하는데, 결혼과 출산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그야말로 인생 전체가 송두리채 바뀌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혼과 출산은 다른 것과는 교환 불가능한 기쁨을 줍니다. 다만 결혼과 수반되는 변화를 거부한다면 파경을 맞을 수 밖에 없을 것이고, 출산과 양육으로 인해 생기는 변화를 부정한다면 아주 끔찍한 사태를 맞이할 수 있겠죠. 결혼이나 출산은 지금까지의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를 창조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실을 알고 있다면 쉽게 파경을 맞기 보다는 더 나은 내가 창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과정을 일자의 철학에서는 개별자를 그대로 긍정하기보다는 기득권의 명령을 통해 해결하려고 합니다. 일자라는 것, 사회의 질서라는 것, 세상의 본질이라는 것, 프로이트가 말하는 초자아라는 것이 바로 그 기득권의 명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자는 남자를 하늘로 받들어야 하고, 자식은 부모의 말에 순종해야하며, 백성은 왕과 관리에게 충성하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해야한다. 이런 식으로 세상의 갈등을, 변화의 계기를 규정지어 버리고 정확하게 규정적인 모습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변화의 고통을. 창조의 계기를 역할지움과 사회의 명령으로 고정시켜버리는 것. 이것이 일자철학이 갖는 가치가 아닌가 합니다.
석가모니는 일자철학의 이러한 맹목성 때문에 세상에 불변하는 것은 없다, 자아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불변하는 자아, 영혼, 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증명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신이 있다고 가정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더 큰 고통에 빠지고, 우리의 삶이 갖는 가치는 퇴색하며, 모든 창조적인 것은 사라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