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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허접역사소설-도산성의 겨울(제2장 김칫국 上)
게시물ID : history_1733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앗카링카앗
추천 : 5
조회수 : 472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07/26 10:36:33
오늘도 올려봅니다.
습작을 읽어주시고 댓글달아주시고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 처음부터 못 보신분들은 아래를 클릭하세요.^^
 
프롤로그
http://todayhumor.com/?history_17262
제1장 심계천하 上
http://todayhumor.com/?history_17277
제1장 심계천하 下
http://todayhumor.com/?history_17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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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김칫국
 
1597년 10월 중순 한양 경리 양호의 숙소
 
“으응. 대인 꼭 안아 주시어요.”
 
점심을 가지고 온 기생이 침상에서 잠꼬대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대 명국 흠차경리조선군무겸 도찰원우첨도어사 양호와 낮거리 후 노곤함에 빠진 상태였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더니…….’
 
경리 양호는 걸상에 앉아 낮잠에 빠진 기녀의 들어난 나신을 감상하며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조선에서의 경리벼슬.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좌불안석의 자리이었다. 하지만 직산대첩 이후로 상황은 반전하여 작금의 상황은 아국의 병부상서도 부럽지 않다고 생각하는 양호였다.
 
‘정유년 이후 조선의 임금이 나에게 조선의 병권을 넘겨주었다. 게다가 내가 비밀서한을 보내 조선 국왕을 뒤에서 조정하니 도당의 인사권은 나에게 있는 것이나 진배없지. 만에 하나 나에게 대적하려는 건방진 놈이 있다면 도찰원에 잡아다가 직접 물고를 내주면 된다. 게다가 때 되면 조선의 임금과 신하들이 내 마음에 들기 위해 재물을 듬뿍 쥐어주니 이 얼마나 호시절인가? 암. 좋은 시절이지.’
 
게다가 양호는 선조와 대등한 예로 접견하고 광해군 에게는 ‘아버지의 친구’의 의전을 제공 받았다. 겉으로 봐서도 조선의 군주와 맞먹는 행세를 하고 있던 것이다. 참고로 도찰원 우첨도어사는 정4품으로 도찰원의 수장인 정2품 도찰도어사의 보좌관 역할이었다.
 
“험. 험. 대인. 모두 모였습니다. 이제 걸음을 옮기시지요.”
 
침소 밖 수하가 헛기침을 하며 오늘의 모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양호는 느긋이 기지개를 키며 걸상 옆 작은 궤짝을 열어 호박노리개 한 쌍을 침상위로 던졌다.
 
“밤에 다시 오려무나. 내 너를 아껴주마.”
 
양호는 의관을 정제하고 수행원들과 함께 지근거리의 도찰원으로 향했다. 도찰원이란 명의 중앙 감찰기관으로서 관리의 임무수행평가도 겸하고 있었다. 명나라는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경리 양호에게 한양에 도찰원지부를 설립하고 조선과 왜에 대한 정보 수집을 담당하게 하였다.
 
“경리 대인 들어오십니다.”
 
넓은 방안에는 휘하 장수들이 긴 탁자를 양옆으로 도열해 있었다. 이번 전장에 나갈 지휘관들이였다. 제독 마귀와 부총병 이여매, 이방춘, 해생 등이 양 경리를 보며 예를 갖추었다. 그는 예를 답하며 손짓으로 부하들을 좌정하게 했다. 장군들의 면모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양호는 그의 옆에 서 있던 부관을 불렀다.
 
“장 대인에게 기별은 없었는가?”
 
“잠시 조선의 장시를 보고 오신다고 인편이 왔습니다. 한 두어 식경정도면 도착하실 거라고 합니다.”
 
“으음. 그런가. 그럼 시작하지.”
 
양 경리는 다시 한 번 좌우를 살피며 입을 떼었다.
 
“오늘 여러 제장들을 이리 보자고 청한 것은 전후 조선의 처리에 관한 것을 논하고자 함이요.”
좌중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전쟁은 이제 막 시작하려 하는데 별안간 논공행상이라니.
 
“경리. 전후처리를 생각하시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가 아닙니까?”
 
신중한 성격의 부총병 이여매가 양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 부총병. 어차피 적은 독 안에 든 쥐입니다. 천장과 천병이 구름떼처럼 진군하면 도적들은 저절로 무너질 것이니 무엇이 걱정이오? 하하하.”
 
양호는 호쾌하게 웃으며 이여매를 안심시켰다. 이때, 양 경리 우편의 제독 마귀가 발언했다.
 
“조선은 군주와 신하가 무능하고 문을 숭앙하여 병사를 방기하니  이번 기회에 대 명국에서 직접 통치하면 만사형통일 것입니다.”
 
크고 굵은 목소리가 좌중을 강타했다. 마귀는 말을 이었다.
 
“왜란이후 병부 직방사 주사 증위방은 ‘조선은 토질이 비옥하여 농사가 잘되고 그 부강함이 중국과 맞먹을 정도 이었으나, 군주가 게으르고 통치력이 떨어지니 왜군의 발호에 맥을 못 추는 결과를 나타냈으므로 세자에게 양위하는 것이 옳다’고 상소를 올렸소이다. 허나 작금의 조선은 왕위교체만으로는 회생이 불가하니 과거 원나라의 예를 본떠 조선에 정동행성을 설치하여 아국에서 순무를 파견하고, 그로 하여금 조선신료들을 전부 행성에 소속시켜 관리하고 조세징수권을 갖도록 주장한 계요총독 손광의 의견이 옳다고 보오.”

명의 조선에 대한 직할통치론은 명나라 내부에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중에 끊임없이 불거져 나왔다. 이는 명국 입장에서 볼 때 정치적·군사적으로 무능한 조선 조정 때문에 조선의 강역을 잃어 왜국이 명의 직접적인 위협이 될까하는 걱정과 더불어 조선의 파병으로 인한 명나라의 경제적 손실을 줄이는 확실한 계책이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명의 황제인 만력제는 스승이었던 장거정의 사망 후 제위 30년 동안 정치적 폐업상태(업무 복귀를 바라는 신하들의 상소더미 위에서 잠을 청할 정도였다. 나중에는 황제의 용안을 보거나 아는 관리가 드물었다고 한다.)에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는 낭비벽이 심한 황제였는데, 임진·정유년간의 왜란이 발발한 때에 또 다른 변방의 이민족을 제압하기 위해서 원정을 감행(이른바 만력삼대정)하여 은 700여만냥을 썼고, 자신의 무덤인 정릉을 건설하는데 800여만 냥을 파묻었다. 여기에 더하여 자신의 아들인 복왕을 장가보내는데 무려 2400만 냥을 쏟아 부었으니, 그나마 일부라도 재정손실을 줄일 수 있는 조선의 경제적 가치에 명의 신료들이 집착했던 것이다. 참고로 당시 명나라의 한해 예산은 은 400만 냥에서 500만 냥 사이였다.
 
“직할통치는 조선인의 반발을 살 수 있으니 차선책으로 이전처럼 은광개발을 요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부총병 해생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임진년에 명군을 조선에 파병할 때부터 명조정과 명군수뇌부가 줄기차게 조선에 요구하던 「조선 은광개발론」이였다. 명의 은광개발 주장은 임진왜란 발발 후 명군의 조선 출병에서부터 시작된다.
 
당시 명조정은 파죽지세로 북상중인 왜군에 놀라 요동에 대기 중이던 명군을 급히 조선으로 진군시켰다. 이때 군사가 전개되는 시간을 빠르게 하고자 군량을 모집하는 대신 명군에게 군량에 버금가는 은화를 대신 보내게 되었다. 조선에서 미곡거래의 대상물로 명에서 통용중인 은화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은 참전 초기 명군에게 큰 시련을 안겨 주었다. 조선에서 명의 은화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은 본위 경제체제가 확고히 자리 잡힌 명과 달리 조선은 16세기에도 미곡과 면포가 거래의 기준이었다. 물론 고려 때부터 조선 건국 초기까지도 조정은 어떻게든 화폐를 제조하여 유통하려 하였으나, 백성들은 화폐를 제대로 사용한 경험이 일천했고 저화나 동전이 현물을 대신한다는 것에 대한 불신이 컸다. 게다가 국내시장 자체가 미 성숙된 상태에서 화폐는 그 존재가치가 퇴색되기 일쑤였다. 결국 한반도에서 화폐가 전국적으로 유통된 것은 17세기 후반의 숙종 연간에 이르러 서야 가능했다. 
결국 명의 상인들이 조선에 투입되어 군량을 수송하는 것으로 명군의 식량수급 걱정은 한시름 놨게 됐지만, 조선입장에서는 명국 상인들의 군량미에 대한 농간과 폭리가 조선에게 새로운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명국은 조선의 미개발 은광에 눈독을 들이게 된다. 조선조정의 직접 나서서 은광을 개발하고, 채굴한 은으로 왜군을 몰아내는 전비로 쓰라는 것이었다. 물론 명조정의 속셈은 조선의 은으로 명군의 군량과 전쟁비용을 충당할 목적이었다.
이 와중에 명군 유격 호대수와 같은 일부 명군 지휘관들은 아예 자국의 광부들을 데리고 직접 은광을 수색하기에 이른다. 왜군과 하루하루 피가 말리는 접전을 벌이고 있는 조선 조정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1594년 4월에 제독 이여송은 영의정 류성룡을 접견한 자리에서 본인 입으로 명군 지휘관들의 탐욕을 인정했을 정도였다. 명군의 도를 지나친 은광탐색이 늘어감에 따라 선조와 대다수의 조정대신들은 은광개발에 소극적인 태토로 돌아서게 됐다.
 
“은광개발은 조선의 왕과 신료들이 반대가 극심한 걸로 알고 있는데, 쉽게 되겠소이까? 심지어 광부들에게 뒷돈까지 주면서 은맥을 찾지 못하게 하는 조선 조정인데…….”
 
양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총병 해생을 바라보았다. 해생은 이미 자신이 예상답변을 준비한 듯 자신 있는 목소리로 질문에 답했다.
 
“우리 군을 수행하는 접반사 이덕형 대감이 은광개발을 지지하는 것으로 압니다. 게다가 조선조정 내외에서도 광산개발을 지지하는 인사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은 채굴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조선 인사들도 있었다. 의병장 정인홍이나 영의정 유성룡 접반사 이덕형등이 그들이었다. 전란으로 인한 피폐한 재정상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책으로서 은의 채굴과 광산에 대한 세금 부과가 유효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접반사가 조선의 중요 중신인 것은 틀림이 없으나, 조선의 군왕이 적극적으로 개발할 의사가 없으니 이를 설득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오.” 
  
실제로 선조는 은광개발론이 힘을 얻을 때마다 신경질적인 거부반응을 보였다. 선조실록에는 은광과 관련하여 그가 ‘한 가지 이익을 일으키는 것은 한 가지 폐단을 제거 하니만 못하다.’ 라고 답한 기록이 남아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장수들 간의 토의는 사그러 들기는커녕 더욱더 격화되었다. 조선에서 경제적 이득을 취하기 위한 여러 방안들이 쏟아져 나왔다. 조선의 차를 채취하여 요동에 팔자는 주장부터 조선의 통상과 무역을 지금보다 확대하여 명국에게 유리하게 하여야 한다는 주장까지 서슴없이 제기되었다. 이미 조선의 물산과 강토가 자기들 것인 것처럼 말이다.
 
“자자. 오늘 논의는 이쯤 합시다. 제장들은 다시 한 번 심사숙고 해보기 바라오.”
 
흐뭇한 표정으로 좌중을 살펴보던 양호는 회의를 파했다. 장수들은 모두 화색이 도는 얼굴을 하고선 양 경리에게 예를 표하고 물러갔다. 그때 한 장수가 그에게 다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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