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환단고기는 명백한 위서.
게시물ID : history_177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엘파란
추천 : 7/5
조회수 : 1202회
댓글수 : 10개
등록시간 : 2011/06/20 10:35:03
현전하는 여러 역사서 및 위서를 베껴 쓴 흔적이 많이 존재한다.
    《규원사화》 및 《단기고사》와 문장구조까지 일치하는 문장이 많이 발견된다.
    《규원사화》 및 《단기고사》에 등장하는 잘못된 인용이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
    신채호가 주장한 ‘연개소문 사망 연도’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러나 해당 연도는 잘못된 연도이다.

용어사용이 적절하지 않다.

    사백력(시베리아), 파나류산(파미르고원), 수밀이(수메르), 우루, 지백특(티베트), 남녀평권, 부권, 상춘, 세계만방(世界萬邦) 등 근대 이후에 등장한 용어가 사용되었다.
    고려(高麗), 몽고(蒙古), 흑수(흑룡강), 영고탑, 산동(山東) 등 실제 사용 시기가 상이한 용어가 사용되었다.
   몽고 : 징기스 칸 이후 등장하는 명칭 
   영고탑: 청나라 시조설화와 관련지어 청대 이후에 등장한 지명
   산동: 중국 사서 《한서(漢書)》를 인용하면서 실제 사서에 없는 산동(山東)이라는 말을 가필하였는데, 실제 산동이라는 용어가 해당 지역을 가리키게 된 것은 명나라 때 이후이다.


저술연대

    1911년 출간본은 존재하지 않으며, 출간 연도인 1979년보다 전에 환단고기 또는 그 저본이 되는 5권의 저서가 존재했다는 근거가 없다.
    1911년에 편집된 책이 1979년에 출간되기까지 60년이 넘게 소요된 설득력 있는 이유를 제시하지 못한다.

기존 사서와 부합하지 않는다.
후대의 글을 인용하는 등 내용상의 모순이 있다.

    1909년에 사망한 이기가 1911년에 완성된 환단고기를 감수하였다고 설명되었다.

    신채호가 《사기집해》의 주석을 잘못 해석하고 주장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전삼한, 후삼한설'이 반영되어 있다.
    이화사의 《언행록》에 수록된 시가 《단기고사》와 《환단고기》에 인용되었다.
    《환단고기》의 내용에 따르면 통일신라 시대의 사람이 저술했다는 《삼성기》에 18세기 청나라 시기에 저술된 책이 인용되어 있다.

《환단고기》와 《단기고사》에 설명된 수메르(수밀이)와 티베트(지백특)까지 진출한 거대한 제국으로서의 고조선의 유적(거주지나 무덤)이 전혀 없다.
환국과 배달국이 존재했다는 시기의 동아시아는 신석기 시대로 국가가 존재할 수 없으며, 일반적으로 문명이 등장하는 시기도 그 이후이다.

《환단고기》는 발해의 왕계보를 14대로 기록하고 있으며 13대 대현석과 14대 대인선의 시호를 각기 경제와 애제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20세기 중엽 김육불에 의해 발해의 14대 왕인 대위해가 발견되면서 발해의 군주는 모두 15명임이 확인되었으며, 대현석 및 대인선의 시호 역시 당시 신라의 왕 경애왕을 오독하여 나타난 것임이 밝혀졌다.

《환단고기》는 출간 경위 자체에 모순이 많다. 저자인 계연수라는 인물의 실존도 의심되고 있으며, 1917년에 단군교에 의해서 공개된 〈천부경〉의 전래 내력에 따르면 계연수는 1916년 이전까지 〈천부경〉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계연수가 1911년에 썼다는 《환단고기》에는 〈천부경〉이 실려 있어 1920년대 계연수의 행적과 전혀 다르다. 《환단고기》에 수록된 오형기의 발문에 따르면 《환단고기》는 1949년에 강화도의 대시전에서 정서되었다고 하나, 실제 강화도의 대시전은 이유립이 교주로 있는 소수종교인 태백교의 교당으로 건립된 연도가 1969년이다.
즉, 아직 건립되지도 않은 건물에서 정서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환단고기》를 공개한 이유립은 1970년대 초반부터 《환단고기》의 일부 편목이나 구절을 자신의 저서 《참된 조국의 상:세계문명동원론》이나 정훈잡지 《자유》에 공개하고 있다.
 이렇게 공개된 부분은 1979년에 공개된 《환단고기》 및 1983년에 다시 출간한 《환단고기》와 다른 부분이 많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오류를 바로잡거나 교열하여 나가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 한편 《환단고기》의 내용 가운데 상당부분은 《단기고사》 및 《규원사화》와 문장 구조까지 완벽하게 일치한다. 일치하는 부분을 분석해 보면 《환단고기》가 다른 두 책을 결합하여 베껴 썼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와 같은 근거를 토대로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1970년대부터 창작 및 조작하여 1979년에 완성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즉, 《환단고기》는 이유립이 고대 역사서를 위장하여 만든 창작물이라는 것이다

《환단고기》가 민족주의 역사책이라는 관점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민족주의, 특히 피식민지 상태의 민족에게서 발달되는 저항적 민족주의의 특징은 다른 민족과 구분되는 배타적인 민족 구성을 중요시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환단고기》는 이러한 배타성보다는 제국주의 일본이나 나치 독일 등에서 유행한 확장적 민족주의의 모습을 보인다. 특히 일본의 ‘대동아공영론’과 유사한 점을 보인다.  

《역사비평》, 1990'에서는 다음과 같은 근거를 제시한다.

    《환단고기》가 저술되었다는 1911년은 항일민족투쟁기인데, 범례에서는 “세계 인류가 대등하게 모여서 함께 존재함을 축하하기 위해서”라고 저술하고 있어 민족주의와 어긋난다.
    고려 우왕 말기에 기록되었다는 《태백일사》에 왜구와의 싸움에 대한 언급이 없다.
    《단군세기》에는 ‘소시모리’가 3도를 거점으로 ‘천왕’을 자칭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일본 신화에서 나타나는 ‘스사노오노 미코토’를 연상시키며, 일선동조론에 이용될 소지가 충분하다.



ㅇㅇ.
그렇습니다. 오히려 친일파 성향이 짙은건 환단고기의 저자와 그걸 추종하는 무리들이라는게 입증됨.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