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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지성의 흥망성쇠
게시물ID : history_1728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oirCafé
추천 : 11
조회수 : 956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4/07/24 20:13:41
합스부르크 시대 오스트리아 제국의 교육과정은 초등학교 -> 실업학교 / 김나지움(인문계 고등학교) / 뷔르거슐레(실무교육기관; 1869년부터) -> 대학의 커리큘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850년 교육개혁 이전까지는 대부분의 교육기관이 종교사제들에 의하여 운영되어 왔으며 유태인과 기독교인 차별없이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하도록 교육시켰다. 김나지움에서는 '마투라'라고 불리는 졸업시험으로 끝나며 이 시험에서 점수를 잘 취득해야 오스트리아 제국이나 독일 국가들의 대학에 진학할 자격이 주어졌다.
 1850년 교육개혁은 커리큘럼의 후반부, 즉 대학교육의 성과를 강화하는데 중점이 실려 추진되었으며 이와 같은 맥락으로 김나지움 과정이 6년에서 8년으로 연장되었으며 한 교사가 모든 과목을 담당하는 체계에서 탈피하여 각 교육과목을 전문교사가 강의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종교가 교육과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축소되고, 자연과학이 도입되었는데,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Wien)의 아카데미 김나지움은 이런 방식으로 개혁된 빈 최초의 김나지움이었으며 슈니츨러, 켈젠 등이 이 학교의 학생이었다. 이러한 김나지움보다 덜 세속적이고 귀족적인 학교로는 쇼텐김나지움이 존재하였으며, 더 격식을 따진 곳으로 리터아카데미가 존재하였다.

 오스트리아 제국시대 김나지움의 교육과정에 따르면 8년 커리큘럼 동안 라틴어 수업을 주당 6시간씩 받도록 규정되어 있었으며, 그리스어를 2년간 주당 여덟시간, 5~6년 동안 주당 5시간씩 배워야하였다. 쇼텐김나지움의 경우 그리스어 수업 마지막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본독해로 마무리짓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교육과정에서 우수한 학생이라면 졸업 시기에 추상 개념을 구사할 능력을 갖추게 되기도 하였다.
 김나지움은 규율이 매우 엄격하였으며 낙제에 대한 리스크, 그리고 이에 대한 학생들의 두려움도 큰 편이었다. 졸업을 앞두고 상관 앞에서 보는 구술시험은 학생에게 즉석연설과 논증을 연습하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낙제의 리스크는 지대했지만 합격하여 대학에 입학하면 특권을 누려게 되었다. 1870년부터 대학생들의 병역의무기간이 1년 단축되었으며 고위 공무원직의 경쟁에도 유리했다. 대학교수는 국가 공무원이었으며 이는 황제의 위임을 받은 교육부가 임명권을 쥐고 있었다. 교육부가 대학교수임용에 대한 무소불위의 권한을 갖고 있는만큼 후견관행 또한 판을 쳤다. 휴스턴 체임벌린이라는 화학자는 대학교수의 딸과 결혼한 지 불과 석달뒤에 화학교수에 임용되었다. 반면 프로이트는 본인이 교수직을 신청한지 3년이 지나도록 긍정적인 통보를 받지 못하고 있다가 프로이트의 환자였던 남작부인이 교육부관료의 미술관에 그림 한점을 기증한 것을 계기로 교수직을 얻기도 했을 정도이다.
 물론 대다수의 능력있는 자들은 지위를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며 그 결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대학에는 뛰어난 교수들도 많았지만 평균이하인 자들도 적지 않았다. 제국은 뛰어난 학자들을 제국의회 상원의 종신의원 자격으로 예우하였으며, 경제학과나 법학과 교수들 중 다수의 교수는 고위행정관료 혹은 언론가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제국의 지식인들에게는 큰 특권이 주어졌으나 그만큼 빡세기도 하였다. 빈 대학의 경우 하루 일과가 아침 7시에 시작되어 저녁 8시까지 계속하였는데, 당연히 자신이 벌어서 학사생활을 이어나가는 학생들은 파김치가 될수밖에 없었다. 여학생들의 경우 성적인 편견에 짓눌리기도 하였는데 여학생의 대학입학은 1897년 철학부를 시작으로 1900년엔 의학부에도 허가가 떨어지게 된다. 물론 교수들의 반응은 떨떠름하였다. 빈 대학의 의학부장은 여학생 입학운동의 주창자에게 "여자의 뇌가 남자들보다 덜 발달됬다는 점을 잘 알거라"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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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 대학)

빈 대학은 1884년에 국회 의사당과 부르크테아터에 인접해 있는 빈의 문화적 핵심지인 링슈트라세로 이전하는데(오늘날의 빈 대학도 여기에 위치), 이러한 대학의 새로운 배치는 학생들로 하여금 예술과 학문을 숭상하는 빈이라는 문화적 연결체의 일부라는 자긍심을 갖게 하였다.
공공건물이 가까이 위치하게됨에 따라 학생들의 캠퍼스 문화의 정치색이 강화되게 되며 점점 과격한 양상을 띄게 되었다. 이들은 반유태주의에 입각하여 유태인들의 대학진입을 막는 소동을 부리기도 하였으며, 부르셴샤프트라 불리는 독일인 남학생 결투조직을 결성하여(오스트리아에서는 19세기 말까지 결투문화가 존속하였다.) '정치적인 결투쇼'를 벌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에 맞서 유태인 남학생 단체들도 결투행위를 조직강령에 포함시키도 하였다. 이러한 정치서클들은 과격한 행위만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술판을 벌이기도 하였고, 아리따운 처녀들과의 밀회를 즐기기도 하며 카타르시스트적인 결속을 강화해 나갔다.

 1850년의 대학교육강화 정책은 이렇듯 다양한 학구적인 분위기를 제국령에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비록 몇몇 혁신적인 발명가들의 발명품이 오스트리아에서 빛을 보지 못한 자랑스럽지 못한 점이 있긴 하지만 수많은 정신적인 구루들을 배출하였다. 마흐, 후설, 프로이트, 노이라트, 비트겐슈타인, 아들러, 바그너, 슐릭 등 철학, 공학, 자연과학, 의학 등 다채로운 분야의 대가들이 오스트리아에서 배출되었으며 빈에서는 경제학의 한 획을 긋는 빈 학파, 즉 국민경제학파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세계상의 개척자들은 엄청난 재능과 끈질김을 발휘하였다. 재능 있는 아이들은 오스트리아에서 혼란하고 복잡하기 짝이 없는 세계를 자신의 잣대로 해석할 수 있는 지적 도구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전통적인 유산에 의하여 오스트리아에서 교육받은 학생들은 상속받은 유산을 능가해 나갈 수가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합스부르크 정부가 붕괴하고 제국은 분열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이제, 제국이 아니라 하나의 영세한 신생공화국이 되었다. 구 제국령의 공무원, 전문직 종사자들이 현지에서 직업을 잃거나 추방되어 오스트리아로 속속 복귀함에 따라 인구 700만의 인구과밀국가인 오스트리아는 기아와 인플레이션, 연료 부족, 그리고 빈곤으로 인한 전염병들의 기승으로 제국에서 독립한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비참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지성의 상징인 빈 대학은 연료부족으로 수년간 문을 닫기도 하였으며, 유행성 감기에 의하여 프로이트의 딸 조피, 화가 에곤 실레를 포함한 수천명이 죽었으며 예술사학자 드보르작 등은 기아로 인하여 사망하였다. 비확실성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오스트리아의 지성의 불이 완전히 꺼진것은 아니었다. 합스부르크 시대의 교육을 통해 배출된 켈젠, 바우어, 슐릭, 노이라트 등의 사상가들은 전 세계에 실증주의를 전파하면서 아직 오스트리아의 지성은 건재하다는 사실을 자랑하였다.

 1차 세계대전으로 큰 피해를 입은 이것은,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완전히 소멸되게 된다. 오스트리아의 지성과 나치의 연으로 인하여 이것들을 논함이 1945년 이후로 터부시되었으며 연방공화국은 제국의 유산보다 알프스의 민족을 더 우대하게 되었다. 1945년 이후로 유럽에서는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사상가들을 보기가 어려워졌는데 오스트리아의 지성의 몰락은 이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현대에 남아있는 과거 오스트리아 지성들의 아류들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창조하지 못하게 되었고 대신 과거의 창조물들을 되새기는 일밖에 하지 못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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