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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도 안되는데 자꾸 글을 쓰게 되네요. 꼭 게시판에 글이 자꾸 올라와야 하는 것은 아닌데 글이 많이 안올라오면 나라도 써보지 뭐 하면서 올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번에 종교가 보수적인 이유에 대해서 써본 적이 있습니다.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phil&no=17210&s_no=17210&page=2
지난 글에서 종교는 태생적으로 생산적이기 힘들기 때문에 기득권에 기대기 위하여 기득권의 입맛에 맞도록 종교가 변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물론 밑에서 부터 지지를 받아 기득권으로부터 외면을 받는다 하더라도 널리 민중으로 부터 지지를 받으면 기득권에 기댈 필요는 없겠죠. 하지만 민중으로부터 지지를 받아 그 기반이 탄탄해지면 결국 기득권과 결탁되어 그 세를 늘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특히 배타적인 초월종교가 더욱 그렇겠죠. 절대자의 선택을 받은 왕, 귀족, 성직자의 역할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으니까요.
사회, 정치적인 측면 말고 내재적으로도 보수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기독교, 이슬람교 같은 배타적인 초월종교에 해당하는 것일 겁니다. 배타적인 초월종교(이하 초월종교)는 형이상학적으로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봅니다. 실제로 기독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교부철학과 스콜라철학을 통해 발전을 하고 유럽을 장악하게 됩니다.
형이상학적인 이분법적 관점은 모사품에 불과하고 정확하지 않은 현실세계(현상)가 아닌 정확하고 성스러운 이데아의 세계가 있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내각의 합이 정확하게 180도인 삼각형을 그릴 수 없습니다(내각의 합이 180도를 넘게 되겠죠). 아주 정확하게 직선을 그을 수도 없죠. 하지만 정확하게 내각의 합이 180도인 삼각형은 이데아의 세계에 존재하고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 이데아의 세계에 있었으므로 부정확한 현상세계에서도 삼각형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죠. 의자는 의자의 이데아에 의해 사람을 앉을 수 있게하는 도구라는 본질을 갖는 것이고, 축사의 돼지는 인간에게 고기가 되는 본질을 갖고 태어난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잊고 살지만 공부를 하면서 이데아의 진리를 다시 하나씩 상기(기억 되살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anamnesia). 물론 그렇기 때문에 인간도 저열한 육신이 아닌 영혼이 본질이 되고 영혼이 육신에 비해 훨씬 중요합니다. 영혼을 통해서 육신이 변한다 하더라도 한 개인은 개인으로 구별성을 갖는 겁니다. 영혼 때문에 팔이 하나 없어져도 영수는 영수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자기동일성).
초월종교는 육신의 현상세계에서 덕을 쌓아 절대신에게 영혼으로 다가가서 심판을 받고 이데아의 세계(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는 것을 미덕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현상세계에서의 행복은 미루고 경건하게 신의 뜻에 맞춰 살면서(그게 노예의 삶일지라도) 구원받아 천상의 세계에서 행복하기를 기원하라고 합니다. 주어진 삶이 왕이면 왕으로 노예면 노예로 신이 만든 질서 안에서 경건하고 불만 없이 하루하루를 버티는 삶이 가장 훌륭한 삶이 되는 것이죠.
형이상학적 철학하에서 만들어진 초월종교는 그래서 본질을 중요시 합니다. 본질을 중요시 한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그 사물의 목적을 중요시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각각의 주어진 삶에 맞춰 살아야 하듯, 모든 사물 역시 그 본질에 맞아야 하는 것이죠. 램프는 불을 밝히는 용도로 써야지 실내 인테리어로 혹은 원고가 날아가지 않도록 괴어 놓는 용도로 써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의자는 사람이 앉는 것이지 싸울때 던지는 용도로 써서는 안되는 것이죠. 물론 절대 안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본질에 맞지 않는 것은 지양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본질을 중요시 하게 되면 보수적으로 변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상황에 따라 유연하고 융통성 있게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고 고정된 본질에 따라 사용해야 한다는 관점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본질을 중요시 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보수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이러한 철학을 무너뜨리고 맹렬하게 공격한 것이 니체 입니다. 신은 죽었고, 본질이라는 것은 인식하는 주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는 거죠. 어떤이에게 콘돔은 유용한 물건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단지 풍선일 뿐이고, 갈매기에게 배는 구경거리지 움직이는 운송수단의 본질은 없는 거니까요. 똥을 바라보는 주체에 따라 사람에게는 쓰레기이지만 들판의 들꽃에게는 좋은 영양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종교가 없는 무교에 무신론자라서 제가 쓰는 글은 다분히 편향적입니다. 당연히 제 생각일 뿐이고 동의하지 않는 분이 많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불교는 조금 다릅니다. 자기동일성을 말하는 자성은 없다고 합니다. 자성이 없다는 말이 곧 공이라는 개념이고, 3법인, 4법인 중 제법무아가 자기동일성 즉 자성이 없다는 말입니다. 제법무아에서 '아'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atman 아트만은 자아라는 개념보다는 자성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으로 보입니다. 변하지 않는 자기동일성이 없다면 세상은 더 유연해지고 죽은 후의 극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세상에서 행복을 추구할 수 있게 되죠.
단하소불이라는 화두가 있습니다. 옛날 단하라는 스님이 몹시 추운 날 혜림사에서 하루 묵어가기를 청했습니다. 당시 관습대로 스님을 묵어가게 해주기는 하지만 뭐가 마음에 안들었나 주지스님이 단하스님을 난방도 안되는 대웅전에서 머물라고 합니다. 밤 늦은 시간 대웅전에서 불빛이 보여서 주지스님이 가보니 단하스님이 목불(불상)을 쪼개서 아궁이에 불을 붙이고 있습니다. 깜짝 놀란 주지스님이 화를 내며 지금 뭐하고 있냐고 하자 단하스님은 '목불에 사리가 있는지 보고 있습니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주지스님은 화가 나서 '아니 나무불상에 무슨 사리가...'하면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죠. 결국 나무 불상은 부처님이 아니고 부처님의 본질을 가진 것이 아니라 단지 나무 조각상이었던 겁니다. 얼어 죽을거 같은데 나무 조각하나 불붙이는게 뭐가 대수겠습니까.
우리나라 사찰에 가면 지옥을 지키는 사천왕이나 지옥에 대한 그림들이 있고, 극락왕생이라던지 천도재 같은 재가 있습니다. 제가 아직 아는 것이 없어 잘은 모르지만, 석가세존은 사후세계 같은 형이상학적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고, 영혼의 존재를 부정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영혼은 불과 같아서 나무로 붙인 불은 장작불, 섶으로 붙인 불은 섶불이라고 하듯 영혼이란 육신이 다하면 사라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육신이 중요한 것이지 육신을 넘어서는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요. 아무래도 영혼을 강조하며 재를 드리고 지옥도를 걸어 놓는 것은 토속신앙과 결부된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윤회라는 것도 불교 이전의 브라만교의 교리가 섞여서 그런것은 아닌가 싶고요.-딴길로 샜네요.
결론적으로 초월종교가 태생적으로 형이상학적 논리를 기반으로 하면서 본질과 영원, 영혼에 집착하면서 내재적으로도 보수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