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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조선 중종 28년 어느 사건 이야기 - 마지막
게시물ID : history_1727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14
조회수 : 858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4/07/23 21:11:08

1. 2월 20일

 

전교하였다.

 

“한덕이 ‘아이를 데리고 가서 기르다 오래지 않아 도로 버렸다.’고 하고 또 ‘청파(靑坡)에 버렸다.’ 하였는데, 지금 아이에게 ‘버릴 때에 네 발을 자르고 버렸는가?’ 하는 내용으로 물어봤는지를 의금부 낭관에게 하문하라. 귀덕(貴德)이 그 뒤에 이 아이를 데려갔었다고 하니 ‘만약 이미 발이 잘려있었다면 이 아이를 어디에 쓰려고 데리고 갔는가?’ 하는 뜻으로 자세히 물으라. 그리고 귀덕을 아이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서 ‘이 사람이 네 발을 자른 게 아니냐?’ 이 사람이 과연 너를 데리고 갔느냐?’고 물으라.”

 

 

2. 2월 21일

 

정원에 전교하였다.

 

발을 자르는 것은 잔혹한 것으로 세상에 드문 일이다. 백성을 구휼하는 정사 중에 가장 먼저 할 일로 이같은 어린아이를 구하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은 없다. 해조에게 적절히 마련하여 음식물을 제급(題給)하게 하라. 그리고 이 아이의 일은 아직 조사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김귀성(金貴成)의 집에서 잘 보호하게 하였는데, 지금은 중덕(仲德)이 어미임이 밝혀졌으니 그 아이를 어미에게 돌려보내야 한다. 그리고 발이 동상으로 빠진 것인지, 칼로 자른 것인지는 자세히 살피면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의술에 능통한 의원과 한성부의 낭관에게 다시 살피고 검사하게 할 것을 금부에 이르라.

 

정원이 의금부의 뜻으로 아뢰었다.

 

“금부 도사 이창무(李昌茂) 등이 의원을 데리고 가서 발이 잘린 여자아이를 살펴 보게 하였습니다. 동상으로 빠진 곳은 두 발의 안팎의 복사뼈와 골구(骨臼)가 완전하며 살은 썩어도 힘줄은 남아 있는 것인데, 이 아이는 끊어진 곳이 이와 다릅니다. 복사뼈 위 정강이뼈의 부러진 곳이 날짜가 오래되어 새살이 나고 살가죽이 줄어 들었으니 칼로 자른 것이 명백합니다.

 

3. 2월 29일

 

판의금부사 김금사(金謹思) 등이 아뢰기를,

 

“어린아이의 발을 자른 사건은 의심스러우므로 한덕(漢德)을 형추(刑推)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는 일로 본부에 하문하셨습니다. 처음에 옥가이(玉加伊)를 추문했을 때, 옥가이가 ‘한덕이 내 발을 잘랐다.’고 말했을 뿐 아니라 발을 자를 때의 상황까지도 매우 분명히 밝혔으므로 믿을 만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발을 잘렸다고 말한 뒤에 여러 차례 다른 집을 거쳤는데도 그때까지 두 발이 모두 온전했습니다. 마침내 귀덕의 집에 와서는 치료를 잘하지 못하여 발목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의원에게 가서 보게 하니 발을 자른 것이 명백하다고 하므로 귀덕을 여러 차례 매질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물금(劉勿金)의 동상으로 빠진 발을 살펴보니 역시 잘라서 끊어진 것과 같았습니다. 사람에게는 본래 이같이 동상으로 발이 빠지는 경우가 있는데, 더구나 옥가이 같은 어린아이의 발이야 동상으로 빠지기가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귀덕의 집에 있을 때도 두 발이 탈이 없었으므로 한덕을 석방해야 하는 일에 의심할 것이 없으나, 옥가이의 말이 이와 같았으므로 아직 석방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젖먹이 어린아이의 말로 한덕을 추문하는 일이 사리에 어떻겠습니까?

 

가령 그 발이 동상에 걸려 귀덕의 집에서 빠졌다 해도 치료하지 못해서 발이 빠지게 되었다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이제 형추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끝내는 결죄(決罪)를 해야 하는데 무슨 말로 조서(調書)를 작성해야 합니까. 의원의 말에만 의거하여 귀덕을 계속 심문하는 것이 사리에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나도 한덕을 형추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한덕의 집에서 버려진 뒤에 여러 번이나 남의 집을 거치다가 발이 빠졌으니 한덕이 관계되지 않은 것을 나도 아는 바다. 그러나 유물금의 동상으로 빠진 발과 비교하여 보면, 동상으로 빠졌는지 잘린 것인지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인데, 이제 물금의 발이 오래되어 분변하기 곤란하다고 한다. 내가 생각해 보니 동상으로 발이 빠졌다면 정강이 뼈가 끊어진 것과 같이 생긴 것은 왜 그런가? 이것을 알 수가 없다. 옥가이가 한덕이 발을 잘랐다고 범범하게 말했을 뿐만 아니라 솜으로 입을 막은 상황까지도 분명히 말하였으니, 이는 비록 아이라 하나 나이가 4∼5세가 넘었는데 무슨 말인들 하지 못하여 무슨 일인들 알지 못하겠는가. 무슨 원한이 있어서 거짓으로 이런 말을 했겠는가. 그러므로 그 아이가 다른 집에 가고 나서 한덕이 쫓아가 몰래 자른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의원은 모두 잘라서 끊어진 것이라고 말하므로 귀덕 역시 추문한 것이다. 유사(有司)하고만 의논해서는 안 되니 대신들과 의논하도록 하라.”

 

하고, 정원에 전교하였다.

 

“의정부의 낭관을 불러 이 옥사에 대해 의논을 모아가지고 오도록 하라.”

 

 

4. 2월 30일

 

영의정 정광필이 의논드리기를,

 

옥가이(玉加伊)가 말한 것을 보면 발을 자른 것은 한덕이 한 짓 같습니다. 그러나 한덕의 집에서 나와 서너 집을 거치다가 끝에 귀덕의 집에 이르게 되었는데 두 발이 그때까지 있었고 단지 동상에만 걸렸을 뿐이었습니다. 귀덕이 역시 분명하게 말하기를 자기 집에 이른 후에 두 발이 떨어졌다고 하고, 그것을 보았다고 증언한 자도 있으니, 한덕(漢德)이 잘랐다는 것도 분명 아닙니다. 그런데 단지 미욱한 아이의 말만 듣고 큰 옥사를 만드는 것은 부당한 듯합니다. 신의 뜻은 이와 같습니다. 의심스러운 옥사(獄事)는 끝까지 밝혀 내지 않더라도 해로울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고, 좌의정 장순손은 의논드리기를,

 

“신도 이 사건을 들었습니다. 신의 뜻에는 금부의 아룀이 온당하게 여겨집니다.”

 

하고, 우의정 한효원은 의논드리기를,

 

옥가이의 말로 살펴보면 입을 막고 발을 잘랐음이 지극히 분명하여 4∼5세밖에 안된 어린아이가 능히 꾸며낼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형추하여 사실을 알아내는 것이 매우 온당합니다. 그러나 귀덕과 돈독(敦篤) 등 여러 사람의 초사를 보면, 여러 차례 집을 옮겨 다녔으므로 동상이 걸린 것도 또한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런 의심스러운 옥사는 끝까지 추문하더라도 실정을 알지 못할 것이요, 오히려 무고하게 죽을 폐단까지 있습니다. 더구나 동상에 걸려 발이 빠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상께서 재결하소서.”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귀덕의 공사는 근거가 없으니 추문하지 말라.”

 

 

※ 몇 줄 요약

 

 

1. 중종이 지금 아이에게 ‘버릴 때에 네 발을 자르고 버렸는가?’ 하는 내용으로 물어봤는지와 귀덕(貴德)이 그 뒤에 이 아이를 데려갔었다고 하니 ‘만약 이미 발이 잘려있었다면 이 아이를 어디에 쓰려고 데리고 갔는가? 그리고 귀덕을 아이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서 ‘이 사람이 네 발을 자른 게 아니냐?’ 이 사람이 과연 너를 데리고 갔느냐?라고 물어보도록 의정부 낭관에게 하문하도록 함.

 

2. 중종은 ‘발을 자르는 것은 잔혹한 것으로 세상에 드문 일이다. 백성을 구휼하는 정사 중에 가장 먼저 할 일로 이 같은 어린아이를 구하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은 없다.‘라고 말하며 의술에 능통한 의원과 한성부의 낭관에게 다시 살피고 검사하여 발이 잘린 원인인 동상인지 아니면 칼로 인한 것인지를 금부에 이르라고 함.

 

3. 의금부가 조사한 결과 칼로 자른 것이 분명하다고 함.

 

4. 판의금부사 김금사 등이 중종에게 말함. 그 내용은 이러함. 처음에 아이의 증언을 들었을 때, 아이가 자신의 발을 한덕이 잘랐다고 말했을 뿐 아니라 그 정황 사정도 분명히 밝혀 아이의 증언은 믿을만 하였음. 하지만 이후 발이 잘렸다고 말한 시점 이후에 여러 집을 거쳤을 그 때까지도 두 발이 모두 온전했음. 그러다 귀덕의 집에서 치료를 잘못하여 발목이 잘리게 됨. 그러나 의원에게 이를 보여주니 의원이 이는 동상이 아니라 잘린 것이 분명하다고 하여 귀덕을 심문함. 그런데 유물금이라는 동상으로 발이 잘린 사람의 경우를 보았는데 그 발도 칼로 잘린 것과 같았음. 사람은 원래 이같이 동상으로 발이 빠지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하물며 옥가이 같은 어린아이의 발이 동상을 빠지는 충분히 있을 수 있음. 어린 아이의 말만 믿고 한덕을 매질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음.

 

또한 그 발이 정말 동상에 걸려 잘린 것이라면 귀덕이 치료를 잘못하여 잘린 것뿐이니 죄를 물을 수 없음. 일단은 심문은 하지만 나중에 조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이런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에서 조서를 작성할 수 있냐고 반문함. 하지만, 그래도 의원이 칼에 찔린 게 맞다고 하니 일단은 한덕을 두고 귀덕을 심문하는 것이 맞는게 아닌가하고 말함.

 

5. 중종은 일단 자신은 한덕을 형추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함. 그리고 자신도 아이가 한덕의 집에서 버려진 뒤 여러 집을 거치다가 발이 잘렸으니 한덕이 이 사건과 한덕이 관련 없는 것을 알고 있지만, 유물금과 아이의 발을 비교하면 아이의 발이 잘린 원인을 알 수 있을텐데 유물금의 발이 오래되어 제대로 분별하기 어렵지 않냐고 말함.

 

이어 아이(옥가이)가 한덕이 자신이 발을 잘랐다고 말했을 뿐 아니라 솜으로 입을 막은 상황까지 분명히 말했는데, 비록 어린 아이라 하나 나이가 4-5세가 넘었는데 사리분별은 할 줄 있을 것임. 아니면 아이가 무슨 원한이 있어서 이런 거짓말을 했겠음? 그래서 자신(중종)은 한덕이 몰래 자른 것이 아닌가라고 의심함. 의원이 잘라서 끊어진 것이라 하므로 정황상 유력한 용의자인 귀덕도 추문한 것임. 그리고 이 일은 해당 부서만 의논하지 말고 대신들과 의논하라고 함

 

6. 다음 날인 2월 30일 중종은 이 6살 어린 아이 발목 절단 사건에 대하여 의정부의 대신들의 마지막 의견을 듣기로 함.

 

영의정 정광필 : 아이의 증언을 들으면 아이의 발을 자른 것은 한덕이 한 짓이 맞는 것 같지만, 한덕의 집에서 나와 귀덕의 집에 이르렀을 때에는 두 발이 그대로였고 단지 동상에만 걸린 상태였음. 귀덕은 자기 집에 이른 후에 두 발이 떨어졌다고 하였고, 이를 증명할 자도 있음. 한덕이 자른 것도 아님. 아이의 말만 믿고 옥사를 크게 만드는 것은 부당함. 여기서 사건을 종결시켰으면 함.

 

좌의정 장순손 : 의금부의 의견이 맞다고 봄.

 

우의정 한효원 : 아이의 말을 들어보면 입을 막고 발을 잘랐음이 분명함. 이는 4-5세의 아이가 꾸며낼 수 있는 말이 아님. 끝까지 조사하여 사실관계를 밝히는 것이 맞음. 하지만 귀덕 등 여런 사람들의 증언을 들으면 여러 차례 집을 옮겨 다녔으므로 동상이 걸린 것도 분명한 것 같음. 이런 의심스러운 사건은 끝까지 추문해도 그 실정을 알 수 없고, 오히려 무고한 자만 죽을 수 있는 일이 생길 수 있음. 그리고 동상에 걸려 발이 잘릴 수도 있음.

 

7. 중종이 근거가 없으므로 더 이상 귀덕을 추문하지 말라고 함

 

 

※ 사상 초유의 사건은 결국 미제사건으로 끝났습니다. 아이의 증언도 맞는 듯 하지만 귀덕 등의 증언이나 정황은 그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고문을 하면 바로 대답이 나올 수도 있겠습니다만 오히려 고문으로 인한 거짓자백으로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중종은 한성부, 의금부, 삼정승 등 대소 신료들에게 이 사건에 대해 의논하였고 결국 더 이상 추문하지 말라는 것으로 이 사건을 종결합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단순히 6살 어린 아이 발 절단 사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당시로써는 인간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던 노비 아이의 사건을 한성부, 의금부, 삼정승 심지어 왕까지 진지하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의 관계자들은 모두 노비였지만 그 누구의 증언도 무시하지 않았고 함부로 고문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관련 기관들이 진지하게 이 사건에 대해 임하며 왕에게까지 보고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물론 왕이 이 사건에 관심을 보였기에 가능한 것이었겠습니다만 

 

그리고 가장 이 글을 쓰면서 가장 감동적인 것은 <백성을 구휼하는 정사 중에 가장 먼저 할 일로 이 같은 어린아이를 구하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은 없다>라는 중종의 말이었습니다. 사극상에서는 여자들에게나 잡혀 흔들리는 유약한 이미지로만 보이던 중종이 무시하면 무시할 수도 있는 그 어린 노비 아이에게도 관심을 가지며 진지하게 이 사건을 해결하도록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저 중종의 말은 최근 세월호 사건에서 보인 우리나라의 공직자들의 행동을 비추어볼 때 현재 우리 사회의 공직자들이 진지하게 귀담아 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두서없고 재미없는 글이었겠지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출처

 

중종 73권, 28년(1533 계사 / 명 가정(嘉靖) 12년) 2월 20일(계사) 2번째기사

중종 73권, 28년(1533 계사 / 명 가정(嘉靖) 12년) 2월 20일(계사) 5번째기사

중종 73권, 28년(1533 계사 / 명 가정(嘉靖) 12년) 2월 21일(갑오) 1번째기사

중종 73권, 28년(1533 계사 / 명 가정(嘉靖) 12년) 2월 21일(갑오) 5번째기사

중종 73권, 28년(1533 계사 / 명 가정(嘉靖) 12년) 2월 29일(임인) 2번째기사

중종 73권, 28년(1533 계사 / 명 가정(嘉靖) 12년) 2월 30일(계묘) 1번째기사

중종 73권, 28년(1533 계사 / 명 가정(嘉靖) 12년) 2월 30일(계묘) 2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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