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월 16일
한성부가 아뢰기를,
“용산강(龍山江)의 무녀(巫女)의 집 뒤, 언덕길 옆에 5∼6세 되는 어린애가 두 발이 잘린 채 버려졌는데, 그 아이가 그때까지 죽지 않고 ‘나를 업고 가면 내 발을 자른 집을 가리켜 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그 아이를 추문한 뒤 그 말에 관계된 자를 잡도록 하면, 반드시 자기가 한 소행을 깨닫고 도피할 것이니, 급히 아이와 함께 군사를 보내어 그 아이가 가리킨 집에 가서 체포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전교하였다.
“그 일을 들으니 놀랍다. 그 아이를 치료하지 않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니 신중히 간호하여 죽지 않게 하고, 속히 포도 부장을 불러 체포하게 하라.”
2. 2월 17일
한성부가 아뢰기를,
“초사(招辭)에 나타난 의심나는 사람을 잡아들였습니다.”
하고, 초사를 입계하니, 전교하였다.
“이 아이의 두 발을 잘랐으니 비록 죽이지 않았어도 상해한 마음은 죽인 것과 같다. 형조에게 추문하게 해야 하지만, 형조에는 일이 많아 쉽게 추문하지 못할 듯하니, 의금부에게 추문하게 하라. 지금 잡아온 자는 금부에 가두고, 이 아이는 생모라고 자청한 자에게 보내도록 허락하라.”
【계사(啓辭)는 다음과 같다. “용산강 무녀의 집 뒤, 언덕길 옆, 감사 김귀성(金貴成)의 집앞에 5∼6세되는 여자아이가 두 발이 잘린 채 버려졌습니다. 이름을 물으니 개춘(開春)이라고 했고, 자기의 형은 어리가이(於里加伊)라고 했습니다. 발이 잘려진 연유를 물으니 ‘칼로 자르며 죽어라 죽어라고 하였다.’고 했습니다. 김귀성이 부(部)에 나아가 고하니 부에서 한성부에 첩보(牒報)하였고, 한성부가 위에 계달하였습니다. 사비(私婢) 한덕(漢德)을 추문한 결과, 그의 공사(供辭)에 의하면 ‘정월 초에 그의 상전 집을 왕래하다가, 허리 아래에 동상이 걸리고 부종(浮腫)이 있는 어린아이가 길에 버려진 것을 보고, 자식이 없기 때문에 집에 데리고 가 다듬이질하면서 밤을 지냈는데, 주인이 더러운 아이를 데려왔다고 꾸짖으므로 다음날 도로 길에 버렸다. 그후에 들으니 겨린(切隣) 중에 대궐에서 나와 사는 사람이 데려 갔다가 그 집에서 또 버린 것을 김 별좌(金別坐)의 종 연수(連守)가 데리고 갔다고 했고, 발을 자른 이유는 듣지 못했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비(私婢) 중덕(仲德)이라고 이름하는 자가 와서 아이를 보고 ‘이 아이는 옥가이(玉加伊)다. 지난해 9월 29일 뜻밖에 잃어버렸는데, 이달 17일에 발이 잘린 아이를 업고 가더라는 말을 듣고 우리 부부가 쫓아가 보니 과연 옥가이였다.’ 하였습니다. 아이에게 발이 잘린 이유를 물으니, 곁에 앉아 죽을 먹이던 여인을 가리키며 저 여인이 내 발을 잘랐다고 하고 한덕을 가리켰습니다. 한덕과 같은 집의 종 봉비(奉非)와 입사리(入沙里) 등 4∼5인의 공사에도 모두 지금 발이 잘린 한덕의 수양딸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원이 아뢰기를,
“발을 잘린 여자아이를 생모에게 보내도록 허락한 전교가 있었으나, 한덕이 거두어 길렀고 중덕은 생모라고 자칭합니다. 두 집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은데도 그 아이의 소재를 알지 못했으니 지금 어떻게 중덕이 생모라는 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중덕과 함께 모두 가두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전교하였다.
“여자아이를 생모에게 보내려는 것은 아이의 발이 잘렸어도 잘 구호하면 살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죽을 것이므로 낳은 어미에게 보내어 성심으로 간호하게 하려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어미인지 확실히 알기 어려우니 가두어 두라. 다만 아이를 보호하는 집【갑사(甲士) 김귀성임.】으로 하여금 진심으로 간호하여 죽지 않게 하라.”
※ 몇 줄 요약 (음슴체)
1. 중종 28년 2월 16일. 용산강 무녀의 집 뒤, 언덕길 옆에 5-6세의 어린애가 두 발이 잘린 채 버려졌다는 것이 한성부를 통해 중종에게 올라옴
2. 중종은 즉시 그 아이를 치료케 하고, 포도부장에게 명해 범인을 잡으라고 명함
3. 중종 28년 2월 17일, 한성부에서 용의자를 잡음.
4. 중종은 아이의 두 발을 자른 것은 죽이지 않았어도 상해한 것과 같다고 판단하고 의금부에서 이 일을 처리토록 하게 함
5. 수사 결과는 이러했음.
음력 2월 아직 밖에선 칼바람이 부는 날 용산강 근처 감사 김귀성의 집앞에서 5~6세되는 여자아이가 두 발이 잘린 채 버려졌음. 아이의 이름을 물으니 개춘이라 했고, 발이 잘린 연유를 물으니 다리를 자른 사람이 '칼로 자르며 죽어라 죽어라' 하였다고 함. 이를 김귀성이 발견하여 부에 고했고 부가 한성부에 고하고 한성부는 그 일을 임금에게 전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