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분들이 호응(?)해 주셔서 용기내어 올려봅니다.
초반부는 3국의 입장을 정리해보았습니다...(아마 제1장부터 돌이 날라 올듯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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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597년 11월 초순 울산 태화강 하류 모처
서산의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낙조가 건설현장의 인부들을 붉게 물들고 있었다. 하지만 고된 육체노동에 찌든 그들의 상기된 얼굴은 그보다 더 발갛게 익어 가고 있었다.
“이놈들아! 힘을 내라! 게으름 부리는 자들은 벌한다.”
어느 왜군 감독관의 목소리에서 쇳소리가 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가 내려진 10월부터 공사는 계속되고 있었다. 주재료인 석물은 울산읍성과 병영성(경상좌도 병영이 있던 곳)을 무너뜨려 성을 짓는데 충분했다. 하지만 유독 감독관 자신이 맡은 공정의 진척속도가 느렸다.
‘느릴만도 하지. 내 무리에는 조선인 노예들이 태반이니.’
정유년의 재침. 임진년과는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 처음 조선을 침공했을 때, 백성을 버리고 줄행랑을 친 임금을 원망하던 무지렁이 천민들이 곳곳에 있었다. 쌀 한줌 짠지하나에 이들은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향도들은 왜군이 조선팔도를 유린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허나 다시 바다를 건너온 올해는 부역자가 쉬 나타나지 않았다.
‘곳곳에 붙인 방문만 봐도 그래. 『조선인 관리와 그 가족을 죽이고 가옥을 전소시킨다. 살던 곳에 돌아오지 않는 자들은 모두 죽인다.』 라고 떡 하니 붙여놨으니 겁많은 조선인들이 꽁무니를 뺄법도 하지.’
그나마 있는 조선인들도 대부분 왜군과 결탁한 노예상들이 잡아온 것이었다. 생포해온 자들도 시골에서 농사나 짓던 놈들이 태반이라, 축성에 대해서 아는 자는 드물었다. 그런 잉여인력들을 연공서열상 밀린 자신이 떠맡은 것이다.
“공사는 잘 진척되고 있는가? 감독관.”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감독관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공사의 감리를 맡은 오타 카즈요시가 아사노 요시나가의 부장 시시도 모토츠구, 가토 기요마사의 부장 가토 기요베등을 대동하고 공역장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또 한사람. 승복을 입은 사내가 그 뒤를 조용히 따르고 있었다.
“군감나으리 나오셨습니까? 보시다 시피 공사는 훌륭히 마무리 되고 있습죠. 헤헤.”
감독관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며 곁눈질로 오타 카즈요시를 보았다. 그는 공사장의 먼지에 눈살을 한번 찌푸리고는 면포를 코에 대고 성의 전경을 살펴보고 있었다. 감독관은 그의 눈치를 보며 마른침만 삼키고 있었다.
“내가 듣기론 그대가 맡은 부분만 공기가 지연된다 들었다. 내 진상을 파악하고자 이리 나와 보았다.”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저들 중에 누군가가 자신을 고자질한 것이 틀림이 없었다.
“오해십니다. 나으리. 다음 달까지는 하늘이 무너져도 기필코 완공될 터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변명을 늘어놓는 감독관에게 오타의 노성이 내려쳤다.
“네 이놈! 이 성이 어떤 성인지 알고 그런 망발을 짓거리는 것이냐? 타이코 전하의 지엄하신 명으로 가토 기요마사공이 입지를 정하고 타이코 전하의 조카이시자 고부고 이신 아사노 요시나가 공과 본인이 총책임을 맡은 공사이니라!”
당시 21세에 불과했던 아사노 요시나가는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대리하여 직책을 맡았을 뿐이고, 사실상의 모든 공정의 총감독은 오타 카즈요시였다.
“오타님. 저런 잡졸은 제가 처리 하겠사오니 부디 고정하시옵소서.”
가토 키요베에가 오타 카즈요시 앞을 나서며 감독관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호랑이 장수의 부장이 사냥감을 찾은 것이다.
“히잇. 부장나으리 제발 자비를……. 모든 것은 일이 서툰 조선 노예들 때문입니다. 지금이라도 저놈들을 족치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허리춤에 매여 있던 왜검으로 손을 뻗었다. 가토 키요베에는 그런 그를 밀치며 손을 들어 공사를 중지 시켰다. 그러고는 다른 감독관을 불러 세웠다.
“너는 지금부터 내말을 조선의 잡부들에게 똑똑히 전해라. 알겠느냐?”
“그럼 조선인 통역사를 데려 오겠습니다.”
“아니 통사는 잡소리가 들어갈 수 있으니 네가 해라. 고려사지사는 충분히 익혔느냐?”
“예. 부장님의 뜻을 받드는데 부족함은 없을 것이옵니다.”
고려사지사. 한글로 풀이하자면 「고려말에 대하여」 라고 할 수 있다. 왜군이 조선을 점령하자 조선의 정보를 수집하고 사로잡은 조선인들을 심문·부역을 시키기 위한 간단한 조선어 회화집이다.
잠시 후.
번득이는 섬광과 함께 감독관의 목이 달아났다. 가토 키요베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시체의 머리를 들고는 왜어로 외치기 시작했다. 그 후 목이 온전한 한 감독관이 악을 쓰며 키요베에의 말을 조선어로 전했다.
“나는 가등청정 장군의 부장이다. 지금 이자를 베었다. 임무를 포기한자. 본보기로 베었다. 이성을 완성해라. 아니면 벤다. 모두 벤다. 내말을 명심해라. 살고 싶으면…….”
얼마 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오타의 무리 속에서 법복을 입은 사내가 합장을 하며 베어진 시체 앞에서 나지막하게 암송을 시작했다. 그가 바로 오타 카즈요시를 따라 정유재란 때 종군한 승려 케이넨 이었다. 그는 오타 카즈요시가 다이묘로 있던 일본 큐슈지방의 안요지라는 사찰의 주지 였다. 정유년에 오타와 함께 조선으로 건너온 그는 군의관으로 종군하고 있었다. 케이넨은 「일일기(훗날 조선일일기로 불림)」라는 일지를 기록했는데 이는 당시 정유재란 당시 조선의 참상을 생생히 보여 주고 있다. 도산성 축성과 관련해서도 글을 남겼는데, 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삼악이 눈앞에 있다. 조금이나마 과오가 있는 자는 수감하여 물고문을 하고, 목에 쇠사슬을 차게 하거나, 달군 인두로 지지는 것은 헛된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로 새삼스럽지 않다.
-1597년 11월 13일
애달픈 마음이다. 백성들은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낮밤을 가리지 않고 혹사를 시킨다. 약간이라도 눈에 거슬리는 자는 심하게 질책하고 쇠사슬로 묶은 다음에 두들겨 팬다. 이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곤혹스럽기 짝이 없다.
-1597년 11월 15일
본토에서 많은 상인이 왔다. 그중에는 인신매매업을 하는 자도 있어 본진의 뒤를 따라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사고선 줄로 목을 묶어 앞에서 몰고 간다. 이때 잘 걷지 못하는 자는 뒤에서 지팡이로 두들겨 팬다. 지옥의 사자가 죄인을 잡아들이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1597년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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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차례의 섬뜩한 처형식이 끝나고 다시 공사장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봐. 만복이 뭘 그렇게 멍하니 보고 있는가? 어서 움직여. 가만히 있음 네놈 목도 뎅강이여.”
들것에 돌덩이들을 들고 서있는 사내를 같은 조의 칠복이가 채근했다. 만복이라 불린 남자다. 허름한 무명옷깃 사이로 보이는 근육질의 몸과는 달리 아직은 앳된 얼굴을 하고 있는 그였다.
“아! 예. 칠복이 아저씨 갑니다요.”
칠복을 따라 잔돌무더기로 걸음을 옮기던 만복이는 높다랗게 지어지는 성채를 노려보았다.
‘왜놈들이 애가 닳기는 닳는 모양이군. 그나저나 오늘도 그자는 나타나지 않는 건가…….’
서산의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죽은 자의 목이 장대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