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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러시아 역사 이야기 5. 쇠락의 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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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리볼버오셀롯
추천 : 12
조회수 : 1065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4/07/22 18:55:01
출처 : http://cafe.daum.net/shogun/9xm/8294

<내우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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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자슬라프의 초상 -


 

 현명공 야로슬라프가 죽자 그가 만든 로타체계에 의거 그의 장자 이자슬라프가 집권했다. 나름 야로슬라프가 키예프루스를 강력하고 체계적인 국가로 만든 까닭에 이자슬라프의 집권 과정에서 당장은 내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자슬라프의 동생들은 형의 집권을 받아들이고 각자의 영지에서 영지를 통치했으며 이자슬라프도 그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당장 스뱌토슬라프 이후 수시로 벌어졌던 상황을 보면 이례적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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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대공이 될 테다! -

 하지만 그 평화는 얼마 가지 못했다. 일단 내부에서 내란이 터진 것이었다. 원흉은 이자슬라프의 친척인 폴로츠크 공 브세슬라프였다. 그는 자신이 대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1060년대 중반 갑자기 노보고로드, 프스코프 등을 약탈하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안되겠다 싶은 이자슬라프는 형제들과 함께 군사들을 모아 1067년 3월 3일 네미가 강 전투에서 브세슬라프의 군대를 패배시키고 브세볼로드를 체포, 키예프로 압송했다. 


 그렇지만 평화를 깬 더 큰 요인은 외부에 있었다. 첫번째는 오구즈족이었다. 페체네그족이 키예프 루스에 의해 패배한 이후 그 공백 지역은 쿠만족의 압력을 받던 오구즈족에 의해 채워졌다. 그러나 오구즈족은 계속 쿠만족에 밀렸고 결국 1050~1060년대에 걸쳐 키예프, 헝가리, 페체네그, 비잔틴을 습격했다. 하지만 곧 키예프, 헝가리, 페체네그, 비잔틴은 대대적인 반격을 펼쳐 오구즈족을 포위, 격멸시켰고 남은 잔당은 오구즈족에 휩쓸려 같이 우크라이나로 이주했던 '카라칼파크'족과 함께 키예프의 군인으로 복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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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진거 다 내놓으라우! -

 그리고 두번째가 쿠만족이었다. 10세기 경부터 슬슬 이름을 드러내던(1) 이들은 1055년 러시아와 최초로 접촉했다. 초기의 관계는 좋은 편이라 이들은 서로 우호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6년 후 쿠만족은 조약을 깨고 러시아 공국들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키예프 루스도 대응에 나섰고, 결국 1068년 알타강에서 이자슬라프와 그의 형제들은 군대를 모아 쿠만족과 대대적인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전투는 키예프 루스군의 대패로 끝났고 쿠만족은 현명공 야로슬라프가 건설했던 대 유목민 방어선 '뱀의 벽'을 뚫고 마구잡이로 약탈을 벌이면서 키예프 루스의 공국들을 짓밟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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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만족은 멸망해야 됩니다! -

 

 안되겠다 싶은 키예프 시민들은 베체(2)를 소집하고 전쟁을 결의했으며, 이자슬라프에게도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전쟁에서 패한 그는 소심해진 건지, 아니면 민중들의 힘이 커지는 것을 우려했는지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키예프 시민들은 일제히 봉기, 이자슬라프를 몰아내고 이자슬라프에 의해 감금됬던 폴로츠크 대공 브세슬라프를 대공으로 추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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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님 이제 물러나시구랴. 이제 내가 대공이우다! -

 그러나 곧 키예프 근교에 쿠만족이 밀어닥치며 일대 혼란이 벌어졌고, 이자슬라프는 처가인 폴란드의 지원을 받아 이듬해 키예프 대공 자리에 복귀했다. 하지만 폴란드의 지원을 받은 것을 고깝게 여긴 동생 스뱌토슬라프가 보리스와 글렙(3)에 대한 시성식 직후인 1073년 3월 22일 군사를 일으켜 이자슬라프를 몰아내고 스뱌토슬라프 2세로 즉위했다. 하지만 이자슬라프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1076년, 폴란드와 신성로마제국의 지원을 받고 다시 키예프 대공으로 복귀했다. 스뱌토슬라프는 포기하지 않고 싸웠지만 이듬해 종기를 잘못 도려낸 게 화근이 되어 죽었다.


 이자슬라프는 이제 지위가 확고해지는 듯 했다. 비록 다시 복귀하는 과정에서 폴란드 군대가 붉은 루테니아를 다시 재점령하기는 했지만(4) 스뱌토슬라프가 죽으면서 도전자는 없어진 듯 했다. 더군다나 그는 폴란드아 인척관계인 덕에 로마 교회와 사이가 좋았고, 복귀 후 얼마 안 되어 로마 교황으로부터 루스의 왕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렇지만 도전자는 존재했다. 스뱌토슬라프의 두 아들들  보리스와 올레그가 여전히 그에게 도전했고 이자슬라프는 그들과 맞서다가 1078년 전사했다.


<교역의 급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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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슬람 해적들에 대해 그린 비잔틴 제국의 그림 -

 

  잠시 시선을 러시아에서 돌려보자. 당시 서유럽이 아시아의 물품들을 수입하려면 비잔틴 제국을 거쳐 수입하던가, 혹은 스웨덴, 키예프 루스를 잇는 바랑기안 길을 통해 얻는 것 정도밖에 없었다. 지중해를 거쳐 교역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왜냐하면 바이킹 만큼은 아니어도 꽤나 악랄한 이슬람 해적들이 지중해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슬람 해적들은 바이킹의 명성에 가려져 그다지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꽤 강력하고 위협적인 존재였다. 이들은 시칠리아를 점령하고, 이탈리아의 바리에 나라를 세우기도 했으며, 로마를 약탈하기도 했다. 크레타섬도 한 때 이들에게 점령당했고 지중해 해변은 이슬람 해적들의 노예사냥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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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젠 니들 좋은 시절도 다 끝났어! -

 


 그러나 11세기경 정세가 급변했다. 1015년, 피사와 제노바의 연합함대가 이슬람 해적들의 영향력 안에 있던 샤르데냐섬을 습격, 이슬람교도들을 쫓아내고 섬을 점거했다. 1030~1035년 사이 피사의 군대가 튀니지를 원정, 옛 카르타고 일대를 휩쓸고, 1052년에는 코르시카섬이 피사에 의해 점령되었다. 크리스트교의 반격이 지중해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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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복. 항복하겠습니다! -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1060년 경 노르만족 출신인 로베르 기스카르가 시칠리아에 상륙하면서 야금야금 시칠리아를 집어삼켜 1072년에는 이슬람 세력을 시칠리아에서 몰아내고 자신이 시칠리아의 군주가 되었다.(5) 그리고 결정적으로 1088년 피사, 제노바, 아말피 등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대규모 연합함대를 결성, 북아프리카를 침공했다. 연합군은 지리드 왕조의 군대를 대파하고 파티마 왕조의 첫 수도 마흐디나를 불태우는 등 북아프리카를 제대로 휩쓸며 이슬람 해적들을 깡그리 박살내버렸다. 이는 기독교도들이 지중해를 장악했다는 신호탄이 되었고 이슬람 해적들이 다시 기세를 올리려면 16세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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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트르메르에 건설된 십자군 국가들 -

 

 더군단 십자군 전쟁이 터지고 우트르메르 일대에 십자군 국가들이 만들어지면서 서유럽은 이제 바랑기안 길을 거치지 않고도 동방, 아시아와 교역할 수 있게 되었다. 해상의 안전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의 함대가 지켜주었고, 도시국가들의 함대는 증대되는 교역 속에 더 강화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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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 잠깐! 저렇게 되면 우리는? -

 

 반대로 바랑기안 길은 너무 위험부담이 커지게 되었다. 애시당초 서유럽 입장에서 안전하고 직접 교역할 수 있기 때문에 비용도 덜 드는 교역로가 생긴 판에 기존의 바랑기안 길 교역로를 통한 무역은 아무래도 입지가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이전처럼 어느정도의 안전성이 보장된다면 모르겠지만 쿠만족이 키예프 루스를 압박하면서 안전성은 보장할 수가 없었다. 애시당초 바랑기안 길에 대한 키예프 루스의 통제력 자체가 굉장히 떨어져서 키예프 루스는 이전에 벌이던 페르시아에 대한 약탈도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키예프 루스로써는 이런 위기상황의 타개가 절실해지게 되었다.


<반격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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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님들이 다 죽었으니 이제 내가 대공이다! -

 

 이자슬라프가 죽자 이자슬라프의 동생으로 페레야슬라브의 대공이었다가 체르니코프 대공으로 옮겼던 브세볼로드가 집권했다. 그는 1055년 쿠만과 우호조약을 맺는데 일조하고, 1067년 비잔틴제국의 공주였던 아내가 죽자 쿠만족과의 우호관계를 위해 쿠만족 출신의 공주랑 재혼했던 인물이었다. 뭐 그렇다고 쿠만족의 약탈이 진정된 것은 아니었다. 당장 쿠만족은 1071년 로스토프체브를, 1079년 네야틴을, 이듬해에는 노보고로드를 약탈했다. 


 그래도 그는 형보다는 괜찮은 인물이었다. 러시아 원초 연대기는 그가 꽤 정의로운 인물이었다고 기록했으며, 그는 실제로 공정한 판결을 위해 꽤 노력했다. 동시에 키예프 루스를 안정시키려고 나름 노력을 했으며, 자신이 군사적 역량이 떨어지는 것을 알고 자신의 아들을 뛰어난 전사로 키우는데 엄청나게 공을 들였다. 그의 아들은 바로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였다.


 브세볼로드가 1093년에 죽자 이자슬라프의 아들 스뱌토폴크가 스뱌토폴크 2세로써 키예프 루스의 군주, 즉 대공이 되었다. 이 때 쿠만족이 침공해왔다. 스뱌토폴크 2세는 사촌인 블라디미르 모노마흐 및 로스티슬라브와 함께 스투그나 강에서 쿠만족과 맞섰다. 이 때 블라디미르 모노마흐는 평화협상을 하자고 주장했는데, 사촌이지만 명성이 높고 강력한 경쟁자였던 그의 의견을 스뱌토폴크는 무시했다. 그리고 이를 무시한 결과는 패배로 이어졌다. 스뱌토폴크의 군대가 먼저 무너지고 이후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의 군대가 박살났다. 공작들은 도망쳤는데 이 과정에서 로스티슬라브가 무거운 사슬갑옷때문에 익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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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싸우자 이거지! -

 

 이후 스뱌토폴크는 쿠만족과 화해, 쿠만족의 칸 투고르의 딸 올레나(6)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 평화는 쿠만족이 키예프로 보낸 두 명의 사절이 살해된 1096년 깨졌다. 투고르칸은 분노하여 키예프 근교를 약탈했다. 하지만 키예프 루스는 곧 반격을 개시, 투고르를 죽였다. 


 일단 이렇게 급한 위기를 넘긴 후 키예프 루스는 고질적인 계승 분쟁 및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류베치에서 회의를 열었다. 사실 이 시점에서 야로슬라프가 고안한 로타 제도는 붕괴되버렸기에 새로 영역을 정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분란의 씨앗을 제거하고 단결하여 쿠만족에게 맞설 필요성도 이들은 느꼈다.


 회의결과 일종의 장자상속제가 우선시된다는 것에 참가자 모두가 동의했으며, 영역의 분할이 이루어졌다. 먼저 스뱌토폴크는 대공의 지위를 누리면서 키예프, 투로프, 핀스크를 확보했고, 그의 사촌이자 경쟁자 블라디미르 모노마흐는 스몰렌스크, 로스토프 수즈달, 페레야슬라브 등등, 덤으로 모노마흐의 아들 므트디슬라브가 노보고로드를 상속받았으며 그 외의 류리크 가문 일족들에게도 나름대로 영지가 재분배되었다. 


 이후 1100년 비티체프에서 러시아 공국들은 동맹을 맺었고 1103년 톨로프스키에서 쿠만족에 대한 대대적 전쟁을 결의했다. 이 과정에서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으며 같은해 블라디미르 모노마흐는 쿠만족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쿠만족도 지지않고 4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며 키예프 루스와 전쟁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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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심이 곧 천심. 민심의 지지를 받는 내가 대공이 되겠다! -


 그러다 1113년 스뱌토폴크가 죽었다. 그러자 키예프에서 다시 한 번 폭동이 일어났다. 키예프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키면서 블라디미르 모노마흐를 추대했다. 그가 쌓은 군사적 명성과 각종 업적등을 고려할 때 쿠만족과 맞서 싸울 인물로 그가 적절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원래 류베치 회의 등에서 결정된 대로면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의 순위는 조금 뒤로 물려져있었고, 다른 몇몇 후보자들도 건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블라디미르 모노마흐는 키예프 시민들의 추대 때문에 자신도 이전에 동의했던 결과를 무시하고 대공으로 집권했다. 그리고 키예프 루스의 마지막 불꽃이 이렇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1) 과거 유럽의 유목민 연재 때 이들이 기록상에 처음 나타난게 1054년이라고 했는데 전역 후 확인 결과 이슬람 사료쪽에서 10세기 경부터 이름이 나타났기에 주석으로 다는 바입니다.


(2) 러시아의 민회. 웬만한 러시아의 공국들은 다 가지고 있었으며, 그 권력은 천차만별이나 남부 러시아나 노보고로드, 프스코프의 경우 베체의 권력은 꽤 강한 편이었다. 노보고로드의 경우는 아예 대공의 폐위까지 결정할 수준으로 강해지기도 했다. 


(3) 야로슬라프의 형제들로 맏형 스뱌토폴크에게 살해된 인물들. 이들에게는 삼촌이다.


(4) 다행히도 폴란드 왕 블레슬라우 2세가 이자슬라프를 지원하고 붉은 루테니아를 접수하려고 나라를 비운 사이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그를 폐위시켰고, 이로 인한 혼란 덕에 붉은 루테니아는 곧 키예프 루스가 수복할 수 있었다.


(5) 두어개 정도의 도시가 겨우겨우 로베르의 공격을 막아내며 버텨냈지만 이 도시들마저도 1091~1092년경 몰타섬과 함께 노르만족에게 함락되었다. 


(6) 아마 결혼했을 때 개종한 걸로 보이며, 이 때 세례명으로 받은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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