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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러시아 역사 이야기 4. 현명공 야로슬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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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리볼버오셀롯
추천 : 10
조회수 : 1250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07/22 18:39:05
출처 : http://cafe.daum.net/shogun/9xm/8289

<저주받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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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년의 블라디미르 대공 -

 블라디미르에게는 굉장히 많은 아들들이 있었다. 그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아들은 스뱌토폴크였다. 그의 어머니는 본래 그리스인 수녀로써 스뱌토슬라프의 불가리아 원정 러시아로 잡혀왔고, 이후 야로폴크의 아내가 되었다가 야로폴크가 죽자 블라디미르의 아내가 된 사람이었다.(1) 이런 어머니의 이력 덕에 스뱌토폴크의 생부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이 있지만 블라디미르는 자신의 맏아들로 생각한 듯, 8살에 투로프에 부임시켰고, 이후 폴란드 대공(2) 블레슬라우의 딸과 결혼도 시켰다.


 그러나 훗날 '저주받은'이라는 칭호를 달았던 그다운 행동이랄까, 그는 장인의 지원을 받아 1010년 경 콜베르그의 주교를 지냈던 독일인 주교 라인베른과 함께 부친 블라디미르의 자리를 찬탈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음모는 곧 들통났고, 스뱌토폴크와 라인베른은 감옥에 갇혔다. 라인베른은 감옥에서 죽었지만 스뱌토폴크는 블라디미르가 죽기 직전 풀려나 키예프 근교의 비쉬고로드에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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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거야!!" -

 1015년 블라디미르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스뱌토폴크는 쏜살같이 달려와 키예프를 장악했고, 민심이 술렁거릴 조짐을 보이자 선물을 풀어 달래주었다. 그러나 이걸로도 안심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동생 보리스와 글렙이 대공위에 도전할 수 있다고 보고, 그들을 제거하기로 했다. 보리스는 그가 자고 있던 텐트에서 습격받아 찔린 후 포대에 넣어져 키예프에 보내졌는데 아직 숨을 쉬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자 창에 관통당해 죽었다. 그리고 글렙은 식칼로 살해된 후 덤불에 버려졌다. 보리스와 글렙은 훗날 러시아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추대했다.

 

 마침 노보고로드에 있어서 당장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로드게나 소생의 야로슬라프는 생존을 위해서라도 바로 전쟁을 선언했다. 노보고로드 시민들과 바이킹 용병들이 그를 지지했다. 스뱌토폴크는 군사적 역량이 떨어지는 인물이었는지 1016년 류베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대패하였고, 장인이 살던 폴란드로 도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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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랫동안 러시아와 폴란드 사이에서 분쟁지대가 됬던 붉은 루테니아의 지도.현재는 대부분 폴란드에 귀속되었다. -

 

 이후 1018년 스뱌토폴크는 장인 블레슬라우와 함께 키예프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고 부친 블라디미르가 개종 전에 폴란드에게서 빼았았던 루테니아(더 정확히는 붉은 루테니아로 불리던 지역)을 폴란드에게 주기로 하고 병력을 끌어왔다. 당시 블레슬라우의 군대는 천명의 페체네그족, 5백명의 헝가리 군인, 3백명의 독일인 용병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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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위. 이제 키예프는 다시 자네 품으로 돌아왔다네. 그럼 대가로 땅을 가져가겠네." -

 

 야로슬라프는 버그 강에서 이들을 막으려고 했으나, 당대의 영걸(3) 블레슬라우는 야로슬라프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빨리 도강하여 키예프 군대를 공격, 야로슬라프의 군대를 박살내버렸다. 그 덕에 스뱌토폴크는 다시 키예프 대공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폴란드 군대가 돌아가자마자 야로슬라프는 다시 돌아왔고 스뱌토폴크는 페체네그족에게 도주했다. 이듬해 페체네그 군대의 지원을 얻은 스뱌토폴크가 돌아왔지만 알타강 전투에서 그의 군대는 괴멸되었고 스뱌토폴크는 폴란드로 도주했다가 곧 죽었다.


 <불안정한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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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겨우 나의 통치가 확고해지는건가." -

 

 스뱌토폴크가 죽고 야로슬라프는 제대로 키예프 대공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일단 그는 먼저 자신을 지지해준 노보고로드에 꽤 많은 자유와 권리를 부여해주었고, 이는 훗날 노보고로드 공화국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 되었다.


 단 아직 안심은 금물이었다. 그의 동복동생 티무타라칸의 대공 므트디슬라프가 대공위에 도전한 것이었다. 스뱌토폴크와 야로슬라프의 싸움에서 중립을 지키던 그는 아조프해와 흑해, 스텝을 통제할 수 있던 티무타라칸의 지정학적 입지를 통해 많은 부를 축적했고, 이를 기반으로 1022년 경 체르케스인들을 제압한 후, 체르케스와 하자르인들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1024년 키예프를 습격했다. 야로슬라프는 겨우 그를 막아낸 후 1026년 드네프르강 동쪽을 주어 그를 달래야했다. 야로슬라프가 키예프 공국 전체를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은 므트디슬라프가 죽은 1036년 이후였다.


 <키예프의 황금시대> 


 야로슬라프는 굉장히 정력적으로 일했다. 그는 국가 행정을 개선시키고, 수많은 그리스 문자로 된 종교 서적들을 슬라브어로 번역하는 작업에도 착수했다. 이 과정에서 키릴문자가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동시에 그는 수많은 교회와 수도원들을 건설하였고, 1036년 페체네그 족에게서 큰 승리를 거둔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듬해 러시아 최초의 대성당인 성 소피아 대성당과 성 게오르기우스와 성 이레네를 위한 수도원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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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경에 찍힌 황금문의 사진 -

 이외에도 그는 많은 세속적 건축물도 지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소위 황금문(4)이었다. 그러나 이런 건축물들 못지 않게 중요한 업적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법전의 편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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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스카야 프로비다 -

 키예프 루스에는 당시 제대로 된 성문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성문법이 필요했는데 야로슬라프는 우리나라 말로 '러시아의 정의'로 번역될 수 있는 '루스카야 프라브다'를 만들었다. 이 법은 슬라브 관습법에 비잔틴 제국의 법을 가미한 것으로 조선의 경국대전이 그러했듯이 오랜 기간 러시아 법의 근간이 되어왔다. 이 법전은 '피의 복수'의 금지, 이자의 지불 규정, 재산 침해 금지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 수시로 터지던 키예프 루스의 계승전쟁을 타파하기 위해 계승 서열을 확고히했다. 그는 키예프 루스를 12등분한 후 키예프를 1등, 노보고로드를 2등, 그리고 기타 공국들에 순위를 매긴 후 키예프는 장자상속으로 상속시키기로 했다. 대신 나머지 공국들은 순번제로써, 만약 2등 노보고로드 공작이 죽으면 3등 서열의 공작이 노보고로드를 승계하고 3등 자리는 4등이 승계하는 식이었다. 이렇게 되면 마지막 12등 자리가 비게 되는데 12등은 키예프에서 공작을 한 명 보내주는 식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블라디미르의 치세를 거치며 류리코비치 가문이 아닌 다른 가문 출신의 공작들이 사라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5)


 이렇게 신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야로슬라프는 1051년, 콘스탄티노플의 통제를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일라리온이라고 하는 러시아인 성직자를 키예프의 대주교로 삼았다. 이 시기 국력이 얼마나 신장하고 경제가 번성했는지 프랑스로 시집보낸 야로슬라프의 딸은 편지에서 "프랑스가 너무 낙후되서 키예프가 그립다."는 식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외교와 확장>


 야로슬라프는 외교에도 신경을 썼는데 이 때 그가 애용한 방법은 결혼 동맹이었다. 일단 야로슬라프는 그 자신부터가 1019년 스웨덴의 공주 잉게게르드와 혼인했고, 많은 아들들을 외국의 공주와 결혼시키는 한편 자신의 딸들과 누이들도 외국으로 시집보냈다. 그 나라들도 다양했는데 딸들과 누이들이 시집간 나라만 해도 프랑스, 헝가리, 노르웨이, 폴란드, 비잔틴 제국이었고, 일설에는 영국 왕족과 결혼한 사람도 있다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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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소피아 대성당에 그려진 야로슬라프의 딸들. 이들 다수가 외국의 왕들 및 왕족들에게 시집갔다. -


 아들들 역시 비잔틴 제국의 공주나 외국의 공주들과 결혼했고, 독일인 아내를 맞이한 사람도 많았다. 베르나츠키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6명의 루스 왕족들이 독일인 아내를 맞이했고, 반대로 신성로마제국에서도 2명의 후작, 각각 1명씩의 백작과 방백, 1명의 황제가 루스인 아내를 맞아들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야로슬라프는 외국 여러 왕족들의 망명지를 제공해주었다. 크누트에게 쫓겨난 잉글랜드 왕족들이나 이슈트반에게 쫓겨난 헝가리 왕족 안드레, 역시 크누트에게 쫓기던 노르웨이의 왕 성 올라프와 그의 아들들, 그리고 올라프가 죽은 후 망명해온 하랄드(6)를 받아들이고, 이들 중 다수와 혼인관계를 맺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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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세기 러시아의 확장을 묘사한 오스프리 삽화. 1번은 모르도바인 전사. 2번은 보야르 귀족. 3번은 노보고로드 민병대다. -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군사적 확장을 싫어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줄곧 군사적 행동도 꽤 좋아했다. 그의 치세 기간 동안 키예프 루스는 동쪽으로 뻗어나가 많은 핀-우그르계 종족들(대표적으로 모르도바인들)과 충돌했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수즈달 지역 이교도들의 반란이나 핀, 발트계 종족들의 저항을 제압하기도 했다.


 거기에 더해 1031년에는 블레슬라우 사후 혼란에 빠지던 기미가 보이던(7) 폴란드를 공격하기도 했다. 이 공격으로 야로슬라프는 형이 팔아넘긴 루테니아 지역을 다시 되찾아올 수 있었다. 이 지역은 이후 잠깐 폴란드에게 빼앗긴 적도 있었지만 14세기 중반까지 러시아의 영향권 안에 속하게 되었다. 또한 1037년에는 페체네그족의 군대를 완벽하게 격파하였다. 이 일로 러시아는 약 20년간 스텝지대 유목민들을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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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해 중인 키예프 루스의 전사들. 이들은 배를 타고 카프카스까지 밀고 내려가기도 했다. 1번은 공국 군대 지휘관. 2번은 고위급 드루지나 전사. 3번은 도시 민병대이다. -

 그 외에도 카스피해 및 카프카스에 대한 군사적 활동을 벌인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1030년 조지아 왕실을 돕기 위해 파견된 바이킹 용병들 역시 키예프 루스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스웨덴에서 발견된 잉그바르 룬스톤들에 기록된 1040년대 초반에 걸친 카스피해 일대에 대한 약탈 역시  키예프 루스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이 이전인 1030년대에도 키예프 루스의 군대가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군사적 행동이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1022년 비잔틴 제국이 소유한 렘노스 섬에 대한 약탈 원정은 성공적이었지만(8) 1043년의 원정은 달랐다.


 키예프 루스는 개종 이후 비잔틴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왔다지만 콘스탄티노플의 부를 여전히 탐내고 있었다. 실제로 야로슬라프는 비잔틴제국의 혼란을 틈타 콘스탄티노플 점령 계획을 세우기도 했었다. 그리고 1043년 키예프 루스의 상인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살해되자 비잔틴 제국을 공격했다. 비잔틴 제국은 배상을 약속했지만 키예프는 비잔틴 1년 예산을 초과하는 터무니없는 배상금을 요구해 협상은 결렬됬고 비잔틴 제국과 전쟁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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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잔틴 침공 당시 키예프 루스가 주력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소형선 모노킬라의 모습 -

 

 하지만 전쟁 자체는 키예프 루스가 일방적으로 두들겨맞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일단 중간 기항지로 쓰려던 바르나 항에서 패배했고, 보스포로스 해협에서도 급조된(9) 비잔틴 함대의 공격에(10) 패배했으며, 후퇴하는 도중 다시 바르나 항에서 크게 패하고 말았다. 그나마 이듬해 키예프 루스는 비잔틴 제국이 크림 반도에 소유하고 있던 영토들을 점령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1046년 자신의 후계자와 비잔틴의 공주를 결혼시킨다는 내용의 조약을 요구할 수 있었다. 단 무역에서는 어느정도 불이익을 봐야했다.


 어찌 됬든 야로슬라프는 현명공이란 그의 별명에 걸맞는 모습들을 보였다. 덕분에 키예프는 엄청난 번영을 맛보았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키예프 공국에는 폭풍우가 닥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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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금니 꽉 깨물고 기다리라우. 우리가 간다우!" -

 바로 쿠만족이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1) 이 여인도 어떻게 보면 로드게나 못지않게, 어쩌면 그 이상으로 불행했던 여인일 수 있다. 그리고 이 여인 역시 크리스트교 개종 이후 버려진 것으로 보인다.


(2) 폴란드는 개종한 지 꽤 오래되었음에도 아직 교황에게서 국왕의 칭호를 받지 못한 상태였다. 블레슬라우가 국왕으로 승인받은 것은 그가 죽기 직전인 1025년 4월의 일이었고 그나마도 왕의 칭호도 영속적이지 못했다.


(3) 블레슬라우는 보헤미아와 전쟁을 벌여 상당히 많은 땅을 빼앗고, 크누트의 영국 정벌을 지원하고, 신성로마와도 대등하게 싸워 땅을 얻어내는 한편 그의 생전 한정이지만 슬로바키아를 점령하기도 했고, 포메라니아에 영향력을 확보하며 귀족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던 인물이었다. 


(4) 몽골족에게 파괴되었지만 나중에 다시 재건되어 현재도 존재한다.


(5) 하지만 이 계승 법칙도 분명히 문제가 있었기에 당장의 안전은 보장됬지만 결국 야로슬라프 사후 반세기도 안 되서 이 계승법칙도 붕괴된다.


(6) 나중에 잉글랜드를 공격하다 스탬퍼드 다리에서 전사한 그 인물이 맞다.


(7) 블레슬라우 시절 엄청나게 많은 땅을 뜯겼던 보헤미아와 슬라브, 발트계 이교도들, 역시 고생을 꽤나 했던 신성로마제국,  억눌릴대로 억눌렸던 귀족들이 블레슬라우가 죽자말자 폴란드를 공격하고, 왕권을 뒤흔들면서 폴란드는 혼란상태에 빠졌다. 당시 국왕인 미에츠코는 키예프 루스의 공격이 있고 1년후 폐위당하기도 했고, 나중에 복위하지만 왕의 칭호를 잃고 대공을 칭해야 했을 정도였다.


(8) 단 이 기록은 비잔틴 제국측 기록에만 보인다.


(9) 하필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느라 비잔틴 함대 다수가 이탈리아로 차출되었기 때문에 급조할 수 밖에 없었다. 반란 자체는 키예프의 침공 시점에 진압되었지만 복귀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다행인 것은 키예프 함대가 소형선 위주라 비잔틴의 급조한 함대가 상대적으로 더 컸다는 것이다.


(10) 당시 해전을 참관하던 황제가 전함 3척을 이용해 유인하라고 지시했는데 현장 지휘관이 그리스의 불을 무기로 유인하라고 보낸 3척을 돌격시키면서 키예프 루스의 함대 대열이 붕괴되면서 비잔틴 쪽으로 승기가 기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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