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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트하게 보는 대한제국의 국방정책
게시물ID : history_1721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oirCafé
추천 : 10/4
조회수 : 1229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4/07/20 21:45:21
개관

청일전쟁 이후 조선은 청의 속국지위로부터 독립한 명목상의 '독립국'이 되었지만 실질적인 독립국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조차도 강군건설을 역설하고 있었는데, 대한제국의 언론이었던 '독립신문'이나 '황성신문' 등의 강병건설에 대한 논설자료들이 당시의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한편 청일전쟁 이전 모병제 군대운용의 실패, 그리고 이로인한 외교적인 패배경험에도 불구하고 구한말 초기엔 여전히 정병론(精兵論)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는데, 정병론에 의하면 여전히 조선군은 소수정예군대의 양성을 목표해야한다는 것으로 이는 청일전쟁 이후의 조선군도 여전히 훈련부족 및 규율, 기강해이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실제로 조선최정예군으로 평가받던 평양진위대를 출장감찰한 일본의 인천영사관 소속 순사는 평양진위대를 '일자무식하며, 도의가 무엇인지 모르며, 폭력을 제멋대로 행사하는 집단'이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다만 조선 내부에서 제시된 이러한 정병양성의 방법론들 중 10년전의 그것과 달라진 점으로는 '군제의 완전한 통일'이 지상목표 중 하나로 설정된 점을 들수 있다. 대한제국이 수립되기까지 조선군의 군제는 일본식에서 독일식으로, 독일식에서 미국식으로, 미국식에서 다시 일본식, 또 여기서 다시 러시아식으로 바뀌기도 하는등 갈지자 행보를 보여왔으며 이와 같은 역사로 인하여 군사교육에서 영어, 일본어, 러시아어 등 각종 외국어들이 함께 쓰이는 기이한 장면을 연출하게 되었는데 이에 아관파천이라는 외적인 요인이 합세하여 일본식 훈련제도를 따르던 무관학교의 기능을 정지시키고 러시아 사관을 초빙하여 러시아식 훈련으로 통일하게 되었다.

얼마안가 이러한 외국인에 의한 국군훈련에 대한 문제점 역시 제기되기 시작하였는데, 궁내부특진관인 민영준은 자국식 훈련제도를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일각에서는 러시아 교관의 명령에 익숙해진 한국군이 러시아의 명령을 따르게 될 것으로 우려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갑신정변 당시 청국 군관의 훈련을 받은 조선군 친위부대는 청군에 합세, 일본 군관의 훈련을 받은 조선군 친위부대는 일본군에 합세하여 상호 유혈 군사충돌을 빚기도 하였다. 1898년 대한제국 정부는 이러한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청원을 받아들여 사관학교인 무관학교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집권층은 군제도를 정비하여 높은 훈련도를 보유한 소수정예군을 육성하면 대한제국의 국방을 성취할 수 있다고 기대한 듯 하다.

 하지만 당시 한국에서 파워게임을 벌이고 있던 러시아와 일본이 징병제를 통하여 대규모의 군대를 육성하고 있었던 현실에 비추어보면, 이러한 소수정예군은 국권을 수호하기에는 그리 적합하지 못하였다. 영국공사관에서는 일본군 2천명의 공격만으로도 서울이 함락될 것이라고 본국에 타진하기도 하였으며, 실제로 일본공사관 측이 대한제국에 모병제 소수정예군을 고수하라고 충고함은, 한국군의 역할이 한국의 국방이 아닌 한국 내의 내란진압에 국한되기를 소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병제군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국 내에서는 이에 대한 지지여론이 형성되었는데, '황성신문'은 자사의 1900년 2월 22일자 신문에서 군대육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설하였다 :

 "러시아와 일본이 군비를 증강하므로 외침을 막기 위해서는 수십만 군대를 양성하여 전국을 방어함이 만전지책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국민이 빈곤하면 군대가 강할 수가 없으므로 먼저 국부를 증대하여 국민을 풍족하게 해야한다. 실례로 영국,미국은 국부가 상당하기 때문에 수년간 전쟁을 지속할 수 있어 승리할 수 있었다. 한국은 군대가 약할뿐 아니라 국가 또한 빈곤하므로 금일의 계책으로는 인재를 얻어 용병 수천명을 정련하여 국내의 우환을 진정함이 족하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대한제국이 국방비에 예산의 절반가량을 투입하고 있었던 현실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국방력 강화보다는 당장 시급한 대한제국 내부의 폭동진압에 초점을 맞출 것을 제의한 것이었다.



 징병제에 관한 논의와 이의 좌절

 1881년 일본에 파견된 조사시찰단이 징병제에 대한 정보를 가져온이래로 징병제 도입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이가 정부에 제기되기도 하였다. 구한말의 언론사인 '한성순보'와 '한성주보'는 징병제에 대한 사회내부의 인식을 환기시키기 위해 노력한 언론들이다. 이들 언론사는 유럽과 일본의 징병제는 빈부귀천을 불구하고 모든 남성을 병적에 편성시킨 국민개병제라는 사실을 소개하며 징병제만큼 국가방위에 적합한 제도는 없다는 사실을 역설하였다.
 징병제에 대한 관심은 일본의 지원을 받아 갑오개혁을 추진한 개혁주의 관료들도 갖고 있었던 것이었으나 대한제국의 주권자인 고종은 이에 거부반응을 보였는데 이는 필자가 어제 쓴글에도 언급한 바 있지만 개인적인 경험의 요인이 큰 듯 하며, 더군다나 이 시점의 고종은 동학당으로 인하여 民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이러한 고종의 징병제에 대한 태도는 1899년 이웃국가인 청국에서 의화단 사건이 일어나 열강들의 이에 군사개입을 하게되는 등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가자 변화의 조짐을 보였다. 원수부는 1901년 한국의 모든국민 중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18세 이상의 남자를 병적에 편입하여 3년간 훈련시킨 후 귀가시킨다는 내용의 징병제 시행초안을 작성하였으나 정부고관 대다수의 반대로 좌절되었는데 의정부 대신들이 반대의 핵심이 되었다.

 당시 한국의 양반층(1894년 갑오개혁을 통하여 명목적으로는 신분제가 폐지되었으나 실질적으로 신분제는 유지되었다.)은 귀천에 구애받지 않는 일률적인 징병제 실시가 한국의 사회구조에 타격을 가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맹렬히 반대했던 것이다. 사실 이와같은 지배계층의 국민개병제적인 징병제에 대한 반대는 비단 조선 뿐만이 아니라 유럽에도 존재하였었다. 흔히 징병제도의 모범국가로 언급되는 프로이센 왕국조차도 초기에는 지배층들이 귀천을 막론한 징병제를 위험한 제도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1806년 예나(Jena)에서 프로이센 군대가 그랑데 아르메에 의하여 무참하게 패배한 이후 프로이센을 엄습한 위기감은 이 왕국의 지배층들로 하여금 국민개병제 도입을 긍정케한 계기가 되었으며, 이를 계승한 일본 또한 서양열강의 침략에 대한 경계심이 일본의 모든 계층을 대상으로 한 국민개병제 도입을 가능케하였다. 반면 당시 한국의 지배층들은 프로이센이나 일본의 지배층들과는 달리 이러한 징병제 도입에 대한 절박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거나 혹은 이의 도입으로 인한 기회비용이 더 크다고 판단한 듯 하며 이는 한국의 근대적인 국민개병제 도입기회를 차단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결국 대한제국 정부는 징병제를 실시하되 근대적인 국민개병제가 아닌, 전근대적인 병농일치제를 부활하기로 가닥을 잡았으며, 징병제 실시로 인하여 늘어날 장정을 부양하기 위한 예산을 확보하기 위하여 토지를 보유한 농민에 대한 토지과세율을 늘리고 농민계층을 징병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대한제국 정부의 행정력이 파탄난데다 민심이 이반한 상태에서 농민계층에 대한 보상없는 일방적인 국방의무의 전가는 이러한 농민층의 분노를 샀으며, 결국 대한제국의 징병정책은 흐지부지되고 만다.



군대 양성의 소득과 한계

 대한제국은 기존의 모병제 군대의 틀을 유지하였으며 특히 청국에서 의화단의 난이 확산일로를 걷자 이에 기겁하여 공격적인 군비증강의 길을 걷는다. 당시 궁내부의 고문이었던 샌즈는 '한국에서 의화단과 같은 반외세 항쟁이 발발할 경우 열강들이 군대를 동원할 것'이라고 충고하였는데, 동학군의 난을 경험한 고종은 이러한 자문을 새겨듣고 이를 실천에 옮긴듯 하다.

 당시 대한제국 내부의 치안상태는 좋지 못하였는데, 경제난과 관리들의 수탈, 황권정부의 실정으로 인하여 민심이 이반한 상태였고 전국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세력을 크게 확장한 동학당, 활빈당, 영학당 세력이 대한제국 정부의 큰 문제로 떠올랐으며 그 중 활빈당은 1900년부터 봉기하여 진위대와 교전을 지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1893-94년과는 달리 1900년대 한국의 군대는 더 이상 민란군에 패배할 정도로 약하진 않았으며, 일본공사는 고종에게 한국군이 활빈당을 격퇴할 정도로 강력해졌다고 찬사를 보내기도 하였다.
 
 한국군이 국내의 '문제집단'을 견제할 정도로 강력해지자 이번에는 청나라의 '문제집단'이 등장하였다. 당시 한국에서는 한국의 국경을 넘어 패악질을 벌이는 중국의 무장집단을 청비(淸匪)라고 호칭하였는데, 청비는 1899년부터 한국국경을 침범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은 국경지대를 침략하여 분탕질을 일삼고 도로 국경을 되넘어 빠지곤 하는등 Hit&Run방식으로 한국을 괴롭히기 시작하였다. 1900년 6월에는 청비가 함경도 8개현을 쑥대밭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청비에 의하여 그로기상태에 놓인 국경지대를 구원하기 위하여 한국정부는 친위대와 병대를 파견하기 시작였으며 1901년까지 1천명의 중앙군 병력파견을 완료하게 된다. 또한 현지에서 포수군을 조직하고 평안도의 평양에 병력 1개대대를 증설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1900년 12월에 청비 200명을 격퇴하고, 이듬해 2월에 청비 400명의 침입을 격퇴하는 등의 소득을 올리기도 한다. 이러한 청비의 침입은 1904년까지 이어지나 1901년 의화단의 폭동이 열강에 의하여 완전진압된 이후로 잠잠해졌다.

 즉 소수정예군 육성론자들이 제기한대로 대한제국군은 '국내민란진압 역량확보'라는 소정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여전히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정부에 의해 '화적'으로 지명된 활빈당은 정부 중앙군인 진위대야말로 진정한 '화적'이라고 성토하기도 하였으며 의정 이근명은 평양 병사들이 상경할때 민폐를 방지하기위해 수상으로 이동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원수부 총장인 신기선은 군대가 무규율한 무뢰배의 소굴이라고 지적할 정도였다.
 당시 기록들에 의하면, 진위대는 지나가는 마을에마다 약탈과 폭력을 일삼았으며 이들의 주둔지역은 황폐화되었을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실질적인 전투력 면에도 의문을 가질 여지의 점을 계속 노출하였다. 청비의 활발한 침입기간 당시 중앙정부군은 청비에 대하여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급조된 지방의 포수대가 청비를 격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결국 개항 이후 20년간 한국은 끝끝내 군대의 '정예화'라는 숙제를 풀지 못한 것이었다.

러일전쟁 개전초기 러시아군과 일본군이 서울에 진입하자 대한제국군은 1천명에 달하는 병력이 즉각 탈영하는 추태를 자아냈으며 국방은 커녕 일본군의 경성장악을 저지하지도 못하였으며 러일전쟁 발발후 3년이후 이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못한채 해산당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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