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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어 쇼펜하우어
게시물ID : phil_1720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MiŜatasVin
추천 : 0
조회수 : 1396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20/04/26 12:39:47
https://youtu.be/q0zmfNx7OM4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19 세기 중반의 독일 철학자였다. 그 이름은 위대한 명저 "의지와 표상의 세계"에 담겨있는 통찰을 위해서도, 오늘날까지 기념될만 하다.

쇼펜하우어는 불교에 진지하게 관심을 가진 최초의 서양 철학자였다. 그의 생각은 불교적 페시미즘에 대한 서구의 깨달음과 재해석 중에 최고의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17살때 삶의 진실을 보았다. 부처가 젊은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인생의 고통과 죽음, 질병, 그리고 노화를 보았다. 내가 깨달은 진실이란, 창조자가 세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면, 그런 괴로움은 존재할 까닭이 없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것들은 이 세상의 고통을 즐기기 위해 만들어낸 악마의 피조물에 더 가까워 보였다."

부처가 그랬던 것처럼, 쇼펜하우어의 목적도 인생의 고통을 탐색하고 해결책을 찾는 것이었다. 쇼펜하우어가 명성에 비해서 널리 읽히고 연구되지 못하는 까닭은 대학에서 그의 철학을 건전하게 취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의 책이 널리 읽혀지기를 막도록 애써왔다. 그러나 사실 그는 부처에 버금가는 가치를 지닌 인물이다. 그의 사상을 보급하기 위해 제자와 학교, 예술 작품 및 수도원들이 세워질 자격이 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우리에게 내재해 있는 어떤 중요한 힘에 이름을 붙이면서 전개된다. 그 힘은 다른 어느 것보다보 더 강하다. 우리의 이성, 논리 그리고 도덕적 감각보다 더 강한 그것을 그는 생존 의지(Will-to-Life)라고 부른다. 독일어로는 "DER WILLE ZUM LEBEN."

생존 의지는 우리를 계속 전진하게 밀어내면서, 우리를 존재에 고수시키고 오로직 이익만을 쫓게 한다. 그것은 그저 맹목적인 의욕이다. Will-to-Life가 우리에게 가장 집중하는 것은 생식이다. 사춘기부터 이 의지는 우리 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끝없이 머리를 들이댄다. 이 에로틱한 시나리오는 우리를 아주 괴상하게 만든다. 가장 극적인 것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사랑을 존중하며, 이 감정을 호랑이나 허리케인에 비유한다. 그는 가장 지적인 사람들조차 그 감정을 느끼면서 겪게 되는 광란과 혼돈을 깊이 존중했다. 그러나 이것을 불규칙적이거나 우연한 것으로 보길 거부했다. 그가 보기에는 사랑은 가장 근본적인 프로젝트와 긴말하게 연결되어 있다. 바로 생존 의지의 요구, 아이를 낳으라는 것이다.

그는 묻는다. "왜 모든 사랑의 순간에는 이런 야단법석이, 흥분, 공포, 슬픔이 함께 따라오는 것인가?" 그 까닭은 "연애 사업이야 말로 우리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살아가는 동안 그보다 더 진지하고 심오한 가치를 추구할 수가 없다." 낭만이 인생을 통제하는 이유에 대해서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인생은 인류의 미래 세대가 다가올 것을 앞당기고, 다음 사회의 구성원을 선포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추구하는 목표란 것이 없다."

물론 우리는 누군가에게 데이트를 요청할 때 미래의 아이들부터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의 견해에 따르면, 이 까닭은 생식의 과정에서 이성이 하는 역활이 무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지가 결정하는 비밀스런 작용에 방해를 받아 거의 작동을 하지 않는다.

왜 이런 기만이 발생하는 것인가? 쇼펜하우어는 문자 그대로 말한다. "제정신이 올바로 박혀 있는 상태로는 우린 결코 번식이란 것을 실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는 자녀에 대한 순수한 희생이 그저 일상의 권태를 덮기 위한 기만 행위일 뿐임을 폭로한다.

게다가 쇼펜하우어는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의 지성이 제대로 된 역활을 한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할 때, 그토록 겉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끼리 짝을 짓는 경향을 결코 설명하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사랑에 빠져드는 궁극적인 이유는 누군가를 정말로 이상형으로 바래서가 아니라, 그저 생존 의지의 재생산 프로젝트에 의해 그 사람을 파트너로 점찍는 것일 뿐이다.

쇼펜하우어는 이것을 아이갖기를 위한 균형이라고 부른다. 그는 우리 모두가 어딘가 약간 불균형적이라고 말한다. 우리 각각은 너무 남성적이거나 혹은 너무 여성스럽고, 때론 너무 키가 크거나 아님 너무 작거나, 누군가는 너무 합리적인 반면에 또 누군가는 충동적이다. 그러한 불균형이 지속되면 차세대에게까지 영향을 주게 되고, 언젠가 인류의 후생 상태는 심각하게 악화될 것이다. 생존 의지는 문제를 수정함으로써 우리가 갖고 있는 서로 간의 여러 불균형을 보완하려고 한다. 이를 테면 작은 코와 큰 코의 만남은 완벽한 코를 약속한다. 따라서 키가 작은 사람은 키가 큰 사람과 사랑에 빠지려 들고, 남성성이 부족한 남자는 매우 남성적인 여자를 선망하게 된다.

불행하게도, 균형 보상이론이라는 매혹의 원리에 때문에, Schopenhauer는 삶에 대해 매우 황량한 결론은 내리게 된다. 즉, 균형잡힌 아이를 생산할 만한 사람은 우리 중에 거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생존 의지에 눈이 멀어져 있다. 때문에 각자가 올바르게 원하는 진정한 짝을 만날 기회는 거의 없다. 우리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친구조자 될 수 없는) 사람들의 결혼에 대해 놀랄 까닭이 전혀 없다: 그는 말한다. "사랑은 섹스를 할 때만을 빼면 서로를 경멸하며 심지어 혐오할 수 있는사람들까지도 끌어당기게 한다." 생존 의지는 우리의 행복이 아닌 그저 자신의 (번식)목적에만 헌신할 뿐이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가 암시하듯이 오르가즘 이후에는 으스스함과 외로움의 순간이 엄습해온다. "교미 직후에 우리의 귓가에 들리기 때문다. 악마가 낄낄거리는 웃음이."

인간의 곤경에 대해서 쇼펜하우는 깊은 유감을 표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그저 동물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 큰 자각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다른 동물들보다 훨씬 더 처지가 비참하다. 쇼펜하우어가 다른 종의 동물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중에 신랄하게 가슴 아픈 구절이 있다. 그는 특히 두더지에 관심이 많았다.

"그것들은 습기차고 좁은 복도에 사는 발육 부전의 괴물처럼 생겼다. 하루 내내 빛을 거의 보지 못하고, 그것의 자손들은 젤라틴 벌레 같아 보인다.... 그럼에도 이들 역시 전력을 다해 생존하고, 존재를 영속시키려 애쓸 뿐이다." 하지만 우리도 두더지와 하나도 다를 바 없이, 역시 비참할 뿐이다.

우리는 맹목적으로 미래를 위해 달려가고 있다. 그저 미래에 만날 파트너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 좋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평생 '그 한 사람'이 누가 될까에 대한 질문을 멈출 수가 없다. 아이를 가질 수 있을 정도가 될 시기가 올 그 오랫동안, 우린 누군가에게 성적 끌림을 당하고, 나머지 세월의 대략 40 년 동안은 우리가 저지른 잘못을 속죄하기 위해 아이들과 함께 불행을 견뎌야 한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인간의 본성에 대해 냉소적이면서도 우아한 슬픔을 유지했다.

"선척적인 오류는 오직 하나 뿐이다. 그것은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착각이다. 우리가 이러한 태생적 착각에 계속 사로잡혀 있는한, 세상은 모순투성이로 가득차 있을 것이다. 삶의 모든 단계에서 크고 작은 경험을 거쳐가면서, 우리는 이 세상의 삶이란 게, 행복을 경험하기 위한 목적으로 계획된 것이 아니란 사실을 철저하게 깨닫게 된다. 그래서 노인들의 얼굴에는 실망감으로 인해 주름살이 짙게 깔려 있는 것이다."

Schopenhauer는 인생의 문제를 풀수 있는 방법으로 두 가지 해결책을 제안한다.

첫 번째 해결책은 '현자'라고 불리우는 다소 희귀한 사람들을 따르는 것이다.현자들은 영웅적인 노력으로, 생존 의지의 요구를 넘어설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내면에 있는 자연의 충동을 직시한다. 이기심, 성욕, 허영심.....그리고 그것들을 무시할 수 있다. 그들은 욕망을 이겨내고, 혼자서 생활하며, 종종 대도시에서 떨어져 살고, 결코 결혼하지 않으며 명예와 지위에 대한 욕구에 흔들리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쇼펜하우어가 지목하는 이런 사람들을 승려라고 부르고 있다

하지만 그는 어느 세대에서나 우리 중 극히 소수만이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다음으로, 더 쉽고 현실적인 해결책은 우리가 가능한 예술과 철학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생존 의지가 우리 모두에게 요구하는 맹목적인 열정과 불행한 혼란을 향해 거울을 비춰보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 자주 생존 의지를 억누르지 못할 수 있지만, 저녁때 극장을 방문하거나 혹은 시집을 들고 산책 할때, 매일 조금씩 뒤로 물러나 우리의 일상을 환상 없이 바라볼 수 있다.

쇼펜하우어가 사랑했던 예술은 감상적인 것과는 정반대였다. 그것은 그리스 비극, La Rochefoucauld 식의 진부함, 마키아벨리즘적 정치이론과 같은 것들이다. 그런 작품들은 이기주의, 고통, 개인의 야망 그리고 결혼 생활의 공포 등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한다. 그것들은 비극적이고 품위 있지만, 또한 인류의 존속에 대하여 쓸모없는 우울한 동정심도 품게 한다.

쇼펜하우어 자신의 작품들이 철학과 예술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합하다. 그 역시 씁쓸한 비관론 안에서도 우리를 위한 깊은 위로를 표하고 있다. 예를 들어,

"결혼을 한다는 것은 혐오감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행동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다."

"모든 삶의 역사는 고통의 역사에 대한 서술이다."

"삶에는 진정한 가치가 없지만, 덧없는 욕망과 환상을 위해선 유지되어야 한다."

오랫동안 공을 들였음에도 그의 작품은 유명세를 얻지는 못했다. 삶의 거의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에 이르자, 그의 글에 주목하는 청중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아트만이라고 이름 지운 강아지와 함께 프랑크푸르트의 저택에서 조용히 살았다. 그 이름은 불교도들 사이에서 세계의 영혼을 뜻하지만, 짓굳은 이웃 아이들은 그 개를 미세스 쇼펜하우어라 불렀다고 한다. 그가 죽기 직전에 한 조각가가 그를 위해 조그만 흉상을 만들어서 헌정했다.

그는 1860년 72세의 나이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 그는 우리 시대의 현자이다. 비록 아직까지 그의 흉상은 그가 흠모했던 부처의 그것보다 널리 퍼지지 않았다 해도, 그 못지 않게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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