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의 평화통일 과정에 ‘한국인의 현세적 기복신앙’은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가?
기독교의 나라인 유럽과 미국은 ‘자본주의 체계의 약탈적 세계화’로 인해 신도수가 급격히 줄고 종교 시스템이 위기를 맞고 있는 반면, 이슬람교는 신도수가 늘고 있다고 한다.
종교가 권력화 되거나 물신주의가 확대되는 나라의 종교는 축소되고 인간의 정신적 욕구를 현세적으로 담아내는 종교는 세가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기복신앙은 21세기에 그 출구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세계화’라는 구호는 선진국 다국적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위한 구실일 뿐이다.
그 은폐된 내용 때문에 우리에게는 ‘세계화’가 ‘소수대기업의 수출 확대로 인한 경제성장’ ‘세계여행의 자유화’ ‘영어 습득의 필요성’등의 의미로 축소된 채 진행되고 있으면서 진정한 의미의 ‘세계문화교류’나 ‘종교간 소통’ ‘지구차원의 생태계 회복’ ‘인간의 얼굴을 띤 자본주의’ 같은 주제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유럽이 경제통합은 4~50년에 걸쳐 이루어 놓고도 아직 정치통합에 성공하지 못한 것은 정치가 오랜 전통과 문화, 관습의 총체적 상부구조라는 점에 그 본질이 있다.
유럽은 중세부터 오랜세월 침략과 정복, 교류, 혼혈등을 통해 끊임없이 융합을 해온 역사가 있으나 그 친숙함에도 불구하고 뿌리깊은 ‘민족 정체성’ 때문에 정치적 통합이 어려운 것이다.
‘세계화’,‘유럽연합’이라는 이름으로 돈과 물자의 자유로운 교류는 가능하나 ‘대결과 침략.전쟁’의 역사로 점철되어 오는 동안 형성된 민족간의 정신적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는 결코 일시에 해소될 수 없는 성질을 띠게 되는 것이다.
‘세계화’라는 신앙 아닌 신앙 때문에 너무나 많은 피해를 보고 있는 국가가 다름아닌‘대한민국과 북한’이다. 북한체제의 허망함은 21세기 인간이 상상하는 도를 넘고 있으나, 그들 역시도 세계화의 파고를 뚫고 생존하려면
같은 민족 사이의 연대 이외에는 그 길이 없을 것이며 대한민국의 현재 상황도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닌 ‘이성적 계몽주의’가 더 필요한 듯 보이나, 서양의 계몽주의 역시 근대국가 수립을 위한 ‘부르주아 혁명’을 할 때는 신선하고 실천적인 사상이었다가 자본주의 체제 성립 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썩어가는 ‘웅덩이의 물’ 신세를 면치 못해 왔으니 21세기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이성적으로 억압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할 수도 있다.
‘자신을 되돌아보는 성찰적 이성’이 아닌 ‘전쟁 수행을 위한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한 서구 이성체계를 우리가 사회 변혁의 원리로 당당히 수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21세기 자본주의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도 대한민국이 굳건히 생존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그것은 ‘남북한의 평화통일’ 프로젝트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외세의 근대적 압력을 이기지 못해 식민지가 되었고 해방 후 외세의 힘에 우왕좌왕 하다가 전쟁을 치르고 분단이 된 후 21세기 현재까지도 외세의 입김에 의해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 한국 정치의 원인은 ‘샤머니즘에 근거한 사대주의’의 오랜 전통 때문이며,그 와중에도 세계 15위의 경제규모(무역규모 세계8위)를 일구었다면 그 또한 ‘현세에 근거한 기복신앙적 에너지’의 소산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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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내 가족이 복 받기를 바라는 강렬한 열망,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교육열, 자식에 대한 헌신을 넘어서 거의 신앙에 가까운 우리 사회의 출세주의, 그리고 그에 기반한 가족주의적 에너지는 각종 ‘샤머니즘적 기복주의’의 용광로 수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한국인의 에너지를 우리 자식들의 미래 삶이자 희망인 ‘남북 평화 통일’의 과정에 쏟아 붓는다면 중국의 추격으로 출구가 보이지 않는 현행 자본주의 질서에서도 소생의 빛을 볼 수 있을 것이며 ‘민족정체성’에 근거한 새로운 사회질서의 전망도 찾아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어차피 한국이 남북통일의 주도적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다면, 우리 한민족의 앞날을 내다보며 민족 고유의 전통적 유전자인 ‘현세를 위한 절박한 에너지’를 사용하여 우선 ‘민족 공동체’라는 먹잇감부터 키우면서 그 힘으로 세계와의 협력을 모색하는 것이 최선 일지도 모른다. 서로 이질적인 체제가 절박함을 갖고 만나야 상호 양보의 조건을 찾지 않겠는가?
1970년대 초반 세계최강 미국의 대통령 닉슨이 당시 경제빈국 중국의 마오쩌뚱을 만났을 때 두 나라가 취했던 상호 양보의 내용은 서로 이질적인 체제간의 교류의 필요성 때문에 형성될 수 있었다. 중국의 거센 경제적 추격을 뿌리치기 위한 ‘현세적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도 남북의 경제교류는 하루가 시급한 상황이 아닌가?
지금과 같은 남북 대립은 한국의 대자본가들도 결코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다. 대자본이 정치를 지배하고 있는 서양 선진국들과는 달리 정치적 독재권력과 대자본이 서로 우열을 가리지 않고 상호 기생하는 대한민국의 ‘비자본주의적질서’가 남북관계를 더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정통자본주의’가 아닌 ‘천민자본주의’의 태생적 한계이다.
샤머니즘적 기복신앙의 전통은 결코 하루 아침에 극복되지 않는다.
아니, 어떻게 보면 우리 고유의 장점을 버리고 서양적 가치관을 기준으로 그에 비슷하게 동화되는 것을 발전이라고 여겨서도 안된다.
오히려 현세적 필요성에 근거하여 여러 종교의 장점을 융합해서 21세기 한반도의 미래에 충실한 사상적·종교적 전망을 형성해야만 대한민국의 출구가 마련될 것이다.
샤머니즘은 특정한 종교적 형태를 띠는 신앙이 아니라 ‘현재’를 살고있는 ‘나’의 바램과 욕구를 실현시키려는 ‘의지’의 집합체이다. 그것이 마치 신앙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듯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 명칭을 ‘사며니즘교’라고 하지 않고 ‘샤머니즘적 전통’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샤머니즘은 ‘신앙적욕구’를 현세를 위한 절실한 행동으로 전환시키는 일종의 신념체계인 것이다.
요동과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단군 조선이 건국된 이래 고조선에서 [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역사의 축과 지금의 대동강 이남 지역의 토착종족인 옥저·동예·마한·변한·진한이 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지는 역사의 두 가지 흐름 중 과연 21세기 대한민국의 전통적 유전자는 어느 축에서 더 큰 영향을 받았을까?
조선시대 내내 지금의 북한 평안도 이북 지역은 계속되는 민족 차별대우를 받고 그 결과 조선 세조때 ‘이시애의 난’을 시작으로 조선 후기 ‘홍경래의 난’까지 분노로 표출되었고 일제 강점기 하 천도교 신자의 90%가 지금의 북한지역에 분포했던 것과 지금 현재 북한 평양에 기자조선(단군조선 이후 동이족 지배의 은나라가 멸망하고 은나라 재상이었던 기자가 주나라로 편입되지 않고 요동 쪽으로 와서 세운 나라)의 존재를 인정하는 기자왕릉은 무엇이며, 왜 대한민국의 역사서에는 기자조선의 존재는 없고 단군이래 약 2000년간의 공백을 두고 위만조선만 고조선 말기의 역사로 짧게 기록되어 있을까? 단군이래 반만년 단일민족 역사관의 허점이 그 속에 들어있을지도 모른다. 그 분야 관련 지식인들의 조언을 부탁드린다.
이 문제는 단순히 우리민족의 뿌리를 캐서 그것의 자부심을 드러내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21세기 한민족이 미래지향적 역사관으로 무장하고 이 현실을 뚫어 나가는데 필요한 내용임을 강조하며 ‘고수’님들의 문제제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현실적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21세기 현재의 남·북한 민족대립이 단순히 우리 스스로 해방을 이룰 힘이 없기 때문에 외세에 의해 분단되고 각각의 체제를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과정에서 생긴 너무나도 당연한 역사의 과정으로 보아야만 하는 것인가?
아니면 [백제-신라-고려(김부식 중심)]로 이어지는 정신적 유전자와 [고구려-발해-고려(묘청의 난 중심)]로 연결되는 유전자간의 갈등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인가? ‘보수 유교적 관점에서 해석한 김부식의 고려’와 ‘풍수지리적·고구려의 기상적 관점에서 묘청이 바라본 고려’의 모습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관점에 따라서는 21세기 남북통일의 과정이 위의 두가지 유전자를 변증법적으로 결합시키는 내용으로 전화될 수도 있다고 본다.
나는 지금 확인되지 않은 궤변을 늘어놓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역사에서 반드시 규명되어야 하는 미래의 주제를 고민하자는 취지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출처 : k-potentia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