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장(別將) 권응수(權應銖)
조선왕조실록과 권응수의 시장(諡狀,시호를 내려주기 위해 인물의 행적을 조사한 자료)을 통해 그의 활약상을 알아 봅니다.
안동 권씨(安東權氏). 명종 즉위년(1546년) 경북 영천 신녕(新寧) 출생 ~ 선조 41년(1608년) 사망. 항년 63세
선조 17년(1584년)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 정8품)에 임명되어 북변에서 3년간 종군합니다.
북변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다음 관직을 기다리다가 선조25년(1592년) 박홍(朴泓)이 수군 절도사(水軍節度使)로 부산(釜山)에 있을 때 권응수가 자원하여 박홍의 휘하 장수로 따라갑니다.
당시부터 별장(別將)이라는 직책이 붙는데 아마도 7품 정도 벼슬인것 같습니다.
(과거 시험에 합격하고 발령 받은 곳에서 의무적으로 임기를 채우고 나면 원하는 다른 자리로 지원을 하는데 자리에 여유가 없을 경우 그냥 집에서 놀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이런 분을 '한산인(閑散人)'이라고 합니다.)
얼마 안 되어 임진왜란 일어나 동래와 부산성이 함락되고 권응수는 고향으로 피신 합니다.
그리고 아우 권응전(權應銓)ㆍ권응평(權應平)과 같은 고을 사람 이온수(李蘊秀) 등과 더불어 의병 1백 명을 모집해 북상하는 왜적과 싸울 준비를 하게 됩니다.
당시 권응수의 의병대는 주변의 왜구와 소규모 접전을 몇차례 벌였었고 그해 8월, 드디어 당시 처음으로 대규모 작전인 영천(永川)성 탈환 작전이 전계 됩니다.
왜구들이 영천과 안동 지역에 주둔하면서 근거리의 인가를 습격하고 백성들을 학살하던 시기였는데 권응수는 자기 고향인 영천성을 탈환하기로 하고 밀양(密陽)에서 후퇴한 부사(府使) 박진(朴晉)에게 합동 공격을 요청합니다.
밀양 부사 박진은 왜구에게 쫓겨 영천 부근까지 후퇴 하였는데 선조 임금은 그를 경상좌도 병마사에 제수하기도 하는 촌극을 벌이기도 하지요. 아무튼 박진은 왜구의 세력이 강해 자신이 참전하면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까봐 권응수에게 지원 병력만 붙여줍니다.
권응수가 의병장 정대임(鄭大任)·정세아(鄭世雅)·조성(曺誠)·신해(申海) 등과 군사를 거느리고 약 2천 여명의 병력으로 진군하다가 영천 화북면 옥계리에세 왜구의 선발대를 만나 시원스럽게 격파하고 왜구의 수급 37급(級)과 말 네 필 및 병기와 재물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승세를 몰아 영천성까지 진군 하는데 왜구들이 겁을 먹고 성문을 닫고 수비를 시작합니다.
이에 권응수가 군사를 합쳐 포위하고 약 1천 여명이 수비하던 영천성의 성문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가장 먼저 권응수가 큰 도끼를 가지고 성문 안으로 돌격 했다고 하는군요.
도끼를 들고 가장 앞서면서 걸려드는 왜구들을 찍어 넘기기 시작하자 여러 군사들이 용기를 내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면서 성안으로 돌입 했다고 합니다. 결국 왜구들이 관아의 창고로 도망해 들어가 문을 닫아 걸자 조선 의병들이 불을 질러 창고를 태우니 적이 모두 불에 타서 죽었고, 도망쳐 나온 자도 우리 군사에게 차단되어 거의 모두 죽었다고 하며 탈출한 자는 겨우 수십 명이고 머리를 벤 것이 무려 5백 17급(級)에 이르는 대승을 거두고 마침내 성(城)을 수복하는 전과를 올립니다.
이리하여 왜구들은 대구 ~ 영천 ~ 안동의 물자 보급로가 차단 되고 안동 이하에 주둔한 적이 모두 꺼꾸로 더 북서쪽인 상주(尙州)로 철수하는 기형적인 전선이 형성되기도 합니다.
임진왜란 초기 지리멸렬(支離滅裂) 패배만 하던 조선 육군에게 보기 드문 상쾌한 소식이었습니다.
임란 발발 1년 후인 선조 26년(1593년) 2월 권응수는 드디어 경상도 병마절도사 겸 방어사(慶尙道兵馬節度使兼防禦使)에 임명 되어 경상도 지역을 지키는데 많은 공훈을 세우고 선조 37년(1604년) 신점(申點)·김시민(金時敏) 등과 함께 선무 공신(宣武功臣) 2등에 책록됩니다..
숙종 17년(1691년) 드이어 충의(忠毅)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지는 가문의 영광을 누리게 되지요.
지금도 경북 영천시 신녕면 치산리 구천서원(龜川書院)에 권응수 할배를 기리는 사당이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