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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다른 생각을 내세우는 누군가는 왜 불쾌한가?
게시물ID : phil_1718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aiidyn
추천 : 1
조회수 : 696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20/03/20 14:01:56
누군가가 나에게 나와 다른 생각을 내세우면 불쾌할 때가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단지 내 생각이 진실이고 저 사람의 생각은 틀린 것이라는 확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지성인이라 한다면 내 앞에 누군가가 내세우는 천동설은 명백히 틀린 것이지만
나는 그를 안타까워 할 지언정 불쾌해 하지는 않을듯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 생각에 대한 확신이 흔들려서 그런것도 아니다.
초등학교 저학년인 내 앞에 똑똑한 또래 친구가 천동설을 내세운다면
나는 내 지식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겠지만 불쾌해 하지는 않을 듯 하기 때문이다. (혼란스러워 할 지언정) 
반대로 누군가가 나를 도둑으로 의심하는 말을 한다면
나는 내가 도둑이 아니라는 것이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확신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에 대해 분명히 불쾌해 하며 불안해 할 수도 있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내세우는 타인에게의 불편함은 
그러는 상대방에게서 느껴지는 나를 무시하거나 적대시 하려는 의도에 의한 부분이 있다. 
예컨데 내가 천문학자인 것을 뻔히 아는 다른 사람이 굳이 내 앞에서 천동설을 내세운다면
그 사람은 단지 자신의 생각을 말하거나, 또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고 싶어서 저러는 것이 아니라
천문학자인 내 생각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며 나를 굴복시키려는 목적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상대가 나에게 싸우자고 시비를 걸며 도발하는 것으로 여기고 불쾌해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개인적인 충돌만으로 생각 차이에서의 모든 불편함이 설명 되지는 않는다.
예컨데 내가 천문학자라면 만약 책이나 언론에서 천동설을 사실인양 내세우는 내용을 보게되더라도
그래서 저들 저자나 기자가 꼭 나를 개인적으로 직접 공격하려는 것은 아니더라도 불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누군가 자신과 다른 생각을 내세웠는데 불쾌하다면
그것은 그 누군가가 그런 행보가 자신이 추구하는 어떤 가치를 위협하는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존중받고 배려받는 세상에 사는 것을 추구한다면
가만히 있는 나에게 생각으로 시비를 걸고 행패를 부리는 사람은 분명 자신이 추구하는 세상을 위협하는 것이 된다.

또한, 만약 내가 진리에 따라 합리적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사는 것을 추구한다면,
그래서 천동설을 기반으로 사상이나 교육이나 정책이 결정되는 따위의 일을 반대한다면,
기자나 전문가가 대중들이나 학생들에게 천동설을 내세우며 주장한다면 나는 
저들이 저들의 영향력으로 행여나 내가 추구하는 세상을 행여나 위협하지는 않을까 경계하고 불편해 할 것이다.
나아가 저들이 천동설을 내세우는 이유가 저들이 진짜로 천동설이 진실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자기내들의 부당한 이로움을 챙기기 위해서 진실을 왜곡해서 세상을 선동하고 있다는 생각에 닿으면 불쾌하기 까지 할 것이다.  

(반면에 내가 본질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천동설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천동설의 원리가 실제로 세상에 작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소수 개개인이 천동설을 주장하더라도 추구하는 세상에 거의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것이라면 저들이 뭘 믿고 따르더라도, 설사 그것이 진실과 거리가 먼 전혀 엉뚱한 거짓이라 할지라도
알바 아니고 전혀 신경쓰지도 않을 것이고, 불쾌해 하지도 않을 것이다.)  

요는 나에게 그것을 위해서 내 자원을 일부를 쏟아부었거나 그럴 용의가 있을만큼 지켜야 할 가치가 있을 때,
그런 가치를 위협하는 다른 사람이 말하는 자신과 다른 생각은 불편하거나 불쾌하게 할 수있다. 
나는 사과를 좋아한다고 했을때, 보통 상황에서라면 복숭아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전혀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일단 나는 사과를 좋아는 하지만 특별히 사과가 많이 팔리는 세상을 추구하는 정도는 아니다.
내가 주변에 사과가 많이 팔리게 하게 하기 위해 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세상에 쏟은 자원은 없거나 사소하다.
그래서 사과가 복숭아보다 더 맛있는 것으로 밝혀지던 말던 내 삶은 잃을것도 얻을것도 없이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병충해나 정책적인 이유로 사과는 모두 사라지고 복숭아로 대체되더라도 
아쉬워 할 지언정 자신의 가치에 대해 위협을 느낄 정도는 아니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 대해 불쾌해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과농사를 짓고 있다면 이야기는 조금은 달랄 질 수 있다.
사과농사를 짓는 순간 나는 사과가 많이 팔리는 세상에 살는 것을 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사과농사를 짓는다면, 나는 사과를 위해 나의 적지 않은 자원을 쏟아 부은 상태가 된다. 
그런 상태이기 때문에 어떤 공인이 복숭아가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고 한다면 살짝 불편할 수도있을듯 하다.
나아가 만약 나라에 사과나 복숭아 중 하나만 키울수 있게 되어서 투표를 해야 한다고 치면
복숭아를 좋아한다는 말을 일반인이 하더라도 예민해 질수 있을 듯 하다.
그것이 자신이 추구하는 세상에 조금이라도 위협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지 느껴지기 때문에 말이다.


이 모든 다른 생각들로의 위협들에도 적어도 본인은
세상에 만약 누구나 수긍하는 평가나 진리에 대한 어떤 절대적 기준점 같은것이 있다면 그 마져도 불쾌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현상이나 결과들이 결국에는 모두가 수긍하는 옳은 형태로 귀결될 것이라는 확신만 있다면
행여나 기자나 전문가가 천동설을 내세우더라도 전혀 불쾌해 하거나 불안해 하거나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들에게 굳이 당신의 생각은 틀렸고 지동설이 옳다고 설명하고 설득하려는데 신경을 쓰며 힘을 쏟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절대적 장치가 있다면 결국에는 지동설이 진리이고 저들이 틀렸음이 밝혀질 것이라는 보장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반대로 그 절대적인 기준에 의해 행여나 내가 받아들이는 지동설이 틀린것으로 밝혀지더라도 나는 기꺼이 받아들일 뿐 아니라
세상을 진리에 따라 좀더 합리적으로 돌아갈수 있게 한 저들의 천동설을 내세우던 사람을 오히려 고마워 할지도 모르겠다.
또는, 사과농사를 짓지만 진실로 복숭아가 더 맛있는 것으로 밝혀지더라도 나는 나의 실책을 인정하고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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