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2년에 그려진 성 올가의 그림 -
945년 이고르가 드리블지예 인들에 의해 찢겨져 죽었을 때 그에게 가족은 부인 올가와 3살짜리 어린 아들 스뱌토슬라프 뿐이었다. 자연스럽게 부인 올가가 섭정이 되어 나라를 통치하게 되었다. 원초 연대기에 의하면 그녀는 890년 프스코프 지역에서 태어나 903년 경에 이고르와 결혼을 했다는데 그렇다면 사실상 50이 넘은 나이가 되어서야 첫 아이를 봤다는 뜻이니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
어찌 되었든 여자가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자 키예프의 지배를 받다가 봉기했던 드리블지예 인들은 굉장히 오만해졌다. 그들은 20명의 고위급 인사들을 키예프로 보내 올가에게 드리블지예족의 족장 말과 올가의 혼인, 그리고 키예프 지역 지배권의 양도를 요구했다. 올가는 이 오만한 자들을 생매장시키는 것으로 응답하는 한편 이 사실을 은폐했다. 그리고 사절을 따로 보내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겠으나 그녀가 드리블지예 족의 땅으로 갈 때 안내해줄 고위급 인사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드리블지예 족은 승낙하고 고위급 사절을 보냈는데 사신은 문이 잠겨진 욕탕에서 불타죽었다.
하지만 이것도 속임수였다! 드리블지예 인들의 마을을 공격하여 공성전을 벌이기는 피해도 클 것 같고 귀찮을 것 같았던 올가는 공물로 바쳐진 참새랑 비둘기들에게 옷감 조각 등을 붙여준 뒤 거기에 불을 붙여놓은 채로 돌려보냈다. 비둘기의 귀소 본능에 따라 당연히 드리블지예 인들의 마을은 불바다로 변했고 이들은 도망치다가 올가가 보낸 키예프 군대에 의해 전원 생포됬다. 그들은 살해되거나 노예로 부하들에게 배분, 혹은 팔려나가는 신세가 되었다. 이 일로 올가는 지혜로운 러시아 여성의 상징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올가의 개종>
지혜로운 여성으로 이야기되는 올가답게 그녀는 일련의 복수를 끝낸 뒤 세제 개혁에 착수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죽은 이유가 무리한 공물 수취 때문인 것을 알고 있었고, 이 상태를 방치했다가는 제 2의 드리블지예 족이 또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각 지역에 징세관을 보내 세금을 거두되 공통된 세법에 따라 1년에 딱 1번만 거두게 해서 자의적인 공물 징수를 방지하도록 했다. 민심을 잡기 위한 방책이었다.
또한 그녀는 947년 므스타 강(1)에 대한 군사 원정을 벌였다. 많은 요새들이 키예프 공국의 손에 들어왔다. 동시에 올가는 볼가강 통행을 불허하는 하자르족과 전쟁을 치루기 시작했다. 이 전쟁은 꽤나 길게 이어졌다.
- 세례를 받은 올가 -
그러나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가 벌어졌다. 957년 올가가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한 것이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7세는 그녀를 적극 환영했고, 그녀를 적극적으로 안내해주었다. 이 무렵 크리스트교 신앙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고 일설에 따르면 이미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였다고 하던(2) 올가는 하기아 소피아를 방문하고 그 곳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 때 콘스탄티누스 7세가 올가에게 청혼을 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올가의 나이가 상당한 편이고 무엇보다 콘스탄티누스 7세에게 아내가 있었다는 점을 볼 때 설득력은 떨어진다. 여하튼 루스 카간국에 대한 선교가 성공적이었다는 867년의 기록 이후 사실상 끊겼던 러시아 지역 기독교 선교는 올가의 개종으로 다시 불이 붙었다. 그녀는 기록 상으로는 첫번째 루스 개종자인 동시에 키예프 공국의 지배자였기에 그녀는 이 공로로 훗날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단 지배자의 개종이 곧 국민의 개종으로 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교회 하나가 키예프에 건설되어있기는 했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따라서 올가는 959년 독일의 왕 오토(3)에게 사절을 보내 루스 지역에서 기독교 선교를 해줄 고위급 성직자들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오토는 이를 승낙, 성 아달베르트를 보냈다.
- "루스라. 좋아 한 번 가보죠." -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아달베르트가 도착하고 보니 올가의 섭정은 끝나있었고 키예프 공국의 지배권은 이제 정식으로 올가의 아들인 스뱌토슬라프에게 넘어가있었다는 것이다. 스뱌토슬라프는 전통적인 이교 신앙(4) 신봉자였고, 아브라함계 종교를 굉장히 혐오하는 자였다. 차마 어머니는 건드리지 못했지만 어머니의 개종 요구를 "내 부하들이 날 우습게 볼것입니다."란 말로 무시하면서 아브라함계열 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아달베르트는 급히 도주하였다.
한편 올가는 이후 조용히 지냈지만 스뱌토슬라프가 불가리아 원정을 간 사이에 페체네그족이 키예프를 치자, 키예프 방어전을 지휘했다고 한다. 페체네그 족의 침공은 겨우 키예프를 빠져나온 소년(5)을 통해 상황을 파악한 스뱌토슬라프가 돌아오자 종결되었다. 이 때 병석에서 죽어가던 올가는 스뱌토슬라프에게 이제 키예프에 머물러야 한다고 하였으나 그녀가 죽자 아들은 그걸 무시하고 불가리아로 돌아갔다.
<계승전쟁의 서막>
사실 스뱌토슬라프도 쓸만한 거리가 넘쳐나지만 하필 이걸 지난번 '유럽의 유목민' 연재 때 외전으로 다루었던 바람에 이번 연재에서는 다루지 않고 과거 글 링크 http://rozanov.egloos.com/1107948 로 넘어가기로 하고 스뱌토슬라프 사후의 정세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 "이봐! 나는?!!! 그냥 이렇게 넘어가는거냐!!!" -
적어도 원초연대기만 볼 때 러시아의 대공들 중 자식을 여러 명 두었고, 또 그 자식들 중 1~2명이라도 15세 이상이 되었을 때까지 살아있었던 군주는 용감공 스뱌토슬라프가 최초였다. 문제는 스뱌토슬라프가 972년에 죽어서 두개골이 술잔으로 변했을 때 계승권이 그다지 명확하지도 않았거니와, 이후 역사가들의 추측에 의하면 키예프 공국 자체가 불안정한 연맹체제에 가까워서 류리크 가문이 아닌 다른 가문이 지배하던 영역도 어느 정도 존재하던 것으로 추측된다는 것이었다. 즉 스뱌토슬라프의 죽음으로 키예프 공국 내에서 내란이 터질 것이 뻔하다는 것이었다.
아니나다를까 바로 스뱌토슬라프의 자식들은 대공위를 두고 내전에 돌입했다. 스뱌토슬라프는 생전에 자신의 장남 야로폴크에게 키예프를 맡기고, 둘째 올레그에게는 드레블리예 족의 영역을, 셋째 블라디미르는 노보고로드를 관리하게 해놨었다. 어떻게 보면 야로폴크에게 대권을 맡기겠다는 간접 선언을 한 셈이지만 그는 불안했다. 애시당초 스뱌토슬라프는 생전에 수도를 발칸반도로 옮길 궁리도 했으니 수도를 맡긴 게 꼭 대권을 맡긴다는 뜻이 된다고 보기도 힘들었다. 마침 둘째 올레그가 루스의 장군이었던 스베넬드의 아들 류트를 죽이자, 이를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올레그를 죽이고, 이후 블라디미르까지 죽이려고 하였다. 하지만 낌새를 챈 블라디미르는 노르웨이로 도주했다.
- 계승분쟁의 서막 jpg -
그리고 980년 블라디미르는 노르웨이에서 대규모 바이킹 용병대를 거느리고 대공위를 차지하기 위해 루스로 돌아왔다. 그는 일단 폴로츠크를 공격, 함락시키고 키예프로 진격했다. 야로폴크는 키예프 근저의 로드냐(현재의 까니브)로 도주했지만 블라디미르에게 매수된 측근 블루드에게 조종당한 바이킹 용병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로써 블라디미르가 키예프 대공의 자리에 올랐다. 다만 이는 훗날 벌어진 계승 전쟁과 내란의 서막이었다. 이제 키예프는 대공이 죽으면 내란이 터지는게 일상인 시대가 된 것이다.
<개종>
- "흐흐 넌 이제 내거야. 감히 날 거부했겠다!" "아.... 안 돼!!!" -
한편 키예프의 지배자가 된 블라디미르는 꽤 난폭하고 여자를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그가 980년 복귀하였을 때 키예프로 먼저 진격하지 않고 폴로츠크로 진격한 것은 원래 결혼하기로 약속되었지만 그 결혼 약속을 거부한 폴로츠크의 여군주 로그네다(6)와 결혼하기 위해서였다. 폴로츠크 함락 이후 블라디미르가 첫번째로 한 일은 로그네다를 겁탈하고, 강제로 결혼한 후 그녀의 남동생 두명을 죽여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키예프의 대공이 된 후 7명의 아내와 800명의 첩을 거느렸으며(7) 이교 신앙을 열렬히 숭배해 이교 신전을 세우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여러 슬라브계 부족들을 무력으로 정복했다. 하지만 점차 그는 크리스트교로 개종하라는 일련의 압력에 직면해야 했다.
일단 당시 크리스트교는 키예프 공국 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의 형 야로폴크는 즉위 후 외국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신성로마제국에 사절을 보내 세례를 베풀고 설교를 할 성직자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신성로마제국은 이를 받아들여 과거 러시아로 간 적이 있었던 아달베르트를 다시 보내 야로폴크를 세례시켜주기도 했고, 이후 크리스트교 신자는 꾸준히 증가했다. 그리고 내부의 유대교도나 이슬람교도도 무시하기는 힘든 상태였고 그는 어떤 종류든 아브라함계 종교 중 하나로 개종해야 했다.
원초 연대기는 이와 관련하여 꽤나 흥미있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먼저 하자르 족의 사절이 찾아와 블라디미르에게 유대교가 얼마나 우수한지 설명을 했다고 한다. 그러자 블라디미르는 "그럼 너희는 왜 예루살렘에서 쫓겨났는가?"라고 하자 사신은 "신께서 노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블라디미르는 하자르 사절을 쫓아냈다.
이후 볼가 불가르족에게서 이슬람 사절단이 도착했다. 이슬람교 사절단 역시 이슬람교의 위대함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특히 아내가 여러명이어도 상관 없으며 동시에 죽은 후 무하마드께서 70명의 미녀 아내를 약속했다는 부분에서 블라디미르는 혹했지만 "술하고 돼지고기는 안 됩니다."(8)을 듣자 "술은 러시아인들의 즐거움이다."라고 외치면서 그들 역시 쫓아냈다.
- 콘스탄티노플에서 온 성직자에게 설명을 듣는 블라디미르. -
이후 독일에서 로마 교황을 따르라는 사절단과 콘스탄티노플 주교를 따르라는 비잔틴 사절단이 왔다. 양쪽 모두 그에게 흥미를 주었고, 블라디미르는 양쪽 모두에 사신을 보냈다. 그리고 돌아온 사신들의 보고를 종합해본 결과 독일로 간 사신은 종교 의식에서는 영광 따위는 없다고 비판했는데, 비잔틴 제국으로 간 사절단은 종교 의식에서 영광을 보았다고 보고했다.
- "이봐! 좀 도와줘!" -
더군다나 마침 비잔틴 제국의 황제 바실리우스 2세가 내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군대 지원을 블라디미르에게 요청한 일이 벌어졌다. 그러자 그는 황제의 여동생 안나와 결혼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바실리우스 2세는 블라디미르가 포르피로게니타(9)를 요구하자, 이교도에게 여동생을 줄 수는 없으니 개종하면 주겠다고 했다. 블라디미르는 알겠다고 하고 일단 지원군을 보내주었다.
하지만 겨우겨우 위기를 넘긴 바실리우스 2세가 생각해보니 블라디미르의 요구는 너무 오만했다. 당연히 바실리우스 2세는 은근슬쩍 약속을 유야무야 시키려고 했다. 블라디미르는 이런 조짐이 보이자 화가 나 크림 반도 내에 있는 비잔틴 제국의 도시 코르순을 점령하고 코르순을 무기로 바실리우스 2세를 협박했다. 어쩔 수 없이 바실리우스 2세는 개종한다면 여동생을 내주겠다고 서약했고, 블라디미르는 개종을 하기로 했다
- 드네프르 강에서의 단체 세례식 -
결국 988년 블라디미르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보내온 주교의 주관 하에 자기의 12 아들들과 세례를 받았다. 직후 키예프의 모든 거주자들도 단체로 드네프르강에 빠지는 형식으로 세례를 받았다. 이후 페룬의 신상 등을 도끼로 모조리 찍어내리고 강에 던져버렸다.
아직 동서 교회가 분열된 시점은 아니지만 콘스탄티노플과 로마가 반목하던 이 시절에 블라디미르가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편에 서기로 하고 세례를 받은 것은 이후 러시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반적인 유럽 세계와 러시아가 어느정도 차이점을 보이고 분리되기도 한 것은 어떻게 보면 이 때의 영향이 컸다. 이후 블라디미르 치하의 러시아는 키릴 문자를 받아들이고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법을 따라하는 슬라브 계 교회 의식을 발달시켰다. 동시에 비잔틴 제국과도 기존의 적대적 관계가 아닌 우호적인 관계가 지속되었다.
- "우상숭배 종교 버렸다고 하니까 이제는 괜찮겠지?" "그런 거 없다!" -
그래도 고려할 것은 아직 루스와 비잔틴 제국 사이에는 몇 개의 전쟁이 남아있다는 것이고, 또 루스의 호전성이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임으로써 좀 줄어들었다고는 하나 아직 바이킹의 피가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자르가 스뱌토슬라프의 원정으로 쇠약해진 이후 볼가강 항로는 다시 뚫려버렸고, 이를 바탕으로 블라디미르는 987~989년, 그러니까 개종을 전후한 시점에 다시 한 번 페르시아를 대대적으로 털어먹었다. 애시당초 페르시아가 루스의 약탈에서 벗어나려면 아직 50년 이상은 더 기다려야했다.
참. 크리스트교는 1부1처제가 원칙이거 애첩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저 수많은 마누라들과 애첩들은 어떻게 됬을까? 답은 간단하다. 비잔틴 제국의 공주 안나를 제외한 모든 아내들과 애첩들은 이혼당하고 버려졌다. 특히 원초 연대기 등에서 대놓고 블라디미르 때문에 온갖 고생과 수치를 당했던 로드게나는 이름만 아나스탸샤로 바뀐 채 이혼당해서 완벽하게 버려졌다... 개종 이후 블라디미르가 경건하고 신실한 삶을 살았다고 기록은 되어있지만 개종 이후에도 몹쓸 짓 제대로 한 셈이다.
(1) 현재의 러시아 노보고로드 주에 있는 강. msta-s 자주포가 이 강에서 이름을 따왔다.
(2) 이 설에 의하면 그녀는 955년 경에 이미 개인적으로는 크리스트교를 믿었다고 한다.
(3)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는 그 오토 대제 맞다. 단 아직 이 때는 황제가 아니었다.
(4) 944년 비잔틴과 키예프가 맺은 조약 당시 페룬 등에게 맹세했다는 기록을 볼 때 이 무렵 키예프 공국은 완벽하게 슬라브화되었고, 종교 역시 오딘 등의 북구 신앙이 아닌 슬라브 전통 신앙을 믿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애시당초 스뱌토슬라프란 이름 자체도 슬라브식이었다.
(5) 이 소년은 페체네그 말을 할 줄 알았기에 그걸 활용해 페체네그 족을 속이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6) 그녀의 아버지는 로그보로드란 인물로 바이킹 출신인데 거의 단신으로 러시아땅으로 와 폴로츠크를 건설하고 지배했던 인물이라고 한다.
(7) 겁탈당한 로그네다를 제외하고도 불가리아인이나 체코인 아내가 있었다는 기록 등을 볼 때 상당수가 로그네다와 비슷하게 납치, 겁탈당한 후 아내가 된 게 아닌가 추측된다. 정식 아내들이 이럴 지경인데 애첩들은 더했을 것이다. 특히 블라디미르가 초기 왕성한 정복 활동을 벌였다는 점을 볼 때 더더욱 의심이 커진다.
(8) 사실 알 사람은 많겠지만 이슬람교가 술을 엄격히 금지하기는 하지만 그 금기를 깨고 술을 마셔대는 사람은 엄청나게 많았다. 심지어 칼리프들이나 술탄들조차도!!! 웬만큼 신실하다고 알려진 자들도 술에 한정해서는 금기 따위 무시하는 경우는 의외로 어느 정도 존재했다고 한다. 페르시아 같은 경우 아예 포도주와 증류주가 꽤나 유명했다.
(9) 아버지가 황제일 때 태어난 공주. 자줏빛 출생으로써 영광의 상징인 동시에 비잔틴 제국이 절대 외국에 넘기면 안 되는 세가지 보물 중 하나로 취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