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흑인 범죄율은 무엇을 말하는가
흑인의 범죄율은 유아원에서부터 '암묵적 편견'에 시달리며 성장한 것과 무관치 않다. 소수자에 대한 암묵적 편견이 차별로 드러나기 쉬운 한국 사회는 최소한의 사회적 긴장마저 부족한 상태다.
ⓒ시사IN 이명익2018년 6월18일 예멘인들이 제주출입국· 외국인청에서 열린 취업박람회에 참가하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당신은 합리적인 사람입니다. 누구도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요. 일터와 학교와 가정에서 상대방의 피부색과 성별에 따라 다르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과연 당신은 그럴까요?
응급의학과 의사인 녹스 토드 박사 연구팀은 1993년 미국의사협회지에 큰 논쟁을 일으킨 논문 <인종에 따른 부적절한 응급실 진통제 처방(Ethnicity as a Risk Factor for Inadequate Emergency Department Analgesia)>을 발표합니다. 연구팀은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대학 응급실에 긴뼈 골절로 인해 지난 2년 동안 찾아온 환자들의 의무기록을 분석합니다. 그중 어떤 사람이 진통제를 처방받지 않았는지 확인합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진통제 처방 여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자가 다름 아닌 환자의 인종이었기 때문입니다. 긴뼈 골절 환자 중 진통제를 처방받지 않은 비율이 백인 중에서는 25.9%였던 반면 히스패닉에서는 54.8%였습니다. 2.12배 차이가 났던 것이지요. 보험 여부, 골절의 심각도, 성별, 입원 여부 등을 모두 통제했을 때 위험비는 오히려 더 크게 증가했습니다. 같은 질환으로 응급실에 왔을 때 히스패닉계 환자는 백인에 비해 명백히 진통제 처방을 적게 받고 있었습니다.
이 연구 결과가 알려진 후, 의사들의 첫 번째 반응은 ‘황당하다’였습니다. 자신들은 환자를 치료하는 데 인종이 아닌 오직 환자의 의학적 상태에 따라 객관적으로 진단과 치료를 해왔기 때문에 연구 결과를 믿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토드 박사 연구팀은 7년 뒤인 2000년 응급의학연보(Annals of Emergency Medicine)에 게재한 <인종과 진통제 처방(Ethnicity and analgesic practice)> 논문에서 이번에는 애틀랜타 에모리 병원 응급실에 내원한 환자를 대상으로 한 인종과 진통제 처방 연구 결과를 발표합니다. 이 논문은 흑인이 백인에 비해 진통제 처방을 받지 않을 위험이 66% 높다는 결과를 보여주며, 앞선 연구 결과가 우연이 아니었다는 점을 확인합니다.
오늘날 의학 교과서에서 극소수의 질병을 제외하면 인종에 따라 진단이나 치료를 다르게 권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하지만 의사가 인종별로 차별적으로 진료를 한다는 연구 결과는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국회의 요청에 따라 미국 국립과학원 의학연구소(Institute of Medicine)가 2002년 출판한 보고서 <불평등한 치료(Unequal Treatment)>에는 경제적 능력이나 의료 접근성과 같은 명백한 불평등 요인을 감안해도 여전히 인종에 따른 의료 서비스 이용 불평등이 존재한다고 보고한 논문이 100편 넘게 인용되어 있습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심장병과 암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HIV 감염과 당뇨병과 신장병을 진단하는 과정에서 환자의 인종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AP Photo6월12일 미국 테네시주에서 흑인 청년을 사망하게 한 경찰 총격에 항의하는 시위가 열렸다.
명시적 편견과 암묵적 편견
이렇게 유색인종 환자가 백인과 동등한 치료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명백해진 이후, 연구자들은 대다수가 백인인 의료진이 진료 과정에서 환자를 차별할 가능성에 주목했습니다. 그러나 의료진 중에서 적어도 눈에 띄는 명시적인 인종적 편견을 가진 사람은 소수였을뿐더러, 그것만으로는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어려웠습니다.
이 복잡한 문제의 사슬을 풀어낸 실마리 중 하나는 명시적 편견(explicit bias)과 암묵적 편견(implicit bias)을 구분한 것입니다. 명시적 편견은 의식적 수준에서 인간이 다른 사람이나 집단에 대해 가지고 있는 태도나 믿음을 뜻합니다. 지난해 내전을 피해 제주도로 온 예멘인을 수용할 것인가에 관한 논쟁은 명시적 편견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입니다. 2018년 난민 신청을 했던 예멘인 484명에 대해 한국에서 가장 큰 호응을 얻었던 목소리는 이들이 ‘한국 사회에서 범죄를 일으킬 수 있다’라는 의견이었습니다. 실제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구체적인 정보 없이, 이슬람 문화에 대한 편견과 유럽 난민 사태의 영향 속에서 일부 한국 사람들은 예멘인들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여겼습니다.
이에 비해 암묵적 편견은 무의식적 수준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태도와 믿음을 뜻합니다. 난민이 내 주변의 한국인처럼 각자 고유한 역사를 지니고 있고 자신의 가치에 따라 살아간다고 믿기에 충분히 알지도 못하는 그들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봅시다. 이 사람은 명시적 편견으로부터는 자유로울지 모릅니다. 하지만 자신이 사는 곳에 거주하는 난민의 숫자가 증가할 때, 그로 인해 아무런 사건도 없었지만 불안함을 느끼거나 난민들이 오는 가게에 가길 꺼린다면, 그 과정에는 암묵적 편견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종에 따른 ‘불평등한 치료’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흑인이나 히스패닉에 대해 명시적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의료진이라 할지라도 암묵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경우가 많고, 그 편견이 환자 진료를 다르게 하는 데 작용했다는 점을 밝혀냅니다. 이러한 암묵적 편견이 소수자 집단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강력하고 광범위한지 검토한 다양한 연구가 등장합니다.
예일 대학 아동연구소는 2016년 9월 미국에 큰 충격을 준 연구 보고서를 발표합니다. 연구팀은 학회장에서 현직 유아원 선생님 135명을 모집했습니다. 연구 참여자들은 15인치 크기의 노트북 컴퓨터 앞에 앉습니다. 노트북 뒤에는 파란색 천으로 된 벽이 있고, 외부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 참가자는 헤드폰을 착용합니다. 외부 자극을 최소화한 것이지요. 컴퓨터 앞에 앉은 선생님들에게 연구팀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지금부터 유아원 아이들 활동을 기록한 비디오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선생님들이 아이들의 문제행동을 어떻게 발견해내는지 알고자 합니다. 이는 문제행동이 드러나기 전 사전에 확인하는 작업을 포함합니다. 비디오에는 문제행동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행동이나 잠재적인 문제행동(challenging behavior)을 발견하면 최대한 자주 버튼을 눌러주세요.”
연구팀이 보여준 비디오에는 둥근 책상에 앉은 어린아이들이 등장합니다. 백인 남아, 백인 여아, 흑인 남아, 흑인 여아 이렇게 4명입니다. 아이들은 평화롭게 모래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반적인 수업시간 모습을 담은 30초짜리 동영상 12개를 쉬는 시간을 포함해 6분 동안 보여줍니다. 비디오에서 어떤 아이도 문제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연구팀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다름 아닌 비디오를 보는 동안 유아원 선생님의 눈동자가 향하는 대상을 추적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과는 명확했습니다. 문제행동을 찾으려 하는 선생님은 여아보다는 남아를, 백인보다는 흑인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성별과 인종을 조합해 좀 더 엄격한 분석을 시행한 결과,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아이의 피부색이었습니다. 아무런 문제행동이 없었던 영상에서 선생님들은 문제행동을 찾기 위해 계속해서 흑인 아이를 더 자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 연구는 그동안 유아기 시절 흑인이 경험하는 사회적 폭력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했습니다. 예를 들어, 왜 흑인 유아가 백인 유아에 비해 유아원을 그만둘 확률이 3배 이상 높았는지를 해석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던 것입니다. 연구에 참여한 유아원 선생님 중 자신이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어떤 대상이든 의심하는 눈으로 오랫동안 바라보면 문제는 더 많이 발견되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더 자주 감시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몸은 어떻게 변화할까요? 2004년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샐리 디커슨 박사 연구팀은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이 어떠한 사회적 상황에서 인간의 몸에 증가하는지 정리한 <급성 스트레스 인자와 코르티솔 반응:이론적 통합과 실험 결과 종합(Acute Stressor and Cortisol Response:A Theoretical Integration and Synthesis of Laboratory Research)>을 심리학회보(Psychological Bulletin)에 발표합니다. 이 논문은 기존 실험 연구 208편을 검토한 결과를 보여줍니다.
물론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었기에 왕따·차별·폭언과 같은 자극은 연구윤리상 기존 연구에서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이를 제외한 나머지 요건 중, 스트레스 호르몬을 가장 크게 증가시키고 원상태로 회복되기까지 가장 오래 걸리는 급성 자극은 다름 아닌 사회적 평가 위협(social evaluative threat)이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을 다른 사람이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위협입니다. 내가 하는 일에서 작은 잘못이라도 찾아내려 눈을 부릅뜨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고혈압, 우울증, 심장병을 비롯한 수많은 질병을 유발하는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흑인들은 유아원에서부터 일상적으로 과도한 사회적 평가 위협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2017년 국제학술지 ‘랜싯’에 게재된 크리스토퍼 윌더먼 교수 연구팀의 논문 <미국의 대규모 수감, 공중보건, 그리고 커져가는 불평등(Mass incarceration, public health, and widening inequality in the USA)>에 따르면 미국 흑인 남성 3명 중 1명은 평생에 한 번은 교도소에 수감된다고 합니다. 이 비극적인 숫자는 열악한 물질적인 삶의 조건에서 비롯된 흑인 범죄율을 반영하는 동시에 그들에게 유난히 가혹한 사회적 평가 위협의 결과를 보여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 소수자에 대한 명시적 편견이 없다고 말하는 많은 이들이 암묵적 편견을 가지고 있을까요? 물론 소수자에 대한 명시적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유로 조사 과정에서 숨겼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결코 그 이유만은 아닙니다.
인간의 두뇌는 외부 자극을 범주화해서 이해하며 진화했습니다. 인간이 처음 사자와 호랑이를 봤을 때 그 대상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기에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경험이 반복되면서, 사자와 비슷한 생명체를 봤을 때 인간의 두뇌는 그것을 맹수라 분류하고 위험한 동물이라고 판단합니다. 그에 따라 도망치거나 싸우는 행동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러한 판단이 빠를수록, 또 무의식적 수준에서 즉각적으로 이루어질수록 인간의 생존 가능성은 높아집니다. 인간 두뇌에 깊이 새겨진 고정관념과 그에 기반한 편견이 활성화되는 과정은 생존하기 위해 수많은 외부 정보를 인지하고 처리해온 과정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인간이 타인을 생각하는 방식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뇌의 신경망이 첫눈에 보이는 피부색이나 성별과 같은 정보를 조합해 그 사람을 특정 범주로 분류하고 그에 따라 판단하는 데 0.1초가 채 걸리지 않습니다. 인간이 눈을 깜빡하는 데 보통 0.1~0.4초가 걸린다는 점을 생각하면, 말 그대로 눈 깜빡할 새보다 빠르게 우리는 타인을 자신의 고정관념에 따라 인지하고 분류해 그에 따라 믿을 만한지 여부를 판단합니다. 이 과정은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입니다.
ⓒ연합뉴스2017년 9월12일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관련 내용이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다른 인종과 이웃하고 싶지 않다
그 과정에서 암묵적 편견은 큰 힘을 발휘합니다. 특히 기존 연구들은 과도한 업무량에 시달리고, 시간에 쫓기고, 피곤한 상황에서 빠르게 의사 결정을 해야 하는 경우 이러한 암묵적 편견이 더욱 강하게 작동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요인들을 두루 갖춘 한국 사회 일터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소수자에 대한 암묵적 편견이 차별적 행동으로 드러나기 매우 쉬운 장소입니다.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편견은 한 사회의 역사와 권력관계를 반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이 없는 예멘인이나 다른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여기는 사고가 대표적입니다. 그런 편견들은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에 깊이 침투해 감시의 눈으로 소수자의 삶을 옥죄고, 병원과 학교와 직장에서 차별적인 대우를 만들어냅니다.
암묵적 편견과 명시적 편견은 밀접히 닿아 있습니다. 명시적 편견이 만연한 사회에서 암묵적 편견이 그보다 덜할 리 없으니까요. 2010~2014년 측정된 세계 가치조사에는 ‘나는 다른 인종과 이웃에 살고 싶지 않다’라고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인종에 대한 명시적 편견을 측정하는 내용입니다. ‘살고 싶지 않다’고 답한 사람의 비율이 스웨덴에서는 2.8%였고 미국에서는 그 두 배인 5.6%였습니다. 그런데 그 응답수치가 한국에서는 34.1%였습니다.
저는 이 결과를 볼 때마다 두 가지 생각을 합니다. 한국 사회가 인종차별이 매우 심각하다는 점과 한국인은 인종차별 성향을 보고하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자기검열과 긴장이 부족한 나라라는 점입니다. 인종별 거주지 분리가 심각한 미국 사회에서, 같은 질문에 ‘살고 싶지 않다’라고 응답한 5.6%가 실제 미국인의 속마음을 반영하는 숫자라고 믿지 않습니다. 그 5.6%는 적어도 누군가 그런 질문을 했을 때, 인종차별주의자로 비쳐지고 싶지 않은 미국 사회의 긴장을 반영하는 숫자라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그 긴장조차 부재한 것이지요.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말합니다. 무의식적으로,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암묵적 편견을 바꾸는 길은 권력의 적극적인 재분배를 통해 소수자의 삶을 바꾸어내는 것과 함께, 우리 스스로가 고정관념과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나 역시 내 의도와 무관하게 가해자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인식하고 경계하며 행동하는 일이라고요. 차별하는 줄 모르고 하는 차별 행동이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저는 차별금지법이 그 인식과 경계와 행동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시작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김승섭(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교수)
인간의 뇌는 부당하다. 보이는 것에 약하고 잘 속는다. 정보를 못가지고 진실을 못보고 제멋대로 느끼고 생각하는 일도 많다. 연구에 의하면 인간 대부분은 인지왜곡이 있다고 한다. 어떤 상황에 자기식대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눈앞밖에 보지 못하고, 개돼지처럼 주변에 잘 휩쓸리기도 한다. 아무것도 아닌데 몸값을 높여 상상도 못할 부를 안겨주기도 하고, 아파트 값을 천정부지로 높여서 30평에 30억이 넘는 희안한 일을 만들기도 한다. 그냥 지구상의 반쪽짜리 문제투성이 나라인데 한강의 남쪽에 있고, 편리하고 조망이 좋다는 그것의 값어치인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남으라 한다. 그런데 인간 뇌의 취약점대로 현대 환경에서 적자생존하기에 유리한 형질은 사실 이미 가지고 태어난다. 후천적인 노력은 시간상, 인간 구조상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후천적인 환경까지 좋다면? 말할 것도 없다.
다이아몬드 원석을 생각해보면 된다. 아무리 갈고 닦아도 다이아몬드가 아니면 끝이다. 물론 다이아몬드라고 모두가 속을 수도 있거나, 당시에 네덜란드 튤립전쟁처럼 값어치있는 것으로 통용될 수는 있다.
이런건 모두 '운' 이다. 내가 원하고 노력한다고 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바꾸려면 국가를 장악하고 사람들의 뇌를 장악해야하는데 이것이야말로 공상과학 소설이고 '운' 이다.)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 법에 저촉되지않고 친구를 만들고 표를 얻고 돈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이 운좋은 사람들이 사회의 주류와 정치인, 경제인, 연예인, 종교인이 된다. 물론 법에 어긋나도 걸리지 않으면 잘 나간다.
부자와 주류는 확률상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부분이 있다.
사실 부자가 되는 것은 '운' 이다.
자본주의 상에서 성공은 절대적으로 운이다. 이를테면 강남땅 매입은 정보를 접하고 '인싸' 습성을 지니고 때맞춰 돈도 있던 사람들이 매입하여 땅값이 올라 대대로 부자가 되었다. 정경유착, 즉 정치와 유착한 사람들이 대기업으로 컸다.
자본주의 상황에서 현대 사회에 기득권이 만들어놓은 불합리한 검증시스템을 통과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재주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도 있을텐데, 그런 경우의 사람은 노력해본들 성공하지 못하고 그들이 만든 부당한 사회의 '하층' 에서 힘들게 살다가 죽는다.
사실 가난은 죄가 아닌데, 부에따라 얻을 수 있는 생존 환경들이 달라지고, 그것을 차별하게 함으로써, 현대 자본주의가 가난을 죄로 만들어버리고 있다.
소수의 기득권에게 유리한 제도를 전국민에 대해 반강제로 세뇌시키고 있다. '무한경쟁' 이란 핑계로 동물적인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룰을 인간에도 적용하여 잔인하게 방관하고 있다. 물론 자기들은 그런 룰을 따르지 않아도 세습으로 부를 물려줄 수 있고, 아랫사람들만 이미 선점한 기득권이 있는 곳으로 올라오려 피터지다가 자기들끼리 발목잡고 끌어내리며 죽도록 내버려 둔다. 심지어 요즘은 그것조차 못하게 대놓고 부와 기득권을 이용한 세습으로 굳혀버렸다. (서울대 입학생의 60% 가 강남구 대치동 출신이다.)
당연히 출생하여 시냅스가 형성되면서 그런 부당한 룰에 적응하게 되고 그런 룰대로 진심으로 반응하게 된다. 그것이 차별의 근거가 된다. 인성교육을 시키지 않고 그러한 무한경쟁과 서열짓기, 차별의 룰을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많은 피해자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평등은 돈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외모에 대한 평등도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별로 방법이 없다. 이것은 그냥 안고가다가 과학이 발전하면 인간 유전자를 개선함으로 해결할 문제이다. (그 정도 수준이 되면 범죄도 사라질 것이다. 한정된 재화도 욕심없이 나누게 되겠지...)
인간은 0.3 초만에 인종차별을 한다는 연구가 있다. 암묵적 차별이다. 이런 원리로 인간들은 길거리나 자기, 자기 경험, 미디어를 기준으로 순간적으로 판단한다. 그리고 호감이나 불쾌감을 느낀다. 불쾌감을 느낄때는 부정적인 사회적 신호인 인사를 무시하거나, 말을 걸어도 무시하고, 똥씹는 표정을 하고, 눈배렸다는 듯이 고개를 떨구고(일반적 반응을 보면 사실 자신감없거나 전날 떡친게 부끄러워서 그러는건 아닌듯), 흘끗보며 기침을 하고 가래침도 뱉는다.
이러한 원리대로 외모가 잘나면 갖은 특혜를 받는 아이돌도 생기며, 외모가 못나면 나락으로 처박혀 왕따나 히키코모리가 된다. (여기에는 심리학적으로 다수가 선호하는 매력이 많이 작용한다. 자기와 맞아서 선호해도 그중 우수한 매력을 주로 선택한다. 그리고 아이돌의 인기엔 대리만족과 카타르시스 심리도 작용함. 사회적 불안을 마녀에게 해소하듯, 사회적 갈증을 우상에게 해소한다.)
굳이 이런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더라도 외모가 잘나면 흔히 일상에서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잘 대해줘서 행복감을 많이 누리고 산다. (사람과 상황에 따라 질시를 받기도 한다. 동성들은 자기방어로 질투할 수가 있다.) 연애도 수월하고, 친절함도 많이 받는다. (호감을 주는 것이 그 자체가 권력이 되며, 사회심리학에서 '참조권력' 에 해당한다.)
반대로 외모가 비호감이거나 못나면 사람들의 눈길에서부터 경멸, 혐오를 당하고 인생의 행복감이 상당히 다운된다. (물론 동정을 받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것들이 그 대상이 주는 느낌에 좌우된다는 점에서 불합리하다. 철저히 타고나고 후천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수 없는 운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은 직업이나 인성이 아닌 순전히 외모에서 발생하는 일들이다. 성격을 겪거나 직업이나 재산을 알고 반전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못하여 이런 사람들의 시선 감옥을 벗어나지 못한다.
학교나 회사같이 지속적으로 만나야하는 상황에서는 왕따나 괴롭힘도 발생한다.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것이 (인간관계 형성에 지장이 되고) 첫인상에서 순간적으로 '사회적 서열낮음' 으로 여겨지기에 곧 '약자' 가 되고, 불쌍함보다는 경멸이나 혐오를 느끼는 자들이 많아 (수양도 안되고 동정스럽지도 않아서 그럴 필요도 못느껴 무심코) 흔히 브레이크 없이 괴롭힘이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그때 상황마다 다르다. 당하는 사람의 느낌에 따라서도 다르고... (더 복잡한 것이 개입한다. 상동성에 감정이입을 하기도 하는데, 자기의 싫은 점을 닮으면 더 싫어한다.) 포인트는 단지 외모로 '약자' 가 되어 괴롭힘의 주도권이 그들 다수에게 있다는 것이 문제 아닐까.
그들도 개개인을 뜯어보면 잘난 것은 아닌데 단지 그들 사이에서 인정되고 특별한 거슬림이 없다는 이유로 묻혀서 '타겟' 을 피해가는 것일 뿐이다. 마치 사냥당하는 물소 무리에서 특별히 약한 물소만 타겟이 되듯이 그런 이유랄까.
도마에 오르면 죄인이 된다. 중세 마녀사냥의 원리처럼...
중세의 수많은 마녀가 그랬고, 예수조차 그랬다.
특히나 한국처럼 모든 것을 비교하는 시선으로 부정적으로 보며, 자기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남 흠을 잡고 까내려 우월감, 안도감을 느끼려는 습성을 가진 곳에서는 더 그렇다. 개성을 인정하고 긍정적으로만 보면 더 좋은 점을 많이 찾을텐데.
분명 먼저 시비를 걸고, 아무 것도 아닌 사소한 외모 하자의 문제를, 굳이 긁어부스럼으로 일으키는 인간의 행동들은 잘못되었다. 그러나 인간이 이렇게 진화된 것이 문제이고(그렇게 진화하게 한 우주 설계도 문제이고), 현대 한국의 (관계지향과 거기에 불리한 조건이면 서로에게 눈치주고 불이익을 주는 풍토에서 비롯된:이것이 획일화된 유행을 따르게도 만듬.) 외모지상의 환경과 맞물려 이렇게 작동하는 인간의 뇌를 물리적이고 과학적인 방식으로 강제로 개조하지 않는 한 별다른 방도가 없다. 세뇌나 계몽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것이다. 특히나 민주주의에 다들 지 꼴리는대로 느끼고 주장하고, 정보화로 쏟아지는 정보를 막을 수 없는 상황에서는.
이런 상황은 십년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더 왜곡되고 심해진다. 단적인 예로 나도 십년전에는 지금같이 극혐의 시선을 받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TV에서 남자 아이돌들이 개판을 치고 동네에 길쭉길쭉한 조두들이 많아지기 시작한 즈음부터 극혐의 눈길을 많이 받는다.
나는 저주받은 유전자로 대가리가 크고 그 와중에 그닥 호감을 못주는 인상에 (사람이라 뜯어보면 잘생긴 것도 있겠지만) 반장애자 면상이다. (거기다가 늙었는데 멋부리지) 그런데 이건 사람들이 보는 시선으로 그렇다.
사실 나는 남눈을 의식안하고 막사는 경향이 있는데, 굳이, 기어이 나를 남이 평가해서 문제다. 사람들이 많아 시선이 분산되고 시선이 안오면 모르나, 인적이 드물어 내게 시선이 오거나 음식점에 가서 일대일의 상황이 되면 그때부터 문제가 생긴다.
일단 불친절하다. 지금까지 인사를 받거나 친절한 대접을 받은 일이 상당히 적다.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백에 하나. 굳이 친절교육을 시키지 않는 한. 심지어 내가 먼저 인사를 해도 무시한다. (전반적인 서비스업 상태가 문제이긴 하지만 나에게만 그런 일도 많다.) 그냥 알바와 첨보고 주문 몇마디했는데 그후에 나를 경멸하고 극혐하는듯이 보고 숟가락을 던지고 가듯이 놓고간 경우도 있다. 이런 정신병적 상황이 이해가 안됐다. '내가 이상한 것일까?' 그런데 나는 정상이다. 물론 진상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인한 자기방어기제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인간 대부분이 갖고있는 인지왜곡에 대한 오판이였다는 것이 문제이지만. (사실 내 이미지가 울퉁불퉁 거슬리고 찌질스럽고, 사람에 따라 주관적으로 어떻게 보면 해끼칠 것 같기는 한데 무섭게 느껴지진 않은 이미지. 지네 좆꼴리는 대로... 눈깔을 확)
그리고 길에선 사람들이 꼭 극혐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꼬라보고 가거나, 꼭 흘끔보고 콜록콜록 기침을 하고 불쾌하다는 표시를 하고 지나가거나, 양아치가 죽일 듯이 날 노려보고 가래침을 뱉고 지나간다. 옆에 친구나 지인이 있든 말든. 그것때문에 옆에 있던 사람이 놀라고 당황한 일도 있다.
돌아다녀보면 특정 동네에서 더 심한데 길거리 외양이 특별히 거슬리지 않고 암묵적으로 계급화된 로컬이 많은 동네에서 더 그렇다. (좋은 것만 보고 살아서 불편해서 그런지, 지루하고 스트레스가 많아서 그런지) 좆목질필요성때문인지 유독 서로 더 상대의 시선에 신경을 쓰고 자기를 어떻게 보는지 민감하기 때문이다. 젊은 애들이 생식하는 시기라서 더 그럴 수도 있고. 지네끼리 좆목질에 불리하면 살기위해 극혐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과 다르면 일단 혐오부터하는 패턴도 있어서 그렇다. (부지불식간에 외집단으로 인식하고 차별.) 내가 겪은 바로는 신도시쪽이 이런게 심한 것 같다.
그런 자들이 많아지냐 적어지냐의 차이 뿐이지, 사실 어딜가도 있다. 이건 한국의 문제다. 외국의 인종차별이 있듯이, 한국엔 외모차별이 있는 것이다. 그 대상은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는다. 인간을 '대상화' 하는 것도 똑같다. 여자들만 피해자인 것이 아니라 남자도 피해자인 것이다. 이것은 '인간' 의 문제이지 남녀를 가리는 문제가 아니다.
사실 근본해결법은 인간의 멸종이다. 특히 한국인의. 그러나 이것이 불가능하거나 어렵기 때문에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누군가 히틀러가 나타난다면 좋겠건만. 히틀러같은 존재가 나타나서 한국인 모두를 가스실에 넣고 죽였으면 하는 바램이다.
문제는 '한국인' 인 것이다.
그간 딱히 꼬집어서 누구나 납득가능한 이미지나 개념의 형태로 이유를 짚어내지 못했는데, 결국 그걸 해냈다. 즉 '암묵적 차별' 이었고, 다들 원인은 잘 모르지만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고,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던 일의 원인을 밝혀 내었다. 인종차별, 남녀차별보다 훨씬 광범위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겪는 사회문제였던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같은 인종끼리의 동양권, 특히 인간관계에 예민하고, 통일성을 지향하고, 갑을경쟁관계가 익숙한, 좁디좁은 한국이란 나라의 특수성에 국한된 문제일 수도 있다.
먼저 알바 경험자나 일반인을 대상으로 직접 또는 인터넷 게시글, 댓글을 통해서 수집하고 확인하거나 직접 질문해보았다.
그냥 어려운내용없이 알바입장에서 쉽게 대답하였다. 손님이 "못생겨서" 인사를 안한다고 한다. 또는 "기분 나빠서" 그리고 그런 손님은 별로 없다는 경우도 있었다. 즉 전체 손님에서 그들이 느끼는 '비호감' 손님의 수는 적다. 그런 상대적인 '사회적 약자' 에게 그들은 그러고 있었다.
또 자기가 다른 손님에게서 인사를 무시당하고 씹힌 것에 대해 그런 약자에게 푸는 우월감을 느끼려는 복수와 해소의 의미도 있었다. 또 어떤 경우는 인사를 받아줄 것같은 손님에게만 한다고 했다. 역시 확인되지 않고 검증되지 않은 주관적, 자의적 느낌(촉)에 의해서이다. 개인적인 경험을 비추어볼 때, 여러 손님을 보면 전체가 보이면서 비교되고 자기가 그런 느낌을 구분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일어나는 일이다.
즉 기본적인 서비스 마인드 그딴 것 없이 그냥 자기 기분대로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자기도 손님의 이미지나 느낌을 느끼긴하지만 손님들을 종합해서 자기 행동이 왜 그런지 짚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대신 해석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인사를 무시하고 불친절하게 함부로 대하는' 손님의 범주는 사실 '인간관계를 할만한 최소한의 호감' 이 '다른 일반인 수준' 만큼도 없다는 뜻이다. 사람 취급할 가치가 없다는 뜻이겠다. 물론 도덕적으로가 아닌 매력적으로 내려지는 주관적이고 왜곡되고 근거없는 순간적인 판단을 통해서다. 보통은 자기나 자기 지인을 기준으로 하거나 지인이 적을 때는 손님들 경험을 기준으로 하지만 때로 tv를 많이 봐서 아이돌을 기준으로 하는 어이없고 황당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그 손님 자체의 고유한 매력을 봐주는 경우도 물론 있겠다.
그럼 구체적으로 보면 어떻게 호감이 없는가? 를 생각해 보면 된다.
일단 인간이 인식할때는 0.3 초에서 1초도 안되는 사이에 실루엣이나 피부색, 이미지 등을 인식하고 호불호에 대한 감정적 반응이 일어나며, 3초안에 이 사람을 좋아할지 싫어할지 결정이 되고(첫인상의 법칙), 그것이 좀처럼 바뀌지 않고 그 자를 안볼때까지 지속이 된다는 것이다. 첫 이미지를 바꾸려면 그 것을 반전시킬 강력한 이미지가 다음에 제시되어야 하는데 그런 진실을 굳이 꺼내야하나하는 회의가 들만큼 인간들의 인식은 부당하게 진화하였다. <미국의 흑인 범죄율은 무엇을 말하는가> 의 '암묵적 차별' 참고.
이것은 일반 만남이나 길거리, 업소를 막론하고 인간이면 누구나 행하는 짓이고, 다만 업소의 경우 진상에 대한 공포가 있기에(직접 겪기도 하고 다른 종업원이 겪는 것을 보기도 한) 그런 자기 마음 속에서 만들어낸 '거대한 괴물' 에 대한 공포를 비호감이지만 만만한 손님에게 투사시켜 증오하고 함부로 하며 자기가 당했던 것을 푸는 그러한 경우가 있고, 이것은 중세 마녀사냥의 심리와도 통한다.
나의 경우가 운이 없게도 그들의 말로 '빻았다' 할 정도로 얼굴 인상이 구겨져 형성되어 있고, 그와 동시에 약한 감도 있어서(눈이 약하다는 말도 들었다) 그들이 '비호감으로 스트레스 풀기' 딱 좋은 먹잇감이였던 것이다. 못생기고 빻은 상태에서 눈주위만 잘생긴척하는 그런 기괴한 느낌도 있고. 놀고 잘나가기는 커녕, 때론 (동병상련의) 동정심마저 일으키는 그냥 약한 안면 장애자 취급을 받은 적도 있고. 그냥 길을 다녀도 다른 사람과 뭔가 느낌이 구분된다.
그냥 돌출입 때문에 그런건 아니다. 돌출입인데 여자의 경우 남자들의 보살피는 마음을 받는 경우도 있다. 나는 남자라서 이런 하자가있는 경우, 미적으로 예민한(이것이 중요한게 깍새같이 외양에 민감한 직업들에 더 혐오를 받고 극혐 대우를 받고 인간 이하 취급을 받았다. 기본적으로 그런 일하는 것들이 대체로 예민하고 성질 이상한데 사회적으로 낮은 취급받아 억화심정에 그렇기도 하지만, 나의 외양으로 차별하고 불친절해서 내가 미용 직업군과 사이가 안좋음.) 남자나 여자들에게 병신, 낙오자 취급을 받게 되는데 거기다가 그냥 얼굴이 느낌상 비호감으로 이것저것 뒤섞인 것이다.
더구나 머리는 큰데 얼굴이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느낌도 있다. 어린 시절 이런 인상 때문에 그 짐승새끼의 눈깔과 심기를 자극하여 손쉬운 대상에게 꼬투리를 잡아 장기적으로 마구 폭행을 가하여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렸던 아동학대의 원인이 되었고, 학교에서는 무뇌아들로부터 질투와 학교폭력으로 이어졌으며, 사회에선 부당한 차별을 당하고, 업소에서 자기들이 그래도 되는 '비호감' 이라는 면죄부가 되었던 것이다. '찌질한데 성격나빠보이는' 인상이.
(인간들은 상당히 예민하다. 나보다도 더. 하긴 나는 다른 자에게 관심이 없지만 그들은 인간관계에 집착하고, 진상을 피하기 위해서 남의 일을 눈에 불을 켜고 관찰하고, 그러지 않아도 저절로 살아나가며 남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드라마를 보며 악역을 욕하듯이 자의적으로 호불호의 감정을 내고, 내게도 마찬가지로 그랬다. 내가 졸지에 의도치않게 그들의 사려깊지못한 순간적 판단에 의해 악역이 된 일도 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어디까지나 그들 눈과 기준, 입장에서 지들 꼴리는대로, 지들 맘대로 일어나는 일들이다.
나는 한번도 그들에게 그런 권한을 준적이 없다. 다만 내가 먼저 장악하고 제압하고 흔들지 않으면 항상 그런 꼴을 당했고, 세상은 그렇게 살아야한다는 것을 나도 모르게 배우고 익혔을 뿐이다.
먼저 그러지 않으면 어김없이 불이익이 돌아왔고 힘든 인생이였다. 그나마 바꿀 수 없는 타고난 생김새에 대한 최선의 수습이 무조건 쎄보이는 것이였고, 어쨌든 그런 타고난 생김새와 맞아떨어지고 어울려서 쎄보이게 굴때는 나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였지만, 좀 버겁고 힘들긴 하였다. 원래 쎄게 태어나지 못했고, 쎄게 형성되는 삶을 살아오지 못해서.)
업소 종업원이든 길거리 양아치든 일반 만남에서든 상대는 그런 식으로 날 판단하였고, 어찌되었든 자기가 더 서열상 우월하다 느끼고 함부로 했던 것이다. 싸움과 상관없는 일반인이나 찐따도 그 지랄하니 장애자 수준으로 취급하여 확실히 얕보긴 얕본 것이다.
더구나 길거리에서 스치는 상황에서는 인간들과 더 비교되기 쉽고 뭔가 얼굴이 '빻았는데' 비호감이고 다른 사람보다 더 약해보이고 사회적 서열이 낮아보이고 낙오된 것같고 뭐 그러한 것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짓도 안했는데.
많은 자들이 그런 것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 예의없는 것들이 꼬라보거나 침도 뱉고 때론 지들끼리 얼평과 욕도 하면서 시비를 걸고 지나가는 것이다.
혼자 1:1 의 상황에서 지나갈때나 데이트 상황에선 더 그렇다. 그냥 대놓고 꼬라보며 가래침을 뱉고 갈구고 지나간다.
인간 벌레들은 거의 이런 패턴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특히 이런 동물적 행위들을 하는 부당한 벌레들은. 사람 얼굴을 하고 사람 옷을 입고서 10년전이나 지금이나 어느 장소에서나 같은 패턴의 짓거리들을 한다. 지네가 자기가 하는 짓거리들을 알수도 모를 수도 있다. 이러한 것들이 내가 인간이란 벌레들에게 마음을 닫게된 계기들이다.
그리고 함부로 취급을 당하는 경우, 길거리 행인이나 알바나 종업원이 함부로 할 만큼 무섭거나 강제력도 없다는 뜻이다. 차라리 자주 만나서 서로 잘 아는 지인의 경우에는 덜하다. (역으로 만만한 정보를 더 알고 친근함이 보호막이 아니라 약점으로 여겨지면 더 심해질 수도 있지만 나의 경우에는 알면 알수록 상대가 더 조심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잘못해도 그들에게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 해를 끼치고 신상에 피해를 입을 만큼 그 차별당하는 손님이 힘을 가지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거나 공격적으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고 즉 일터를 벗어난 길거리나 일반 인간관계에서도 그렇듯 '함부로 해도 뒤탈없고 괜찮을 사람' 정도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노려서 즉각적으로 해결하려면 무섭고 세보이면 된다.
호감은 얼굴에 집중된 생김새를 기반하기에 바꿀 수 없이 어느정도 타고나는 것이라 어쩌지 못하겠지만(실제로 웃어도 보고 친절하게도 해보았는데 이렇게 생긴 것 위주로 기본적인 호감을 느끼는 상황에서 비호감인 자가 친절하고 웃으면 일단 본능적 차원에서 적으로 규정한 상황에서의 태도이기 때문에 '만만하고 약한' 느낌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 비호감을 반전시킬만한 호감으로 바꾸진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무표정일때 비호감 인상인데 상대에게 호감을 주는 표정을 짓거나 웃어서 호감인 경우도 있긴 하다. 그러나 보통은 굳이 항상 웃지 않고, 무표정일때 호감, 비호감에 따라 행동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이에 따라 많은 자들의 행위가 갈리고 사회적 이익과 불이익도 받는다.) 무서움은 분위기를 통해 상대가 느끼도록 노력으로 줄 수 있는 경우가 있다. 더구나 잠깐 만나고 헤어지는 경우에는 더 유용하다. 그리고 연구를 보면 호감에 뇌가 반응하는 경우는 20% 인데 공포에 편도체가 반응하는 경우는 90% 라는 연구결과가 있다. 물론 그 소스도 중요할 것이다.
보통 눈에서 시작된다. 전체 스타일이나 조화도 중요하지만... 개별적으로 상황에 따라, 경우에 맞게 해결해야할 문제이다.
'공포' 의 감정을 이용한 것은 아니고, 긍정적인 시야로 질투가 배제된 '선망' 이나 '존경' 비슷한 감정을 이용한 것이지만, 비싼 브랜드 옷을 입고, 그러한 것들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백화점 같은 곳을 가서 그 브랜드를 알아보면, 일반 식당에서 무시당하듯이 그 정도로 개무시는 안당하는 그런 일이 있었다.
(원리상 호감을 얻고, '사랑' 받는 것이 시비 걸리지 않고, 공격받지 않고 자기를 보호하는 것에라든지 방해받지 않고 일이 잘풀리게 하는데에 제일 좋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그나마 선망받고 존경받는 것이 좋고, 안되면 공포라도 주는 것이 자기를 지키는 길이다.
더럽고 치사하나 벌레같은 인간들이 수양이 안되어 그 지랄로 행동하므로 전 국가적으로 어릴때부터 인성교육하고, 대대적으로 계몽하고, 전국민적인 동의를 얻어 법제화까지 하기 전엔 어떻게 하기 힘든 부분이다. 현재 본사에 클레임 걸거나, 업장에 악플 후기 남기는 것외엔 별로 제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부분이다. 이런 빈틈을 노려 이것들이 그 지랄하는 것이고.
길거리는 어떻게 못한다쳐도 음식 장사나 서비스업은 그러지 말아야지. 개같은 것들이...)
관련 연구는 있지만 확실하고 명확하게 개념이나 학문적으로 정립되고 증명되어 통용된 내용들이 아니라서,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른다. 자기들은 그렇게 느끼고 살고 행동했는데 왜 그런지 잘 모르고, 어디서 기인했는지 잘 모른다. 그런데 보통 잘못은 다 '진화심리' 때문이다. 이 모든게 우주의 설계자에 의해서 기본적인 구조가 제시되고, 지구의 역사를 거치면서 변하고 추가되고 전수되어 내려온 '진화심리' 를 느끼는 본능에 의해 일어난 망할 일들이다. 각종 범죄, 특히 폭력과 성범죄도 그렇다.
인간은 빻거나 찌질하거나 관계맺기 싫으면 인사도 안함. 학교든 직장이든 심지어 알바들도. 이것은 마치 인종차별처럼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연구에 의하면 0.3~1 초 안에 이사람을 차별할 것인지 인식과 행동이 일어난다고 한다.)
알바들이 보통 그냥 기분나쁘면 인사안한다고 함. 인사안받을 것 같거나. 주관적 느낌이나 '다른 일반인 수준의 호감' 도 없는 경우에 그런다. 백명중 한둘... (마치 인종차별하듯이. 인종차별 가해자도 백중하나, 피해자도 사회적 약자 범주이다. 백인들 눈에, 또는 한국 가해자들 눈에. 상대적이나 어쨌든 그때의 소수자, 약자를 공격하는 비열한 경로가 작동하였다. 외국에선 인종차별, 한국에선 외모차별. 심지어 이건 아동학대까지 이어진다. 안처맞을 것 같고 뭐라 안그럴 것 같으니까 대놓고 그런거지... 불이익도 없고. 저도 모르게 약자에게 스트레스, 태생적 사회적 불안이나 하찮은 고까운 감정을 푸는거다. 보는 사람도 없고. 그나마 비호감은 인사안하면 뭐라 할 것 같이 생겨야 인사받는듯.
이상하게 다른 사람들은 미용실가면 대접받는다고만 하던 미용사란 직업들과 안좋은 일들이 많다. 그것들이 외모지상주의여서 그런 것 같다. 내가 극혐외모니 그냥 보고 기분나빠서 함부로 막하는 것이겠지. 병원 카운터 간호조무사도 비슷하다.)
개인적으로 먼저 인사해도 씹히는 경우도 있었고, 옆 친구에겐 웃고 나보고 인상 팍쓰는 개같은 일도 겪었다. 무주상보시(무외시보시)하기엔 난 그냥 일반인이라 기분이 더럽다. 주변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걸 노린지도 모르지만.
그냥 가게나 학교, 직장에서 인사만 안하고 안받으면 되는데, 길거리에서 똥씹은 표정으로 쳐다보고 불쾌한 듯이 기침을 하거나 땅에 가래침이나 침을 뱉고 가거나 무리끼리 욕을 하고 가거나 직접적으로 뭐라고 하고 지나가면(대다수는 겪지 않겠지만 실제 구체적 사례로 일어난 일들이다.) 그때 그런 가해자의 눈에 그래도 저항못할 만만한 상태에, 거슬렸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거슬림은 단지 외모가 못생긴 것에서 약한데 위협이 되서 기분나쁜 것까지 다양한 경우가 있다. 때론 자격지심, 자기와 그냥 안맞아서 또는 잘나서 질투심에 그러기도 한다.
데이트를 할때도 당했고 (대놓고 꼬라보며 시비걸고 지나가고, 고등학생 무리가 날보고 외모 욕을 하고 가기도 했다.) 지인이 있어도 개의치않고 그러는 일도 다반사다.
1:1 의 상황에 더 그러는걸로 보아 때로 어떤 새끼는 다른 자의 눈(사회적 강제력, 자연감시)을 의식하기도하는 비열함이 있다. 약자는 감정이입도 안되고 막해도 되나 사회적 지탄은 두려운 것이다. 다수가 지나가는 길거리에서는 시선분산으로 타겟이 안되기도 하나, 때에 따라 튀지만 약해보여서 타겟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어쨌든 그 사람을 보고 상대하는 '얽히는' 상황에서 그런다.
앞서 말한 행위는 길에서든 직장에서든 공통적으로 '부정적인 사회 신호' 로 본다. 언어적일 수도 있고 비언어적일 수도 있다. 언어적이면 차라리 명확하나 비언어적인 것은 당시 상황에 폭행을 당하지 않는 이상, 확실히 분별하여 증거로 삼기도 불명확한 점이 있다.
다른 사람은 다 인사를 받는데 자기만 못받거나 또는 부정적인 사회 신호를 받고 불이익 당하고 차별받고 무시당하고 배제당하거나 한다면 그냥 외양이 그런 느낌을 풍기는 것이다. 외국에는 인종차별이 있고 한국에는 외모차별이 있다. 당하는 사람 잘못은 아닌데 어쨌건 많은 자들이 한국이란 환경에서 그렇게 행동한다. 인간은 상황에 따라 제각기 또는 비슷하게 반응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가족과 오손도손 행복하게 살고 싶었지만, 그런 기본적인 권리조차 박탈한 이유가 위에 서술한 이것 때문이다. 별거아니라 여것던 이것이 내 인생을 다 파괴하고 망가뜨렸다... 직업도 연애도 '인간관계' 라 하는 허망한 원숭이 짓거리들도... 그리고 그들의 부당한 짓거리들을 그냥 무시하기엔 내가 당장 피해를 입고, 우리의 행복 자체가 망가진 일도 많아서, 잠시 때우고 사는 식의 수습이라도, 그런 식으로라도 해결하며 사는 것이다.
어차피 인간은 늙고 죽고 생전의 삶은 잠깐인데, 여기에 이러한 인간들 오류 때문에 천년만년 고통받을 것처럼 집착하여 살 수는 없는 노릇이고, 해결 방법도 요원하다는 결론을 내렸으므로(아마 본능에 관련된 유전자를 과학기술로 뜯어고치기 전까지 해결이 불가할 것이다.) 이런 사회 약자에 대한 부당한 폭력을 원치않게 떠안고, 그나마 가지고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누리며(이런 쓰레기들때문에 외식을 포기할 정도였다.) 생전에 남은 인생 잘살고, 청산하면 된다. 적극적인 방법이 있다면 저항하지 못할 가해자에게 먼저 피해를 줘버릴 수도 있겠다. 그것들이 유일한 해결책이고 길이다.
그나마 (그 당사자 원숭이 새끼들은 모르지만) 내가 피해와 고통을 당하는 이유에 대해서, '우주의 설계' 와 '진화심리' 라는 그 최종 원인들은 찾았다. 그것으로 위안을 삼자. 다만 그 '법칙' 을 직접 공격할 수는 없으니까 그 법칙을 생각없이 실행하는 그 당사자들에게 타격과 피해를 줘야하고, 그것이 사실 인간이 역사적으로 할 수 있었던 최선이었다.
그리고 그 최고의 형벌은 그들이 생전에 살아있을 때,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고 최악까지 고통스럽게 살고 가도록 만들어줘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한 각종 방법. 벌레같은 사는 수밖에 없는 그들 수준에서, 별수없이 피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내가 그나마 해줄 최고의 것이다. 그나마 이런 것에서 우월하니까.
(지가 나보다 우월하여 나에게 피해를 주었다 착각하고 때론 방어기제로 자위질하여 우월감을 느끼려하지만, 사실 내가 그 벌레들보다 진정으로 우월했기에. 나는 이미 니들 머리위에서 놀고 있다.
니들 벌레수준의 눈깔에 보이는 외모보다 더 쎈게 있다는 것을 겪게 될 것이다. 외모는 개돼지와 벌레들의 눈을 속여 그들 무리 사이에서 자리를 선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그들의 삶에 깊게 침투하여 정신적, 물리적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준다.)
이런 말도 안되는 오류 투성이의 짓거리들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들 사는 벌레 새끼들을 무시함에서 그치고 싶지만 그걸로 현실 해결이 안되고, 우리 행복도 지키지 못하기에, 그냥 최선을 다하고 사는 것이고 이것이 '삶' 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어나는데 한국은 여기에 특유의 경쟁적이고 계산적인 면까지 더해져 첫만남에서 내심 계산적인 서열로 정하는 경향이 있고, 외모나 재력, 인맥 여하로 사람을 무시한다. 여성들은 배우자를, 동성들은 친구를 그런다.
그렇다고 잘나면 굴복만 하는게 아니다. 한국인은 "잘나면 시샘하고 못나면 무시한다."
이것이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팠던 종특이다.
이런 성향은 최신 우주 과학론에 의하면 우주 설계자에 의해 (컴퓨터 게임처럼) 프로그래밍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개인적인 사견으론 구조나 성질까지는 프로그래밍을 할 수 있어도 그 후에 시간의 경과에 따른 진화를 통해 지구라는 환경에 적응하면서 이러한 일들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 같다.
미래에서 21세기의 세상 모습을 시뮬레이션 해보기 위해서 만들었거나(인간이 시행착오를 하고 미래를 살듯이 그런 룰로) 또는 미래 세계를 살기 위해 현재까지 시뮬레이션 했을 수도 있고, 이런 생태계를 만들었을때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보려 했거나, 자기들이 살만한 세상을 테스트해보기 위해서 우주의 프로그래머는 자신들의 노트북에서 인간 세상을 시뮬레이션하여 돌려본 것 같다. (책 '멀티 유니버스' 를 보면 나와있다. : 그런데 이런 자기들의 이기심을 위해 못된 짓거리들을 하는걸 우주 시뮬레이션을 파괴함으로써 보복하고 싶은데 마땅한 방법이 없는 것이다.)
또는 내 사견으로는 자기들 문제의 해답을 얻기 위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인간의 우연에 따른 지혜와 발상을 포함하여. 마치 인간이 인공지능을 만들어서 그렇게 하듯이 말이다.
인간이 언젠가는 시간과 인과적 확률(인과는 확률에 의해 발생한다. 확률도 인과에 의해 존재하고.)에 의해 문명을 발전시키고 자기들이 살고 있는 우주와 설계자를 인식하리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들이 현재 우주를 연구하는 것도, 외계인에겐 결국 인구가 증가하고 시간이 경과하면 확률상 알게될 깨달음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 입장에선 허망하겠지만, 현재 지식을 인간 세계에서 사용하고 앎을 충족하니까 그런 수준에선 유용하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이런 부당한 세계를 만든 설계자를 못죽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를 없애봐야 또다른 우주가 존재하는 상황이 어이없을 뿐이다. 그리고 인간이 TV를 만들어 즐기듯 우주 밖에서 우주의 모습을 다양한 프로그램처럼 즐기고 있을 수도 있다. 인간들은 그들의 배려부족한 희생양이다.)
우주의 프로그래머는 과학적인 능력은 뛰어났던 것 같다. 그러나 한계적인 능력을 보인다. 설계상에도 오류가 있고, 시간이 흐르며 명령어의 모순적인 충돌과 버그가 발생하고 여전히 업데이트도 되지 않은 채, 거의 방치된 것이나 마찬가지로 시간이 가면서 우주가 펼쳐지고 현재와 같은 망할 인간사들도 일어나고 있다.
과거에 공룡을 실패하고(어쩌면 다른 뜻에, 일부러 멸종시켰는지도 모른다.) 진화상 '흔적기관' 이 남는 깔끔하지 못한 처리도 있다. 훗날 인간에게 깨닫게 하기 위함이였을까? 그리고 인간은 여전히 망막이 '청색광' 에 취약하다.
인간은 대다수가 여전히 무지에 의해 많은 실수를 저지른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취약점으로 다만 현재에 수습할 수 있을 뿐이다. 그조차도 지식의 부족과 현재 능력의 한계로 어쩌지 못하는 일이 많다. 그때 정신적 상태로 인해 정보를 접해도 모르거나 절제가 안되서 과음을 하여 기형아를 낳는 경우가 그렇다. 지식이 있고 최선을 다했는데도 여전히 해결못할 문제들을 남기고 그것이 현재로써 한계인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민주주의의 발전의 한계나 범죄율 관리, 기아와 난민 문제 같은 것이다. 근시가 발생하여 콘텍트 렌즈를 개발하였는데 여전히 불편하거나, 라식술을 개발하였는데 부작용이 있는 것 같은 상황이다.
우주의 프로그래머는 인문학적인 소양에서는 0점이다. 그 이하이다. 그렇게 비인간적이고 정신병적이고 싸이코패스적인 변태성을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인간 세계의 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실수를 저지른다. 그것을 되돌릴 수가 없는 구조이다. 시간때문에. 이미 벌어진 일을 앞으로 미래에 일어나지 않도록 현재에만 수습할 수 있다. 우주의 프로그래머는 재미로 그랬겠지만 인간 입장에선 고통이다. 그리고 그 벌어진 일이 다음에 수습가능한 것이면 그나마 다행이다. 아예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이 허다하다. 죽어버린다든가, 불치병에 걸린다든가 하는 일들이 그렇다.
우주 프로그래밍의 헛점(또는 의도된 것)으로 인해 정보를 모를때 생명의 위협까지 있거나(시골에서 모시농사를 지어서 모시전을 계속 부쳐먹었는데 부작용에 의해서 혈관이 막혀 사망한 것과 같이) 인신매매나 사기처럼 자기의 소중한 것들을 잃을 수도 있었다. 자기가 한 것도 아닌데 홍수같은 자연 재해와 실수로 인한 것들 까지도 자신이 떠안아야 하기도 한다.
이 세상의 많은 사건사고는 범죄(비도덕적인 행위) 때문이다. 사회 혼란에 많은 지분을 갖고 있다. 범죄는 인간의 본능에서 기인한다. 프로그래밍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절제하는 것에서도 운과 확률이 개입하도록 만들었다. 자기의 자유의지를 누구나 깨닫지 못하고 언제나 백퍼센트 능숙하게 사용하지도 못한다. 이것도 프로그래밍이다. 그 결과 현재 인간 세상이 이런 모습이다.
인간의 과거사는 살인과 전쟁의 역사였다. 인간사의 대부분이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고 그 역사동안 수없는 비인간적인 일들이 자행되었다. 대부분 그 당사자들도 그때 정신에 사로잡혀 자기가 왜 그러는지 잘 모르고 그냥 했던 일이다. 때론 자유의지로 더 (브레이크가 아닌) 악셀레이터를 밟고.
중세의 마녀사냥도 마찬가지이고 현대의 악플도 마찬가지이다. 중세의 마녀사냥은 사회적 갈등과 구성원들의 불안 원인을 '혐오하는 약자' 에게 투사시켜 그 자를 희생시킴으로써 해소하려고 하였다.
인간 병신들은 사실 다 뒤져야할 새끼들인데 자긴 안뒤져야 한다고 생존본능이 있다. 그래서 사회 문제의 불안에 대한 가상의 괴물을 만들어 이미지 나쁜 사회적 약자에게 투사하여 죽으라 지랄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이 죽으라." 고 하면 반발하고 지랄하는데 그들이 혐오하는 대상으로 범위를 지정해주면 찬성하는 일들이 많다.
이를테면 '전라도' '조선족' '한남충' '김치년' '좌파' '우파' '개독' '외노자' '난민' '똥꼬충' 이런 식으로 범위를 지정해주면 극렬한 분노를 표출하고, 아마 한국이 테러 가능했더라면 테러했을 것이다. 이것을 이용하여 서로 다른 집단들에게 '범위' 를 지정해주고 극렬한 분노를 하게 하고, 테러까지 가능하도록 해준다면 전 사회가 서로를 공격하며 결국은 공멸하게 된다.
문제는 테러나 살인까지 잘 안가니까 그게 문제이긴 하네.
인간의 부당한 본성이 하나로 요약된 사건이 있다. 중세의 '마녀사냥'.
중세에는 마녀사냥으로 사회적 불만을 약자에게 투사시켜 정신이 팔리게하여 해소시켰다.
현대의 나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아무 잘못도 안했는데 사회적으로 배척되고, 매장되었으며, 침몰당했다.
심지어 아무 관련도 없는데 그냥 거기 있었단 이유로 자기의 기분 저하와 불행이 다 내탓인양 뒤집어써져서
오랜기간 미움받았다. 목사딸에게...
'뭔가 이상하다.' 고 상황마다 나름의 가지각색의 이유를 붙여 희생양을 만들고
지네 사회적 불안감과 스트레스를 쏟아내었다.
나는 어릴때부터 혜택을 받지못하고 목숨만 연명하며 학대를 당했다. 그건 저주의 상황이였고, 어쨌건 그 희생의 결과물인 '나'
를, 정확히 말하자면 쓰레기같은 유전자와 함께 그런 성장 과정을 거쳐 구겨진 나의 얼굴을 보고 '기분 나쁘다.' . '재수없다.' 며,
또 그럼에도 착한 것을 느끼고 더 기분나빠하며 내게 더 가혹하게 굴었다.
그게 인간의 본성이다. 중세시대 공개사형을 즐기던...
나는 이런 사실은 몰랐지만, 직접 겪은 인간의 잔인함들에 마음을 닫고 골방에 숨어들었었다...
지금도 공개사형은 모습을 바꾸어 이루어지고 있다. 역시 당시처럼 짧은 자신들의 생각과 치사한 눈으로 누명을 씌우고 떼법으로 달려들어 처리하고 있다.
역시 시작은 '그냥 기분나빠..' 이고, 그것의 해소를 위해 한놈씩 침을 뱉고 그게 강을 이룬다. 자기 눈깔에 염산이 되어 돌아올 줄도 모르고...
인간들의 뇌는 현대에도 당시 중세와 다를게 없다. (근본 이유는 기본 우주 프로그래밍의 오류, 진화상의 오류이다.)
그냥 길거리나 학교, 생활상 조금 느낌이 다르거나 대가리가 크고, 뭔가 이상하고 이유야 경우마다 제각각이지만, 본질은 중세 시대의 뇌 그대로 현대에도 느껴지는데로 느끼는데에 있다. 그런데 그것이 참으로 부당하고, 왜곡되어 있다.
일단 자기 잘못도 아닌 유전적 형질에 대해 불쾌를 표시하며 '거슬리다.' 고 시비거는 것이다. 그냥 아예 생각이 없는 동물이나 벌레 수준의 반응들이다.
또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는 식으로 반응한다. 즉 과거는 괜찮았던 것이 지금은 이상한게 되어버린다.
예를 들어 2000 년대 한 가수가 있었는데 그때는 '와 미남이다.' 식의 취급을 받다가, 요즘은 그냥 대가리 큰 놈이 멋부리고 다니는 그런 식의 취급을 받는다. 대부분 잘 모르니까... 심지어 씹덕취급을 하기도 한다. 그땐 그게 잘난건데 지금은 아니니까. 미디어의 제시에 따라 미의 기준이 뒤틀린 것이다. 그리고 그건 꼭 대중들의 선호를 반영하지 않는다. (당장 일본만 보아도 그런 인간 '본능' 의 개념을 잘 찾아가는데 한국은 뭐랄까 겉돈다. 안땡기는데 대충 우겨파는, 불필요한 백화점 물건들 느낌이다.)
더구나 현대(특히 한국)가 사람을 깊이 알아주고 그런 시대가 아니라 지 살기 바쁘고 각자 도생의 시대이다 보니 그냥 스치는 느낌으로 대충 판단한다.
안그래도 요상한 일도 많이 일어나고, 도덕성도 붕괴되고, 기준도 '이게 맞다.' 는 식으로 반강요하며 오랫동안 인조인간같이 같은 패턴을 보여주는 미디어나 영화의 인물들로 획일화, 세뇌되어 젖어들고, 언제나 대중들은 남의 시선도 의식하고 아닌척하며 눈치도 많이 보면서, 어이없게도 기준은 다른 사람의 '시선' 과 체면이 되어버린다. 당시 무슨 수로 누가 뭘 유행시켰건 간에 어쨌건 퍼져서 다수가 하면 너도 나도 따라하고, 안따라하면 큰일나고 뒤쳐지는 줄 알고, 실제로 따돌림같이 불이익도 일어나면서 그런 과정을 거쳐 그것이 '기준' 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따라하지 않으면 외롭게 살 수 밖에 없다. 그게 한국이란 쓰레기통의 현실이다.
한국인은 롱패딩 유행과 맛집 줄서기, 히트작 영화처럼 '남이 한 것은 나도 한다.' 식의 그런 행동 패턴을 벗어난 적이 없기 때문에 사람의 몰골을 보고도 그렇게 순간적으로 반응해 버리는 것이다.
노인들도 '체면' 때문에 남의 시선을 고려하여 튀는 색깔의 옷은 입지 않으려 한다. 튀는 색의 옷을 입으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해버리기 때문이다. 한때는 현기차 안사고 쌍용차를 사면 별종취급을 받기도 했다. 현기차가 고장만땅이었음에도. 그런 (왜곡되었으나 사회적으로 선호하여 진짜 기준이라 착각하는) 자기눈에 어긋난건 4차원이니 삐꾸니 병맛이니 찌질하다느니 하며 비하하고. 튀긴 했으나 브랜드나 자기들에게 검증된게 아니면 내려까고 왕따시키고. 항상 그게 그들의 '기준' 이다.
혼란된 사회에서 나름의 정체감을 찾아 안정감을 얻으려는 부질없는 짓거리들.
현기차를 안사고 핀잔을 피하는 방법이 있다. 현기차가 아니라 외제차를 사면 부러움을 받는다. 물론 이때 상황에 따라 질투도 섞인다. 명품도 마찬가지이고.
아마 이것을 보면 '체면' 의 기원은 '서열싸움' 이 아닌가 생각한다. 근본은 '내가 낫냐, 니가 낫냐' 는 것이다. 시비도 이로부터 비롯되고. 한국인의 뒤틀리고 모자란 행동은 이런 것을 근간으로 많은 것이 설명된다. '비교' 와 차별.
그런 자들의 눈으로 보면 행동을 이해할 수 있다.
워낙 얼굴 작고 키크고 늘씬하고 그런게 남자고 여자고 많아지다가 보니(특히 중고생들 많은 동네는 더 그렇다. 그런 체형을 따라갈 수가 없다.) 그런걸 기준으로 형성이 되어 좀 벗어나면 오크 취급을 한다. 자기들 생활권에서 잘 못보는 스타일의 느낌이면 바로 외부인 취급이다. (특히 자기들끼리의 견고한 생활권이나 계급화되어 있는 고인 썩은 물같은 동네가 더 그럼.)
그딴 식으로 남을 보는 것 때문에(그렇다고 다들 뛰어난 것도 아니다. 그냥 남을 깐다. '최고' 의 기준에 빗대어, 또는 자기 기준에 비교해서) 진짜 '행복' 도 잊고, 남의 행복한 시간마저 '찌질하다.' 비하하며 파괴한다.
인스타그램에서 유행하는 곳을 찾아가야 그게 지네들한테는 '행복' 인 거고. 실제론 행복하지 않은 가짜 행복에 불과하다.
그냥 '잘나가는 기분' 이나 우월감, 사람들의 세뇌된 가짜 인정에 초점을 맞추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게임.
실제론 경쟁판인지라 개돼지들이 팔로우는 해도, 대다수는 시샘하고 지인이면 가짜로 인정하고 뒷담깐다.
결론은 죽도 밥도 아니고, 진짜 서열이 높고 권력이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사람같이 사는 진정한 행복감은 당연히 없어서 행복지수가 현저히 낮다. (OECD에서 최하위권 - 한국사람들이 불행한 이유는 그냥 간단하다. 남과 끊없이 비교해서 내가 우월해야 만족하는 삶을 살기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고도성장시기의 경쟁 분위기에서 이어지고, 서양의 개인주의와 달리 민족주의 관습에서 이어져서, 항시 남을 감시하고 차별했고, 분위기상 차별당하면 안되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아야 생존할 가능성이 높은 환경이라서, 사회적 분위기의 세뇌를 통해 자연스럽게 젖어들고 당연시되어,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진심으로 강해지고 내면화되어 무시를 유독 더 견디지 못하고, 그런 자들이 우월한 자리를 차지하고 적자생존했기에 다들 그래야 한다고 다른 자들을 눈치주며 분위기를 만들어서 그렇다. 또 눈치와 공공연한 홍보로 하나가 유행했다치면 다들 미리 약속이나하고 통일하여 합의하고 어기면 큰일나고 죽는다는 듯이, 실제로 인간관계에 실제적인 불이익이 있는 인종차별보다 더 유치한 민족성이기 때문에(사실 인간은 무언가를 차별하려는 성향을 가지는지도 모르고 한국은 그게 부와 외모가 된 것이다), 그 유행을 목숨걸고 따라하고, 외모지상주의 풍조와 성형강국도 마찬가지의 맥락이다. 대가리 처든건 없는데 남눈에 민감하고 인정은 받아야겠고, 그래서 저 지랄하고 그렇지 못하면 문신이라도해서 남 머리 위에 있어야하기에 그 지랄 염병질 하는 것이다. 무시해버리면 그만인데 그걸 또 못견뎌서 바득바득 기어오르고... 노답이다.)
이런 어리석은 행동을 깨닫고 벗어나려 자연스럽게 살면 또 그들의 눈으로 제제가 들어온다. 이건 사람새끼들이 아니다. 그래서 헬조센, 헬조센 하나 보다. 이건 뭐 딱히 극복할 방법도 없다. (바꿔보려했지만 안바껴서 - 아무래도 거대한 쓰나미를 개인의 힘으로 바꾸기엔 역부족이다. 그냥 재수가 없는거다 이땅이.) 지옥같지만 맞춰주는 수밖에.
그 병신 레밍들은 이렇게 사는게 그들 자신들도 괴롭다는걸 모른다. 알아도 주도하는 힘있는 자들은 후달리는게 아니라 질좋은 것을 추구하는 본능적 선호에 기반한 사회적 세뇌의 흐름을 바꾸기가 힘들다. 벗어나는 방법은 탈조선 밖에. 그러나 딱히 살기좋은 나라가 따로 있는건 아니다.
그리고 거기다 한술더떠 인간마다 자기 처지나 상황, 유전자, 겪어온 것 등의 조건 상태에 따라서 제각각 반응한다. 표정하나하나에 반응하기도 하고, 그런데 둔감하고 생김새, 이미지 위주로 보기도 한다. 누구는 찌질하게 봐서 지 화나 스트레스를 못참고 묻지마 화풀이를 하기도 하고, 누구는 쎄게봐서 서열싸움을 걸기도 한다. 똑같은 자를 보고 누구는 못났다하고, 누구는 사정도 모르면서 잘난 사람이 왜 그러냐한다. 자기기준이다. (사실 애매하게 생긴 경우가 제일 힘들다. 아무거나 줏어먹는 년들도 있다지만, 보통은 남자 피해자의 경우 개그맨처럼 빻은 와꾸에 잘생긴 듯하면서 착해보이는 약한 찐따 느낌같이 이런 경우 동성은 질투에 갈구고 시비걸고, 이성은 꺼려한다. 왜냐고 물어봐야 그냥 진화가 그렇게 이상하게 되어서이다.)
그토록 부당하게 똥씹은 얼굴을 하고 기침을 하고 꼬라보고 가래침을 뱉고 심지어 외양이 마음에 안든다고 이야기 한마디 안해보고 뒷담화를 퍼뜨리거나 왕따까지 시킨다. 마치 악플을 다는 상황과 비슷해진다. 그리고 그런 심리는 오래 간다. 인간은 '첫인상' 에 좌우되는 취약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선 아예 '내맘이야' 라는 식으로 문신하고 지멋대로 하고 쎄게가면 지네가 혹시 봉변이라도 당하고 해당할까 아예 신경안쓰는척하고 눈치살피고 뭐라 못한다. 학교다닐때와 심리는 비슷한데 마치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있고 말도 받아주고 통하고 뭐라하여 커버가능한 애들이나 그냥 명령해도 그만인 안친해져도 상관없는 만만한 애들에겐 이래저래 뭐라하고 질투도 하지만, 아예 막가고 지 성질대로 개념없이 맘대로 하는 애들에겐 눈도 못마주치고 지네가 오히려 뭐라 트집잡히고 맞을 것 같으니까 조심하는 그런 심리이다.
"닌 만만해서 시비걸면 안돼" 라고 하는 식이다. 그런데 쎈놈들이 그러는건 '어쩔 수 없는' 일이 되고 걱정거리가 된다. 그런 것들이 성인이 되어서 또 지네도 차별을 하고 자기가 맞네, 우리가 맞네, 유행이니 맛집이니 뭐니 좆도 모르고 개돼지처럼 휩쓸려가며 그 지랄들 하고 사는 것이다.
인간들은 그런 비굴한 심리가 있으므로 사실 쎈게 제일 선이다. 지금도 단지 사회 주류이고 쎄다는 이유로 옳지도 않은 것을 모두가 따르고 있지 않은가? (여호와도 늘상 힘의 논리대로 우겨댔고. 그 새끼의 실수는 멋있지가 않아서 참조권력이 없어 반발을 산다는 것이다.)
그런식으로 지금도 중세와 다를 것 없이 벌레같이 느끼고 차별한다.
물론 그냥 스치면서 대가리크기나 그런 실루엣 위주로 똥씹고 찌푸리는 벌레도 있고, 동공크기 변화까지 감으로 인식하듯이 그냥 '느낌' 으로 그러는 자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미세한 늙음과 손질안된 헤어스타일의 더부룩함도 느끼고 순간적으로, 직감적으로 똥씹은 표정을 하며 꺼리는 것이다. (과학적인 실험에 따르면 70% 의 인간들은 동공 크기변화를 그냥 감으로 느낄 수 있다. 물론 집중해서 볼때 조건의 이야기 이겠지만.)
인간들이 그렇게 반응하는 것은 말하자면 데이터적이다. 그냥 자기가 길거리를 다니고 미디어를 접하고 인간관계를 하면서 본능과 함께 반응하여 느끼는 경험들과 형성되는 왜곡된 생각들이 직감적이고 순간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해결법은 그들이 길거리를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고, 보지 못하고 겪지못하게 하면 된다. (사실 진짜 '인간관계' 를 했다면 길거리에서 그딴 식으로 판단하면 안되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을 할 수 있었던 존재라면 말이다.)
중세에도 현대처럼 분명 개중에는 휩쓸리지않고 안타까워하던 자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미친 상황에서 내가 취할 행동은 하나다. 요동치고 불안해하지 말고, 그냥 내 갈길 가면 된다. 오류가 없는 나는 맞고, 그들이 틀렸기 때문이다. 또 나도 그들처럼 왜곡되었어도, 어차피 다들 왜곡되었으니 서로 피해주지 말고 너 가던길 가라는 것이다. 그게 왜 힘든지 모르겠다. 한국 사람은 지나치게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또 자기가 판단자가 되려 한다. 그 자의 인생에 일말의 도움도 주지 못하면서.......
그러므로 그들의 반응에 일희일비하지말고, 그냥 "내가 옳다." 는 생각으로 가면 된다. 잘못본 것도 그들이고, 바뀌어야할 것은 그들이기에.
그들 수준의 다른 사람 같으면 고치지못할 약점이 있어 그런 대우를 받으면 (사실 하는 자들도 자기 기준에서 큰 '꺼림' 이기에) 인생이 끝난 것과 같이 절망감을 느낄 수도 있는 사안이지만, 나는 그러지 않기로 한다.
현대는 현대다. 현대는 제도와 정보 상태, 법과 사회적 환경이 다르다. 그럼으로 많이 개념들이 생기고, 그런 '미개한' 행위들을 브레이크를 걸어 막아주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런 환경 기반에서 싸워 그때와 다른 방식으로 더 잘살아갈 기회가 있다.
이런 뿌리깊은 인간의 부당한 심리에서 비롯되어있기에 앞으로 내가 취할 포지션에 대해선 논리적으론 이해가 끝났고, 뭐 현실에서 할 수 있는한 최선으로 바꾸다가 뭐 못바꿔도 그만이다. 어차피 청소할거잖아.
그들이 잘못했다면 '이쪽도 잘못한 것 없다.' 는 신호로 그 벌레가 내게 한대로 똑같이 해주고 갚아주고 때론 바로 잡아줘라. 그들이 당황할 정도로... 그것이 미친 사회를 살아나가는 한 정당한 인간의 최선이다.
현대까지의 인간 역사에서 못된 인간의 본성들은 날뛰었고, 좋은 인간의 본성은 묻혀졌으며, 가해자와 피해자가 발생하고, 때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기도 하면서 엉망진창으로 세상에선 갖가지 좋고 안좋은 일들이 발생되며 시간이 흘러왔다.
모성애와 진실된 사랑도 있지만, 조건적인 것에 기반을 둔 사랑이 확률상 더 많이 발생한다. (다만 대다수라서 그것이 정상으로 보이지만 원래 그것이 정상은 아니다. 설령 우주가 의도했어도 사람답게 살려면 그렇게해선 안되었다.)
정직하게 일해도 실패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잃고서 그 원인을 뒤늦게 깨달을 수도 있다.
차별과 따돌림이 있고, 부당한 폭력이 있다. 중세에는 마녀사냥도 있었고, 현대에는 잘못된 종교로 패가망신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을 뒤늦게 깨닫거나 또는 그러지 못하고 죽는다.
거의 운에 해당하는 영역인 누군가의 실수나 태생적 한계로 일이 안되기도 한다.
운이 좌우하기에 그렇고, 그것을 알아도 인간의 한계로 인해서 생전에 개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인간 역사가 반복되어왔고, 그 결과물이 현재 세상이다.
이것만 보면 우주는 변태이거나, 싸이코패스이거나 의지가 있어도 이것이 최선인 것이다. (어쩌면 이미 진행되어 버린, 무한복제하고 있는 다중 우주를 모두 인식도 못하고, 손을 못쓰고 개입을 못하거나 그럴 필요를 못느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인간이란 생물체는 우주의 설계자와 닮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인간이 느끼는대로 느끼고 행동하고 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인간만 그런가? 이러한 비도덕성은 다른 동물들에게서도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다른 동물들은 대부분이 자유의지도 없고, 그것을 인식조차 못하고 적재적시에 자유자재로 쓰지도 못한다. 그래서 오만 참극이 벌어진다. 사자가 산채로 사슴을 잡아먹는 것은 그냥 생활이고 일상이다. 깊이 들어가면 더 비참한 일들이 많다.
바다코끼리들은 번식에서 탈락한 수컷이 (50마리중 49마리. 싸우다 탈락한 수컷에게 암컷은 눈길도 주지 않는다고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들을 덮치고 강간한다고 한다. 그리고 새끼들은 6m 나 되는 수컷의 몸에 깔려서 죽는다고 한다. 암컷에게 무시당한 수컷바다코끼리들은 소아성애자가 되는 것이다.
아델리 펭귄은 일상적으로 이미 죽은 암컷의 시체에 생식기를 꽂아넣으며 성행위를 하기도 한다. 암컷이 출산후 수컷이 알을 품고 암컷은 떨어진 체력을 보충하려고 바다에 나갔다가 포식자들에게 당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이렇게 미망인이 된 수컷들은 동성간에 섹스를 하고 엄마를 잃어버린 새끼펭귄을 키우기도 한다. 강간도 한다. 한참 집을 지을때 돌을 뺏는 절도와 그것을 얻기위한 몸을 파는 매춘도 한다고 한다. 암컷펭귄이 유혹하듯 걸어가며 수컷의 얼굴을 비빈다.
프리실라 이라블라스 거미는 수컷이 실에 싼 파리 선물을 준비하지 않으면 교미확률이 50% 인데 준비하면 90% 라고 한다. 암컷이 실을 풀고 파리를 먹을 동안 수컷이 교미를 해서 성공을 한다고 한다. 먹지못할 걸 실로싸서 속이는 사기꾼 수컷도 있는데 암컷 거미가 실을 풀동안 교미를 후딱해치우고 튄다고 한다.
돌고래들은 지능이 높아 복어를 위협하거나 물었다 놓으면서 발생하는 복어독으로 저릿함을 즐기며 마약을 하고 그 방법을 공유하며 해수면에 자기의 모습을 비춰보며 황홀해하거나 물고기를 여럿이서 물었다놨다하며 감촉을 즐기면서 괴롭히는 갱뱅도 하고 한다고 한다. 지능이 높으면 본능을 더 악용하는 쪽으로 행동하는 것 같다. 그리고 동료의 장례를 지내주는 식으로 선과 악이 공존함.
보노보는 수컷, 암컷, 새끼 구분안하고 성행위를 한다. 좋은 일이 있어도 하고 나쁜 일이 있어도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서 하고 아무일이 없어도 스킨십을 위해서 한다. 소아성애와 동성애는 자연스러운 행위이다. 수컷해달은 새끼바다표범을 강간한다. 새끼바다표범이 죽을때까지 행위를 멈추지 않는 집착을 보인다. 게다가 새끼바다표범이 죽은 후에도 몇일동안 교미를 시도한다.
코끼리는 동료의 항문에 자기코를 집어넣어 똥을 먹는다. 소화에 잘될 박테리아를 섭취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들은 우주의 프로그래머가 기획하거나 미필적 고의로 방조한 일들이다. 이것만봐도 우주의 프로그래머는 능력은 있으나 상당히 비도덕적이고 변태적이라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다.
결국 인간도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원시에는 90%의 인류가 살해당했다. 그러다 급격한 문명화를 거쳐 살인자의 수가 지금처럼 낮아진 것이다.
그럼에도 현대 인간의 뇌는 258만년전의 두뇌가 그대로이다. 더구나 1만년의 역사로 시행착오로 인해 변할 기회가 적었던 불완전한 생물체이다.
그래서 현대 사회도 살인까지는 아니지만 다른 방식으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아마 법이 없거나 느슨하여 살인이나 범죄가 가능한 환경이라면 충분히 그런식으로 시냅스가 형성될 것이다. 세계 각국의 범죄율을 보면 이러한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인간은 폭력성에 있어선 보노보보다도 못하다. 인간 역사상 비교적 최근에 CCTV 와 스마트폰 같은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시민의식을 바꾸고 제도와 법을 통해 개선을 하려고 하고 있지만 여전히 범죄율의 감소엔 한계가 있고, 전쟁의 위험은 존재한다. 모두 인간의 본능적인 뇌 때문이다.
살인을 예로 들었지만 살인만 문제가 아니다. 남녀간의 관계가 자손번식이 아닌 잠깐 사귀다 갈아타는 식으로 즐기기 위한 관계로 이루어지고, 집단따돌림과 차별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도 그렇다.
인간 세상은 긍정적인 1% 와 부정적인 99% 로 가득차있다.
긍정적인 1% 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기술발전과 보급, 자선과 같은 것들이고
부정적인 99% 는 현재 사람들이 살면서 느끼는 그러한 것들이다.
차별, 왕따, 따돌림, 마녀사냥, 인종차별, 아동학대, 묻지마 살인 같은 것들.
이런 것들은 약자에게 개인적, 사회적 스트레스를 쏟아붓는 방식으로 행해진 인류의 고질병이다. 본능 설계의 오류(또는 의도)로 인해 약자에 대한 심리적 투사를 하게 된다. 마치 사자가 약한 사슴을 구별하여 쫒는 것과 비슷한 회로이다.
인간은 자기의 자존감(또는 권력감)을 유지하기 위해, 또는 자기의 이기적 안락을 지키기위해 상대를 깎아내리고 헐뜯고 상처주기도 하며, 상황에 따라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로 그러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의 문제는 방어기제로 시작했어도 시간이 지나면 뇌 회로가 변하게 되고 그게 자기의 '진심' 이 되어 버린다. 후천적 싸이코패스도 이런 과정을 거쳐서 변화되는 것 같다.
인간들은 그들 사이에 '정상적' 이라하는 친목질을 해도 문제가 발생한다. 외모나 매력, 이미지와 느낌에 대한 '그냥 좋다/싫다' 는 식의 호불호(진화심리에 따르면 자기에게 해되는 것을 보통 싫어한다고 한다. 경쟁자로 인식되는 것 포함), 내집단/외집단(자기들과 같은 과이냐, 성향이나 취향), 친구들 의견, 사회적 지위 등을 통해 삼삼오오 화기애애한 관계들이 맺어지고, 당사자들의 이익과 필요에 의해서 관계가 지속된다.
(심지어 '평소에 아무런 이득없이 안부인사를 하면 좋은 사람으로 기억된다.' 는 심리원리를 이용하길 권유하는 처세서도 보았다. 그들이 그렇게 비열하다.)
그러면서 공감도 그런 자들끼리의 공감이고 죽고 못사는 감정들이 일어나고 오고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 와중에도 차별과 냉대, 왕따가 발생하며, 그것들은 보통 묻혀지나 가끔 복수 등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사회적 거부의 신호(signal)로 인사 무시하기, 대답안하기, 거부하는 표정, 꼬라보기, 눈총, 찌푸리기, 침뱉기, 가래침뱉기(영역표시와 우월감 표시는 싸이코패스의 특징이다. 이런짓은 싸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가 많다.), 무리에 끼워주지 않기, 톡씹기 같은 것들이다.
내집단과 외집단을 가르는 신호이며, 지네끼린 호락호락하지만 소외된 외집단들에게는 세상살기 빡빡해지는 환경이 자칭 '주류' 인 그들에 의해 조성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들에겐 관대하면서 외집단에겐 개같이 까다로운 조건을 강요한다.
아예 그들의 그런 친목 관계에서 배제된 사람들에겐 이득은 커녕 그들 시선의 기준대로 맞추고 행동하길 강요받는다. 그냥 "거슬린다." 식의 이유로. 그렇다고 불쌍하다는 정도라도 공감을 해주는 것도 아니다. 자기집 키우는 애완견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괴롭히기도 하며, 거기에 반항하면 투명인간(은따)으로 전환된다. 그들에겐 "그냥 뒤져도 상관없는 사람" 이나 "뒤지면 좋을" 사람 정도로 여겨지는 셈이다. 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어차피 끼워주지도 않을 것을 아무런 득도 없이 피해만 받는 셈이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다른 양아치에게 당한 분풀이를 그런 느낌나지마 찐따, 만만한 자에게 투사하여 불쾌를 푼다. 또 아예 착한걸 만만한걸로 보고 갈구고 푼다. 그냥 '느낌' 이라 그때 어떻게 보여지는지는 자기가 잘 파악하고 대처해야 한다. 옷잘못입었다고 그들 눈깔에 거슬려 생각없이 불이익이 오기도 한다. 그들이 잘못했지만 내가 약자라 내가 잘해야 한다. 진짜 더럽고 아니꼬워서... 그래서 인간관계를 아예 포기할 정도였다. 너무 더럽고 치사해서...
물론 강자이거나 단점있어도 함부로 어떻게 하지 못할 상황이면 그러지 못하겠지만 보통은 그런 경우가 드물게 된다. 아예 내가 갖고 태어난게 하자라 내가 굳이 그러한 환경과 조직구조를 인위적으로 만들지 않는 이상 그런 '내가 왕인' 환경이 조성이 안되기 때문이다.
어차피 가만있고 정상적이어도 갈구는거 비호감으로 살면 어떠냐고 막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처음에 그렇게 보지않고 잘하면 좋게 생각하는 사람때문에 다수가 있을 때 그러진 말아야 한다.
이것도 사실 잘못은 우주의 프로그래밍에 의한 진화된 본능 때문이다. 인간들은 거기에 맞춰서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하며 살고 있을 뿐이다. 다만 나나 부단한 노력과 함께 운좋게 깨달아서 그것을 초월하여 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초월하여 살고 있지만 10년전이나 20년전이나 똑같은 것을 지금도 겪고 있다. (지네가 과거와 똑같은 원숭이짓하는지도 모르는 병신들이다.) 당장 어제도 기분나쁜 일이 2번 있었고. 세상을 바꿀 수 없으니 내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틀린 말이다. 세상이 잘못되었으니 모두가 힘을 합쳐서 바꾸어나가야 한다. 암세포를 죽이고 치료해야지 암때문에 사람이 죽을 순 없지 않은가.
황금률의 발생은 지성이 생긴 인간의 구조상 지구에 적응하면서 이러한 상태를 개선하려 필연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황금률이 없이는 인간이라면 어디나 개판이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갈등도 방치된 점이다. 그런데 그 결론은 파국을 맞았다. 지구상 대부분이 '자본주의' 란 잘못된 선택을 함으로써 차별, 불공평한 기회, 빈부격차, 생활고, 불행과 같은 많은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과거의 잘못을 깨닫고 발전된 형태의 사회주의를 채택함으로써 선천적인 능력과 후천적인 운의 불공평함, 그리고 노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모두가 행복하게 분배하고 기회와 권한을 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미 지나간 시절은 돌이킬 수 없다. 그러나 현재와 미래는 바꿀 수 있다. 우리는 사람이니까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과거를 거울 삼아 미래를 나아지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은 이미 운으로 자기가 가진 것을 내놓아야하니 국민적 반발이 있겠지만, 후세의 백지장 상태의 어린아이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숨쉬는 공기처럼 사회주의를 받아들일 것이다. 마치 현재 잘못된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저도 모르게 '진심' 으로 살고 있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