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의 운동만 보고도 지구의 공전을 알아낼 수 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가 살았던 시대까지 근 5천년간 그 어떤 누구도 그것을 알아내지 못했다. 누군가 알아냈어도 보통 그렇듯이 그냥 스쳐흘러가는 생각처럼 되었을 수도 있고, 그런걸 깨달았어도 유명해지지 않고 그냥 묻혔을 수도 있다. 당시에도 현대처럼 유명해져야 깨달음도 알려지는 부당한 원리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이다.
일단 생존과 직결이 되지 않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고, 당시 주류이고 지배자인 교황청이 천동설을 정설이라 주장하여 아무도 반기를 못들고 의심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며, 금성의 운동 궤적을 생각하고 데이터화 하려는 사람이 없었고, 그것을 보고도 추론하지 못했다. 바로 눈앞에서 사과가 떨어져도 이유를 몰랐던 대부분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자기가 보려는 것을 본다. 당연하다. 자기에게 의미가 없으면 쓸데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인간이 느끼는 것은 (그때 그 상황마다의 경우가 있지만) 자기에겐 제일 중요하다. 우주 자체가 자기가 없으면 자기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물이지만 내가 느끼는 것도 중요하다. 다른 동물이 어떻게 느끼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느끼건, 우주가 어떻게 느끼건 스스로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외면하고 돕지 않으면 아무도 자기를 도울 수 없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난 기도해서 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마음의 소리가 해결해준 적은 많았다. 그것이 내가 스스로 나를 돕고 개선해올 수 있었던 이유이다. (돈이란 것도 남들처럼 틀에 갇히고 시야가 제한되어 안벌고 인간의 약속일 뿐이고 그냥 저기서 여기로 이동시키면 된다는 식의 초월한 관점으로 행위하게하여 아무런 제약없이 현실적인 방비를 하고 대비하며 벌 수 있게 되었다.)
조사에 의하면 인간들의 90% 이상은 인지왜곡이 있다고 한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자기 멋대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은 온전히 대상을 보지 못하고 속기도 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그렇게 그들이 잘못생각하고 느낀 것에 대한 후폭풍과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러면서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
(모든 인간이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다 많은 인간이 그런다. 그런 것이 곧 사회문제이다.)
특히 '유사성의 오류' 로 자기가 겪은 '착한' 느낌대로 판단하므로 오판하여 앝보는 것이다. (실상은 다를 수 있는데) 그러니 다른 행동하면 "재수없다." 거나 '뭔가 이상하니까' 기침하지. 그들이 잘못한건데 내가 고민하고 앉아있다.
이것이 '아 저들이 잘못생각한거니까... 내가 맞고, 나는 나대로 그냥 살아야지...' 그러고 산다고 고쳐지고 그들이 다시봐주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다시보는 일도 있는데 첫인상에 좌우되고 끝까지 가져가는 일도 많다. 인간이란 상당히 불합리한 존재이다.
자존감이니 뭐니 하면서 남눈의식말고 자기 뜻대로 살으라는 조언이 많다. 그런데 그것의 문제는 나도 해봤지만, 그렇게 사는데 시비를 걸거나 불이익을 주거나 지들 멋대로 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그냥 '신경끄고 무시' 하는 식으로 간단히 해결이 안되었다. 그러기에 고민이 생긴 것이고 이런 부당한 현실(곧 타인)을 바꾸거나 내가 바뀌어야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도망가는 안도 있지만 그러고 싶진 않다. 너무 답답해서 내가 못견뎌...)
그런데 나는 그들의 눈과 말이 틀렸기에 그들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좀 손해가 있더라도(시간이란 귀중한 것을 잃었다. 그러나 어차피 그 시간에 그들의 룰로 혐오할바에얀 그냥 진격하기로 하였다.) 옳은 나를 인정하고 나대로 살며 세상을 바꾸려한다.
나는 그냥 행복하고 싶었다. 인간이 살날도 길지 않은데, 나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조용히 아무런 문제없이, 사회적 분란없이 평온한 인생을 살고 싶었다. 어차피 한정된 시간속에 행복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초점을 맞추어 그렇게 살았다. 더구나 그간 시간을 낭비한 경향이 있어 그러한 삶이 더 간절했다. 나는 햇빛쐬고 일상으로 행복했다. 난 바깥 공기만 맡아도 행복한 것이다. 사소한 것으로 행복하고 만족하고 돈은 많지 않지만 그렇게 일상을 채워나가고 싶었다.
그런데 세상이 그렇게 살도록 날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마치 잘난 사람을 가만 안내버려두고 따라서 올려주듯 못난 사람을 핍박하고 끌어내렸다.
사람을 평가 대상으로만 보고(우주도 인간을 그렇게 보고, 우주가 상황적 조건에 의해 '진심' 이 나도록 만들어졌으나 한국이 더 심하다. 가끔 조건에 따른 반응을 초월한 진심이 있기는 있으나 이들 얘기는 아니다.), 전혀 나라는 사람을 인간대 인간으로 배려하지 않고, 차별하고 냉대하고 불이익을 주고 괜히 시비걸고 욕하고 못살게 굴었다. (그래서 니들은 행복했니? 이기적으로 남은 피해주고 자기는 즐거워? 한사람씩 다들 그래서 나라가 이런거다.)
누굴 찔러야 살인범이 아니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그 사람의 행복할 시간을 망치는 것도 그 사람의 마음에 대한 살인이고 범죄이다. (내가 당했으니 고대로 백배 사회에 돌려준다. 그것들이 행복하면 안되는데 행복하고 있다...)
남 의식안하고 사는데 존나 남의식하고 갈구고 시비거는 벌레들이 있다. 특히 길거리에서. (남녀노소 안가림.) 지네가 존나 남의식하고 쓰레기같이 사는데 나는 안그러고 사니, 그런 지같은 병신상태를 내게도 강요하고, 배제될지 모르는 사회적 불안을 약자인 나로 타겟을 찝어 공격하는 것이다. 그리고 날 공격함으로써 자기는 안그런다고 착각하며 불안을 해소한다. 나를 좀 허술하다고 '싸움에 진 개' 취급을 하면서...
나말고 남의식 안하고 사는 사람도 많은데 시비가 왜 굳이 나였나. 사실 그게 눈길가고 만만해서 본능대로 해버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이 아니라 벌레였던 것이다.
"왜 시비거냐?" 잘사는 사람을... 온라인에선 솔직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 범죄자들은 자기들의 합리화로 그냥 "니가 만만하니까 그렇지." "띠꺼워서." "그냥 싫어." "그냥 기분나빠." "진짜 없어보인다." 그런 식으로 나에게 책임을 돌렸다.
그런 식으로 당하면 보통 자기에게서 원인을 찾는다. 겉보기엔 그냥 일반인이고, 사실 인두껍을 쓴 악마 혹은 쓰레기인데 그런 벌레 새끼들의 왜곡된 마음에서 나온 짓거리들을 찐따처럼 존중하는 것이다.
특히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라면 자기가 그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해서 자기를 고치려하기 때문이다. 내가 왜 그래서? 그런데 사실 까보면 그 결점이 작은데 그걸 보는 것들의 눈깔이 삐어서 침소봉대하여 지각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치 일상에서 다른 사람의 말투나 어조 하나하나를 일반인들은 크게 받아들이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그렇게 일반인들이 정보처리하는 스펙트럼이 좁다. 그래서 이전에 그런 일반인 기준에 맞춰서 처세하려고 힘든 적이 있다. 그런 와중에 그들이 무시하고, 똥씹은 표정을 한다거나 기침을 하고 침을 뱉는다는건 그들 기준에서 인격모멸 수준의 제일 큰 행위들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 용서할 수 없고. 자기가 당하면 천지개벽하듯이 분개하지만 남에게 할 때는 감정이입이 차단되는 듯 하다.
(사실 객관적으로 못생겼는데 잘생긴척하는 느낌이나 약한데 쎈 그런 띠꺼운 부조화의 느낌이 있을 수는 있다. 생긴 것과 인상이 뭔가 안어울릴 수도 있고, 잘생기려다 하자 심하게 그럴 수 있고. 아예 약하고 빻아보일 수 있고. 그리고 다른 일반인보다 그런게 강할 수 있고.
그런데 문제는 마치 물이 반이나 남았네, 반밖에 안남았어 같은 상황에 대한 해석과 같이, 그것을 보는 사람마다 그때 보이는 것을 보고, 진상 피하는 생존상 봐야하는 것을 보고, 이성을 찾거나 경쟁자를 제거하려는 본능 등의 이유로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다른건 무시하는 형태로 주관적으로 인지왜곡을 한다는 것에 있고, 바꾸고 싶지도 않고 바꿀 필요도 없고 바꿀 수도 없는 생김새를 가지고 내탓을 한다는 문제가 있다. 마치 기형아로 태어났는데 넌 왜 기형아냐고 하는 것이다. 그 사람도 고민이 심하고 노력하여 많이 나아졌을 수도 있는데 그런 사정도 모르면서 겉만보고 왜곡된 인지로 몹쓸 짓을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사실 잘못과 책임은 생각없이 겉만보고 욕하는 예의없는 사람에게 있는데.)
물론 그들 눈엔 내가 잘못했다 생각할 수 있다. "생긴게 잘못했어." "니가 있는게 잘못이야." 이딴 식으로. 논리보단 (부당한 진화에 의한 유전적 선호 + 사회 미디어나 다른 사람 선호의 영향도 받아)자기의 왜곡된 감정이 진짜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 잘못안한 연예인도 악플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 꼭 내가 잘못했다고 만은 생각되지 않는다. (악플은 도마에 오른, 자기 눈에 거슬리거나 질투나는 만만한 약자를 대상으로 트집을 잡아 평소 자기의 스트레스를 배설하는 방식의 잔인한 손가락 살인이다. 기사는 부추길뿐 사실 본질은 인간의 본성과 놓여있는 상황적인 처지이다.) 더구나 그렇게 따지면 자기들은 무기징역 아니겠는가. 이기적인 욕구나 자기 이상형을 지키기위해 남을 혐오하는 케이스도 마찬가지이다.
그냥 그들의 눈에 보여지는 것만으로, 드러나는 것만으로. 그들의 마음에 안든 '죄' 를 기어이 억지로 내게 뒤집어 씌웠던 것이다. 뭐든 진짜 속내를 덮는 명분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정말 하나도 없는데. 아무말도 안했는데. 오히려 어울리려했고 친절하게 잘해줬는데... 예수도 이렇게 죽었지. '볼품없이 태어나 설쳤다' 고. 그들의 눈에 '미움을 산 죄' 를 뒤집어 쓰고, 억울하게, 누명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남들처럼 인생을 가볍게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이 내게 지우고 시비걸고 공격한건 '심각한 일' 이였다. 그들은 침뱉고 꼬라보고 눈총주고 배척하고 흘끗보고 기침하고 그 "심각한 가해" 를 아무렇지 않게 하고있었다. 그게 그들의 '일상' 의 일부였다.
처음엔 그런 '인간 벌레' 들 때문에 그냥 인간관계 포기해버리고 내식대로 그냥 살려고 하였다. 그들의 유치한 본능이 아닌 나의 이성과 사상으로 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세와 태도에도 이런 것들은 심기가 거슬렸는지 "띠껍다." 는 식으로 치부했다. 분명히 그들이 틀렸지만 현실의 사회적, 물리적 약자이고 지극히 작은 개인이라서 이 억울함을 어떻게 해소할 힘이 없었다.
그냥 그런 벌레들을 만난게 "재수가 없었다." 고 치부하기엔 그런 자들의 수가 너무 많았고, 또 주변에 쉽게 전염시켜서 내게 큰 피해를 주었다. 그냥 넘길래야 넘길 수가 없는 상황을 여러번 겪었던 것이었고 결국 인생의 중요한 문제인 진학과 직업에도 지장이 생기고 남들 다하고 누리는 행복조차 박살을 내자 나는 변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 나는 나자신도 이런 부당한 인간관계를 거부하며 사회를 바꿀 생각을 했다. 문제는 사회였고 사람들의 마음이였던 것이다. 나를 부당한 룰의 세상에 맞추지 말고, 세상을 다같이 살기좋게 변화시켜라. '조커' 라는 영화를 보면 이러한 것이 잘 나와있다.
어릴때 학교에서부터 양아치들이 만만하고 거슬리고 공부잘한다고 시비를 걸어서 싸워야했고, 집에선 이유없이 트집을 잡아 아동학대를 당했다. 아마도 (얼굴도 잘 안보고 거의 남과 다름없던 상황이였으니) 아동학대의 원인과 사회에서 인상만 보고 냉대했던 심리가 동기적으로 같았던 것 같다. 사회에서 날 고깝게 보며 함부로 했던 이유가 아동학대의 이유도 되었던 것이다. 즉 "그냥 보기 싫다." 자기 안맞는 등의 이유로 "싫다." 는 식의 자기도 이유를 모르는 감정들.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했을 수도 있고.
거기다가 덧붙여 만만하고 저항할 힘없는 어린 놈이 자기가 벌어온 밥을 먹고 집에서 자고 있으니 열이 받은 것이다. 그리고 평소 직장생활 스트레스와 승진과 같은 사회적 불안감을 꼬투리잡아(그냥은 못패니까) 폭발시켜 내가 희생되고 완전히 망가질 정도로 박살을 내었던 것이다. 아비라는 역할을 망각한 아동학대 범죄자가 말이다.
그리고 사회에서 사람들이 그냥 "없어보인다." "비호감이다." "성격나빠보인다." 그런 말도 안되는 이유로 차별했고, 냉대했고, 따돌리기까지 하였다. 실제로 나의 본모습을 보여주지도 못했는데, 꺼내기도 전에 그렇게 차별하고 선을 긋고 그들의 모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선한척하는 교회에서도 당한 일이다.
차라리 말로 하면 쉽게 알아먹는데 쉽게 증명이 힘든 비언어적인 사회 신호, 즉 인사무시하기, 거부하는 표정, 꼬라보기, 눈총, 찌푸리기, 침뱉기, 가래침뱉기(영역표시와 우월감 표시는 싸이코패스의 특징이다. 이런짓은 싸이코패스가 많다.), 무리에 끼워주지 않기 같은 것들이 배척과 적대감의 사회적 신호들인데 이런 것들로 비열하게 해버리면 뭐라 꼬집어서 개념화하기도 힘들고 분명 피해는 있는데 입증은 못하는 상황이 되어, 자칫하면 '피해의식' 으로 매도당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실제로 왕따, 배척같은 행위적인 결과로 나타나고 피해는 존재하니까 그런 식으로 간접적 증명도 가능하다고 하겠다.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 묻지마 조차도 그렇다. 어떤 사람이 피해상황이 있으면 그에 대한 원인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도 존재한다. 가해자를 욕해야지 피해자를 탓하지 말길 바란다.
흔히 사람들은 잘난 놈, 못난 놈 가르고 속으로 무시한다. 남눈을 의식하고 남을 꼬라보고 흘끗보고 흘겨보며 기침하고 불쾌한 표정을 짓고 품평하기도 한다. 이것은 남녀가 없다. 겪어보니까 있는 놈이나 없는 놈이나 뭘로 무시하냐의 차이가 있을 뿐 무시하는건 똑같다. 없으면 없는대로 트집잡고 폭발시킨다. 남자도 여자를 평가하고 여자도 남자를 평가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그런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친목을 지향하고 비인간적인 방향으로 '노는' 인간들이 심하다. 그냥 일반인이 찡그린다면 이것들은 대놓고 기침을 콜록콜록 떠나가라하고 가래침도 뱉는다. '인간말종' 이란 말이 괜히 생긴게 아니다.)
그것은 일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라면, 둔감한게 아니라면 누구나 시선이나 말, 행동 또는 자기에게 주어지는 사회적인 대접과 대우, 지급되는 급여로 알고 느끼게 된다.
그래서 자신들의 부당한 대우에 대해 고치라고 주장하는 파업도 많고, 자신에게 저지른 부당한 갑질에 대한 폭로도 있고, 미투운동도 그 맥락이며, 심지어 당사자한테 그래야지 약자를 희생양으로 삼는 식으로 방법은 잘못되었지만 묻지마 살인이나 길거리 시비 폭행 사건까지 모두 이러한 뿌리깊은 이유 때문에 발생한다.
결국 사회적으로나 물리적으로 더 쎄고, 강하고 유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약한 사람을 함부로 하기 때문이다.
성폭력도 이래서 발생하고, 학교폭력도 마찬가지이며, 가정폭력과 아동학대도 그렇고 심지어 국가간의 전쟁도 그렇다.
이렇게 큰 파장을 발생시키고 개인의 행복감마저 깎아먹는 이유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소하다.' 생각할 수 있는 '무시, 멸시' 라는 감정들이라니 놀랍지 않은가?
사람들은 아주 극히 일부만 모든 자를 긍정적으로 보고, 대다수는 속으로 자기가 보기 불쾌하다고 보는 사회적 약자에게 불편한 심기를 가지며, 아주 일부는 그 사회적 약자에게 시선, 말, 행동을 통하여 피해를 입한다. 그리고 그 사회적 쓰나미는 가장 취약한 자들에게 바다속 폐플라스틱처럼 썩지앉고 가라앉아 묻지마 살인같은 범죄를 일으킨다.
그리고 대다수는 고때만 냄비처럼 끓다가 나몰라라 자기 일을 하고 살고 있다. 먹고 살만하고 그것이 개인이 바꾸기엔 힘든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도 누군가를 무시하고 멸시하며 자기 마음아래로 가라앉히고, 마음밖으로 내치며 사회에서 점점 밀려나고 사회의 추운데서 지옥을 겪으며 사랑을 나누는 것과 같이 남들이 하는 기본적인 것도 못하며 늙어죽는다.
반대로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타고난 형질을 바탕으로 0.1~3초 내에 내리는 자기 기준의 부당한 판단으로 (근시안으로 이리저리 휘둘리고 세뇌되면서 만들어지는 당장 필요한 쾌락 충족에 급급해하는 비도덕적이고 비이성적인 상태의 오류투성이의 뇌로 : 더 웃긴건 남자가 좋아하는 이미지, 여자가 선호하는 느낌 등은 후천적 처세의 별다른 이변이 없는한 유전적으로 이미 정해져 있음. 당사자는 사실 봉변당하는 건데 이런 차별과 소외에 떠밀려 범죄까지 저지르면서 이런 부당한 사회 때문에 그런 줄 모르고, 또 부당한 그들 다수가 모임으로 인한 쪽수에서 생성된 그들의 손과 권력에 의해 처벌되는 황당함까지 일어남...) 호감을 가지게 되는 사회적 태풍은, 그 반대편에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활용하여 (집집마다 놓여 반강제적으로 보는 막강한 영향력의 TV와 안 미치는 곳이 없는 인터넷 자본을 통해) 연예인, 정치인같은 사회적 리더를 만들고 떠밀어 앉혀 놓는다. 그래서 승리같은 막강한 힘을 가진 반사회적 괴물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권력과 힘, 돈이 가는 만큼 사회적 약자에겐 가혹한 칼바람이 든다. 당장 목숨줄이 달린 현실적인 돈문제에 비하면 마음의 상처는 차라리 애교다. 그리고 사람들은 눈앞만 보고 그들의 그런 처지를 보고 또 비웃고 조롱하고 욕하고 침뱉는다.
이러한 일들은 한 개인의 힘으로 거부하거나 맞서지 못하고, 국가라는 곳의 구성원들, 그들 자신들이 이득과 각종 불이익(사회적 불호 포함)이라는 당근과 채찍으로 그렇게 떠미는데 억지로 원치 않아도 정신차려보니 그자리에 있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의 룰대로 살기를 거부하면 노숙자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어릴때 취약하고 정신차려보면 이미 상당히 나이먹거나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서 손도 못쓰는 상황에 처해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그런 쪽에 무지하고 운이 없어 사람을 잘못만나 가정이 파탄나는 일도 부지기수이다. 모르고 당해서 피해자가 되고 그 잔인한 상황을 나몰라라 방치한다.
인간들은 왜 그럴까? 그건 사실 자본주의 때문이다. 자본주의를 채택한 모든 나라들이 겪는 문제이다. 자본주의란 개개인이 가지고 태어난 조건, 능력과 운을 전혀 배려치않고 무식하게, 마치 짐승들과 같이 "무한 경쟁하고 약육강식해라." 라고 인간들을 정글에 던져놓은 상태와 같다. 거기서 인간들이 생각할 것은 오로지 생존이다. 그것을 위해 인성교육도 필요성이 적어지고 사람답게 살 것은 뒤로 내팽개쳐둘 수 밖에 없다.
정작 인생의 행복은 '사람답게 사는 것' 에서 나오는데, 자본주의를 함으로써, 더구나 한국이란 환경의 특수한 점들과 맞물려서(한국은 악플대선플의 비율이 9:1이다. 악플 9개에 선플 1개가 달린다. 일본은 4:1이고 네덜란드는 1:9이다. 한국인이 더 남을 의식하고 남과 비교하며 더 삶에 불만족하고 비판적인 성향을 보인다고 한다.) 더 사람을 계급화 시키고, 줄세우고, 평가하고 차별하며, 자신들의 왜곡되고 획일된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난도질 하고 있다.
어떻게 미디어에 나오는 획일화된 사람들, 길거리에서 보았던 경험을 기준으로 삼아 비교하고 한 사람의 외양을 정육점 고기처럼 평가하고 판단하여 호불호를 가질 수 있는가. (그리고 자기는 좀 된다 생각한다. 때론 아닌 것들도 그따구로 행동한다. 상대보단 낫다고 착각하고, 자기는 그럴 권한이 있다고 착각한다. 권한이 없어도 그런다. 마치 악플쓸때 처럼. 또 자기가 더 우월하다 자위하기 위해. 뇌가 없는, 내로남불의 벌레들이다.) 인간들은 저마다 사람들의 마음속엔 사람을 사람으로 안보는 괴물이 하나씩 들어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에 들어맞는 자들이 자기와 친해질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선이 되어버린다. 외모가 잘나서, 매력이 있어서, 가진게 많아서, 남자라서, 여자라서, 잘놀아서 등 인간만큼이나 이유가 많으나 그 방향은 한곳을 보고 있다. 그런데 맞춰서 또 끼면 뭐하겠는가. 애써 맞추어봤자 애초에 그딴 식으로 금그어놓고 사람 차별하는 쓰레기들의 부정적인 방향이 또 다른 것을 긁어부스럼하여 차별하겠지. 애초에 시선의 방향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뭐든 획일화 되는 것이 한국의 특성이다. 얼마나 차별과 왕따가 심하면 남의 시선에 맞추어 자기를 진심으로 변화시켜서 생각하고 행동하는가.
그래서 다들 그러니까, 그런 사회환경에 젖어들어 자기도 알게모르게 그러고 있다. 역시 나도 어릴때부터 사회분위기에 젖어 반응하다가 어느새 내가 피해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문제성을 바로 잡게 되었다.
'어릴때부터' 라는 것이 무서운게 뇌가 자본주의와 서열화에 맞추어 자라난다는 것이다. 시냅스가 그렇게 형성되어 자본주의의 노예로 길러지게 된다. 불합리한 제도임에도 그것의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한채 자라난다.
그렇게 한국식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비교하는 쪽으로 눈이 돌아가면 모든게 불만이 생긴다. 만족이 없게 된다. 그래서 한국이 행복지수가 세계 꼴찌인 것이다. 정작 행복은 조건에 상관없이 개개인을 사람으로 인정하며, 자기도 사람으로 대접받고 온정을 나누며 '사람답게' 모두가 어우러지는데서 발생하는데 말이다.
그리고 '사람답게 사는 생활' 을 받쳐주는데 기본적으로 돈이 든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에서는 '돈' 을 벌기 위해서 상당히 불합리한 방식을 쓴다. 개개인이 타고난 외모가 다르고 재주가 다른데 거의 전적으로 '운' 에 좌우되는 요소를 가지고 한꺼번에 부를 몰아주기도 하고, 박탈하여 거지를 만들기도 한다. 이것은 자본주의라는 환경에서 발휘되는 사람들의 눈과 뇌가 만들어내는 일이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가 서울 아파트값일 것이다. 18 평의 아파트가 30 억이 넘어간다는 것은 분명히 기형적인 일이다. 합리적 이성으로 볼때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다.
반대로 집이 없이 세들어 열심히 일하고 힘들게 사는 사람도 부지기수이다.
부자가 되고 가난한 것은 절대 그 사람의 도덕성, 노력, 성실성과는 관계가 없다. 거의, 하나도 없다. 열심히 노력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 사람이 부자가 될 수 있는가? 아니다. 희박하다. 만약에 된다면 TV방송에 나올 정도로 전국 5천만 국민 중에서 손가락에 꼽는다.
그 사람이 가난한 것은 단지 운이 없기 때문이다. 현대의 기득권적인 제도가 원하는 재주를 가지고 태어나지 못했고, 적절한 환경을 만나지 못하여 그것이 실력으로 개발되고 발휘되지 못했다. 단적인 예로 좋은 직장을 통과할 관문이 되는 기본 조건인 서울대 입학생의 60% 의 주소지가 강남구 대치동이다. 서울대생은 좋은 교육 환경을 만들어주고 교육에 돈을 쓸 수 있는 부모를 만날 운에 좌우된다는 뜻이다.
"가난은 죄가 아니다. 당연히 죄가 아니니까 이런 불합리한 상황을 개선해야 한다."
사실 자본주의 상에서 성공은 절대적으로 운이다. 이를테면 강남땅 매입은 정보를 접하고 '인싸' 습성을 지니고 때맞춰 돈도 있던 사람들이 매입하여 땅값이 올라 대대로 부자가 되었다. 정경유착, 즉 정치와 유착한 사람들이 대기업으로 컸다.
특히 자본주의 상황에서 현대 사회에 기득권이 만들어놓은 불합리한 검증시스템을 통과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재주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도 있을텐데, 그런 경우의 사람은 노력해본들 성공하지 못하고 그들이 만든 부당한 사회의 '하층' 에서 힘들게 살다가 죽는다. 그리고 그건 당신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과거 그걸 몰랐을때 그들이 만들어놓은 엉터리의, 부당한 사회의 룰을 따라 죽도록 노력하고 사활을 걸었지만 잘안되었다.
그것은 한사람의 노력은 인정하지 않고 단지 지네들의 주관적인 입맛이나 분위기, 그냥 기분나쁘다는 말같지도 않은 이유 따위로 선을 넘는 유치한 품평을 하며 입소문을 내고 때론 갑질하고 진상도 떨었던 벌레같은 인간들 때문이었다. 한사람의 생존과 먹고사는 것이 연예인을 선호하듯 겨우 그런 불합리한 되도않는 것에 달려있다는 불합리함이 세상의 잘못된 점이다.
내가 지금 불행하고 가난한 것은 무엇때문인가?
그 정답은 여기서 나온다. 사람을 온전한 그 인격체가 아닌, 평가대상으로 만들어 외모, 성격, 매력, 학력, 인맥, 돈, 집안 등 조건에 따라 줄을 세워서 서열을 나누기 때문이다. 서열만으로도 기분나쁜데 그 서열에 따라서 실제 생존에 필요한 목숨 그 자체와 관련된 돈까지 윗서열은 많이, 아랫서열은 적게 식으로 치사하게 분배한다. 당연히 아래로 갈수록 하고 싶은 것을 못하고 나누고 싶은 것도 못나누며 생활이 힘들어진다.
그런데 그것이 피라미드 구조라서 상위 사람들의 3배의 숫자이다. 즉 이런 못된 법을 만든 자칭 상위 1명에게 비싼 술값도 주고 비싼 것도 먹게 하고 비싼 옷도 사주면서 행복하게 하기 위해 나머지 3명이 죽을 고생을 하고 먹을 것 못먹고 집도 없이 갑질에 시달리다가 평생을 비참하게 살며 늙어서 죽는 것이다.
"사실 내가 가난한 것은 세상이 잘못되어서이다. 민주주의 때문이고, 자본주의 때문이다."
자본주의처럼 운좋게 뭐가 뛰어난 자가 짐승마냥 적자생존을 통해서 다 쓸어가고 한푼도 안뱉어내는 구조가 아니라, 사회주의처럼 "사람답게, 사람의 방식으로"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나누어야 개개인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행복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은 절대 다수가 본질이 악하므로 현재 한국인들의 쾌감의 원천이 부나 차별에서오는 권력감처럼 비인간적이고 부당해서 공리주의는 근절할 필요가 있다. 한국인들은 진정한 행복을 모르고 소수의 인간적인 삶을 차별하고 밟고 해치므로 소수의 방식을 따르게끔 세뇌하고 훈련시키고 조련할 필요가 있다.
알다시피 한국인들은 개돼지라 외국에서 히트쳤다하면 따라하고 흡수, 소비하고 그런 병신같은 습성이 있어 제대로 된걸 좀 제시하고 받아들이고 따라하며 젖어들고 뿌리내리고 뇌구조와 삶을 개선할 필요성이 있다.
잘못된걸 모르고 그랬다면 실수일 수 있지만 잘못된 걸 알고 깨달았는데도 계속 잘못된 짓을 하는 것은 죄이다. 예전엔 운이었지만 깨달은 지금은 의지이다.
깨달았으면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 인간의 오류성을 인정하고 모두가 공정한 법을 만들자. '자유경제' 라는 합리화는 그만하고 그것이 산채로 사슴을 잡아먹는 사자같은 짐승들이나 하는 비인간적이고 미개한 시대의 반인륜적인 짓거리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모든 물질을 공평히 나누자. 땅속에서 파낸 보석만 모두가 공평히 나누어도 모두가 생전 짧디짧은 인생 잘먹고 잘산다. 모두가 공평해질 수 있는 법을 만들자. 그것이 전 지구인이 살아낼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고 과제이다.
덴마크처럼 소득에 따라서 80% 까지 세금을 거두어 전액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복지예산으로 사용하는 법을 만들자. 즉 의사가 1억벌면 8천만원을 세금으로 내고 그 8천만원으로 가난한 사람 1000 명이 월 80만원 월급을 받는 것이다.
전 국민에게 이유불문 똑같이 월 500 만원의 월급을 지급하라.
이것을 위한 천만 서명 운동을 진행한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서명을 해주길 바란다.
링크.
날 무능력하다고 욕하는 니들의 기존 잘못된 시스템에 개돼지처럼 젖어들고 세뇌된 니들의 뇌와 눈깔이 잘못된거지, 내가 잘못된게 아니야. 니들이 완전히 틀린 것이라고. 고쳐서 새롭고 다같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자고. (일부만의 세상이 아니라.)
니들이 지금 잘났다고 잘난척하지 마라고. 니들이 잘난게 아니라 사회가 잘못되어 니들을 떠받들고 있는거라고.
모커뮤니티 게시글에서 인사안받으면 기분나쁘다고 그러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런데 서로 인사를 받으면 될텐데 인사를 안받다가 서로 기분만 나빠지는 것이다.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존중하면 될텐데 무시하고 무시당한 자는 (화풀이+배워서) 다른 자를 무시하고... 이렇게 연쇄작용이 난다. 그래서 어느새 전염병처럼 사회전체가 오염된다.
우리는 이것을 깨닫고 그러지 말자. 다같이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나부터가' 사회주의를 찬성하자. 사회주의는 생존이다. 내가 살기위해서 사회주의를 하는 것이다. 사회주의가 되면 내통장에 매달 5백만원이 들어온다. 너, 나, 우리 모두가 잘살기 위해서 사회주의 정책을 법제화하고 추진하자.
그러면 모든 이유가 자본주의, 민주주의라는 사회적 제도 하나 때문일까?
아니다. 인간의 '본능' 이라는 바다속에 잠겨진 거대한 빙산이 남아있다.
이 인간의 본능은 진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나, 그 이전에 진화를 일으키도록 우주적으로 프로그래밍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홀로그램 우주' 나 '다중 우주' 에 관한 내용을 찾아보면 잘 알 수 있다.
우주를 프로그래밍한 이유는 미래에서 21세기의 세상 모습을 시뮬레이션 해보기 위해서 만들었거나(인간이 시행착오를 하고 미래를 살듯이 그런 룰로) 또는 미래 세계를 살기 위해 현재까지 시뮬레이션 했을 수도 있고, 이런 생태계를 만들었을때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보려 했거나, 자기들이 살만한 세상을 테스트해보기 위해서 시뮬레이션을 했을 수 있다. (책 '멀티 유니버스' 를 보면 나와있다. : 그런데 이런 자기들의 이기심을 위해 못된 짓거리들을 하는걸 우주 시뮬레이션을 파괴함으로써 보복하고 싶은데 마땅한 방법이 없는 것이다.)
또는 내 사견으로는 자기들 문제의 해답을 얻기 위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인간의 우연에 따른 지혜와 발상을 포함하여. 마치 인간이 인공지능을 만들어서 그렇게 하듯이 말이다.
인간이 언젠가는 시간과 인과적 확률(인과는 확률에 의해 발생한다. 확률도 인과에 의해 존재하고.)에 의해 문명을 발전시키고 자기들이 살고 있는 우주와 설계자를 인식하리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런 부당한 세계를 만든 설계자를 못죽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를 없애봐야 또다른 우주가 존재하는 상황이 어이없을 뿐이다.
그리고 인간이 TV를 만들어 즐기듯 우주 밖에서 우주의 모습을 다양한 프로그램처럼 즐기고 있을 수도 있다. 인간들은 그들의 배려부족한 희생양이다.
실상 우주밖에 프로그래머가 있어서 마치 컴퓨터 게임(그래서 현실도 다분히 조작가능한 심리게임적인 속성도 있다.)속의 세상처럼 이 우주를 0과 1로 프로그래밍하였고(우주 역사도 노트북 한권으로 구현이 가능하다고 한다.), 우리는 그 안에서 그 사실을 모른채 3차원만을 보고 느끼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개미가 1차원을 보지만 인간이 볼땐 그 위로 다른 차원이 있듯이, 일상적인 공간에 12차원이나 되는 고차원이 작게 말려 있어서 그곳에서 제시된 (마치 '주역' 과 같은) 룰과 선택된 정보들에 의해 저차원들이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저차원이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을 쉽게 이해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입자들로 되어있어 서로 통과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이것은 저차원 거시계에서는 중첩상태가 빠르게 깨져서 '입자' 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고, 따라서 양자역학의 법칙보단 고전역학의 법칙에 더 지배받게 되기 때문이다. 비선형적인 카오스 원리도 따른다.)
인간과 동물의 본능은 우주를 닮은 프랙탈이다. 우주의 생존본능, 번식본능 그대로 모든 생물과 인간이 그렇게 행동한다. 우주도 감각기관과 신경계를 가지고 정보처리하는 뇌기능과 자유의지를 가지고, 마치 인공지능처럼 스스로 팽창하고 성장하려하고(그러면서 무질서도는 증가한다), 무한 팽창후 어떤 임계점을 건드리는 일종의 스위치에 의해서 다른 우주를 계속 생성시킴으로써 무한번식을 한다. (그렇게 태어난 것 중 하나가 우리 우주이다.) 그러한 방식으로 생명체가 발생할 가능성을 높였다는 것이다.
인류원리의 입장에선 '겨우 인간이란 생명체 하나를 탄생시키려고 왜 그렇게 비효율적인 방식을 채택하였는가?' 라고 하지만, 사실 이것이 그나마 (기형률을 최소화한 안정적인 인간의 DNA 전달방식처럼) 가장 심플하고 오류가 잘 안생기는 안정적인 방식이고 이를 통해 우주 자체의 안정화라든가, 다양한 시뮬레이션의 구현이라든가, 인간외의 경치라든가, 다양한 생명체, 인간의 다양한 경우의 삶 같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우주의 생존욕구로 인해서 생물의 진화도 일어나게 된다. 11차원 이상에서 우주 자체가 생존욕구를 가지고 기획도 하고 저차원에서 현상이 일어나고, 현실로 나타나게 하는데 관여하여 어떤 원리대로 저차원 모습을 물질로써 나타나게 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사자도 생기고 사슴도 생기고 독버섯도 생기고 약초도 생기고 인간의 DNA 구성도 생겼다.
저차원에선 '진화' 라는 과정으로 나타나는데 고차원의 언어는 어떤지 모른다. 그리고 고차원에선 마치 2D우주 대본처럼 기본 구조만 제시하는지도 모른다. 나머지 불확정성한 성질이 있는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적응과 진화는 저차원 수준에서 해결이 되는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아마존같이 생존경쟁이 치열한 곳에서 생존하기 위해 생물들의 몸집이 커지거나 갈라파고스같은 상황이나 비소만 나타나는 환경에서 변이를 하여 비소를 먹고 살게된 물고기가 나타나고, 원숭이가 생각하고 '억울함' 을 느껴서 인간으로 도약한 식으로 말이다. 이런 정보들 역시 컴퓨터 '클라우드' 저장소처럼 고차원과 정보는 공유된다. 다양성을 보고 싶은 우주 고차원의 욕구로 인해 유성생식이 널리 퍼지고 인간이 생기게 된 것도 이러한 과정을 거쳤다.
*당연히 공룡과 같이 잠깐 살다가 멸종된 케이스도 있다. 그리고 자연계에는 설계의 오류가 종종 발견된다. 있었다가 사라진 '흔적 기관' 이 그 예이다. 설계시 횡설수설 한거다. 개중에는 심해어처럼 환경에 적응하다가 그렇게 된 사례도 있다.
인간은 거기에 대한 치유능력은 진화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짧은 파장의 청색광에 망막이 손상을 입는다.
우주가 제시한 법칙에 의해 근시가 발생하였지만 인간은 거의 필연적으로 안경과 렌즈를 개발하였고 그럼에도 여전히 불편한 문제가 남아있다. 즉 우주는 거기까지 개입하고 인간은 그 정도로 주어진 상황을 다루고 바꿀 불확정성한 자유로운 실력행사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우주의 원리와 저차원의 관계에 대한 상태이다. 우주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개선하지 않고 딱 거기까지만이다. 기형아의 발생도 분명히 우주의 오류이지만(인간도 무지의 상태에서 과음이나 노산같이 자기가 원인에 대해 인지불가하거나 조절 불가한 운적인 상황이 기형아로 이어질 줄 예상못했을 것이다.) 버그 수정이나 업데이트는 안되고 방치되어 결국 인간 책임으로 떠안아지며 인간의 과제로 남게 된다.
우주가 의식이 있어 죄가 있다면 이러한 것을 미필적 고의로 방치하고 인간에게 떠넘긴 죄이다. 그 기형아는 자라면서 자기 죄인양 욕을 먹고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이것이 우주의 책임회피이자 의도된 못된 장난이다.
아마 인간을 만들기 위해 무한히 번식하는 다중 우주를 만들었다면 인간의 상태에 대해 모르지는 않았을텐데(더구나 컴퓨터 프로그램이고 모니터로 보는데) 우주의 설계자 혹은 관리자는 현재 방관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인간도 그 우주 고차원에서의 선택에 저차원에서의 자유의지 행사와 행위를 통해서 영향을 준다. 심지어 양자끼리의 거리가 가깝고 저차원 시공간의 제약이 없는 고차원을 다이렉트로 통하여 텔레파시, 투시, 타인의 과거읽기도 가능할 수 있다. 어쩌면 굿이나 기도와 같이 정신능력을 끌어내고 발휘하는 방식을 통해서 저차원의 일들이 인과적으로 바뀌도록 고차원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저차원과 고차원은 하나로 돌아가므로 우리가 저차원에서 하는 모든 행위가 그대로 고차원에서도 그쪽의 언어로 정보처리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고차원에서도 현재의 저차원의 모습들로 나타나도록 구현한다. 그리고 그 처리되는 모든 데이터에 대한 (또는 사람처럼 의미있는 기억에 대한. 조작이 가능할 수도 있다.) '아카샤의 기록' 이라는 저장소가 존재할지도 모르고 이것을 읽는 것이 가능한지도 모른다.
동물이 저차원의 이유뿐만 아니라 고차원의 정보처리로도 생명활동을 한다는 사실은 뇌수종으로 뇌가 없는데 IQ가 126이 넘고 수학과를 다닌 실제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비슷한 사례로 뇌를 대부분 절제했는데 일상생활이 무리없이 가능한 사례들이 있다. 조금 남아있는 뇌신경이나 장기가 기능을 대신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보다는 우주의 오류로 뇌가 없어도 기존에는 일부만 처리하던 것이 전적으로 더 고차원의 양자수준에서 (양자컴퓨터처럼) 정보를 처리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우주는 시뮬레이션으로 최적화를 반복하긴 하나, 연산정보가 누적되면 실제 방정식으로 계산된 값이 메모리 할당량을 벗어나게 되는데 근사치로 계산하여 10이 나와야하는 것이 9.9999... 로 나올 수 있고, 플랑크 길이보다 짧은 이동에 대한 연산에는 플랑크 길이에 맞춰 반올림을 해야하는 미세한 오차가 생기는데 바로 위와 같은 경우인 것이다.)
다시말해서 저차원 물질계의 뇌란 기관에서 전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아닌, (생활과 관련된 것도 포함된) 일부 정보는 고차원의 양자수준에서도 처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저도 모르게 고차원의 백업 드라이브에 접속한 상태로 살면서 실시간 동기화되고 있다. 그러므로 뇌기능이 정지한 상황에서, 마치 노트북 밧데리가 다가도 AC전원으로 연명하듯이 우주의 오류가 발생한 어떤 조건들의 경우에는 고차원의 (그 사람에 대한) 정보가 활동하고, 죽음 이후에도 존재하고 이동할 수 있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식물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예컨대 스타펠리아와 파리지옥 같은 식물을 보면 신경계도 없는데 그러한 방식으로 진화하였다. 단지 저차원의 좁은 시야에서만 인식하는 유전자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 생존이 되게하고 그런 기능으로 진화를 하도록하는 '동기' 가 되는 데이터들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고차원에 존재하는 것이다.
뇌가 죽어서 정보는 더 고차원의 시공간에서 처리하는 그러한 상황을 저차원 물질계에서 뇌간이 살아있어 생명활동을 하고 각성해있는 특수한 상황때문에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다. (식물인간의 상황에서는 각성해있지 않기때문에 이런 현상으로 나타나지않고 알수가 없다.) 저차원 물질계도 결국 파동이고 정보처리상태로 고차원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고차원의 원리대로 이것이 가능한 것이다. 저차원의 원리보다 상위차원인 고차원의 원리가 앞서기 때문이다. (이미 인간이 저차원에서 존재하고 만나고 애를 낳는 자체가 고차원에서의 그쪽 논리로 이해되는 어떤 이유들로 인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도 앞의 논리를 뒷받침해주는 사례이다.
그런데 그 고차원부터 저차원까지 처리되는 정보처리(저차원의 모든 것도 사실은 우주에서 정보로 처리되고 있다.)의 '룰' 이란 것이 상당히 비인간적이고 비겁하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으로 대표되는 것 같이 현재 동물계에서 행하는 모든 부조리하고 비인간적인 본능들이 그 룰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틀안에 갇힌채 그저 주어진대로 살며, 상황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한다. 자기의 유전자는 간직한 채. (사실 아동학대, 성폭력의 상당수는 인간의 폭력 본능과 상황의 합작으로 일으키는 것이다.)
그 프로그래밍이 어디서 기원되었으며 어떻게 가지는지 모르는 일이 많다. 보통 스스로의 리소스로 자각하지도 못하거나, 모니터링도 못한다.
사실은 그 프로그래밍의 기원은 못된 우주 때문이다. 인간의 본능 구조가 어떤가 유추해보기 위해서 다른 동물들이 프로그래밍 되고 구현된 사례들을 살펴 보자.
바다코끼리들은 번식에서 탈락한 수컷이 (50마리중 49마리. 싸우다 탈락한 수컷에게 암컷은 눈길도 주지 않는다고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들을 덮치고 강간한다고 한다. 그리고 새끼들은 6m 나 되는 수컷의 몸에 깔려서 죽는다고 한다. 암컷에게 무시당한 수컷바다코끼리들은 소아성애자가 되는 것이다.
아델리 펭귄은 일상적으로 이미 죽은 암컷의 시체에 생식기를 꽂아넣으며 성행위를 하기도 한다. 암컷이 출산후 수컷이 알을 품고 암컷은 떨어진 체력을 보충하려고 바다에 나갔다가 포식자들에게 당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이렇게 미망인이 된 수컷들은 동성간에 섹스를 하고 엄마를 잃어버린 새끼펭귄을 키우기도 한다. 강간도 한다. 한참 집을 지을때 돌을 뺏는 절도와 그것을 얻기위한 몸을 파는 매춘도 한다고 한다. 암컷펭귄이 유혹하듯 걸어가며 수컷의 얼굴을 비빈다.
프리실라 이라블라스 거미는 수컷이 실에 싼 파리 선물을 준비하지 않으면 교미확률이 50% 인데 준비하면 90% 라고 한다. 암컷이 실을 풀고 파리를 먹을 동안 수컷이 교미를 해서 성공을 한다고 한다. 먹지못할 걸 실로싸서 속이는 사기꾼 수컷도 있는데 암컷 거미가 실을 풀동안 교미를 후딱해치우고 튄다고 한다.
돌고래들은 지능이 높아 복어를 위협하거나 물었다 놓으면서 발생하는 복어독으로 저릿함을 즐기며 마약을 하고 그 방법을 공유하며 해수면에 자기의 모습을 비춰보며 황홀해하거나 물고기를 여럿이서 물었다놨다하며 감촉을 즐기면서 괴롭히는 갱뱅도 하고 한다고 한다. 지능이 높으면 본능을 더 악용하는 쪽으로 행동하는 것 같다. 그리고 동료의 장례를 지내주는 식으로 선과 악이 공존함.
보노보는 수컷, 암컷, 새끼 구분안하고 성행위를 한다. 좋은 일이 있어도 하고 나쁜 일이 있어도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서 하고 아무일이 없어도 스킨십을 위해서 한다. 소아성애와 동성애는 자연스러운 행위이다. 수컷해달은 새끼바다표범을 강간한다. 새끼바다표범이 죽을때까지 행위를 멈추지 않는 집착을 보인다. 게다가 새끼바다표범이 죽은 후에도 몇일동안 교미를 시도한다.
코끼리는 동료의 항문에 자기코를 집어넣어 똥을 먹는다. 소화에 잘될 박테리아를 섭취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들은 우주의 프로그래머가 기획하거나 미필적 고의로 방조한 일들이다. 이것만봐도 우주의 프로그래머는 능력은 있으나 상당히 비도덕적이고 변태적이라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다.
이러한 일의 연장선으로 살인과 전쟁의 역사인 인류사가 있다. 결국 인간도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원시에는 90%의 인류가 살해당했다. 그러다 급격한 문명화를 거쳐 살인자의 수가 지금처럼 낮아진 것이다. 그럼에도 현대 인간의 뇌는 258만년전의 두뇌가 그대로이다. 더구나 1만년의 역사로 시행착오로 인해 변할 기회가 적었던 불완전한 생물체이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그동안 인간은 전쟁만 일삼았다. 유전자가 변할래야 사기적이고 폭력적인 성향으로 메틸화나 돌연변이를 통해 변할 수 밖에 없었고, 그런 유전자들이 적자생존하여 씨를 남겼던 것이다. 인간은 폭력적인 면에서는 보노보보다 못하다.
인간은 그러한 상태로 여전히 현대를 살아가고 있다. 최선아닌 최선의 노력을 하면서... 제도를 만들고, 개선을 하려하며.
황금률의 발생은 지성이 생긴 인간의 구조상 지구에 적응하면서 이러한 상태를 개선하려 필연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황금률이 없이는 인간이라면 어디나 개판이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갈등도 우주가 방치한 점이다. 그런데 그 결론은 파국을 맞았다. 지구상 대부분이 '자본주의' 란 잘못된 선택을 함으로써 차별, 불공평한 기회, 빈부격차, 생활고, 불행과 같은 많은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과거의 잘못을 깨닫고 발전된 형태의 사회주의를 채택함으로써 선천적인 능력과 후천적인 운의 불공평함, 그리고 노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모두가 행복하게 분배하고 기회와 권한을 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미 지나간 시절은 돌이킬 수 없다. 그러나 현재와 미래는 바꿀 수 있다. 우리는 사람이니까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과거를 거울 삼아 미래를 나아지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은 이미 운으로 자기가 가진 것을 내놓아야하니 국민적 반발이 있겠지만, 후세의 백지장 상태의 어린아이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숨쉬는 공기처럼 사회주의를 받아들일 것이다. 마치 현재 잘못된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저도 모르게 '진심' 으로 살고 있듯이 말이다.
그리고 우주 프로그래밍의 헛점(또는 의도된 것)으로 인해 정보를 모를때 생명의 위협까지 있거나(모시 부작용에 의한 사망과 같이) 인신매매나 사기처럼 자기의 소중한 것들을 잃을 수도 있었다. 시간은 당연히 되돌릴 수 없고, 예방과 수습만이 가능하고, 자기가 한 것도 아닌데 홍수같은 자연 재해와 실수로 인한 것들 까지도 자신이 떠안아야 하는 것이다.
그 와중에 못된 인간의 본성들은 날뛰었고, 좋은 인간의 본성은 묻혀졌으며, 가해자와 피해자가 발생하고, 때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기도 하면서 엉망진창으로 세상에선 갖가지 좋고 안좋은 일들이 발생되며 시간이 흘러왔다.
모성애와 진실된 사랑도 있지만, 조건적인 것에 기반을 둔 사랑이 확률상 더 많이 발생한다. (다만 대다수라서 그것이 정상으로 보이지만 원래 그것이 정상은 아니다. 설령 우주가 의도했어도 사람답게 살려면 그렇게해선 안되었다.) 정직하게 일해도 실패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잃고서 그 원인을 뒤늦게 깨달을 수도 있다. 차별과 따돌림이 있고, 부당한 폭력이 있다. 중세에는 마녀사냥도 있었고, 현대에는 잘못된 종교로 패가망신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을 뒤늦게 깨닫거나 또는 그러지 못하고 죽는다. 거의 운에 해당하는 영역인 누군가의 실수나 태생적 한계로 일이 안되기도 한다. 운이 좌우하기에 그렇고, 그것을 알아도 인간의 한계로 인해서 생전에 개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인간 역사가 반복되어왔고, 그 결과물이 현재 세상이다. (우주 프로그래머는 과학자이지만 인문학자는 못되는듯하다.)
이러한 연유로 인간 세상은 긍정적인 1% 와 부정적인 99% 로 가득차있다.
긍정적인 1% 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기술발전과 보급, 자선과 같은 것들이고
부정적인 99% 는 현재 사람들이 살면서 느끼는 그러한 것들이다.
차별, 왕따, 따돌림, 마녀사냥, 인종차별, 아동학대, 묻지마 살인 같은 것들.
이런 것들은 약자에게 개인적, 사회적 스트레스를 쏟아붓는 방식으로 행해진 인류의 고질병이다. 본능 설계의 오류(또는 의도)로 인해 약자에 대한 심리적 투사를 하게 된다. 마치 사자가 약한 사슴을 구별하여 쫒는 것과 비슷한 회로이다.
인간은 자기의 자존감(또는 권력감)을 유지하기 위해, 또는 자기의 이기적 안락을 지키기위해 상대를 깎아내리고 헐뜯고 상처주기도 하며, 상황에 따라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로 그러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의 문제는 방어기제로 시작했어도 시간이 지나면 뇌 회로가 변하게 되고 그게 자기의 '진심' 이 되어 버린다. 후천적 싸이코패스도 이런 과정을 거쳐서 변화되는 것 같다.
인간들은 그들 사이에 '정상적' 이라하는 친목질을 해도 문제가 발생한다. 외모나 매력, 이미지와 느낌에 대한 '그냥 좋다/싫다' 는 식의 호불호(진화심리에 따르면 자기에게 해되는 것을 보통 싫어한다고 한다. 경쟁자로 인식되는 것 포함), 내집단/외집단(자기들과 같은 과이냐, 성향이나 취향), 친구들 의견, 사회적 지위 등을 통해 삼삼오오 화기애애한 관계들이 맺어지고, 당사자들의 이익과 필요에 의해서 관계가 지속된다.
(심지어 '평소에 아무런 이득없이 안부인사를 하면 좋은 사람으로 기억된다.' 는 심리원리를 이용하길 권유하는 처세서도 보았다. 그들이 그렇게 비열하다.)
그러면서 공감도 그런 자들끼리의 공감이고 죽고 못사는 감정들이 일어나고 오고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 와중에도 차별과 냉대, 왕따가 발생하며, 그것들은 보통 묻혀지나 가끔 복수 등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사회적 거부의 신호(signal)로 인사 무시하기, 대답안하기, 거부하는 표정, 꼬라보기, 눈총, 찌푸리기, 침뱉기, 가래침뱉기(영역표시와 우월감 표시는 싸이코패스의 특징이다. 이런짓은 싸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가 많다.), 무리에 끼워주지 않기, 톡씹기 같은 것들이다.
내집단과 외집단을 가르는 신호이며, 지네끼린 호락호락하지만 소외된 외집단들에게는 세상살기 빡빡해지는 환경이 자칭 '주류' 인 그들에 의해 조성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들에겐 관대하면서 외집단에겐 개같이 까다로운 조건을 강요한다.
아예 그들의 그런 친목 관계에서 배제된 사람들에겐 이득은 커녕 그들 시선의 기준대로 맞추고 행동하길 강요받는다. 그냥 "거슬린다." 식의 이유로. 그렇다고 불쌍하다는 정도라도 공감을 해주는 것도 아니다. 자기집 키우는 애완견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괴롭히기도 하며, 거기에 반항하면 투명인간(은따)으로 전환된다. 그들에겐 "그냥 뒤져도 상관없는 사람" 이나 "뒤지면 좋을" 사람 정도로 여겨지는 셈이다. 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어차피 끼워주지도 않을 것을 아무런 득도 없이 피해만 받는 셈이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다른 양아치에게 당한 분풀이를 그런 느낌나지마 찐따, 만만한 자에게 투사하여 불쾌를 푼다. 또 아예 착한걸 만만한걸로 보고 갈구고 푼다. 그냥 '느낌' 이라 그때 어떻게 보여지는지는 자기가 잘 파악하고 대처해야 한다. 옷잘못입었다고 그들 눈깔에 거슬려 생각없이 불이익이 오기도 한다. 그들이 잘못했지만 내가 약자라 내가 잘해야 한다. 진짜 더럽고 아니꼬워서... 그래서 인간관계를 아예 포기할 정도였다. 너무 더럽고 치사해서...
물론 강자이거나 단점있어도 함부로 어떻게 하지 못할 상황이면 그러지 못하겠지만 보통은 그런 경우가 드물게 된다. 아예 내가 갖고 태어난게 하자라 내가 굳이 그러한 환경과 조직구조를 인위적으로 만들지 않는 이상 그런 '내가 왕인' 환경이 조성이 안되기 때문이다.
어차피 가만있고 정상적이어도 갈구는거 비호감으로 살면 어떠냐고 막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처음에 그렇게 보지않고 잘하면 좋게 생각하는 사람때문에 다수가 있을 때 그러진 말아야 한다.
이것도 사실 잘못은 우주의 프로그래밍에 의한 진화된 본능 때문이다. 인간들은 거기에 맞춰서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하며 살고 있을 뿐이다. 다만 나나 부단한 노력과 함께 운좋게 깨달아서 그것을 초월하여 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초월하여 살고 있지만 10년전이나 20년전이나 똑같은 것을 지금도 겪고 있다. (지네가 과거와 똑같은 원숭이짓하는지도 모르는 병신들이다.) 당장 어제도 기분나쁜 일이 2번 있었고. 세상을 바꿀 수 없으니 내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틀린 말이다. 세상이 잘못되었으니 모두가 힘을 합쳐서 바꾸어나가야 한다. 암세포를 죽이고 치료해야지 암때문에 사람이 죽을 순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