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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간단하게 보는 전량(前凉)이란 국가에 대한 이야기.txt
게시물ID : history_1710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뭐이어드래?
추천 : 11
조회수 : 1191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4/07/16 00: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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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지도에 표시되어있는 영역이 모두 전량의 영역이라고 여기시면 상당히 난감.. 조그맣게 표기된 국명들을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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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량의 역대 군주 계보도입니다. 여기서 장궤는 이후 태조 무왕으로, 장식은 고조 명왕, 장무는 태종 성왕으로 각기 추존된게 계보도에는 안나와 있네요.
 
 
4세기 초 무렵, 서진(西晉)이 북방 이민족들의 침입으로 망해갈 무렵 서진의 신하였던 장궤는 현재의 감숙성 일대에 독자정권을 수립, 훗날 세워지는 전량이란 국가의 기틀을 마련합니다. 서서히 이민족들의 놀이터가 되어가던 중원을 벗어난 한족들의 대다수가 남방의 동진(東晉)으로 망명했지만 일부는 서쪽의 전량으로 도피하기도 했었는데요, 이유인즉 장궤부터가 한(漢)족이며 특히 그가 한인학자들을 받아들이며 한족문화를 고수하는 등 전조(前趙)나 후조(後趙)같은 이민족 국가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가운데 유일하게 멸망한 서진(西晉)의 제후국이자 계승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리자임을 천명하는 한족정권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때를 계기로 이 동네에 중원문화가 유입되었다고 보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명분상으로는 서진의 신하임을 자처하던 장궤였지만 정작 서진이 흉노의 전조(前趙)에게 털리는 것도 거의 외면하다시피 하며 이건 뭐 도와주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싶을 정도로 뜨뜻미지근한 지원과 반응을 보였던지라 어디까지나 허울 좋은 구실에 불과했습니다. 어렵사리 감숙성에 자리잡은 장궤였지만 정권 내부에서도 문제는 존재했습니다.
 
바로 감숙성 일대, 즉 하서(河西)지방의 토착호족들과의 마찰이 그것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장궤 역시 중원에서 이주해온 사람이었던데다 나중에는 하서지방의 군주로 군림하게 되었으니 기존의 토착호족들의 반발이 생겼던 것이죠. 한마디로 텃세부렸던 것인데 당시 하서지방의 대표 호족세력들을 열거하자면 진창 장씨, 돈황 조씨, 금성 국씨 등으로 장궤가 하서지방에 기틀을 마련할때부터 시작해서 추후에 장궤가 병이들자 그 틈을 타 망해가는 서진에 연신 장궤를 고발하며 전량정권의 정식 통치관직인 양주자사직에 장궤 대신 다른 이를 앉힐 것을 건의하는 등 틈만나면 여러가지 방식으로 장궤의 전량정권에 반기를 들던 자들이었습니다.
 
토착세력들의 반발이 심해지자 이에 장궤는 "니들이 이렇게 싫어하니 나 그럼 이 짓 그만두고 내 고향 땅 가서 살란다" 식의 뜻밖의 자폭드립을 치며 토착호족들을 당황시키게 하여 반발을 무마하는 등 나름의 자구책을 썼고 이후 거의 망하기 일보직전의 서진으로부터 정식으로 서평군공(西平郡公)에 봉해져 정식으로 하서에서의 통치를 승인받자 기다렸다는 듯 반발하는 호족세력들을 숙청해버리는 교활함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배경에서 토착세력들의 반발을 무마하고자 위에서 말씀드렸다시피 5호 16국 시대라는 중원에서의 혼란을 피해 이주해온 한인학자들을 대거 받아들임으로서 정권을 주도하는 지도층의 물갈이가 이루어졌던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전량의 기반 다지기에 전념하던 장궤도 죽고 그 뒤는 장남 장식이 뒤를 잇습니다만 이번엔 웃기게도 아버지 대에 유입되어 등용된 한인유민 세력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맙니다. 당시 유홍이란 사람이 이끌던 일종의 사이비 종교집단의 소행이었는데 전량의 조정에까지 깊이 침투해있던 이들은 유홍을 양왕(凉王), 즉 전량의 새로운 군주로 추대할 것을 결의하고 반란을 획책하여 군주 장식을 살해하는 사태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반란은 진압되었고 죽은 장식의 뒤를 이어 장궤의 차남이자 장식의 동생 장무가 즉위합니다만 이번엔 외부에서 위기가 닥쳐옵니다. 서기 323년, 당시 중원에서 잘나가던 흉노의 전조(前趙)가 계속되는 전량의 성장을 제지하고자 침공해왔던 것이지요. 강력한 전조의 침공을 막을 여력이 없던 장무는 전조에 복속의사를 표명하고 전조의 복속되는 형태로 제후국이 됩니다만 어디까지나 겉으로 일뿐 여전히 독자정권을 고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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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전조가 당시 성장한 갈족의 후조(後趙)에 의해 급격하게 밀려나며 중원을 상실하자 장무의 뒤를 이은 장준은 전조의 번국임을 나타내는 전조의 연호와 전조가 수여한 봉작을 버리고 다시 과거 서진(西晉)의 연호와 봉작을 사용하며 독립의사를 표명합니다. 결국은 전조가 망하고 그 뒤를 이어 후조가 중원의 패자로서 군림하며 전조처럼 전량에게 복속할 것을 요구합니다만 전량은 엿을 날리며 오히려 사천지방의 성한(成漢)이나 서진을 계승한 동진(東晉)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후조에 대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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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장준의 치세기에 전량은 이른바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그 영토도 실크로드라 할 수 있는 하서회랑 쪽으로 더 넓어졌으며 이때부터 가량왕(假涼王)이라는 왕호를 씀으로서 비로소 전량이 독립된 하나의 정권으로 수립되기도 합니다. 그동안 쭉 마치 전량이 과거 장궤의 대부터 하나의 독립된 정권인양 써와놓고 이제 와서 뭔소리냐고 반문하실까 싶어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사실 전량정권을 언제부터 독립된 정권으로 보느냐의 문제를 두고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누구는 실질적 건국자인 장궤부터를 전량의 건국으로 보기도 하고 누구는 가량왕을 자칭한 장무의 대를 전량정권의 수립으로 보는 등, 그 시점이 모호합니다.
 
양쪽 다 맞는 구석이 있긴 하지만 봉진정삭(奉晉正朔), 즉 언제부터를 진(晉) 왕조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립의 길을 걷게 된 때로 보는가의 관점에 있어서는 아무래도 장준의 대부터를 전량 건국의 시기로 보는 것이 맞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장준의 대에 서진을 계승한 동진이 별도의 관직을 장준에게 하사하여 서진시대처럼 전량이 여전히 진 왕조의 번국임을 강조하려 들긴 했지만 앞서 설명드렸다시피 장준은 동진이 준 관직을 쌩까고 가량왕을 자칭함으로서 전량이 독립국임을 천명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장궤, 장식, 장무 이 3대에 걸친 봉진(奉晉 : 진 왕조를 받드는 것)의식은 단순 전량정권 내부의 결속을 강화하고자 하는 수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을 뿐, 그걸 가지고 장준 이전의 전량 3대 군주 치세의 전량이 진 왕조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보기엔 어렵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어서 이걸 두고 어느게 맞다고 확정하기엔 어려울 듯 싶습니다.
 
 
아무튼 장준의 대를 이후로 전량은 서서히 쇠락기로 접어듭니다. 서기 346년, 장준이 죽고 그 뒤를 이어 아들 장중화가 즉위합니다. 장중화의 대에는 주로 외부의 침입으로 빚어진 쇠퇴로, 중원을 장악한 후조나 그 뒤를 이은 전진(前秦)과 같은 강대국들에게 두들겨 맞으며 전량의 영토는 나날이 줄어갔고 장중화가 죽자 이복형인 장조가 장중화의 아들인 장요령을 후계자로 세우라는 장중화의 유조를 조작하면서부터 전량 내부에서의 혼란을 예고하고 있었죠.
 
다만 장조가 유조는 조작했지만 그래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유조대로 불과 10살짜리 조카 장요령을 후계자로 내세우긴 했습니다만 그것도 잠시, 수양대군이 단종 내쫓듯이 장요령을 폐위, 장조가 즉위합니다만 이 장조란 인간은 전형적인 폭군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며 폭정을 일삼기 시작합니다. 특히 방계 왕족들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으로 인하여 뭇 왕족들의 반발을 사는 바람에 결국은 죽임을 당합니다.
 
장조를 죽인 방계왕족들은 장조의 뒤를 이어 장요령의 동생 장현정을 추대합니다만 이번엔 섭정직을 거머쥔 방계왕족들과 당시 전량의 대표 호족세력으로 급부상한 송(宋)씨들과의 권력다툼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4대 군주 장준의 아들, 장천석이 허수아비가 된 장현정을 죽이고 전량의 마지막 왕으로 즉위합니다.
 
마지막 왕의 치세답게 이 시기의 전량은 중원의 강자 전진(前秦)에게 연거푸 두들겨 맞으며 복속하여 번국이 되는 등 어떻게든 멸망은 피하고자 전진의 비위를 맞췄지만 서기 376년, 전진의 대규모 침공으로 인하여 전량의 수도 무위가 함락당하고 장천석을 비롯한 전량의 군민들이 항복함으로서 전량은 멸망합니다.
 
 
여담으로 이 장천석은 훗날 서기 383년, 중국의 3대 대전 중 하나인 비수대전에 전진군의 장군으로 참전하기도 합니다만 전진군이 박살이 나자 그대로 동진에 투항하여 안락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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