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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너타 이론 상세 요약
게시물ID : phil_1710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MiŜatasVin
추천 : 1
조회수 : 640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9/12/31 17:46:16
데이비드 베너타는 위 도형을 통해 "어째서 존재하는 것이 항상 해악인가?" 라는 도발적인 주장을 개시합니다.

위 그림에서는 

(1) 고통의 존재는 나쁘다.


(2) 쾌락의 존재는 좋다.


(3) 고통의 부재는 좋다. 설사 그 좋음이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향유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4) 쾌락의 부재는 나쁘지 않다. 그 부재가 박탈이 되는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라는 네 가지 핵심적인 논점을 담고 있습니다. (1)과 (2)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겠지요, 하지만 (3)과 (4)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저자는 수십 페이지를 할애하여 이를 설명하지만, 이를 줄여서 몇 가지 상식에 가까운 주장으로 보완하자면



첫째, '고통을 겪을 사람들을 존재하게 만드는 일을 피할 의무는 있지만, 행복한 사람들을 존재하게 만들 의무는 없다'라는 주장입니다. 괴로움을 겪을 사람들(suffering people)을 존재하게 만들지 않을 의무가 있는 이유는 이 고통의 존재는 그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나쁠 것이며, 그 부재는 설사 그 고통의 부재를 향유할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도 좋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행복한 사람들을 존재하게 할 의무는 없습니다. 그들의 쾌락은 그들 자신을 위해서야 좋겠지만, 쾌락의 부재는 그것을 박탈당하게 될 누군가가 아예 없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들에게 나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출산과 연관지어 보자면, '잠재적 사람들의 이익에 근거를 둔 불행한 사람들을 창조하는 것을 피해야 할 "강한" 도덕적 이유는있지만, 행복한 사람들을 창조해야 할 "강한" 도덕적 이유는 없다' 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아이를 잉태하기 위해 아이를 잉태할 떄의 이득을 이유로 드는 것은 이상하지만(다시 말해 아이를 위해서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상하다), 아이를 잉태하는 것을 피하는 근거로 잠재적 아이의 이익을 인용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아이를 만들지 않기로 한 이유로 아이를 가지지 않았을 때의 이익을 드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셋째, 우리는 누군가를 존재케 한 일에 대해, 진정으로 존재하게 된 그 사람들을 위해서 후회할 수 있지만, 누군가를 존재케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존재하지 않게 된 사람들을 위해 후회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애초에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태어나 절망스러운 삶을 살아 죽어간다면, 우린 그가 존재한 것 자체를 실제로 그 아이를 위해서 후회할 수 있지만, 우리가 출산을 하지 않았을 때 후회하는 것은 그 아이가 존재와 쾌락을 박탈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출산과 양육이라는 경험을 박탈당한 우리 자신에 대한 후회입니다. 



넷째, 우리는 누군가가 존재하고 고통받는다는 사실에는 슬픔을 느끼지만, 누군가가 존재할 기회조차 없었다면 그들이 향유할 수 없었던 쾌락에 대해 슬픔을 느끼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외국의 하층 노동자들의 절망적인 삶에 대해서는 올바르게도 슬퍼하지만, 이에 반해 화성에 존재하지 않는 외계인들을 위해 그들의 잠재적인 존재를 유감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만일 화성에 삶이 있고 그 화성인들이 고통을 겪는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이 점에 대해 그들을 위해 유감스러워할 것입니다.




삶은 비존재의 축복받은 고요를 방해하는, 이로울 것이 없는 사건으로 여길 수 있다. 


- 쇼펜하우어



연이은 장에서 그는 설명합니다. "삶의 질은 그 좋음에서 나쁨을 뺀 격차가 아니다." 라고. 먼저, 자기 삶의 질에 대한 자기평가를 신뢰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것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 모두가 긍정적인 방면으로 치우친 심리 현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우리는 낙천주의 성향(tendency towards optimism)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잘 알려진 심리 연구들은 피실험자들이 그들의 삶 전반에 일어난 사건을 기억해 보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부정적인 경험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긍정적인 경험을 열거하고, 그에 맞추어 자신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예상이나 기대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편향, 과장되는 경향을 가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둘째, 적응, 동화, 습관화라고 불리는 현상입니다. 우리의 객관적인 환경이 악화되면, 처음에는 상당한 주관적인 불만족이 생기지만, 그러나 이후에는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여 자신의 기대를 그에 따라 조정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셋째, 다른 사람의 복지와의 암묵적인 비교입니다. 자기 삶이 그 자체로 얼마나 잘되어 가는지를 측정하기 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얼마나 잘되어 가는지를 자기 평가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렇기에 자기 평가는 자기 삶의 실제 질(actual quality)보다는 비교를 통한 상대적인 질(comparative quality)에 대한 지표로써 기능을 발휘합니다.



물론, 낙천주의 성향을 제외하고 적응과 비교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우리는 긍정적 상황에도 적응하며, 자신과 더 나은 사람과 비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낙천 편향의 힘을 고려할 때, 양자는 모두 낙천주의적 기준선으로부터 작용합니다. 예를들어 사람들은 자기보다 나은 사람보다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하고 자신을 비교하기가 더 쉽습니다. 그리하여 최선의 경우 적응과 비교는 낙천 편향을 강화하고, 최악의 경우 적응과 비교는 낙천 편향을 완화하지만 완전히 상쇄하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실제로 좋음에 적응하고 우리보다 더 처지가 나은 사람과 비교할 때, 우리의 자기평가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보다 덜 긍정적으로 되지만, 부정적으로 될 정도로 만들지는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또한 이 세가지 경향은 진화적 관점에서 놀랍지 않습니다.(이는 낙천주의가 한도없이 진화적 우위점을 지지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나친 낙천주의는 진화적 우위를 해치며, 일정한 염세주의 역시 진화적 우위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자살을 방지하며, 번식에 도움이 됩니다. 역으로, 염세주의와 비관주의는 자연선택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철학자들은 괴로움을 겪는 종이 증식하도록 선동하기보다는 적은 수의 개인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에 차라리 훨씬 더 노력해야 한다. 


- 볼테르



그는 이어서 사람이 나게 됨으로써 겪을 일, 수많은 질병, 기아, 장애, 전쟁, 자연재해, 사고, 범죄를 열거하며, 이런 대부분의 괴로움을 겪지 않은 삶, 아주 운 좋은 삶(charmed life)가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특권층들조차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을 겪고, 강간당하고, 폭행당하거나, 잔인하게 살해당할 아이를 낳을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출산은 곧 자신뿐만 아니라 미래의 자손을 겨냥하고, 총알이 모두 장전된 총으로 러시안 룰렛 게임을 하는 것이라고요.



그 이후에도 그는 출산과 낙태, 인구과잉, 멸종, 자살에 대해 논증을 이어갑니다. 비록 제가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반출생주의에서 주장하는 "존재하게 되는 것의 해악" 부분이었기에 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저자는 죽음이 옳은 선택지라고 제시하지 않습니다. 죽음 역시 우리가 생존과 번식이 DNA에 새겨진 동물인 이상, 극한의 고통이니까요. 그러나, 더 이상 끊임없이, 본인이 동의하지도 않은 존재를 쾌락과 고통이 공존하지만, 서로 상쇄될 수도, 정당화할 수도 없는 세상에 내던지는 것이 옳은 일일까요?



태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태어날 수 밖에 없다면, 그다음으로 좋은 것은


우리가 나왔던 곳으로 재빨리 돌아가는 것이다.


젊은이가 그 모든 어리석음과 함께 세상을 떠날 때


누가 악 아래에서 비틀거리지 않는가? 누가 그 악에서 탈출하는가?


- <오이디푸스 왕>, 소포클레스

​https://m.blog.naver.com/vlfghks156/221651325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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