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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러시아 역사 이야기 2. 키예프 공국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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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리볼버오셀롯
추천 : 10/4
조회수 : 998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07/15 19:43:40
출처 : http://cafe.daum.net/shogun/9xm/8272

이전 글에서 이름만 언급된 올레그가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키예프 공국의 성립>

Oleg_of_Novgorod.jpg

- 빅토르 바스네초프가 그린 올레그 상상화 -

원초 연대기에 의하면 879년 류리크가 죽었다. 류리크에게는 아들 이고르가 있었지만 이고르는 매우 어린 아이(갓난 아기였다고 보는 경우가 대세)였다. 그래서 류리크의 친척인 올레그가 이고르를 대신해서 지배자가 되었다고 되어있다. 


 물론 이 기록도 현재는 진위여부가 의심되고 있다. 대체적으로 올레그와 류리크가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인지 명시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일단 원초연대기를 신뢰하는 주장의 경우 올레그가 류리크의 처남쪽일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원초연대기조차 어떤 판본에서는 올레그를 류리크의 아들, 심지어는 전혀 관계없는 남남으로 묘사하는 판본도 있다. 이고르 역시 과연 류리크의 아들인가가 의심되고 있는데 이유는 류리크의 실존 여부도 있거니와 어떤 판본에서는 이고르를 올레그의 아들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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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랑기안 길. 러시아 지역에 정착한 바이킹들은 이 무역로를 통해 부를 획득했다. -


하여튼 이제 홀름가르드(1)를 지배하게 된 올레그는 스웨덴에서 콘스탄티노플, 페르시아까지를 잇던 바랑기안 길을 장악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라도가 호수에서 페르시아로 갈려면 볼가강을 지나야 했고 그 곳에는 나름 강력한 국가들인 볼가 불가리아나 하자르가 떡 버티고 있었다. 두 국가 모두 볼가강에 수도를 두고 있었기에 이 지역을 공격한다는 것은 무리수였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로 향하는 방향은 달랐다. 원래 이 지역 역시 하자르족의 영역에 가까웠지만 페체네그 족의 난입과 바이킹의 등장 등으로 그 통제력이 많이 약해진 상황이었다. 사실상 드네프르강 일대는 그 지역에 거주하던 마자르족이 여전히 하자르 칸국에게 충성을 바쳐서 겨우 영향력을 유지하던 상황이었을 뿐이었고 사실상 페체네그, 슬라브, 바이킹, 마자르 등이 자기들끼리 알아서 다 해먹던 상황이었다. 올레그는 당연히 이 쉬운 길을 택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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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이 더 많은 곳으로 가자!" -


 원초 연대기에 따르면 이 때 올레그는 어린 이고르를 데리고 키예프를 향해 남하하기 시작했다. 그는 중간에 있던 키리비치인들을 제압하고 그들을 자신의 군대로 흡수하는 등 동슬라브계 부족들을 흡수하면서 남하했다. 그리고 키예프에 도착했다. 그 곳의 지배자는 과거 류리크의 부하였던 아스콜드와 디르였다.


 원초 연대기의 기록에 의하면 아스콜드와 디르는 콘스탄티노플을 습격했으며(2) 이후에는 비잔틴 제국과 우호적으로 지내고 선교사도 받아들이며 친기독교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사실상 독립군주처럼 행동하고 있던 셈이었다.


 키예프 근처의 언덕에 배를 댄 올레그 일행은 군대 일부를 배에 태워두고 나머지는 숨겨놓은 후 사절을 아스콜드와 디르에게 보냈다. 사절이 전한 내용은 자신들이 그리스로 갈 것인데 처음 가는 사람의 안내인이 되어줄 수 없냐며 상담을 좀 해보자는 내용이었다. 아스콜드와 디르는 별 생각 없이 승낙하고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아스콜드와 디르가 도착한 바로 그 순간 올레그는 숨겨놓은 병력들로 아스콜드와 디르를 에워싼 후 "너희는 군주의 자격이 없다. 여기 류리크의 어린 아들 이고르야 말로 진짜 군주다."라고 말하며 아스콜드와 디르를 죽이고 키예프를 차지했다고 원초 연대기는 전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의 고고학적 조사결과 880년 경 이전에는 바이킹 관련 유적이 키예프에서 출토되지 않고 있다. 그 이전에는 슬라브계 유물들이 주로 출토되고 있다는 것. 즉 이 일화 전체가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정황상 바이킹들이 군사력을 동원해 키예프를 장악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때 키예프를 지배하고 있던 것은 바이킹 계 군주가 아닌 슬라브인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사실 러시아 초기 역사가 부정확한 것의 투성이다.


 <약탈의 시대>


 하여튼 키예프를 장악한 이고르는 바랑기안 길로 알려진 동유럽의 무역로 상당부분을 움켜쥔 셈이 되었다. 그는 이 무역로를 장악하여 벌어들인 부를 바탕으로 인근의 동슬라브 부족들을 복속시켜나가기 시작했다. 본래 이들 부족들은 하자르의 종주권 하에 있었지만 이 무렵 우크라이나의 상당부분은 하자르의 통제가 약해진 상태였기에 하자르의 항의 없이 이 작업은 나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동시에 이들은 약탈 원정에도 힘을 쏟았다. 무역을 하다가도 이들은 언제든지 해적으로 돌변했다. 일단 슬라브족의 경우는 무역과 약탈이 공존한 상태였는데 키예프는 슬라브 부족들에게서 배를 제공받기도 했지만 가끔은 슬라브인들을 납치해 하자르나 아랍, 볼가 불가리아 인들에게 노예로 팔아넘기는 짓거리도 벌였다. 그리고 여차하면 콘스탄티노플이나 페르시아도 약탈 대상에 포함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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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르켈의 폐허 -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키예프는 하자르의 힘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자르 족은 이미 바이킹들의 난동을 우려해 830년대에 돈 강 하구에 사르켈 요새를 만들어 바이킹들을 통제하려고 했고, 이 요새 때문에 바이킹들은 하자르를 상대로 협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은 콘스탄티노플이나 페르시아를 약탈하러 갈 때 약탈품의 일부를 하자르의 카간에게 주기로 하고 통행을 허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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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광 온 김에 내가 왔다가 갔다는 인증 하나는 때려야지. 안 그래?" -

 이런 과정을 거쳐 올레그는 907년에 직접 콘스탄티노플을 습격하고, 910년 경에는 그의 함대가 페르시아 북부 아바스쿤 항을 다시 한 번 공격했다. 콘스탄티노플의 경우 당연히 함락에는 실패했지만 원초 연대기에 따르면 올레그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자신의 방패를 콘스탄티노플 성문에 못질하는 퍼포먼스까지 벌이기도 했다.(3) 기록에 따르면 비잔틴 제국이 쇠사슬로 보스포루스 해협을 막아버리자 올레그는 바퀴를 2천척에 달하는 배에 달아서 수레처럼 만들어버린 후 상륙해서 콘스탄티노플 성벽에 도달했다고 전해진다.(4)

 

 그 결과 올레그는 911년에 비잔틴 제국에 상당히 유리한 무역 조약을 강요할 수 있었다. 다만 이 때 비잔틴 제국에 소수의 전사들을 근위대로 제공해주기로 했고, 이것이 바랑기안 근위대로 발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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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한 천쪼가리 두른 친구들. 안녕? 저 쪽 애들은 우리만 오면 가진거 다 주던데 너희도 가진 거 다 줄래? -

 

 페르시아 약탈의 경우 상당히 자주 이루어졌는데 910년에 한 번 벌어졌고 912~913년에 걸쳐 대대적으로 이루어졌었다. 이 때 루스의 군대는 약탈품 일부를 하자르족에게 주기로 하고 볼가강을 통과, 페르시아 북부 타바리스탄과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휩쓸고 내륙의 도시들까지 즐겁게 약탈한 후 복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수디라고 하는 이슬람 역사가의 기록에 따르면 하자르 칸국 내부의 이슬람 교도들이 이 행각에 분노, 복수를 맹세하며 카간에게 이를 통보했다. 카간은 이들을 막을 수 없었고, 이슬람교도들과 루스인들은 볼가강 유역에서 격돌했다. 이 전투의 결과는 루스인들의 대패로 끝났다고 전해진다.


 어찌 됬든 바랑기안 길로 알려진 교역로를 장악하고 나름 그 힘을 키웠던 올레그는 912년 혹은 913년에 죽었다. 일설에 의하면 예언자가 "올레그 당신은 당신이 아끼는 종마에 의해 죽을 것이다." 라고 하자 올레그가 그 말을 어디 먼 곳에 보내놓았었다고 한다. 그러다 그 말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예언이 틀렸다면서 그 말의 뼈를 발로 툭툭 찼는데 하필 말의 뼈 속에 숨어있던 독사가 놀라서 튀어나와 그를 물어버리는 바람에 죽었다고 전해진다.


 <이고르의 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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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고르를 묘사한 연대기 삽화 -

 

올레그가 죽자 이고르가 대공(5)이 되었다. 아직까지 전설의 영역에 더 가까운 올레그에 비하면 이고르는 부친이 누구인가를 제외한다면 여러 기록에서 존재가 확인되기 때문에 이제부터 러시아사의 영역은 실증이 가능한 시대로 접어들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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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이 해적노무 새끼들아! 이 녀석 맛 좀 봐라! 아랍놈들도 이거는 이기지 못했느니라!" - 

 

이고르는 올레그처럼 무역과 공물 받아내기, 약탈에 열을 올렸다. 이고르는 941년 페체네그 족과 동맹을 맺고 비잔틴 제국을 습격했다.(6) 그는 5월에 비티니아 지방을 한 번 쓸어버린 후 함대를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진격시켰다. 하지만 비잔틴 제국은 비장의 무기 그리스의 불을 꺼내들었고 루스 함대는 불타버리고 말았다. 잔존 함대는 니코메디아와 트라키아로 도주하여 그 지방들을 약탈했지만 비잔틴 제국 군대는 이들도 괴멸시키는데 성공했다. 결국 945년 이고르는 비잔틴 제국이 소유하던 크림반도의 케르손을 절대 건드리지 않고, 그 근처에서도 어업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조약에 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911년의 조약보다 루스에게는 불리한 조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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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도 페르시아는 괴롭습니다 jpg -

 반면 카스피해 약탈 자체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943년. 키예프 루스의 함대는 아제르바이잔의 쿠라 강을 거슬러 올라가 그 곳을 통치하던 페르시아계 살라리드 왕조(7)의 군대를 괴멸시키고 1년 동안 근방에 체류하며 철저하게 근방을 약탈하였다가 생존자들이 병력을 규합하고, 전염병이 돌자 철수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키예프 공국은 이득을 챙길대로 챙긴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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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물을 직접 거두는 이고르 -

 그 외에도 이고르는 슬라브족들을 정복해나가며 그들에게서 공물을 긁어내는데 열중했다. 그러나 그 공물의 양이 과중해 그를 원망하는 부족들이 생겨났다. 그러다 비잔틴 제국과의 전쟁에서 키예프의 군대가 패배했다는 것을 안 드레블리예인들이 945년 반란을 일으켰다. 이고르는 그 반란을 진압하려고 했지만 지금의 코로스텐 지역에서 되려 그들에게 붙잡혀 나무에 매달린채 몸이 찢겨 죽고 말았다. 어린 3살 짜리 아들과 부인만 남겨둔채로.


참고로 이 무렵 루스에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943년의 약탈로 꼭지가 돌대로 돈 카스피해의 이슬람 교도들은 하자르족에게 저들을 통과시키면 안 된다며 강력하게 항의했다. 하자르족 치하의 이슬람교도들도 이에 호응했고, 하자르의 카간은 이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앞으로 루스인들의 배가 볼가강을 지나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해야했다. 통행세를 못 받는게 아쉽기는 했지만 워낙 압력이 거세어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분노한 키예프 루스는 하자르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하자르와 루스는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1) 홀름가르드는 노보고로드를 가리키던 북구식의 명칭이다.


(2) 물론 현재의 정설은 아스콜드와 디르의 존재 자체가 의심되고 있으며, 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습격한 주체는 아니라고 보는 편이다.


(3) 단 이 퍼포먼스는 러시아 기록에만 보이고 비잔틴 기록에는 보이지 않아 창작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4) 오스만 제국이 나중에 비슷한 짓거리를 하기는 했다. 다만 기록된 시기를 볼 때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공성을 본따서 이야기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될 것이다. 


(5) 사실 편의상 대공으로 치기는 하지만 당시 키예프의 군주는 정황상 대외적인 칭호는 여전히 카간으로 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슬람권의 기록에서는 이 무렵 루스인들의 군주 칭호를 카간으로 처리하고 있다.


(6) 하자르족의 카간이 후우마위야의 유대인 재상 요셉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이 공격은 하자르족이 비잔틴 제국의 유대인 탄압에대한 보복으로 사주한 것이라고 한다. 


(7) 사산조 페르시아에 정예 보병들을 공급해주던 이란 북부의 소수민족 다일람인들이 아제르바이잔 및 이란 북서부 지역을 거점으로 919년에 세운 국가. 10세기 중반에 루스와 함단 왕조의 침공으로 위기에 빠졌다가 겨우 극복했으며 셀주크 투르크에 의해 1062년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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