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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러시아 역사 이야기 1. 루스 카간국과 류리크
게시물ID : history_1709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리볼버오셀롯
추천 : 11
조회수 : 2806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4/07/15 18:55:59
출처 : http://cafe.daum.net/shogun/9xm/8252

<원초 연대기-류리크가 나라를 세우다>

LadogaOvals_Web.jpg

-라도가 호수에서 발견된 바이킹 여성의 장신구-

 스웨덴에서 건너온 바이킹들은 8세기 중엽부터 러시아 지역에 슬금슬금 기어들어오기 시작했다. 바랴그 인들이라고도 불리던 이들은 라도가 호수 지역에 거점을 마련하였고, 그 곳을 바탕으로 주변의 핀족, 발트인, 슬라브인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유적등을 볼 때 이미 라도가 호수 주변은 8세기 후반 경에 이미 스웨덴 출신 바이킹들에게 점거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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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부터 이 곳은 내가 지배한다!"-

이후 스웨덴 바이킹들, 즉 바랴그인들의 지배는 계속되었지만 원초 연대기에 따르면 860년대 발트족과 슬라브족, 핀족은 무장 봉기를 일으켰고, 스웨덴 인들을 쫓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뒤가 문제였다. 딱히 통일된 구심점이 없었던 토착민들은 곧 저희들끼리 싸워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안 되겠다 싶은 슬라브계 부족들 및 소수의 핀, 발트 계열 부족들은 합심하여 그들이 쫓아냈던 바랴그인들, 즉 바이킹들을 찾아가 바이킹 출신의 류리크를 지도자로 추대했으며 류리크는 자신의 형제 시네우스와 트루보르와 같이 라도가 호수 주변으로 가서 토착민들을 평정하고 862년에 러시아 최초의 군주가 되었다. 그는 홀름가르드, 즉 현재의 노보고로드를 건설하고, 자신의 부하 아스콜드와 디르(1)를 남쪽으로 보내주었고 그들이 키예프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원초연대기의 기록이다. 


 하지만 원초 연대기만을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원초 연대기와는 상충되는 유적, 기록들이 19~20세기 들어와서 속속 발굴되거나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아니. 애시당초 류리크라는 인물의 실존 여부도 현재 굉장히 의심받고 있다. 실제로 원초 연대기가 편찬된 건 1113년 경인데 그 이전 기록들은 류리크가 아닌 올레그에게서 류리코비치 가문의 기원을 찾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더군다나 원초 연대기 조차도 대부분의 판본에서는 올레그를 류리크의 친족으로 묘사하였는데 소수의 판본에서는 올레그를 단순한 군 사령관 정도로 묘사하기도 했다. 또 워낙 이 시기 기록들이 불분명 한 것 투성이라(9세기 경 기록물에서 그나마 믿을 만한건 이슬람권이나 비잔틴, 프랑크 제국의 기록들 정도다.) 원초 연대기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힘들다. 특히 루스 카간국이 이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루스 카간국>


 비잔틴 제국에서 편찬된 전기 '아마스트리스의 성 조지(2)의 삶'의 기록에 따르면 830년대 루스인들이라고 하는 자들이 마르마라 해를 공격했다가 동쪽으로 돌아 지금의 터키 북부인 파플라고니아 해안가를 습격했다고 전해진다. 루스인들의 존재에 대해 기록한 최초의 사료이다. 이후 비잔틴 제국과 프랑크 제국의 연대기에는 839년 각각 콘스탄티노플의 궁정과 프랑크 제국의 황제 루트비히의 궁정을 방문한 '루스인'들의 존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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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댁들이 비잔틴 제국이요? 난 루스인이라고 하오. 자. 이제 돈 될만한거 전부 다 내놓으시오!" -


이 기록들에 따르면 '루스인'들은 북방에서 콘스탄티노플로 배를 타고 왔으며, 그들이 콘스탄티노플로 왔던 길로 되돌아갈 경우, 그 길을 장악하고 있던 마자르인들의 습격을 두려워해 프랑크 제국을 거쳐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뜻을 비잔틴 제국의 황제에게 청원했다고 한다. 비잔틴 제국 측에서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그들을 프랑크 제국으로 보냈고 그들은 프랑크 제국의 황제 루트비히를 만났다. 황제는 이들을 면밀히 조사한 끝에 이 이교도들이 스웨덴인들이며 북쪽에서 온 게 맞다는 것을 확인했고, 그 뒤에 이들을 그들의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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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이들은 자신들의 군주 칭호를 '카간'이라고 묘사했다. 카간은 본래 유연에서 유래된 스텝 유목민 군주들의 칭호였다. 당시의 비잔틴 제국이나 프랑크 제국한테도 그다지 낯선 칭호는 아니었는데 이는 판노니아에서 아직 잔존해있던 아바르족이라던지 한창 기세를 올리던 하자르족 역시 이 칭호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스웨덴이 있는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는 이 칭호를 쓰지 않았다. 즉 이들은 스웨덴 인들이지만 스칸디나비아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나올 수 있는 결론은 830년대에 라도가 호수 지역에 스웨덴 인들이 지배계급인 국가가 건설되었으며 그들의 군주는 남쪽 하자르족의 영향을 받아 그 칭호를 '카간'이라고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외에도 루스 카간국에 대한 기록은 다른 곳에서도 보인다. 871년 바리에미리트(3)를 멸망시킨 후 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루트비히 2세에게 보낸 서신에도 루스 카간국이 언급되었다.


 그것말고도 이슬람측의 기록에도 루스인들의 군주 칭호가 카간이라고 기록되어있다. 다만 이 기록들의 경우 상당수가 870년대 이후의 기록들인 경우가 많아 주의가 필요하다. 뭐 애시당초 루스 카간국에 대한 기록 자체가 불분명한 것들 투성이다. 애시당초 그들 자신들의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의 유물 발굴 결과 루스 카간국은 860년대 후반에 대대적인 전란 상태에 휘말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원초 연대기에 루스 카간국의 존재가 언급되지 않는 점이나 그외 러시아 초기 역사의 수수께끼를 푸는데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


 <원피스 실사판>


 현재의 고고학 조사 결과에 따르면 863~871년 사이 라도가 호수 주변의 바이킹 유적들이 고의적으로 불에 탄 흔적들이 발견되었다고 전해진다. 거기에 더해 뜬금없이 카스피해 연안에 있는 페르시아의 아바스코스 항이 루스인들로 알려진 바이킹들에게 습격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더군다나 비잔틴 제국의 기록들도 무언가 수상쩍은 점들을 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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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돈 안주면 다 부숴버린다 쿵짜라쿵짝!" -

 일단 860년 경 비잔틴 제국이 압바스 왕조와 싸우기 위해 주력 병력들을 소아시아로 보낸 사이 루스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습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공격은 저지되었지만 위기 의식을 느낀 비잔틴 제국은 불가리아를 기독교로 개종시킴으로써 그 위협성을 반감시킨 전례에 따라 루스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선교 공세를 피기로 했다. 이에 따라 상당 수의 선교사들이 루스 카간국으로 보내졌다. 이후 867년 경 콘스탄티노플 주교가 루스인들에 대한 선교가 꽤 성공적이라고 했는데 정작 이후 러시아 내에서 기독교 선교에 대한 글은 거의 찾기 힘든 수준이고, 러시아 지역에서 기독교도들 수가 증가한 것도 아니었다. 이후 기록된 비잔틴의 기록물에서 루스인들은 여전히 이교도들이었다. 그리고 그 위험성 역시 여전했... 아니 더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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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킹의 영국 침공을 설명하는 지도 -

 

 더군다나 고개를 조금만 돌려 동 시기의 스칸디나비아와 브리튼 섬을 중심으로 한 서유럽을 보면 완전히 원피스 실사판, 인세 지옥이 되어있었다. 이전까지는 스칸디나비아나 유틀란드가 아닌 곳에 유럽 타지역에 자리잡은 바이킹 수는 비교적 소수였는데(4)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바이킹들이 대대적으로 군대를 이끌고 여기저기를 약탈하고 들쑤시기 시작했다. 서프랑크 왕과 계약하고 다른 바이킹을 몰아내기로 해놓고 누구 편에 붙을지 저울질 하면서 몸값 높이는 놈이 나타나는가 하면, 훗날의 기록들에 따르면 부친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하에 무골 이바르(5)와 그 형제들이 브리튼 섬을 침공, 노섬브리아 왕 엘라를 피의 독수리 형에 처하고, 동앵글리아 등 앵글로 색슨 7왕국을 무자비하게 공격하여 웨섹스를 제외한 다른 왕국들을 멸망시키고, 그 땅들을 지배하기도 했다. 아일랜드도 앳저녁에 아작이 났다. 브르타뉴의 헤스테인이라는 자는 간이 배밖으로 튀어나왔는지 후우마위야 왕조 수도를 공격하여 하렘을 털고, 팜플로나의 왕을 사로잡아 몸값 협상을 하고, 로마를 털어버리겠다고 공언하고 다니기도 했다.(6)


 이전부터 바이킹의 공세는 상당한 수준이었지만 갑자기 이런 인세지옥, 원피스 실사판이 찍힌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고 이게 러시아 사와 무슨 연관이 있는가? 


 먼저 첫번째 질문부터 답해야 될 것 같다. 사실 이게 2번 질문을 이해하기도 편하다. 일단 첫번째 질문에 대한 그동안의 답은 인구압이 심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오히려 스칸디나비아반도 및 유틀란드에서 인구압이 심해진 것은 11세기 경이었고, 당시에는 그다지 인구압이 심한 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것인가? 이는 당시 스칸디나비아반도 및 유틀란드 반도의 정치 상황과 연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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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랑기안 교역로. 보라색과 빨간색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그다드와 콘스탄티노플에서 시작한 교역로가 라도가 호수에서 합쳐져 스웨덴으로 향하고 있다. -


 7~8세기경 발트해 및 북해에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및 유틀란드 반도, 카톨릭 문명권, 발트족 거주지역 및 슬라브 거주 지역등을 잇는 포괄적 무역로가 건설되어있었다. 동시에 이 무역로는 확장되어 훗날 바랴그(혹은 바랑기안)-그리스 교역로란 이름의 거대한 교역로로도 이어지는데 이는 페르시아와 그리스에서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잇는 거대한 교역로였다.


 바이킹들은 이 교역로에서 큰 돈을 벌어들였다. 약탈이 수반된 경우도 많기는 했지만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바다코끼리 이빨, 호박석, 무기 등을 비잔틴제국의 포도주, 유리등과 바꾸고 이슬람의 은화도 같이 벌어오는 이 장사는 바이킹들에게 꽤나 수지맞는 장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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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돈 좀 벌어서 다시 왔다. 왕위를 내놔라!" -

 그러나 이 부의 축적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당시 덴마크는 막 통일되어 중앙집권적인 시그프레드 왕조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지만 노르웨이나 스웨덴은 여러 소왕국들이 난립하여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그프레드 왕조조차도 같은 가문원들 및 다른 가문의 왕위 도전에 시달리고 있었고, 실제로 많은 왕들은 암살당했다. 즉 애시당초 이 부를 통제할 수 있는 세력이 전무했다는 것이다. 그나마 권력이 강한 편이던 시그프레드 왕조도 이를 통제하는 데는 실패했고, 따라서 왕위를 차지하려는 반역자들은 무역과 약탈을 통해 벌어들인 수익으로 군대를 마련해 허구한날 왕위를 확보하려고 시도했다. 그나마 통일된 덴마크가 이지경이니 소왕국들이 난립한 스웨덴이나 노르웨이가 어떠했을지는 불보듯 뻔할 것이다.


 결국 시그프레드 왕조는 860년대 경 계속되는 도전을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었다.(7) 그리고 덴마크는 분열되었으며, 재통일되는데는 100여년의 시간이 걸렸다. 거기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바이킹들이 좋아하던 이슬람권의 은화 역시 훗날 사마라의 혼란(8)으로 알려질 압바스 왕조 내부의 분쟁으로 거의 유입되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다. 안그래도 정치상황이 개판인 판국이고 돈 맛을 알아버린 상황에서 돈까지 부족해졌다. 이제 이들은 부와 군사력, 그리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이것이 본토에서 지배자가 되기 위한 것이던 아니면 다른 곳에서 왕 노릇을 하기 위함이던) 말그대로 유럽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비스칸디나비아 지역에 거점을 오래전부터 두고 있던 소수의 몇몇 바이킹들도 마찬가지로 날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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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격 지옥의 현실 강림 jpg -

 이 과정에서 어디선가 굴러들어온(밑에서 후술하겠지만 유력한 후보는 있다.) 바이킹 세력들이 루스 카간국을 습격하였다. 비잔틴 제국의 선교 공세 속에서 막 기독교를 받아들일려고 했던 루스 카간국은 이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제압되었고 이 바이킹 세력들이 새로운 지배자가 된 것으로 보인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원초 연대기의 기록을 어느정도 고려한다면 이 때 몇몇 토착민 부족들이 이 세력들에 협력했을 가능성도 있다. 참고로 이슬람 기록등을 토대로 볼 때 이들도 한동안은 대외적으로는 군주의 칭호를 '카간'으로 하는 쪽을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를 건설한 주체들은 누구인가?>


 이 쯤에서 한번 이야기하고 넘어가야 될 주제가 있다. 바로 러시아를 건국한 주 민족이 누구인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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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따 건국한거야 바로 우리지" -

 

 통상적으로 알려진 설이야 스웨덴 출신 바이킹들이 러시아를 건국한 주체였다는 설이다. 이 설에 따르면 러시아의 어원이 된 '루스'라는 칭호는 바이킹들이 노예로 부린 동슬라브족을 가리킨다던가, 혹은 슬라브 족 등 토착민들이 스웨덴 바이킹들을 가리키던 말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구 소련 시절 소련에서는 이 설을 반박하는 주장들이 많이 나왔다. 이들은 루스라는 호칭이 우크라이나에 있는 로스강에서 유래된 것이며, 우크라이나나 폴란드의 전설에 나오는, 세 형제가 자신들이 지배할 땅을 찾으러 가는 이야기에 나오는 세 형제의 이름 중 하나가 루스라는 점. 그리고 원초 연대기에서는 키예프가 류리크의 부하 아스콜드와 디르에 의해 세워진 것처럼 되어있지만 실제 키예프는 5~6세기경 키라고 하는 인물(실존 유무는 명확하지 않음)에 세워졌다는 기록 등을 내세웠다. 또한 이븐 파들란의 기록에 나오는 루스의 풍습 중 일부가 슬라브적이라는 점도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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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거든. 우리거든!" -


 실제로 키예프가 아스콜드와 디르가 아닌 슬라브계의 키라는 인물에 의해 세워졌다는 주장은 이후 사실로 밝혀졌다. 그러나 이후 논쟁과 발굴, 명칭 조사 결과 이 주장은 지나치게 민족주의적 감정에 기반된 주장으로써 스웨덴 바이킹들에 의해 러시아가 건국된 것이 확실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일단 드네프르 강 등을 비롯 소련 시절에 사라진 수많은 우크라이나 및 남러시아 강들의 여울목 명칭들 다수는 고대 북구권 언어에서 유래된 것이었고, 루스의 어원을 조사한 결과 이는 핀족이 스웨덴 바이킹을 가리키는 호칭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이븐 파들란의 기록 역시 슬라브족 풍습도 있기는 하지만 인신공양과 희생제물, 배를 관으로 삼는 선관장 등 바이킹적 풍습도 엄청나게 많이 기록되어있다는 점에서 기각처리되었다. 이외에도 비잔틴 제국의 기록등도 루스를 바이킹쪽으로 묘사함으로써 슬라브설을 반박하는데 일조했다. 단 국내에서는 사실상 박노자의 비판(그나마도 곁다리로 언급된 수준)을 제외한다면 러시아사와 관련, 조금 심도있게 언급된 서적들은 모두 러시아 건국의 주체가 슬라브족이라는 식으로 묘사되어있다.


 그래도 이 과정에서 루스 카간국의 존재나, 류리크의 존재 유무가 불확실하다는 점은 분명하게 밝혀지기도 했다. 그 이외에도 키예프 건설 년도가 앞당겨진 것도 나름 성과이기는 했다. 그렇다면 류리크에 대해서도 언급을 해 볼 필요가 있을 듯 하다.


 <류리크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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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리크를 그린 17세기의 그림 -

 


 사실 류리크의 정체는 불분명한 점이 많다. 애시당초 기록 자체도 많지 않고 연대기 기록들도 이것저것 오류 투성이에 믿기 힘든 것들도 많기 때문이다. 애시당초 원초 연대기도 판본따라 다른데다가 이고르, 올레그와의 관계도 불명확한 점이 많으니 말 다한 것이다. 오죽하면 가상 인물이라는 설까지 나올 지경이다. 실제로 몇몇 12세기 이전 러시아의 기록들은 그들 대공의 조상을 올레그에서 찾지 류리크에서 찾지 않았다고도 전해진다.


 일단 현재 남아있는 류리코비치 가문의 후계자들을 토대로 한 하플로 그룹 조사에 의하면 류리크 가문은 리투아니아를 지배했던 게디미나스 가문과 먼 친척으로 2500년 전에 갈라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 근거는 부계로 유전되는 하플로 그룹 유전자 중 N1C1 유전자와 연관이 있는데 이는 핀족 및 발트족쪽에서 많이 나타나는 유전자이다. 류리크가 바이킹으로 추정되는 마당에 웬 뜬금없는 소리냐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가능도 아니다. 애시당초 7세기 경부터 발트해 지역은 교역이 활발해 이 과정에서 이주했을 가능성도 높거니와,  6세기 경 판노니아에 거주하던 게르만계 훌로리족이 판노니아 패권 다툼에서 패배, 일부가 스칸디나비아 반도쪽을 도주하면서 슬라브족 및 발트족 거주지역을 지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류리크의 조상이 휩쓸려 스칸디나비아 반도나 유틀란드 반도에 정착했을 개연성도 있다.


 이와는 별도로 류리크로 추정되는 인물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서구권 연대기에 도레스타드의 로릭으로 알려진 인물이 바로 류리크의 유력 후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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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레스타드의 로릭을 묘사한 19세기의 그림 -

 

 도레스타드의 로릭은 덴마크 시그프레드 왕조의 일원으로 하랄드 클락이 그의 삼촌이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황상 하랄드 클락의 형제들인 아눌로, 라그프리드, 헤밍 하프단손 중 한명이 그의 아버지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인물이다. 810년 혹은 812년에 태어난 그는 프리지아를 습격하는 덴마크 군대에 여러번 편승했다가 프랑크 제국의 내란에 개입, 로타르 1세를 도왔으며 그 대가로 로타르 1세가 제위를 받게 되자 네덜란드의 휘링겐 섬을 받았다. 이후 그는 휘링겐 섬을 바탕으로 프리슬란드(먼나라 이웃나라로 나름 알려진 네덜란드 북부 지역)를 휘저었고 850년에는 도레스타드를 점거, 거점으로 삼았다. 이후에도 그는 도레스타드 등 프리슬란드 지역에 있는 자신의 거점을 토대로 덴마크, 북부 독일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해나갔다.

 

 하지만 867년 경 그에게 대항하는 폭동이 일어나자 그는 프리슬란드를 떠났다. 공교롭게도 라도가 호수의 유적이 불탔다고 추정되는 가장 오래된 연대쯤에 말이다. 다만 프리슬란드의 폭동은 곧 진압되었는지, 870년 이후의 기록에도 그는 종종 프리지아의 지배자로써 언급되며, 크리스트교로 개종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참고로 그가 죽은 건 882년 경으로 추측되며 이후 그의 프리지아 영토는 다른 바이킹족에게 넘어갔다고 전해진다.

 

 사실 도레스타드의 로릭을 류리크로 보기에는 좀 애매한 구석도 있다. 사실상 많은 부분에서 로릭을 류리크로 보는 견해는 이름의 유사성에서 기인한 것도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는 별도로 류리크의 실존 유무도 애매한 편이기도 하다. 사실 이 당시 연대기 자체가 애매모호한 게 많아서 그 유명한 라그나르의 죽음(9)도 별별 이야기가 다 있을 정도이다. 그래도 연대기에서 그가 프리지아를 떠났다고 하는 연도가 유적의 연대와 얼추 비슷하다는 점 등을 볼 때 아주 배제하기는 힘든 학설이라고 봐야 될 것이다.

 

 다만 도레스타드의 로릭을 류리크로 본다면 이런 가설도 가능하다. 일단 도레스타드의 로릭은 폭동으로 쫓겨났지만 그 동안 모은 부와 군사력이 있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병력을 충원, 비잔틴과 이슬람과의 무역로가 만나는 교통 거점을 장악하고 있던 루스 카간국을 습격, 점령하였고, 다시 루스 카간국 점령과 이후에 벌인 몇몇 약탈을 통해 충당한 군사력으로 다시 프리슬란드를 탈환했을 가능성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그 먼 프리지아와 러시아 지역을 동시에 통치하는 것은 그가 살아있을때 뿐이었을 것이다.



(1) 이들은 반 전설적인 인물 라그나르의 로드브로크의 손자라고 전해진다.

 

(2) 아마스트리스는 지금의 터키 북부 흑해 연안가에 위치한 도시이며 성 조지라는 인물은 8세기말~9세기 초 아마스트라스의 주교였다.

 

(3) 847년에서 871년까지 지금의 이탈리아 남동부 바리에 세워진 이슬람국가. 당시 나름대로 날뛰면서 시칠리아를 정복하던 이슬람 해적들에 의해 창건됬다. 하지만 주변국들은 모조리 도움을 기대할 수가 없는 기독교도 국가였고, 결국 871년 바실레이오스 1세와 루트비히 2세의 협공으로 멸망했다.

 

(4) 브르타뉴의 헤스테인과 도레스타드의 로릭, 그 외 아일랜드 해안 일부 지역의 바이킹들 정도 뿐이었다.

 

(5) 여기서의 무골은 뼈가 없다는 뜻이지만 현재 학자들은 이바르가 진짜 뼈가 없다기 보다는 골절취약증이라는 뼈 관련 질환을 앓았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6) 다만 로마의 이름을 잘못 아는 바람에 로마가 아닌 토스카나의 루나라는 도시가 털렸다.

(7) 당시 프랑크 사절단이 덴마크를 방문했는데 그들이 알던 덴마크의 왕 호릭 2세 및 그 친척들이 이미 다 죽고 없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8) 압바스 왕조에서 861년부터 10여년간 계속된 혼란. 당시 압바스 왕조의 수도가 사마라라 이런 명칭이 붙었다. 칼리프 계승권을 두고 다툼이 일어났는데 투르크 용병들까지 끼어들어 칼리프가 수시로 바뀌고 내전은 상시적이었다. 더군다나 이 틈을 타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 이집트가 독립해버렸다. 더군다나 868년 경에는 바스라 인근 지역에서 흑인 노예들인 잔지들까지 반란을 일으켜 십수년간 사실상의 독립 국가를 건설해버리는 일도 벌어졌다.

 

(9) 가장 유명한 건 아무래도 노섬브리아 왕 엘라에 의해 독사굴에 던져져서 살해되는 과정에서 "새끼 멧돼지가 늙은 멧돼지의 상황을 알면 어떻게 꿀꿀거릴까?"라는 유언을 남겼다는게 정설이지만 연대기에 따라 그가 병으로 죽었다던지, 프랑크 제국의 요청을 받은 호릭 2세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워낙 기록들이 부실하고 부정확한 판이라 현대의 역사가들은 무골 이바르 등 그의 아들들로 알려진 자들이 정말 그의 아들인지도 의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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