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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후한ㆍ강족 전쟁 (3)
게시물ID : history_1709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10/4
조회수 : 66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7/15 16:45:30

안제 영초 7년(기원후 113년), 후한 정부는 기도위 마현에게 강족 토벌을 맡기고 반격에 들어갑니다. 마현은 강족과의 싸움에서 매년 큰 승리를 거두고 원초 2년(기원후 115년)에는 호강교위를 대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중랑장이 된 임상은 원초 3년(기원후 117년)에 북지군에 본거지를 두고 있던 영창을 공격해서 그 처자를 죽이고, 다음 해인 원초 4년(기원후 118년)에는 강족과 연합하고 있는 다른 종족들을 회유하여 영창과 두계공을 사살합니다. 그리고 마현과 연합하여 영창을 보좌하고 있는 낭막의 군대를 패배시키고, 다음 해인 원초 5년(기원후 119년)에는 자객을 보내 낭막을 죽이는데 성공합니다.

 

이러한 전방위적인 후한의 반격으로 전령의 봉기로 크게 기세를 타고 있던 선령강은 완전히 와해되었고, 선령강의 침탈을 겪던 삼보와 익주 지역도 처음으로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은 후한에게 결코 장밋빛 결과만을 안겨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려 12년 간 이어진 강족과의 전쟁 기간 동안 후한 정부는 240억 전이라는 엄청난 군비를 지출하였고, 그 때문에 국가재정은 바닥이나서 병주와 양주 이 두 주는 황폐해져 버렸습니다. 게다가 강족 토벌의 일등 공신이라 할 수 있는 임상은 황태후의 종제인 등준과 군공을 다투고, 또 참수한 강족의 수를 거짓으로 늘리고 게다가 불법으로 천만 전 이상을 횡령한 혐의로 사형에 처해지고 그의 전택, 노비, 재물은 모두 몰수당했습니다.

 

이처럼 마현과 임상의 활약으로 강족들의 기세는 한풀이 꺾였지만, 그것이 강족 전체가 굴복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원초 6년(기원후 120년) 이후부터 늑저종, 농서종, 당저종, 소당종, 침저종, 건인종, 공당종 등의 각 강족 일파들이 차례로 반란을 일으키며 매년 장애과 무위 등의 서역 교통로를 약탈하였습니다. 그 때마다 호강교위인 마현은 이들을 격퇴시키고 귀순시켰습니다. 이후에도 마현은 강족과의 전쟁에서 맹활약을 벌여 그 공으로 순제 영화 4년(기원후 139년)에는 홍농태수로 전임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음해인 영화 5년(기원후 140년)에 또 다시 강족이 삼보를 노략질하자 정서장군에 임명되어 강족 토벌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음 해인 영화 6년(기원후 141년)에 두 아들과 함께 전사하였습니다.

 

마현이 전사할 무렵에 강족의 침입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관중에 침입한 공당종의 계통의 강족은 장안 근처를 노략질하고 전한의 여러 황제들의 능에 불을 지르고 군현의 장관들을 살해할 정도였습니다. 이후에도 강족의 침입은 계속이어지다가, 영가 원년(기원후 145년)에 무려 강족 25여 만호가 후한에 귀순하면서 조금씩 안정되는 기미를 보였습니다. 영화 원년(기원훠 136년)에 시작되어 영가 원년까지 약 10년간 이어진 강족과의 전쟁에서 후한이 지출한 군비는 80억 전에 이르렀습니다.

 

이후에도 강족의 침입은 후한 왕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이 때마다 황보규, 장환, 단경 등이 맹활약하여 강족의 침입을 격퇴하였지만, 계속된 강족의 침입은 후한 정부뿐만 아니라 내군의 농민들도 괴롭히게 되었고, 극심한 국가재정의 소모를 가져왔습니다.

 

이후 후한이 쇠락하면서 강족들은 위나라나 촉나라와의 복종과 반항을 번갈아하며 질기게 버텼습니다. 서진이 중국을 통일하던 때에도 그들은 관중 지역에 머물며 5호 16국 시대에 이르러서는 강족계통의 국가인 후진을 세우기에 이르렀습니다.

 

※ 출처 : 중국의 역사 진한사,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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