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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및 펌] 여러 형태의 김구 비판
게시물ID : history_1709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한솥매니아
추천 : 14/5
조회수 : 1805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4/07/15 15:40:24
인간은 모든 형태의 서사를 단순화해서 받아들이려고 하는 인식적 버릇이 있습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많은 경우 역사 역시 하나의 서사로서 단순화되는 경우가 많고, 이 때 채택되는 포맷은 대체로 선악의 대결입니다. 인류의 역사라는 것이 워낙 수많은 투쟁으로 점철된 서사이다 보니 가장 무난한 포맷이 되는 것이겠죠.

뭐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렇다고 역사에 선악 자체가 아예 없느냐 하면 그건 아닐 겁니다. 절대선이라는 개념이 윤리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느냐 같은 골치아픈 얘긴 치워두고, 척 보면 착한 놈과 나쁜 놈을 구분해 내는 것 역시 인류의 진화적 적응이 이루어낸 경제적 판단에 속할 테니까요. 특히 정말 나쁜 놈들이 이런 진지한 접근을 악용하여 궤변을 늘어놓기 시작하면 참 피곤해지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단순화를 경계하는 이유는, 뭐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이런 구도가 일종의 우상화를 만들어 낸다는 것 때문입니다. 우상화는 두 가지 방향에서 문제가 있는데, 하나는 분명 결점이 있었던 역사적 인물/세력을 무조건 추앙하여 오류를 극복할 기회를 제거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결점에도 불구하고 유의미했던 역사적 인물/세력의 결점 때문에 그들의 의미를 부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에서의 투쟁이란 결국 정치적인 문제이지, 순결한 천사의 군대와 흉악한 악마의 군대가 하르마게돈을 벌이는 게 아니란 걸 잊게 되는 거죠.

이런 문제는 특히 각국의 역사에서 성역으로 취급되는 부분에 집중되어 불거집니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미국의 독립혁명, 일본의 메이지 유신 같이 현재의 국가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사건을 전후한 시대죠. 우리의 경우, 아마 일제강점기 시기의 독립운동일 겁니다. 특히 소위 말하는 '희생된 애국자들'의 경우가 심하죠. 그 정점에 있는 인물이 김구라고 생각합니다.

이 인용과 펌은 인터넷에서 금방 찾아볼 수 있는 가벼운 내용이고 학문적으로 엄밀히 검증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당시를 살았던 실제 '사람'으로서 분명 가질 법했을 결점들에 대한 얘기고, 많은 사람들이 모르거나 알고자 하지 않을 얘기이기도 합니다. 맹목적인 찬양만이 유통되고, 단순한 자서전이 대단한 필수 교양 서적으로까지 취급받는 상황에서 한 번쯤 접해봐야 하는 글이라고 생각해 이렇게 퍼옵니다.



1948년 2월 단독선거·단독정부가 가시화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백범 김구는 유명한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여기서 김구는 “박테리아가 태양을 싫어함이나 다름이 없이 통일정부 수립을 두려워하는” 단정 추진세력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곧이어 북행을 강행하여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함으로써 김구는 통일의 화신처럼 됐다. 그러나 1년 전인 47년 발표한 ‘나의 소원’이란 글에서 김구는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독재다. …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서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며 공산주의를 극단적으로 비판하고 있었다.

해방공간 최대의 정치세력이자 대중의 압도적 지지를 얻고 있었던 좌파가 빠진다면 사실상 통일정부의 수립이란 요원한 일이었다. 그러나 김구와 임시정부는 귀국 직후 좌파 인민공화국의 협상제의를 단지 ‘서식상의 문제’라는 황당한 근거로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말았다. 곧이어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신탁통치’로 이해하고 격렬한 반탁투쟁을 선도해 이른바 ‘반탁 쿠데타’까지 나아갔다. 반탁투쟁은 해방공간 좌우대립구도 성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며 결국 남북 분단으로까지 연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에도 김구는 ‘백의사’ 등을 통해 대북 타격정책을 일관되게 수행했다. 해방공간 내내 반공, 반소로 일관한 김구의 남북연석회의 참가는 이승만과의 경쟁에서 패배해 모든 정치적 전망이 사라진 조건에서 취해진 정치전술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는 “일부 소위 좌익의 무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소위 사상의 조국을 운위하며, 혈족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계급을 주장”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기에 좌파와의 연대는 극히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이렇게 좌파를 부정하는 주장을 하게 된 것은 “둘 이상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서 명령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근본 문제”라는 위계서열적 인식이 전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사물의 질서는 위에서 아래로 정연하게 배열돼야 했고 이것을 거스른다는 것은 자연에 반하는 것이었다. 김구는 순종과 직분을 통해 조화로운 세상의 구현을 추구했으며 그에게 좌파의 평등주의는 이 조화를 해치고자 하는 일시적 풍파일 뿐이었다.

해방공간 김구의 자기모순적 논쟁과 실천은 비극적 죽음으로 숭고화됐다. 그의 죽음이 조화로운 민족공동체라는 상상의 낙원을 위한 장엄한 희생이 됨으로써 한국 민족주의는 비극적 숭고함의 아우라를 걸치게 된 것이었다. 그 아우라는 실상 “혈통적인 민족만은 영원히 성쇠흥망의 공동운명의 인연에 얽힌 한몸”이라는 맹목을 가리는 장막일지 모른다.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1065000/2004/05/001065000200405101843248.html



‘무고한 희생자’의 문제와 함께 저항 방법으로서의 테러를 의심케 하는 부분은, 폭력이 일상화되면 저항 주체 사이의 권력 투쟁의 수단으로도 전락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보통 독립운동의 역사를 ‘왜적과의 싸움의 역사’로 보지만 실제로는 독립투쟁에서도 내부적인 권력 쟁투 양상이 적지 않았으며 때로는 폭력적 형태를 취하기도 했다. 동류를 향한 폭력의 주체가 저명한 독립운동가라고 해서 과연 그 폭력이 무조건 선한 것이던가?

예를 들어, 1922년 초기에 상하이 임시정부가 한인사회당의 간부인 김립(1880~1922)을 “레닌이 보낸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했다”고 성토한 데 이어 김구 부하인 오면직, 노종균 두 청년이 1922년 2월11일에 상하이의 거리에서 김립을 사살했다. 이 암살을 ‘정당한 응징’으로 묘사한 <백범일지>의 권위가 절대적이기에 김립이 “응분의 대가를 받았다”는 통설을 의심한 이들이 여태까지 거의 없었지만, 반병률 교수(한국외대)의 연구에 의하면 김립의 ‘횡령 행위’가 사실이라기보다는 정적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 레닌 정부의 바람대로 김립과 그 동지들이 세 차례에 걸쳐 수만루블의 자금을 한인사회당에 어렵게 운반해주어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사업비로 쓰게 했지만, 그 자금이 김구 등 임시정부의 우파적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됐다. 자금 문제를 놓고 그 뒤에도 우파 민족주의자들에게 ‘동족 테러’가 빈번히 이용됐다는 사실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무장 독립운동의 비극적인 이면이다.

70여 년 전, 한국 공산운동의 탁월한 지도자 박헌영은 윤봉길의 의거를 비판하면서 민중의 계급적 각성과 연대가 뒷받침하지 않은 극소수의 폭력에 의한 운동이 필히 패배한다고 이야기했다. 지금의 이라크 상황을 본다면 윤봉길과 비슷한 방법들을 이용하고 있는 무장 투쟁이 성공할 확률도 적지 않지만, 과연 소수의 저항 집단이 만드는 독립국가는 민중적, 민주적, 인권적 모습을 띨 것인가? 최고의 빨치산 대장이 결국 최악의 독재자로 변신한 한반도 현대사의 교훈을 염두에 둔 필자는 이라크 무장 독립운동의 성공적 투쟁에 대해 기쁨과 함께 일정한 염려를 느끼고 있다.

http://legacy.h21.hani.co.kr/section-021109000/2007/04/021109000200704120655080.html



권위주의적인 행동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남로당원 출신 박갑동은 "경교장에 가서 만나면 언제나 김구 선생은 한복차림으로 있었다. 내가 김구선생과 얘기하고 있을 때 비서가 와서 외출하자고 하니까, 바지저고리 차림의 김구 선생이 일어섰다. 그러면 비서가 두루마기도 입혀 주고, 모자도 씌워 주면서 문도 열어주는데, 손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그의 비서가 구두도 신겨 주고, 손에다 지팡이를 쥐어 주는 모습이 영락없는 조선왕과 다를 것이 없었다."고 주장하였다.[267][269] 당시 박갑동은 해방일보 기자 자격으로 경교장한국독립당한민당, 수도경찰청 등에 출입하고 있었다.

1948년 4월 방북시에도[267][270] 숙소에서 여자 접대원들에게 "야!"라고 불렀더니 그들이 못들은 체 한 것이다. 김구가 화가 나서 "왜 부르는데 대답을 안하나?"라고 묻자 접대원들은 "저희는 그렇게 습관되어 있지 않아서 잘 몰랐습니다."라고 답했다.[267][270]

http://ko.wikipedia.org/wiki/%EA%B9%80%EA%B5%AC#.EC.9D.98.ED.98.B9.EA.B3.BC_.EB.85.BC.EB.9E.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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