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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괴베클리 테페’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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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오래된유머
추천 : 12
조회수 : 5630회
댓글수 : 16개
등록시간 : 2014/07/14 14:47:38
http://sscn.kr/news/view.html?section=2&category=10&no=4128

▲1만 1600년 전 터키 남부 지방에 세워진 신전인 괴베클리 테페의 돌기둥들. 가장 큰 것이 높이 5.5m에 달한다. 전면에 있는 돌기둥에는 인물 형상이 새겨져 있다.(사진=내셔널 지오그래픽)

 

[시사중국] 1994년 가을, 독일의 고고학자 클라우스 슈미트는 터키 동남부 지역의 가장 큰 도시인 우르파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약 14km 떨어진 긴 산맥의 가장 높은 산봉우리는 둥그런 지형이었다. 슈미트는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방대한 부싯돌부스러기를 발견했다. 수천 년 전에 수십 명 혹은 수백 명 사람이 모여 공동 작업을 한 장소임을 직감했다. 그는 곧 독일 고고학연구소와 우르파 박물관과 합작해 이듬해부터 본격적인 발굴에 착수했다.

 

이렇게 해서 세상에 알려진 터키의 괴베클리 테페는 지금까지 발견된 고대 건축 구조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괴베클리 테페의 ‘테페(tepe)’는 곧 테페이(teppay)라고 발음하는데 터키어로 ‘배꼽 언덕’이라는 뜻이다.

 

수십 개의 거대한 돌기둥이 겹겹이 둥근 원을 이루고 있으며, 인류가 처음으로 만들었던 기존의 가옥구조 보다 더욱 크고 복잡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이 돌기둥들은 1만 1600년 전에 세워졌으며 기자 대 피라미드보다 7000년이나 앞섰으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신전(神殿)의 형태도 있다. 터키 남동부 지역에서 건축물이 세워진 시기에 세계 어디에도 이와 비교할만한 규모의 건축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의 돌기둥이 다른 하나의 돌기둥을 받치는 형태는 마치 영국의 스톤헨지를 떠올리게 하지만 스톤헨지보다 약 2배는 오래됐다. 괴베클리 테페의 기둥들은 거칠게 깎인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조각되고 새겨진 석회석 기둥이다. 돌기둥엔 가젤과 뱀, 여우, 전갈, 멧돼지 등 동물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괴베클리 테페에는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은 듯하다. 영국의 스톤헨지보다 7000년이나 앞선 이 신전은 지금까지 전체 면적의 10분의 1도 발굴되지 않았다.

 

발굴 초기 슈미트 팀은 지면에서 몇 센티미터도 안 되는 곳에서 정교하게 조각된 돌을 발견했다. 계속해서 또 다른 돌들을 발견했는데 나중에는 여러 개의 직립된 돌기둥으로 형성된 원환(圓環)을 발굴해냈다. 몇 년 사이에 슈미트 팀은 두 번째의 돌기둥 원환을 발견했고 잇따라 세 번째, 뒤에는 더욱 많은 원환이 발견됐다. 그렇게 해서 2003년 탐사 결과, 발굴단은 적어도 20개의 원환이 복잡하게 겹쳐서 흙속에 묻혔다고 발표했다.

 

돌기둥은 매우 방대했다. 가장 높은 것은 5.5미터이고 무게는 16톤에 달했다. 돌기둥 표면엔 각종 동물 형상이 부조됐고 모양은 서로 다른 풍격을 지니고 있었다. 조각이 거친 것을 비롯해 비잔틴 예술품처럼 정밀하고 상징적 의미가 풍부한 것도 있었다. 슈미트는 또 산자락의 여러 곳에서 고대 유물이 어마어마하게 널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곳은 신석기시대의 칼, 도끼, 투척 무기 등 창고였다. 이 돌은 인근지역의 골짜기에서 운반해온 것이었다. 슈미트는 “이곳의 1, 2평방미터 범위 내에 널려있는 돌들은 많은 고고학자들이 기타지역 유적에서 발견한 것보다 더 많았다”고 말했다.

 

괴베클리 테페의 고고학적 연구를 종합해보면 그 원인을 알 수는 없지만 당시 괴베클리 사람들은 몇 십 년에 한 번씩 돌을 묻고 새로운 돌기둥으로 대체하다가 이후 모든 원환이 부싯돌로 메워졌고 사람들은 또 부근에 완전히 새로운 구조물을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전반 유적지는 이렇게 발굴됐다가는 메워지고 다시 보수되는 식으로 몇 백 년이 지난 것으로 보인다.

 

▲5톤이나 나가는 석회암 기둥에 맹수 조각상이 돌출되어 있다. 이 석회암 기둥은 장인들이 인근 채석장에서 수레나 소ㆍ말 등 사육 짐승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 운반해 온 것이다.

 

특이한 점은 당시 괴베클리 사람들의 신전을 보수하고 건축하는 기술은 시간이 갈수록 저하됐다는 것이다. 가장 초기의 원환은 가장 크고 기술과 공예 수준에서도 가장 발달했지만 후대로 진행됨에 따라 모양이 갈수록 초라해졌고 대수롭잖게 설치된 듯했다. 게다가 기원전 8200년 경, 이 공정은 완전히 정체 상태에 빠졌는데 괴베클리 테페는 철저히 쇠락해졌고 더는 부흥하지 않았다.

 

발굴 과정에서 또 다른 특이한 점은 그곳에서 사람들이 거주했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돌기둥을 조각하고 건축하려면 필연코 수백 명의 인력이 필요했을 텐데 유적지 부근에는 수원(水源)조차 없었다. 가장 가까운 계곡의 물도 그곳에서 5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다. 많은 인력이 또 거주해야 할 곳이 있어야 함에도 어떠한 벽이나 난로 혹은 주택 흔적마저 찾아볼 수 없다. 다수의 인력이 반드시 취사를 했을 텐데 주변엔 경작을 한 흔적도 없었다.

 

슈미트는 그곳에서 어떠한 취사도구나 밥을 끓이던 잿더미나 여타 흔적을 발견해내지 못했다. 다만 유적지 부근에서 발견된 수천 개의 영양과 야생소의 뼈로 판단할 때 작업 인력은 먼 곳에서 야생동물을 조달해 식사를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복잡한 활동은 반드시 책임 있는 조직과 감독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는 사회 계층을 설명할 수 있는 어떠한 증거 또한 발견되지 않았다. 지배세력의 존재를 입증할만한 아무런 흔적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사치품이 부장된 흔적도 없고 계급을 나타내는 식사도구의 차이점도 발견되지 않았다.

 

▲T자 모양의 돌기둥에 세련되게 양각해 놓은 독수리, 전갈 따위의 동물 형상은 숙련된 장인들이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고대인들에게도 복잡한 사회 구조를 갖출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괴베클리 테페에 참배했던 최초의 사람들은 문자나 금속과 도자기 등이 없는 사회에서 생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괴베클리 테페가 세워진 시기 대다수 인류는 아직 소집단으로 유목생활하고 있었고 식물을 채집하고 야생동물을 사냥해 생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이런 거대한 구조물을 세우기 위해서 신전을 구축했던 사람들은 놀랍게도 수레바퀴나 짐을 나르는 가축도 없이 16톤이나 되는 돌을 수백 미터의 먼 거리에서 자르고 날라서 이곳에 세워 놓을 수 있었다.

 

괴베클리 테페의 발굴 작업은 아직도 진행 중에 있으며 이를 둘러싼 고고학계의 논쟁 또한 그치지 않고 있다. 하지만 학자들은 이 유적지가 기존 과학계를 뒤집는 인류 이전 과거의 유물로서 가장 중요한 곳임을 공통적으로 인정한다. 20년 전만 해도 대다수 고고학자들은 신석기혁명이 발생된 시간과 지점, 대체적인 과정에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괴베클리 테페의 고고학적 발견이 진행되면서 학자들은 기존의 역사 시기 분류와 관련한 학설을 뒤집어야만 하는 인류사적 고민에 직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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