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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썼나? 애국가 작사의 미스테리.... 그것이 알고 싶다.
게시물ID : history_1707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얼레리
추천 : 11
조회수 : 1093회
댓글수 : 70개
등록시간 : 2014/07/14 14:02:49

못 보신 분들 .... 보시라고 게시판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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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된지가 70년 가까이 되어 가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 작사자가 누구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렇다면 진짜 애국가 작사자는 누구인가?






1. 윤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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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에모리대에 보관되어 있는 애국가 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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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에 쓴 자필 가사지 옆에는
윤치호.. 라는 이름이 쓰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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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중 탑클래스 10인 중에 포함되는
친일파 중 친일파....

이 사람이 애국가를 작사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우리 국민들은 큰 자괴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한신대 역사학과 교수 김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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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

한국 최초의 코스모폴리탄
18살에 신사유람단을 따라 나섰고
중국과 미국에서 유학

초대 주한미국공사의 통역관으로
국제정서에도 매우 밝았던 시대적 인물




<아래는 그의 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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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에 걸처 거의 매일 영어로 일기를 써왔다.
박스로 10상자 정도 되며

내용은 매우 매우 디테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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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한 나라가 되느니
차라리 식민지가 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윤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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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결국 윤치호란 이름을 버리고
이토 치코가 되었다.

그리고
총독의 직속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참의 고문으로 활동

천황의 임명으로
칙임위원이라는 최고의 직위를 받았다.





그렇다면 이런 친일파 윤치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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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모리대에 직접 방문했던 안민석 의원

몇가지 의문점을 품게 되었다는데...

우선 필적을 비교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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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 가사지와 일기장의 필체를 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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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적 감정 결과 4군데 중 3군데는

윤치호의 일기장과 애국가 가사지의 필체가
동일인에 의한 필적으로 감정되었다.




안익태가 작곡한 것은 1935년
작사는 훨씬 더 이전부터 전해져 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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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가라는 이 책에 (1908년 발행)
바로 그 애국가 가사가 쓰여져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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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애국가 가사지 중 가장 오래 전
1908년에 발행된 이 책은
윤치호가 낸 것






1908년 이 찬미가와 더불어

1945년은 에모리대에 보관 중인 애국가 가사지는

애국가의 작사자가 윤치호다...라는 증거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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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신한민보에도
윤치호라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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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발행한
찬가집도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라고 나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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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1914년 외무차관은 이런 보고서를 보내기도 했다.
윤치호가 지은 애국가가 미주 지역에서 불리고 있다는 내용...



그렇다면
일본 황제에게 칙임위원까지 임명되었던
이런 윤치호가
정말 이렇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가사를 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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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으로 나타난 활동만 해도
그의 친일 행적을 그냥 덮을 수 없는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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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도 안 되는 거 내세우면서
칠일 행적을 덮으려 한다고...

분노하시는 위원장님









1-1 그렇다면 윤치호에 관한 여러 문서는
      과연 증거가 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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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가 원 작사가라는 증거가 되는

1908年  찬미가
1914年 일본의 외교문서
1910年 신한민보
1931年 찬가집은


그 증거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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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가 에모리대에 보관된 가사지를 쓴 이유는

윤치호 딸이 아버지인 윤치호를 찾아왔을 때
딸의 부탁으로 윤치호가 써 준 것이라고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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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 딸 이름이 문희

왜 하필 그 시기 1945년 9월.. 해방시점에 써 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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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민석 의원의 해석...

해방된 1945년 9월은 해방이 된 지점으로

친일을 하던 윤치호는 해방이 매우 두려웠을 것...

그래서 친일 행적을 희석하기 위해서 쓴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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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도 좀 묘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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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08년 발행된
찬미가에도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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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윤치호가 '역술자'라고 나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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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수님의 관점은

'역술'은

윤치호가 지은 것이 아니라...
그저 번역한 것이라고...

왜냐하면 본인이 지었으면 '저작'이라는 표현이 있어야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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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도 그 시대에는
본인이 지었다면 저작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나 윤치호는 1908년 발행된 찬미가에
애국가 가사에 대해서 저작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즉 윤치호가 이 책에 애국가 가사를 썼다고 해서
윤치호가 작사가라는 증거는 될 수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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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찬미가에는 애국가 외에
다른 찬송가 13곡이 번역이 되어 있다는 것이 그 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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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은
찬미가에 나오는 가사들은
의역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윤치호가 직접 지은 것으로 보기 힘들다는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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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술자 윤치호








가장 이상한 점은
바로 일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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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정말 디테일하게 썼다.



디테일이 어느 정도였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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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는 부자였음에도
아주 적은 돈까지
상세하게 다 적을만큼 디테일의 왕이었던 것


그런 윤치호가
일기장에
애국가를 썼다는 얘기는 단 한 줄도 언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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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민석 의원도 역시 이 점에 대해서 의문을 가졌다.




또 하나의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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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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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민심이 들불처럼 일어나는 광경...
사람들이 애국가를 부르며 외치는 모습을 목격하고는
일기에 이러한 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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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그 어디에도
자신이 지은 애국가에 대한 글은 단 한 줄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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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가 길에 울려 퍼졌음에도
일기에는

그냥 이런 내용이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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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쓴 노래라면 그렇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까????
왜 일기장에 한 줄도 쓰지 않았나?????


(그렇게 디테일한 사람이...)






2. 도산 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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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은 안창호의 외손자.. 필립 안

외할아버지인 안창호 선생이 애국가의 작사자라고 주장

안창호의 부인... 즉
필립 안씨의 할머니로부터 안창호 선생이 애국가를 작사했다고 들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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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의 맏딸...

아버지가 애국가를 썼다고 알고 있다고 말씀하심
그러나 올해 연세가 100세...

더 이상의 대화는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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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의 비서실장 구익균

구익균씨는 도산 선생에게 직접 물어봤다고 한다.




윤치호처럼 문서적인 자료는 없지만
사람들의 증언은 꽤 구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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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평북 선천에서 있었던 일

예배당에서 백두산이... 두만강이...
이런 찬미가가 불려졌고

이것을 들은 도산 안창호가
영감을 받음



(윤치호의 찬미가는 1908년 발행으로 안창호의 일화가 1년 더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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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당에서 들었던

두만강을 동해물로 바꾸고
사계절을 테마로 바꾸어 찬송가를 지어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애국가의 원형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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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장경씨는 독립운동을 했던
집안 어른들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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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선생이 평양을 거쳐 서울로 내려 간 뒤
15일 후에 이러한 기사가 실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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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의 제안으로 애국조회가 학교에서 시작되었다.





진짜 작사가는
윤치호냐 안창호냐?????


그렇다면
왜 아직 학계에서는
애국가 작사가에 대한 연구를 하지 않았나?






2-1 학계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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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일찍이 정부에서도 애국가 작사자를 찾기위한
심의위원회를 열었는데...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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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위원장이 친일파 최남선...
( 윤치호와 친분이 있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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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위원회는 다 친일파 출신...
상당한 의도가 있다고 보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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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안창호는 미묘한 갈등이 있어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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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의 외손자인
필립 안씨는 이러한 점을 바탕으로

1955년 애국가 작사자 규명위원회는
애국가 작사자가 안창호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보심








3. 도산 안창호와 윤치호의 연결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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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한 일본 영사관으로
한장의 보고서가 도착

그것은 조선인 학교에서 압수한 노래책에 대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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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학교 학도 중 누군가가 지었다고...

압수된 노래책의 첫머리에 애국가가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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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대성학교에서 이미 부르고 있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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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대성학교는
안창호와 윤치호를 연결할 수 있는 고리이기도 하다.


이 대성학교는 원래 안창호가 실질적인 교장이었으나

안창호는 자신이 세운 학교에 윤치호를 교장에 앉혔다.

두 사람이 만난 1907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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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되고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된 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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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통해 나라의 힘을 기르는 것이
조국 독립을 위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안창호와 윤치호....


두 사람은 개성과  평양에 각각 학교를 세우고
다양한 애국찬가를 보급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런데 왜 그 둘은
결국 다른 길을 가게 되었는가?




3-1 위험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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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우치 총독 살인 미수 사건
있지도 않은 살인 미수 사건의 배후에
윤치호가 지목이 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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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는) 결국 3년간의 억울한 옥고를 치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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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윤치호는
일제에 순응하지 않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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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소 후 공식적인 노선변경을 알렸고...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충격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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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지도자가 되어달라고 했으나
윤치호는 단호히 거절




그러나 이 무렵
윤치호의 일기를 보면
눈꼽만큼의 갈등이나 후회는 전혀 찾아보기 힘들다...


이미 독립운동은 무모하고 어리석은 짓이라고 결론을 내린 상태...
(일기가 정말 대박입니다.)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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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을 거지로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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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을 가리켜 비열한 공산주의자로 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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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의  생각은

문명화를 해야 힘 있는 나라가 된다.

약소국은 강대국의 지배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
힘을 기르지 못한 우리탓이지 제국주의를 탓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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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살기만 하면 뭐든 된다는 효율 지상주의로

식민지 지배까지 정당화 하는 위험한 생각으로 빠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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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윤치호는  아주 전방위적으로 친일 행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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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는 일본의 군인으로 전쟁에 참가할 수 있는 것
조차도 축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일본을 위해 목숨을 바쳐라...라고 글을 쓰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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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출발점이 같았던 안창호는
윤치호와 다른 길을 걸을 수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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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는 정의가 힘이고
정의를 세워서
제국주의를 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 윤치호처럼 잘 살기만 하면 뭐든지 괜찮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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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임시정부가 윤치호의 이런 변화를 모르지 않았을 터
만약 애국가를 윤치호가 지었다면
상해임시정부가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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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애국가 가사를 윤치호가 지었다면
김구 선생이 이를 모르지 않았을 터

절대로 인정치 않았을 것!!!!!!!






4. 우리가 몰랐던 또 다른 노래

(제일 중요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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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배제학당 입학식....
(조선은 대한제국이므로 황실이라는 단어가 있다.)

1899년에 무궁화 노래를 불렀는데...

후렴이 지금의 애국가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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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무궁화가로 불린 노래
이미 지금 애국가의 후렴구가 있었다!!!!!


(윤치호의 찬미가는 19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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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배제학당 1899년보다 2년 앞선 1897년

독립협회의 개최로 열린 조선개국기원절에서도
무궁화 노래가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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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윤치호나 안창호가 작사를 하기 전 )

1890년대에 애국가 제정운동이 있었고
민족학교나 민족교회에서 애국가를 불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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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애국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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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 제정운동으로 1896년 시기에
수많은 애국가들이 독립신문 및 다른 언론을 통해서도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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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이렇게 가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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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앞부분은 조금씩 달라도
모든 애국가의 후렴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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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기본의 틀이 있었고
상황에 맞게 단어를 고쳐서
지방에 따라 변형되서 불려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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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강제병합 1년 뒤에도 무궁화 노래가 불려졌으나
가사는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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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에는 '국민'이라는 단어가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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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 ----> 국민. 민족
조금씩 가사의 개선이 이루어진 걸로 보시는 관장님




노동은 교수의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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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에  이미
'동해 수와 백두산.... 마르고 닳도록...'
기록이 있다.


즉 윤치호의 찬미가보다 4년 앞선 기록이 있다.








아래는 애국가를 연구하던
한 서지학자의 제자

스승님이 돌아가시면서 고문서를 몽땅 다 받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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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께 자료를 받긴 했는데...
무슨 자료가 있는지 잘 모르시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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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가 무지하게 많음
열심히 찾아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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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가사와 거의 똑같다.
(엄청난 기록을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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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진초하...

1904년 여름

더 흥미로운 자료가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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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 말의 필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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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과연 언제 누가 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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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뒷장에 적힌 날짜 19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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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충성가에도 뒷장 교가에도 황제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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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이것은 대한제국시대 때 불렀던 교가
< 대한제국 :1897년 10월 12일부터 1910년 8월 29일까지의 조선의 국명>





만약 이 가사가 을사늑약 후라면 이렇게 쓸 수 없다.

즉 이 책은 상황적으로 1903년이 맞다고 본다.



따라서 1908년 찬미가에 나오는 애국가 가사를 윤치호가 지었다고 볼 수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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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 말에서
식민지 시기를 거쳐
해방까지

애국가는 우리가 알기 훨씬 오래 전부터
더 많은 사람들을 거쳐 전해졌을 수도 있다.











출처:
그것이 알고 싶다. - 누가 썼는가? 애국가 작사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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