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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하게 보는 에도시대 일본의 광공업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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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NoirCafé
추천 : 7/4
조회수 : 2504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4/07/12 22:38:28
현대 일본은 천연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국가로 알려져있으며, 공산품의 수출을 통하여 획득하는 재화를 통하여 부족한 천연자원을 해외로부터 수입하는 국가로 인식되곤 한다.

하지만 전근대시대의 일본은 현대의 일본과 180도 다른 무역구조를 가진, 즉 천연자원을 수출하고 공산품, 사치품 등을 수입하는 지역이었다. 전근대시대 일본은 서구에서 '황금의 나라 지팡구'로 알려져 있었으며, 이 명성에 걸맞게 세계 수위의 양을 자랑하는 귀금속이 일본 열도에 부존되어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역시나 비교적 가치가 높은 광물인 구리 또한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었고 이러한 일본의 막대한 귀금속 및 금속 자원들은 16세기 들어 동아시아에 출현한 유럽상인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다만 그 이전시대에는 이러한 막대한 양의 귀금속의 광맥을 발견하지 못한 상태였으며, 구리 광업의 경우에는 채광기술과 제련 및 주조기술의 미숙으로 인하여 일본은 이러한 구리 자원을 잘 활용하지 못했다. 무로마치 시대와 전국시대 초중엽 일본은 구리를 명(明)에 수출하고 반대급부로 구리로 만들어진 중국 화폐인 영락통보(永樂通寶)를 수입하였으며, 이러한 경위로 일본시장에 수입된 영락통보는 17세기 초엽에 새로이 수립된 에도막부가 영락통보 우대를 금지할때까지 일본에서 최상의 지위를 누리는 화폐로서 통용되었으며 17세기 말까지 꾸준히 거래화폐로 이용되었다.
  
 이렇듯 본래 일본의 광공업은 안습한 수준이었으나 16세기에 들어 이와미 은광 등 대규모 광산의 발견 및 기술의 수입과 더불어 빠르게 발전하게 되며 그후 광공업 분야에서 세계적으로도 독보적인 지위를 향유하게 된다.



 개관

 먼저 16세기 초중엽에 접어들어 이와미 은광을 발견하게 되며, 이때를 즈음하여 중국 혹은 조선을 경유하여 하이후키(灰吹) 제련법이 일본에 전파된 것으로 보고있다. 하이후키 제련법이란 납을 이용하여 광석 내의 광물을 추출하는 제련기술로 이로 인하여 비교적 높은 순도의 광물을 추출해내는 것이 가능하여 졌으며 비교적 이후(16세기 후엽)에 전래된 난반부키(南蠻吹) 제련법, 그리고 광공업의 발전과 함께 개발된 각종 측량,채광,제련,배수,통풍 기술들은 여기에 날개를 달아주었는데, 이는 전국시대 당시 자국의 국력강화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던 다이묘(大名; 영주)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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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미 광산)

 위에서 소개된 이와미 광산은 16세기 후반만 하더라도 지배자가 5차례나 바뀔정도로 치열했던 쟁탈전의 쟁탈대상이 되었으며, 이는 광산이 당시 일본 각 영주들이 얼마나 이를 중요시 했으며, 또한 그들의 국력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인지 가늠케해 준다. 실제로 전국시대에 이름을 떨친 영주들 중 대다수는 일본 내 주요광산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초중기 전국시대의 양대세력으로 이름을 떨쳤던 타케다(竹田)가문과 우에스기(上杉)가문은 각각 카이 지방과 사도 섬에 존재하는 대규모의 금광을 보유하고 있었다.

 비단 전국시대 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전쟁상태가 종식된 이후에도 광공업은 일본의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으나 이의 무역은 점차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의 패권을 장악한 17세기에도 일본은 여전히 귀금속 수출국이었다. 하지만 지난의 거진 100년간 그 전성기를 누리던 일본의 귀금속 광업은 점점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하였고, 귀금속을 국부의 원천으로 여기고 있던 신생 막부는 귀금속의 대외유출을 점차 우려섞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은 일본의 정치권력으로 하여금 귀금속의 유출을 자제하게끔 만들었다. 에도막부는 점차 일본의 대외무역을 통제하에 두기 시작하였다. 먼저 일본의 인기수입품인 생사(견직물의 원료가 되는 실)를 구매할수 있는 생사상인을 에도막부가 허가를 내린 자들로 한정짓게 되며, 이러한 맥락하에 하이후키 과정을 거쳐 제련된 순은(에 가까운)의 수출을 금지하고 대신 비교적 은 함유량이 떨어지는 정은(丁銀; 쵸긴)의 수출만 허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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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도시대 일본의 주요화폐로 쓰인 정은(丁銀)

 이러한 에도막부의 중상주의적인 무역성향은 소위 말하는 '쇄국'으로 그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먼저 일본인들의 불법 해외도항을 금지시키고 포르투갈인과 스페인인들이 기독교를 구실로 일본에서 추방당하고 네덜란드인들과의 경쟁에서 밀려난 영국인들이 자발적으로 물러남에 따라 일본과 무역을
유지하는 외국상인은 실질적으로 중국인과 네덜란드인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막부는 히라도의 네덜란드 상관을 나가사키로 옮기고 중국인과 네덜란드인의 무역을 나가사키 한곳에서만 허용하게 함으로 쇄국을 완성하였는데, 이는 보다 더 적은 수의 교역대상과 1개의 막부직할 무역항에서 막부가 인정한 소수의 무역상을 매개로 무역을 하는편이 훨씬 막부의 의도대로 무역을 통제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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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로 문명4 토쿠가와의 선호시빅 선정은 매우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완전소중 귀금속 사수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래 지나지않아 은, 거기에다 추가적으로 구리의 공급이 부족해지며 결국 1660년대 말 막부는 은과 구리의 수출을 전면적으로 금지하게 이르게 된다. 이는 나가사키와 중국,네덜란드 상인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는데 우선 일본의 대외수출품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은과 구리였기 때문에 이 두 품목의 금수는 거의 일본의 무역을 결단대는것과 같은 수준이었으며 이에 대외무역으로 이득을 보던 나가사키 상인들과 외국 상인들에게는 거의 절망적인 선언이었다. 다만 막부도 대외무역에 나가사키 경제는 물론 일본 경제가 영향을 받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근책으로 일본이 보유하고 있는 금화(金貨)의 수출을 허가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대외무역의 두개의 축 중 하나인 중국상인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는데, 이유는 일본에서 금이 은에 대하여 누리는 지위에 비하여 은본위제 하에 있던 중국에서의 금은 상대적으로 그 가치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탓에 막부는 무역유지를 위하여 상대적으로 품위가 떨어지는 은 제품을 일정 허가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난국은 17세기 말 일본에서 구리 광산이 대대적으로 개발되어 대규모의 물량이 쏟아져 나와 새로운 수출품으로 부상한 덕분에 타개된다.



 구리 광산의 개발

 귀금속 광업이 쇠퇴하기 시작한 에도시대 초엽에도 귀금속이 가져다주는 거대한 경제효과에 빛이 가려 구리 광업은 거의 이목을 끌지 못하였다. 오히려 상인들의 구리광산 개발제안에 퇴짜를 놓는 번(藩; 다이묘가 통치하는 지방정권)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은이 수출금지 대상이 되자, 한동안 주목을 끌지 못하였던 구리가 큰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였다. 번(藩)들이 광산 개발에 열을 올린 이유는 비단 광물의 판매대금 뿐만에 있는 것이아닌 광산 주변에 형성되는 광산촌(-村)에도 있었다.

 광업은 대규모의 인력을 필요로 하며 이에 흥하는 광산 주변에는 여기서 일자리를 구하고자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 광산촌이 형성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부유한 광산촌은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곤 하였다. 번이나 막부는 이러한 광산촌을 대상으로 독점적으로 쌀 등을 판매하거나 이곳에서 거래되는 재화와 서비스에 세금을 물리는 방식으로 짭짤한 소득을 올리곤 하였다. 그렇기에 광산은 핵심자산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막부는 여기서 한술 더 떠서 광산에서 채굴된 구리들을 반드시 막부직할령인 오사카로 수송하여 최종제련공정을 거치게 함으로서 추가적인 지대를 확보하였다. 이렇게 은 산업의 쇠퇴는 구리 산업의 발전을 촉발시켜 이의 공급량의 폭발적인 성장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일본의 대외무역을 한동안 더 유지케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17세기 말엽 일본의 구리 광공업의 발전과는 대조적으로 지구 반대편의 주요 구리 공급지역인 스칸디나비아는 정치적인 혼란에 빠져 오히려 구리의 공급량이 줄어들게 된다. 이 기간동안 일본은 세계 구리시장을 독점하게 되며, 일본의 구리는 전 세계 모든지역에서 거래와 가격의 기준이 되었고 이러한 무역호황은 전례없는 황금기인 겐로쿠(元祿) 경제호황을 촉발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된다.

 이러한 구리무역은 1710년대를 기점으로 주요 구리광산의 생산량 격감과 함께 의미있는 추락을 거듭하게 된다. 그리고 두번다시 이전시대의 광공업제품 수출량을 회복하지 못하게 된다. 반면에 일본 내부적으로 주 수입품이었던 생사, 인삼, 설탕 등의 '국산화'가 크게 진척됨에 따라 일본의 대외무역은 수출과 수입 공히 감소하게 된다. 이러한 무역의 감퇴는 막부와 다수의 번의 재정위기를 초래하였고, 이후 100년간 일본 내 다수의 정부들은 재정문제로 골골거리게 된다.



 구리왕 스미토모

 에도시대 일본 구리제련기술의 끝판왕인 난반부키(南蠻吹)를 최초로 습득한 기술자는 소가 리에몬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기술은 몇몇 제련업자에게 전수되었는데 소가 리에몬의 아들인 소가 토모모치도 이 기술을 습득한 자 중 하나였다. 소가 리에몬은 스미토모 가문 출신 승려인 스미토모 마사토모의 딸과 결혼함으로서 스미토모의 성씨를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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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미토모 토모모치)

 스미토모(住友)가문은 원래 무사가문이었으나 전국시대에 온갖 쓴맛을 본 이후 무가(武家)의 세계와 선을 긋게되며 스미토모 마사토모는 승려임과 동시에 쿄토에서 한약방과 서점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스미토모 토모모치 또한 그의 기술을 활용하여 쿄토에서 구리제련업을 시작하였으나 곧 근거지를 쿄토에서 오사카로 옮겨 이즈미야(泉屋)라는 이름의 점포를 설립하게 되는데 당시 오사카는 일본 제련업의 중심지였으나 스미토모 토모모치는 그의 재능을 살려 오사카에서도 두각을 드러내게 된다.

 구리 제련공정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수가 있었는데, 1차공정이 바로 하이후키 기법을 이용한 제련이었다. 하이후키 기법을 거치면 구리광석으로부터 비교적 순도가 높은 구리인 황동(荒銅)을 추출해낼수 있었다. 하지만 이 황동에는 은이나 금이 섞여있었으며 보다 더 구리 본연의 순도를 높일 여지가 있었다. 이에 황동을 제련하는 2차공정이 바로 난반부키 기법을 이용한 제련인데, 난반부키 기법을 거치면 황동으로부터 은과 금을 추출해낼 수 있었고 이는 2차공정으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소득이었다. 또한 이러한 기법을 통하여 불순물이 걸러진 황동은 정동(精銅)이 되는데, 이 과정에서 구리의 중량이 10% 가량 감소하나 고순도였기 때문에 황동에 비해 더 비싼가격에 팔아치울수 있었다.

 1차공정은 비교적 간단한 기술이었고, 대부분의 광산에서 자체적으로 이 공정으로 구리 광석을 제련하여 황동을 생산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2차공정은 고난이도의 기술로 오사카의 특정 제련업자들만이 보유한 독점적인 기술이었다.

 스미토모는 이러한 기술의 독점을 유지하기 위하여 막부 공인하에 카부나카마(株仲間; 일종의 동업자 조합)인 도후키야나카마(銅吹屋仲間)을 결성하게 된다. 이 조합은 소수의 오사카 제련업자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스미토모의 이즈미야는 이 조합의 킹왕짱이었고, 실제로 카부나카마의 16주(株; 일종의 주식) 중 4주를 보유하여 대략 25%의 발언권을 보유하여 이 조합을 자신의 뜻대로 운영할 수 있게 되었고 이 조합을 통해 스미토모를 포함한 소수의 오사카 제련업자들은 거의 150년간 난반부키 기술의 오사카 독점을 유지하는데 성공한다. 
 도후키야나카마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막부에 압력을 행사하여 유관정책의 수립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규모이권집단으로 성장한다.

 스미토모는 제련업 뿐만이 아니라 아키타, 난부 등의 구리광산 개발에 참여하여 구리원석의 채굴업에도 적극 진출하였는데 이중 가장 기념비적인 것은 이요의 벳시 구리광산을 17세기 말엽부터 해당 번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독점으로 운영하기 시작한 것이 그것이다. 구리의 채굴업과 제련업에서 큰 성공을 거둔 스미토모는 기존의 한약재상과 서점은 물론 생사수입업, 금융업 분야에도 성공적으로 확장하여 '일본의 그 누구도 이즈미야에 대항할 수 없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규모의 상공업 제국을 건설하게 되었다. 이 '자본제국'은 오랜기간동안 존속하게 된다.

 비록 18세기에 막부가 수출구리 쿼터의 50%를 삭감하기도 하는등 경영의 악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에도막부에 의하여 단 세개의 구리 수출 허가업자 중 하나로 선정되어 오히려 구리무역에서 입지가 더 강력해지는등 스미토모의 질주는 끝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위기의 조짐이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우선 오사카의 난반부키 기술독점이 깨져버렸으며 개화기의 정치,경제 혼란으로 구리의 가격이 폭락하여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이러한 총체적 난국 하에서 메이지유신과 함께 문명개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원래 스미토모는 '난반부키'라는 기술의 이름에서도 알수 있듯 서양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부흥에 성공한 자본집단이었다. 재미있게도 이러한 스미토모는 19세기 말에 다시 한번 서양의 광업기술, 그리고 제반운영기술을 공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하였고 이를 통하여 침체일로에 있던 자신들의 광산사업을 크게 부흥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근대화된 벳시광산은 이러한 스미토모의 상징물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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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초기 벳시광산)

 역시나 에도시대에 그랬던것처럼 광산업에서 큰 성공을 거둔 스미토모는 광산업에서 확보한 재원을 통하여 무역, 금융, 전자전기, 중공업, 화학 등 근대 일본제국의 대부분의 주력사업 분야로 문어발식으로 확장하는데 성공하여 일본 3대재벌 중 하나로 우뚝서게 된다. 종국적으로 에도시대 일본 최고의 상업집단이라는 명성을 근대시대에도 이어나간 것이다.

 역시나(2) 에도시대 때 그랬던것처럼 일본의 2차세계대전 패배로 일본을 점령한 GHQ의 재벌해체정책의 시행대상 중 하나가 되는 위기를 맞게 되었으나 냉전논리에 의해 이러한 재벌해체안이 크게 완화되어 스미토모 가문의 사업은 현대까지 존속하게 되었고, 그뿐만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일본 3대재벌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종국적으로 스미토모는 400년의 역사를 지닌, 그리고 400년동안 일본은 물론 세계적인 규모의 상업집단들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P.S 막상 다쓰고 나서 보니 전혀 간략하지 않은게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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