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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후한ㆍ강족 전쟁 (2)
게시물ID : history_1703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12
조회수 : 901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07/12 11:28:27

소당강이 몰락하면서 후한에 대한 강족의 공격은 사실상 없다시피 했지만 곧 새로운 문제가 터져나왔습니다. 그것은 후한에 항복하여 후한 영토 내로 이주한 강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삼보, 농서, 천수, 안정, 한양, 금성 등 여러 지역에 분산 이주되어 각 군현의 관리나 지역 호족들에게 혹사 of 혹사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강족들의 불만은 점점 쌓여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강족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 안제 영초 원년(기원후 107년)이었습니다. 당시 후한은 금성, 농서, 한양 등의 지역에 거주하던 강족들을 징발하여 서역원정군을 편성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주천에 이르렀을 때 반란을 일으키고 흩어져 도망쳤습니다. 게다가 이들을 토벌하려고 온 후한의 군사들은 도망친 강족들의 지역을 약탈까지 하면서 남은 강족들도 모두 흩어져 반란에 참가하였습니다. 이들을 이끈 것은 선령강 계통의 추장인 전령이었습니다. 전령이 이끄는 강족 군대는 서역에서 섬서로 향하는 통로를 차단하였습니다.

 

이에 후한 정부에서는 거기장군 등척과 정서교위 임상을 중심으로 한 5만 군대를 보내 이들을 토벌하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등척의 군대는 영초 2년(기원후 108년) 봄에 패배하였고, 임상이 이끄는 군대도 같은 해 겨울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후한의 토벌군마저 패배시킨 전령은 스스로를 천자라 일컫고 다른 강족들을 모아 삼보에서 조, 위 지방을 노략질하고 익주까지 침입했습니다. 이러한 강족의 대대적인 반란에 후한은 서역도호마저 폐지하고 서역경영을 포기할 정도였습니다.

 

이후 강족은 매년 후한을 침입했습니다. 영초 3년(기원후 109년)에는 토벌군이 또다시 삼보에서 강족에게 패배하고, 영초 4년(기원후 110년)에는 한중이 약탈당했고 후한군은 패배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영초 5년(기원후 111년)에 이르러서는 강족은 하동, 하내 지방까지 밀고 내려왔습니다. 당황한 후한 정부는 위군, 조국, 상산군, 중산군 지역에 방루 616곳을 급히 만들어 강족의 공격에 대비하였습니다.

 

이렇게 강족의 공격이 매년 이어지고 후한의 피해도 극심해지면서 금성군치(군치 : 군태수가 재임하는 장소)가 농서군 내의 양무로 옮기기 시작했고, 농서군치는 적도에서 양무로, 안정군치는 우부풍의 미양으로, 북지군치는 좌풍익의 지양으로, 상군군치가 아 지역으로 철수 하였습니다. 후한 정부는 치소를 옮기는 동시에 군의 백성들에게 철수를 명령하였습니다. 이를 거부하는 백성들의 가옥은 모두 파괴하였고 농작물은 익지 않은 채로 베어버렸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동안 삶의 터전을 버리고 내지로 이주한 백성들 상당수는 이주 도중에 사망하거나 토호의 노비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후한 정부마저 치소를 옮길 정도로 강족의 기세가 점점 커지면서 이에 호응하는 후한 측 사람들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한양군의 두기와 두계공 형제, 한양군의 왕신 등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두기는 한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했지만, 동생인 두계공은 전령을 우두머리로 하는 강족의 부장에 임명되었습니다. 다음해인 영초 6년(기원후 112년)에 강족을 부흥시킨 전령이 죽고 그의 어린 아들 영창이 뒤를 잇고, 낭막이 영창을 보좌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후한 정부 역시 강족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합니다.

 

 

※ 출처 : 중국의 역사 진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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