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5년, 명명제(明命帝)의 명으로 카톨릭 금지령이 내려지긴 했지만 믿는다고 잡아다 죽인다든지 극형으로 다스리는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국내에 머무르고 있던 카톨릭 선교사들도 포교행위는 금하되, 외국서적을 번역하는 일에만 종사할 것을 요구하는 등, 탄압의 수준이 그리 가혹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1830년대에 들어서면서 '레 반 코이의 난' 이라는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카톨릭에 대한 탄압과 박해가 이루어집니다.
레 반 코이의 난은 1833년, 베트남 남부에서 당시 한창 이루어지던 명명제의 과도한 중앙집권화 정책, 특히 명명제가 남부에 대한 직접적인 통치를 선언한 것에 대한 반발, (자꾸 다른 얘기로 새는 것 같아 좀 그렇지만 이왕 쓴김에 몇글자 적어보자면 당시 베트남은 아무래도 나라가 길게 생겨먹었던지라 북부, 중부, 남부로 나누어 통치했었고 중부는 황제가 직접 통치, 북부와 남부는 공신들에게 분봉하여 위임하는 식의 형태였습니다) 특히 레 반 코이(黎文? : 코이에 해당되는 한자가 나와있지 않아 ?로 썼습니다) 라는 사람의 주도 하에 일어난 사건을 말합니다. 특히 레 반 코이가 자신의 양부이자 완 왕조의 개국공신이었던 환관 여문열(黎文悅 : 베트남어로는 레 반 주엣)이 명명제에게 핍박당해 죽은 일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던 것이 도화선이 되었던 것인데, 여기서 레 반 코이는 선제 가륭제의 차남이자 명명제의 형인 완복경(阮福景)을 새로운 황제로 추대할 것을 내세우며 명명제를 부정, 완 왕조를 전복시키려 들었습니다.
난은 3년씩이나 이어졌고 한때 남부 최대의 도시인 사이공 (오늘의 호치민시)을 두들길 정도로 막강했는데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베트남 내부의 혼란을 틈타 한몫 챙기려는 태국이 가세하여 반란군을 지원하니 이는 완 왕조에게 상당한 위협이었습니다. 결국은 어찌어찌 난은 진압했습니다만 난 직후 뒷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난에 적잖은 카톨릭 신도들이 가담했고 또 지원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명명제는 격노하여 1836년, 칙령을 내려 국내의 외국 선교사들을 살해해도 죄를 묻지 않을 것이며 그들을 숨겨주는 자 또한 극형으로 다스리겠다는 엄포를 놓습니다.
결국 이 칙령으로 6명의 선교사들이 극형에 처해졌고 수많은 베트남인 신도들이 처형당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에서의 카톨릭 신도들은 꾸준히 증가했고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무려 45만명에 달하게 됩니다. 베트남에서 자국 신부들이 처형당한 것에 대해 프랑스도 분명 이 사실을 알았을테고 바로 보복에 나섰을 것 같아보이지만 프랑스가 본격적으로 베트남을 족치러 오는 시기는 명명제, 소치제(紹治帝)에 이은 4대 황제 사덕제(嗣德帝)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