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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를 통해 바라본 원소 - 1
게시물ID : history_1700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이응미음!
추천 : 16
조회수 : 2210회
댓글수 : 10개
등록시간 : 2014/07/10 17:40:43
안녕하세요//
지난번 글에서는 간단하게 정사, 그리고 연의의 차이점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써봤습니다..만 묻혔네요 ㅠㅜ
혹시 관심 있으신 분 있으시면 요기로 보러 가시면 됩니다!(http://todayhumor.com/?history_16845)
 
참고 자료는 주로 정사 삼국지 이고, 일부 후한서를 사용 하였습니다. 주로 구 파성넷 번역 자료를 참고 하였습니다.
일단 참고자료는 링크로 대체하고, 혹시 원 번역가님 께서 불편하시면 글은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이탤릭체는 정사의 내용을 서술한 것으로, 길어서 읽기 불편하시다면 각 항목 끝에 한줄 요약 달아놨습니다!
시작하겠습니다.
 
1. 원소의 출생
 
 원소(袁紹)의 자는 본초(本初)이며, 여남(汝南)군 여양(汝陽)현 사람이다.
고조부는 원안(袁安)으로 한의 사도(司徒)를 지냈다.
원안 이하로부터 4대가 삼공의 지위에 오르니, 이로 말미암아 그 위세가 천하를 기울였다. 
- 정사 삼국지 원소전
 
원소는 곧 원봉의 서자(庶子)인데, 원소는 원술의 배다른 형으로 (원소가) 출생하고 난 후에 원성이 (원소를) 아들로 삼았다」- 배송지 주

 
 원소는 연의에서 항상 말하는 것 처럼 4대에 걸쳐 삼공의 지위를 누린 훌륭한 가문 출신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원소의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 고조 할아버지가 최소 장관에서 국무총리 급의 벼슬을 받은 것 입니다.
 
 하지만, 원소는 소위 완전한 명문가 자제라고는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일단 원소의 어머니는 노비였습니다. 정사 삼국지, 그리고 원소 열전에는 그저 '서자' 라고만 표현하지만,
그 외의 주석에서는 '얼자' 라고 표현하며, 이는 종의 자식을 의미 합니다.
원소의 적이었던 공손찬 전을 살펴보면 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춘추」春秋의 뜻에서는 자식은 모친의 지위에 따라 귀해진다 했습니다. 원소의 모친은 비사(婢使, 계집종)이니 원소는 실제로는 미천(微賤)한 자로 다른 이의 후사가 될 수 없고 의(義)로 볼 때 마땅한 일이 아닙니다...
신이 또한 매번 후장군(後將軍) 원술(袁術)의 서신을 받아보면 그가 이르길 원소는 원술의 일족이 아니라 했습니다.
- 정사 삼국지 공손찬전
 
 위 글은 공손찬이 원소와 전쟁하기에 앞서 그 정당성을 논하기 위해 중앙정부에 보낸 서신 입니다.
요약하면 '종년 자식이 왜 저러고 있냐. 원술은 심지어 자기네 집안도 아니라고 하더라' 겠네요.
즉, 원소는 종의 자식이며, 위의 '서자' 였다는 서술과 합해서 생각해 보자면 원소는 원봉의 얼자 였으며 원성의 서자로
들어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원술(원술이야말로 정말 원씨의 적통 후계 이지요)은 원소가 원씨도 아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는 실제로 원소가 원씨도 아니라는 것 보다는, 원씨의 적통으로써 원소를 디스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할 듯 합니다.
 
한줄요약: 원소는 비록 명문가 출신이긴 하나, 종의 자식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갖고 있던 인물입니다.
 
2. 2번의 삼년상과 낙양으로 귀환
 
 이러한 출생을 갖고 있는 원소는 이후 낭( 관리의 보조직 )으로 정치에 입문하였고, 복양장으로 제수되게 됩니다.
이후 삼년상을 연속으로 치르는 것을 통해서 원소는 본격적으로 낙양의 정치계에 주목을 받게 됩니다.
 
 원소는... 어미의 상을 당하였고, 상복을 벗게 되자 또 돌아가신 부친을 추모해 상복을 입으니, 무릇 6년간이나 움막살이한 것이다... 천하가 그 명성을 듣고 서로 만나지 못한 자가 없었다... 벼슬하어 오라는 명에 응하지 않았다. -정사 원소전
 원소의 이런 삼년+ 삼년 총 6년상에 관한 내용은 후한서에 역시 등장합니다.
 
 원소는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관직을 떠났다. 3년의 상례를 마치자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것을 추감(追感)하여 다시 아버지의 복상(服喪)을 지냈다. 복상(服喪)을 마치고 낙양(洛陽)으로 이주하였다. 원소는 외모가 빼어나고 위엄 있는 모습이었는데 명사들을 아끼고 봉양하였다. 이미 조상이 여러 대에 걸쳐 삼공를 지내었으므로 빈객들이 귀부 한 바 되었고 원소 역시 더욱 마음을 기울여 자신을 굽히고 사람들과 사귀니 현사들이 그의 집으로 앞을 다투어 달려오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원소는 선비들이라면 귀하고 천한 신분을 무론하고 자신과 대등한 예로 대하니, 원소를 찾아온 빈객들의 귀하고 낮은 여러 가지 수레들이 잇대어 거리를 가득 메웠다. - 후한서 원소 열전
 
 심지어 몇 백년 후의 조선시대에도 삼년상을 치르다가 줄초상을 치른 적이 있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그만큼 삼년상은 중노동에 속했습니다. 사서 삼공을 지낸 명문 집안의 삼년상은 당연히 주변의 이목이 집중되는
행사였고, 원소는 근 6년동안 이를 완벽하게 수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원소에게 전국적인 명성을 줍니다. 
 유명해진 원소를 보기 위해서 수많은 빈객이 방문하였습니다.
여기서, 원소는 신분이 낮은 선비에게도 대우를 잘 해주며, 이는 후에 원소의 정치적인 기반이 됩니다.
 
원소는 이를 통해
 
1. 3년상을 2번이나 완벽히 수행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렸고
2. 이러한 명성을 보고 방문한 인재를 귀천을 막론하고 잘 대하여 천하에 명성을 떨칩니다. 
 
 
이후 6년 간의 상을 마치고 전국적인 명성과 함께 원소는 낙양으로 돌아옵니다.
 
 (*당시 후한의 중앙 정치는 크게 두 개의 세력, 환관의 탁류와 그에 반대하는 청류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제 이전 청류는 외척 두무와 함께 환관 세력을 뒤집어 엎고자 하다가 오히려 역으로 당하게 됩니다.
이를 당고의 옥 이라고 합니다.- 기본적인 사항은 http://ko.wikipedia.org/wiki/%EB%8B%B9%EA%B3%A0%EC%9D%98_%EC%98%A5 위키피디아 당고의 옥을 보셔요!) 
 
  원소가 낙양으로 돌아왔을 때 그 유명한 십상시는 다시 한 번 청류파를 족치는 중이었습니다.
 원소는 이러한 상황에서 오히려 청류파와 손을 잡기 시작합니다. 청류파의 대표 인사인 하옹과 친분을 쌓으며,
 청류파를 숨겨주는 계획을 논의합니다.
 
 원소는 그를 흠모하여 더불어 왕래하며 사귀었고 마침내 분주지우의 연을 맺었다.
이무렵 당사가 다시 일어나 모두 난을 피해 떠났는데 하옹은 몰래 낙양으로 들어갔고 원소를 따라 계책을 의논했다.
- 후한서 하옹열전
 
 원소는 두 번의 삼년상과, 빈객에 대한 예를 갖춘 대접 + 원씨 가문 버프로 인해서 전국에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본래 원가는 탁류와 적절히 타협을 하여 그 권력을 유지하고 있던 집안이었습니다.
 하지만, 원소는 반대로 청류에게 손을 내밀고 관계를 맺어 그 신뢰를 쌓게 됩니다.
 
 본인의 6년 상 수행 전국적인 명성+ 원가의 명성+ 청류파와의 친분
 
 위 3가지 요소들로 인해서 원소는 전국의 선비들에게 더더욱 명성을 떨침과 더불어서 십상시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중상시(中常侍) 조황(趙黃)이 여러 황문(黃門)의 관리들에게 이르길 “원본초는 앉아서 명성을 지어 팔고, 소환에 응하지 않고 죽음을 키우는 선비이니, 이 아이가 뭘 하려는지 모르겠는가?”- 정사 원소전 배송지주
 
 십상시중 한명인 조황이 한마디로 '저 새낀 뭔데 죽으려고 저러냐' 고 이야길 했다는 것이지요.
 나중에는 십상시들이 벼슬을 주어 회유하려 해 보지만, 원소는 병을 핑계로 정국에 절대 나서지 않습니다.
원소는 조용히 이곳 저곳 숨어있는 청류파와 교류를 쌓고, 본인의 명성을 점점 높이고, 십상시를 쫓아낼 방법을 찾습니다.
 
(사실, 당고의 옥은 표면적으로는 탁류의 승리이나, 전국의 선비들의 공분을 사게 만든 무리수 였습니다.
원소가 만약 제 2의 당고의 난을 시작 한다면 분명 명분은 원소쪽에 있었을 것 입니다.)
 
 만약, 원소가 그냥 허섭스레기 같은 가문 출신이라면 그냥 대낮에 때려 죽이면 되겠지만, 하필 사서 삼공 원가의 자식입니다.
결국, 십상시로써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아무도 모르게 콱 암살해 버리는게 가장 편했겠지요.
 
이건 사견입니다만, 낙양으로 이주한 이후 원소는 암살 위협에 시달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복상을 마치고 낙양으로 이주한 후에 원소는 함부로 빈객들과 교류하지 않았는데,
천하에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 아니면 원소를 만나 볼 수 없었다. - 후한서 이현의 주석
 
 원소는 낙양에서 십상시에게 상당한 어그로를 끌었을 확률이 높으며, 6년상땐 사람 잘만나다가 갑자기 사람을 피하게 된 것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원소의 집안에서는 당연히 원소의 이런 행동을 걱정합니다.
 
원소의 숙부 원외가 이를 듣고 원소를 꾸짖기를 “네가 또한 우리집을 망치겠구나!”라 했다. 원소가 이에 대장군의 명령에 일어나 응하였다 - 정사 원소전 배송지주
 
원소의 숙부인 태부(太傅) 원외(袁隗)가 소문을 듣고는 원소를 불러 조충이 했던 말로 그를 책망하였으나 원소는 끝내 고치지 아니하였다. - 후한서 원소 열전 
 
 정사 삼국지와 후한서의 서술이 다릅니다만, 어찌되었던 간에 나중에 원소는 곧 대장군 하진 밑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사견으로는, 황건의 난 이후에 당고의 옥을 당한 청류파를 대거 사면하였었는데( 노식 역시 다시 복직하게 되죠)
이들의 복직 이후에 환관의 대척점인 하진의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사견으로는, 본디 청류파를 규합하여 당고의 금 시즌 2 같은 환관을 물리칠 계획을 세운 듯 하나
황건의 난 이후로 청류파의 대규모 사면이 이루어진 마당에야 직접 임관하여 환관의 뿌리를 뽑을 생각을 한 듯 합니다.
 
 하진의 밑에서 일하기 전까지 원소가 행한 것과 그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세줄 요약
 
1. 6년상을 성공적으로 치르므로써, 원가의 명성과 합쳐 전국적인 '원소'의 명성을 드높임
2.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예를 갖추어서 선비를 대해 명성을 높임과 동시에 미래의 인재를 찾음
3. 낙양에서 청류파와 어울리면서 본인의 가문빨+명성을 적절히 이용, 정치적 신성으로 등장
 
황건의 난이 아니었다면 원소가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되던가, 당고의 옥 season2를 찍거나
낮은 확률로 아예 환관들 싹 쓸어버릴 수 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황건의 난으로 인해 청류파가 대거 조정에 귀환하고
이는 원소가 행보를 수정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3. 십상시의 난 -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을 불태우다. 
 
하진의 밑에서 원소는 서원팔교위로 일하게 됩니다. (더 자세한 사항은 넘어갈께요..)
이 부분을 설명하기에 앞서 십상시의 난에 대해서 간단하게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악자(樂資)의 산양공재기(山陽公載記)에 말하기를 “소황문(小黃門) 건석(蹇碩)을 상군교위(上軍校尉)로 삼고,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 원소(袁紹)를 중군교위(中軍校尉)로 삼았으며, 둔기교위(屯騎校尉) 포홍(鮑鴻)을 하군교위(下軍校尉)로 삼고, 의랑(議郞) 조조(曹操)를 전군교위(典軍校尉)로 삼았으며, 조융(趙融)을 조군좌교위(助軍左校尉)로 삼고, 풍방(馮芳)을 조군우교위(助軍右校尉)를 삼았으며, 간의대부(諫議大夫) 하모(夏牟)를 좌교위(左校尉)로 삼고, 순우경(淳于瓊)을 우교위(右校尉)로 삼았으니 무릇 8명을 일컬어 서원군(西園軍)...- 후한서 원소 열전 이연의 주석
 
 관도대전의 스타 순우경도 보이고, 원소의 x알 친구 조조도 보이네요.
 
 중요한 것은 저기의 소황문 건석 입니다. 건석은 십상시중 한 명 입니다.
저기 서원팔교군은 제가 알기로 수도 방위병 이고요.
한 마디로, 이 서원 팔교군은 궁궐의 가장 강한 무력입니다.
 
 앞서 대장군 하진이 환관의 반대파라고 했는데,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진이 대장군이 된 것은 그 여동생이 황후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었는데요.
그 여동생이 황후가 되게 만들어 준 것이 바로 십상시 입니다.
 
 하지만, 대장군이 되고 권력을 잡게 되자 하진은 슬슬 허파에 바람이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환관 vs 외척 싸움에서 환관이 싫었던 청류파는 그 반대파인 하진의 밑에 붙기 시작하고요.( 어느나라 정치 보는 것 같죠?)
당연히 청류파의 스타로 부상한 원소 역시 하진의 밑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진은 점점 기고만장 해져 갑니다.
십상시는 황건의 난 이후에 줄어든 세력으로 조용히 사리고 있습니다.
 
 건석은 이러한 상황이 맘에 들지 않아 수도 방위군을 끌고 반란을 일으키려 합니다..만
다른 십상시는 오히려 이러한 건석을 밀고하고 본인들의 안전을 사고자 합니다. 덕분에 하진은 군권 역시 장악하게 되지요. 
 
 하지만, 지금 하진 밑에 있는 원소 등의 청류파는 이러한 십상시에 대한 온건한 태도가 꺼림칙 합니다. 
전에 당고의 옥 사건도 그렇고, 십상시의 저력은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문제는, 하진의 힘은 그 동생, 즉, 황후에게서 나온다는 것 입니다. 태후는 어찌되었던 간에 자신을 황후로 만들어 준 십상시를
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또한, 환관들이 뇌물을 태후에게 엄청 먹이기도 하고요.
 
후.. 잡설이 길었습니다...
 
 이제 수도 군권도 잡았겠다 청류파 대거 영입해서 명분도 있겠다..
하진은 십상시를 궁지에 몰아 넣었지만, 저런 배경 하에서 하진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소와 청류파는 꾸준히 하진에게 행동을 취할 것을 촉구합니다.
 
원소가 하진에게 다시 이 일에 결단한 것을 권하고 두 번 세 번이나 촉구했으나, 하진은 허락하지 않았다. - 정사 원소전
 
배송지 주에서는 좀 더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처음 원소가 하진을 설득하길 “황문과 상시들이 누대로 크게 성(盛)하여 그 위엄이 해내를 복속시키고 있어, 이전 두무(竇武)가 이들을 주살하려 했지만, 오히려 해를 입었으니, 다만 앉아서 하는 말이 누설되어 오영(五營)의 군사들이 병력이 되었던 까닭입니다. 오영의 군사들은 경사(京師=수도)에서 태어나 성장하여, 중인(中人=환관)들에 복종하여 두려워하는데, 두씨가 반대로 그들의 예봉을 사용하니 마침내 과연 반도들이 황문에게 귀복하여 이로써 스스로 파멸하게 된 것입니다...하진이 그 말을 받아들였으나, 후에 다시 의심이 생겼다... 하진은 결국 따르지 않았다가 결국 패망하고 말았다.- 정사 원소전 배송지주
 
 원소는 이에 대해서 그의 가장 큰 실수, 즉, 동탁을 중앙 정부로 부르게 됩니다.
 
원소가 하진에게 동탁 등 여러 군대를 불러들여 태후를 협박하고 모든 환관들을 주살할 것을 권하니 원소를 승진시켜 사례교위(司隸校尉)를 삼았다. - 정사 원소전
 
 그렇다고, 연의에서 처럼 병신이라서 병사를 안쓰고 부르자고 한 것은 아니고, 동탁 등 지방 제후를 불러 친 십상시파가 된 황후를 협박하고, 이를 통해서 십상시를 처리하자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그 이후 뭐 다들 아시다시피 하진은 십상시한테 암살 당하게 됩니다.
사실, 이것은 십상시 입장에서는 마지막 발악이었습니다. 이미 군권도 털리고, 명분도 털리고, 황건의 난 이후 청류파는 대거 복귀해서 십상시는 가만히 앉아서 죽기 vs 발악하고 죽기 중에 선택해야 할 판이었습니다. 
하진이 암살당한 이후, 원소는 양아치 동생 원술과 십상시를 모조리 때려 잡습니다.
 
 중상시 단규(段珪) 등이 태후의 명이라 속여 하진에게 의논하기 위해 들어오라고 하여 마침내 죽이니, 궁중에서 난이 일어났다. 원술이 거느린 호분 병사들이 남궁의 가덕전(嘉德殿)과 청쇄문(靑瑣門)에 불지르고, 단규 등을 압박해 나오게 하려 했다. 단규 등은 탈출하지 못하자, 황제[이 불운의 황제를 역사서에선 소제(少帝)라 부르고 이름은 유변(劉辯)입니다]와 황제의 동생 진류왕(陳留王)을 위협해 소평진(小平津)으로 달아났다. 원소는 이미 참수한 환자들을 사례교위 허상(許相)에게 처리하게 하고, 마침내 병사를 거느리고 여러 엄인(閹人=환관)들을 체포하니, 노소를 가지리지 않고 다 죽였다. 혹 수염이 없어 (환관들로) 오인하여 죽이는 일이 있으니, 스스로 형체를 보여주어 나중에 죽음을 면할 지경에 이르렀다. 
 환자들 중에는 혹 선행을 행하여 스스로를 보전하였지만 오히려 이러한 일에 이르렀다. 그 마구 죽이는 것이 이와 같았다. 죽은 자가 2천여명이나 되었다. 단규 등을 급히 추격하니 단규 등은 모두 강으로 달아나 죽었다. 황제가 환궁하게 되었다.
- 정사 원소전
 
 결국 십상시는 원소가 때려 잡았으나, 동탁이 낙양에 도착해서 정원의 세력을 흡수하고
원소가 어어 하는 사이에 가장 강한 군사력을 쥐고 주도권을 잡습니다.
동탁은 원소를 불러 황제를 폐할 것을 논하는데, 원소는 이에 불응하고 기주로 도주하게 됩니다.
 
 동탁이 원소를 부러 황제를 폐위하고 진류왕을 옹립할 것을 모의하였다. 이때 원소의 숙부 원외가 태부(太傅)가 되었는데, 원소가 (모의할 것을) 거짓으로 허락하고, 말하길 “이것은 큰 일이니, 나가서 마땅나서 태부와 의논하십시오”라 했다. 동탁이 말하길 “유씨의 종족은 다시 남겨 둘 순 없소”라 했다. 원소가 불응하여, 칼을 가로 눕히고 길게 읍(揖)한 후 도망갔다. - 정사 원소전
 배송지주 에서는 좀 더 다이나믹 하게 해당 장면을 묘사합니다. 무슨 칼을 뽑고 어쩌교.. 연의에서도 나오는 묘사지요. 
 어쨌든 원소는 기주로 도망쳤습니다.
 
 동탁의 수하들은 동탁에게 원소가 가문빨+개인 명성을 기반으로 병사를 일으키면 골치 아프니 차라리 벼슬을 주라고 합니다.
하지만, 원소는 벼슬을 받자 오히려 그것을 기반으로 난을 일으킵니다.
 
한줄요약: 원소는 하진의 우유부단함에 못 이겨 동탁을 불러왔으나, 감당하지 못하여 기주로 도망가서 동탁을 토벌코자 합니다.
 
4. 반동탁 연합

원소가 마침내 발해에서 병사를 일으켜 장차 동탁을 주살하려고 했다. 
원소는 스스로 거기장군(車騎將軍)이라 호칭하며 맹주가 되어 기주목 한복(韓馥)과 함께 유주목(幽州牧) 유우(劉虞)를 세워 황제로 삼고, 사신을 보내 문서를 받들고 유우에게로 가게 하니, 유우는 감히 받지 않았다.- 정사 원소전

초평(初平) 원년(元年), 원소는 마침내 발해에서 기병하여 종제인 후장군 원술, 기주목 한복, 예주자사 공주(孔伷), 연주자사 유대, 진류태수 장막, 광릉태수 장초, 하내태수 왕광, 산양태수 원유, 동군태수 교모, 제북상 포신 등과 더불어 동시에 함께 군사를 일으키니, 무리는 각기 수만 명을 헤아렸고 동탁을 토벌하는 것으로써 명분을 삼았다. 원소는 왕광과 더불어 하내(河內)에 주둔하였고, 공주는 영천(潁川)에 주둔하였으며, 한복은 업(鄴)에 주둔하였고 나머지 군대는 모두 산조(酸棗)에 주둔하여 서로 맹약(盟約)하고 원소를 추대하여 맹주를 삼았다.- 후한서 원소열전

 이후, 다들 아시다시피 동탁은 황제를 폐하고 진류왕을 옹립하게 됩니다. 이후 설명하겠지만, 유우는 삼국지 정사 전체를 통틀어서
사견으로는 한나라의 진정한 충신으로써의 면모를 보이곤 하는데요. 어쨌든, 원소는 동탁이 옹립한 황제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인망이 있는 왕족을 옹립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우리 충신인 유우는 단호하게 이를 거절하고 한복, 원소의 사자를 목을 베어버립니다.  
 
 조조 등 소수 군웅은 유우 옹립에 반대하였으나, 원소의 당시 명성은 대단하였으며, 대다수의 군웅이 찬성했었습니다.
(조조는 어쨌든 적통이라는 입장이었습니다.)
(원술 역시 반대 했습니다만.. 그 이유는 역시 또라이 답게 황제가 없는 세상이 좋아서...)
 
 
그리고 192년, 동탁은 이런 원소의 태도에 즉답을 해주죠.
 
무오일(18일), 동탁이 태부(太傅) 원외(袁隗), 태복(太僕) 원기(袁基)를 죽이고 그 일족을 멸했다 - 후한서 효현제기 

원씨 일가를 낙양에서 싹 다 죽여버립니다.
 
 이제 원소의 연합군은 다 모였습니다. 동탁은 연합군에게 사자를 보내 이들을 해산하려 하였으나, 원소는 패기 넘치게 모조리 목을 잘라 버립니다. 그만큼 동탁의 정통성에 대한 전국의 반응은 좋지 않았습니다.
 
 이에 원소의 숙부 원외(袁隗)를 주살하였고 원소의 종족 중에 경사(京師)에 있는 자를 모조리 진멸(盡滅)하였다. 동탁은 대홍려(大鴻臚) 한융(韓融), 소부(少府) 음순(陰循), 집금오(執金吾) 호모반(胡母班), 장작대광(將作大匠) 오순(吳循=吳脩), 월기교위(越騎校尉) 왕괴(王瑰)를 파견하여 원소 등의 여러 군대들을 달래 해산시키려 하였다. 원소는 왕광(王匡)으로 하여금 호모반, 왕괴, 오순등을 주살하였고 원술 또한 음순을 잡아 주살하였는데, 오직 한융(韓融)은 명성과 덕망 때문에 죽음을 면하였다. - 후한서 원소 열전
 반 동탁 연합군의 행보는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반동탁 연합군은 기세 넘치게 낙양 근교까지 넘어가게 됩니다. 특히 원술은 손견을 내세워서 직접 낙양을 수복하여 인정을 받게 됩니다.
 
원술(袁術)이 장수 손견(孫堅)을 보내 동탁의 장수 호진(胡軫)과 양인(陽人)에서 싸웠고  호진군이 대패했다. 이에 동탁이 낙양의 여러 황제 능(陵)을 파헤쳤다. - 후한서 효헌제기
 

동탁이 낙양에 불지르고 무덤 파해치고 사람 싹 죽이고 도망가자
목적의식이 없어진 반 동탁 연합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나게 됩니다.
 
모두 설명하기보다는 원술 열전에서 인용한 문구로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원술의 사촌형 원소袁紹는 손견이 동탁을 공격하러 가 돌아오지 않았고 멀었기에, 그의 장수인 회계會稽의 주흔周昕을 파견해 손견의 예주를 빼앗게 했다. 원술은 노하여 주흔을 공격해 달아나게 했다. 원소는 유우劉虞를 황제로 세우기를 원해 의논했는데, 원술이 제멋대로 행동하길 좋아하여 황제가 서는 걸 꺼렸기에 공의公義를 핑계로 대며 들어주지 않았고, 이 불화가 쌓여 마침내 대립했다. 이에 각자 외교로 무리를 모으며 서로 도모함으로써, 원술은 공손찬公孫瓚과 맺어졌고 원소는 유표와 이어졌다. 호걸들이 원소에게 많이 붙기에 원술은 노하여 말하길 “천한 것들이 나를 따르지 않고 우리 집 종놈을 따르는구나!” - 후한서 원술 열전
 
 딴소리지만, 항상 원술의 열전을 보면 패기가 넘쳐요. 시원시원하게 생각나는대로 뱉고 삽니다.
 
 반동탁 연합은 흐지 부지로 끝나고, 결과적으로 공손찬-원술 라인과 원소-유표-등의 라인으로 정리가 됩니다.
 
한나라의 정통성, 권위는 반 동탁 연합군이 나름 황제의 사자인데 목을 베어 조리 돌림을 함으로써
무너지게 되고, 반 동탁 연합군은 흐지부지 되어 군웅할거의 시대가 도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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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보니까 내용도 별로 없는데 글만 길어졌네요..ㅜㅠ 잘라서 서술할 생각은 없었는데
생각보다 일대기 형식으로 다루려고 하다 보니 요약본만 해도 제 능력으로는 되게 오래 걸리네요... 죄송합니다 ㅠㅜ
 
일단은
 
정리하자면
 
1. 원소는 분명 사세 삼공의 명문가 출신이나, 노비의 자식이라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2. 원소는 젊은 시절 6년간의 상 + 빈객에게 예의를 갖추기+ 청류파와의 결탁 등 영리한 행보를 통해서
  
가문빨과 개인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여, 반 동탁 연합까지의 시점에서 가장 유명한 군웅이 됩니다.
 
이는 연의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가문빨 밖에 없는 병신 도련님 이미지와 가장 큰 차이라 생각합니다.
(그건 원술이겠죠?) 
 
3. 동탁을 불러옴으로 인해서 원소는 결국 전국에 몇십년이 가는 피바람을 불러 일으킵니다..
 
 
다음에는 특히 연의에서 서술이 약하게 되어있던 원소의 군웅할거 시절의 군벌로서의 행보
그리고 제가 능력이 된다면 조조의 사실상 끝판 왕인 관도대전에 대해서 간단하게 서술해 보고자 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 사이트
 
구 파성넷(http://rexhistoria.net/
- 후한서
- 정사 삼국지
 
입니다.
 
 
-이전 글 http://todayhumor.com/?history_16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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