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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후한ㆍ강족 전쟁 (1)
게시물ID : history_1700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10
조회수 : 1185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4/07/10 16:32:57

현재의 섬서성 서부와 감숙성 동부 그리고 청해성 동부의 산악지대에는 티베트 계통의 저족과 강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연원은 꽤 오래되어 은나라 갑골문에 따르면 강방이라 불렸고, 은나라에 조공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은주혁명 때 주나라를 지원하였고, 춘추시대 때 진(秦)이 강성해지면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월준강, 광한강, 무도강 등으로 여러 부족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공손앙(상앙)을 등용하여 진나라를 강대국으로 이끈 진효공 때 이들은 진에게 굴복하였고 이후에도 진나라 밑에서 지냈습니다. 하지만 전한 초에 흉노의 선우인 묵돌이 등장하면서 흉노의 힘이 강해지자 이들은 흉노에 귀부하여 전한의 서부 지역을 자주 침범했습니다. 이들이 강성할 때에는 농서까지 진출하여 흉노와 함께 전한의 큰 위협이 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전한 무제가 하서 지역에 네 개 군을 설치하여 흉노와 강족의 통교를 막아버리면서 이들은 황중으로 쫓겨났다가, 전한 선제 무렵에는 흉노와 연합하여 하서 지역을 공격하지만 조충국 등이 이끄는 전한 군대에게 제압당하였습니다. 이후 강족은 전한에는 대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지냈습니다.

 

이후 전한이 멸망하고 광무제 유수에 의해 후한이 건국된 이후 후한에 대한 강족의 공격이 이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광무제 건무 10년(기원후 34년)에 강족의 일파인 선령강이 금성군과 농서군 방면을 노략질했고, 다음해인 건무 11년(기원후 35년)에도 재차 침입하여 후한의 변경을 어지럽혔습니다. 당시 농서태수였던 마원은 군대를 이끌고 이들 선령강을 격파하고 포로들을 천수, 농서, 우부풍의 3군에 이주시켜서 후한의 관할 하에 두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선령강의 세력은 마원의 활약으로 잠잠해지는 듯 싶었지만, 바톤 터치를 하듯 유곡(현재의 청해성 부근)을 중심으로 한 소당강의 세력이 새롭게 떠올랐습니다. 명제는 영평 원년(기원후 58년)에 장군 두고와 마무 등을 보내어 소당강의 추장인 전오를 서한(청해성 동부 지역)에서 공격하였고, 항복한 소당강 출신 강족 7천 명을 삼보로 이주시켰습니다. 다음 해인 영평 2년에는 전오가 아들 동오와 함께 후한에 항복을 하였습니다.

 

후한 정부는 강족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하여 광무제 때 일시 설치되었다가 없어진 호강교위 제도를 부활시키고 그 치소를 적도(감숙성 지역)에 두었습니다. (치소는 상황에 따라 한 곳에 두지 않고 여러 지역으로 옮겨졌습니다.)

 

전오와 동오가 항복했지만 전오의 동생 미오는 남은 소당강 세력을 규합하여 후한에 대해 저항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장제 원하 3년(기원후 86년)에 미오는 동생인 호오와 반란을 일으켰고, 다음해인 원하 4년(기원후 87년)에는 당시 호강교위였던 부육을 죽였습니다. 죽은 부육을 대신하여 호강교위가 된 장우는 책략을 세워 미오를 포함한 강족의 추장 8백 여명을 죽이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이는 강족들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었습니다. 강족들은 분노하며 미오의 아들인 미당을 수령으로 삼아 대대적으로 봉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미당은 농서군 변경 공략을 시작으로 후한 공격의 고삐를 당겼습니다. 하지만 농서 태수에게 곧 격퇴당하고, 그는 전략을 전면 수정합니다. 기존의 소당강만의 전력이 아닌 후한에 복속당했지만 후한에 불만을 품고 있는 여러 세력들을 규합하여 세력을 늘렸고, 이 늘린 세력을 바탕으로 십수년 동안 후한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비록 그 사이에 패배도 있었고, 다시 후한에 복종하는 세력도 있었지만 이들의 저항은 멈출 줄을 몰랐습니다. 역대 호강교위들과 후한 정부도 이들을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화제 영원 12년(기원후 100년)에 주유(삼국지의 그 주유랑 다른 인물입니다.)가 호강교위에 임명되었습니다. 주유가 호강교위에 임명되었을 무렵에 강족 내부에서 대대적인 내분이 일어났었는데, 주유는 이를 좋은 기회라 보고 다음해인 영원 13년(기원후 101년)에 여러 군현의 병사들과 후한에 귀속한 강족 및 흉노 출신의 병사들을 모아 합계 3만의 병력으로 미당의 본진을 공격하였습니다. 이 때 미당이 이끄는 소당강의 피해는 극심하였습니다. 포로는 6천에 달했고, 미당이 이끄는 소당강 자체의 세력은 일천 여명도 되지 못했습니다. 미당은 이 전투가 있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하였고, 주유는 항복한 강족들을 한양(감숙성 동부), 안정, 농서의 여러 군에 이주시키고, 엣 소당강의 땅에 둔전을 설치하였습니다. 이렇게 강족과 후한의 전쟁은 끝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 출처 : 중국의 역사 진한사,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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